임종 앞둔 선사 빼어난 직관·상상력
선승 정관 스님의 마지막 게송
터럭도 자르는 예리한 칼날로
온갖 번뇌망상과 질곡 끊어내
깨달음은 준비된 이에게만 와
석 자 취모검을
오랫동안 북두에 감춰두었다.
허공의 구름 다 흩어지자
그 칼끝 비로소 드러났다.
三尺吹毛劍(삼척취모검)
多年北斗藏(다년북두장)
太虛雲散盡(태허운산진)
始得露鋒鋩(시득로봉망)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부처님오신날’도 지나고, 하안거도 결재했다.
이제 다시 ‘칼’을 갈아야 할 때이다. 들뜸에서 고요로, 축제에서 적멸로 다시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 ‘길[道]’의 시간에서 문득 만난 정관일선 선사의 시, 취모검. 취모검은 ‘바람에 날린 터럭도 자를 만큼 매우 날카로운 칼’이다. 그 취모검으로 나는 무엇을 베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나도 그런 ‘칼’을 벼릴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작고한 시인 김지하는 그 칼로 ‘미련’을 베어버리겠다고 했다. ‘씻을 수 없는 죄’와 ‘지혜’로 바뀐 ‘배신’과 ‘서러운 사랑’으로 바뀐 ‘패륜’을 베어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미련의 베를/ 오늘은 끊으리라/…… / 죽음으로밖에는 죽음으로밖에는/ 씻을 수 없는 죄도 한줄기 눈물로 씻겨내려/ 배신이 지혜로 패륜이/ 서러운 사랑으로 바뀌는 미련의/…… / 미련의 베를/ 끊어/ 알 수 없는 거리로, 먼 벌판으로/ 아픈 저 허공으로 오늘은 떠나리라”라고.
그러면서 그는 그 칼을, “칼아/ 모진 그 옛 스승아”(이상 김지하의 ‘칼아’ 일부)라며, ‘옛 스승’이라고 명명했다.
김지하 시인은 ‘칼’을 왜 ‘스승’이라고 했을까. 다름 아닌 그 칼은 ‘취모검’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에 날린 터럭도 자를 만큼 예리한 칼날의 취모검은 (김지하 시인이, 중생이) 인간세상(에서 견뎌온) 온갖 번뇌 망상과 고통의 질곡을 끊어내는(베어내는) ‘자유와 지혜’의 칼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 칼은 어디 있는가. ‘마음[心劍(심검)]’에 있다.
그 마음이 어딘가. ‘북두성’(지혜의 완성, 깨달음)이다. 부지런히 갈고 닦을 때만이, 북두성 뒤에 숨어 있는 그 칼은 ‘반짝반짝’ 빛을 드러낸다.
하지만 칼은 휘두르면 절대 안 된다. 휘두르는 순간 도륙이 되고, 살육이 된다.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그 칼은 영원히 ‘살인검’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
하지만, 칼이 ‘칼’로 깨어 있을 때, 그 칼은 온갖 구속과 속박을 끊어내고 자유와 해방(해탈)을 안겨주는 ‘활인검(活人劍)’이 된다.
정관일선 선사는 그 활인검을 본 것이다. 중생들에게 활인검의 거처를 슬쩍 알려주신 것이다.
여기서 잠깐. 모든 문학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상상력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목적으로 하는 고도의 정신작용’(배규범의 ‘게송의 연원과 문학성’에서 인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영감과 직관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영감과 직관이 뛰어날수록 상상력이 빼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선시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선사들이 선시를 짓는 것은(선사들에게 선시가 오는 것은) 깨달음의 순간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라고 한 적이 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은 결국 순간에 오며, 그 순간은 결국 뛰어난 직관(혹은 영감)의 상상력에 의해 표출되기 때문인 것이다.
정관일선 선사의 ‘석 자 취모검’은 그 상상력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선시는 선시 전체가 빼어난 직관에 의한 빼어난 상상력으로 이뤄져 있다.
선사의 빼어난 직관(영감)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오랫동안 북두에 감춰’둔 ‘취모검’을 보고, 허공에 구름이 흩어진 끝에 비로소 드러나는 ‘칼끝’을 상상해낼 수 있었겠는가.
보물도 보물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물인 것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 한 가지. 직관(영감)이 빼어나다고 해서 깨달음이 갑자기 오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부단히 준비하고 닦은 사람에게만, 허공에 구름이 걷히는 찰나의 시간에 찰나로 오는 것이다.
사실은 이 선시도 정관일선 선사가 죽음에 임해 부른 ‘마지막 게송’(임종게)이다.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