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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묵상글 (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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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07 03:48
-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께서 오셨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는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데 우리가 할 일이 없겠습니까?
대림절이라고 하는데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오셔도 무관심하고 환영하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
기다리기라도 하고 환영까지 하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좀 더 사랑한다면,
주님 사랑을 본받아 이웃 사랑을 한다면 주님처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구나!” 하며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뭔가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야겠지요.
오늘 주님께서 수확할 것이 많다고 하시는데
씨 뿌리는 것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겠습니다.
그다음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시기 말입니다.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싹이 자라고 여물게 하실 뿐 아니라 뿌릴 씨까지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달린 것은 할 마음뿐이고 씨를 뿌리는 수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음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마음뿐, 사랑뿐이라 하여 과소평가해선 안 되지요.
이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고,
어느 정도 중요하고 대단하냐 하면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하나의 사랑을 의심 없이 꽉 붙들고
멈춤 없이 그러니까 끝까지 계속 실천하면 됩니다.
그리고 성무일도 월요일 아침기도의 마침 기도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면 되겠습니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희가 할 일을 알려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어,
저희 모든 일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끝마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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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모든 부분에서 넉넉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7~80년대를 석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현재 엄청난 발전을 일구었습니다. 하지만 행복도는 어떨까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2018년부터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보며 우리의 행복을 반추하게 됩니다.
부유한 나라의 국민은 삶의 만족도가 높았지만, 삶의 의미를 적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삶의 의미를 아주 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만족도는 성공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제대로 산다는 감각입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미를 찾는 데 종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절대자를 통한 굳은 믿음 안에서 의미를 찾고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의 사람은 종교가 그들에게 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행동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려고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만족도만을 위했다면 부귀영화에만 집중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말 대신 ‘사랑’만을 말씀하셨고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삶의 의미만을 향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 모두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이 일꾼들은 받는 자가 아닌 ‘거저 주는 자’였습니다. 그 일꾼은 특별한 사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모두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모든 이가 물질적인 삶의 만족도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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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주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소서.”(라이홀트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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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고 합니다.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도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라고 노래합니다.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러니 우리는 그 마음을 ‘이미’ 우리 가슴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고,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기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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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늘리고 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되지만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탈랜트는 다양하고 소중합니다. 탈랜트는 묵히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관리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으로 잠시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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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엘파소에 갔다가 ‘Carlsbad(칼즈배드)’엘 다녀왔습니다. 칼즈배드는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동굴입니다. 1시간 정도 내려가면 넓고 큰 동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밝은 곳에 있다가 동굴 입구로 들어가면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발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10분 정도 내려가면서 점차 눈이 익숙해졌고, 편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동굴에서는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나게 됩니다.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석순과 종유석은 빛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성모님 같았습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사자의 입 같았습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고래 같았습니다. 어떤 모습은 마치 장군 같았습니다. 먼 길임에도 기꺼이 운전하고, 간식도 챙겨주고, 설명까지 해 준 후배 신부님이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오고 가며 왕복 5시간 동안 우리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후배 신부님도 청소년국에 있었고, 저도 청소년국에 있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열정적으로 추진하는 세계 청년대회 이야기도 나누었고, 청소년 사목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내년쯤에 서로 1주일씩 바꾸어서 지내자고도 하였습니다.
종유석이 자라는 데는 몇만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2000년이 지났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후배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교우들은 신부님의 그런 모습을 저에게 하나하나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주일에 30명 미사참례 하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주님께서는 신부님과 공동체의 모습을 칭찬하시리라 믿습니다.
한 자매님은 ‘풍성한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쉬는 교우 댁을 방문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나 이제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앞으로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시어머니는 ‘내가 개신교회에 나가니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앞으로 성당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방문하기 전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보를 전해 드릴 때 주보에 전화번호와 좋은 글을 써서 함께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던 형제님도 많이 누그러지셨고, 개신교회에 다니던 할머니도 웃어주었다고 합니다. 기도와 전교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그 자매님의 말씀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크고 화려한 성당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제와 주교, 수도자들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따뜻한 미소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작지만,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쌀쌀맞게 대하는 쉬는 교우들에게 주보를 전해주고, 다시 한번 찾아가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원망할 일이 있어도, 화나는 일이 있어도 주님 때문에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제때 열매를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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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매일의 미사를 통해 파견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파견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바로 우리를 가엾게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보살피십니다. 아픈 이와 병든 이를 치유하시고 희망을 잃어버린 이에게 삶의 힘을 선물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이제는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따뜻한 하느님의 손길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따스함을 전했습니다. 은총으로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와 쉬면서 주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우리는 파견받고 우리 자리에서 열심히 사랑을 전합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그렇게 사랑을 전하다가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려 쓰러지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돌아와 주님과 함께 지내며 ‘쉼’을 가졌는데 말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다시금 새겨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제가 말하는 돌아오는 것이란 주님과 함께 쉬고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쉬며 충전할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우리의 사명을 다하기를... 그리고 때가 되면 돌아와 주님 안에서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림과 인생
저는 이곳에 발령받은 후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배우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림도 인생도 천천히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빨리 그리고 싶어집니다.
빨리 멋진 그림을 완성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조바심에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다시 붓을 대면 그림은 상처를 입고 맙니다. 마른 후에야 다른 물감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배운 것은 순서를 지키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조바심을 내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관계나 일을 망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어느 정도 순서를 지키며 살아야 상처 없이 평화로울 수 있음을 그림 배우기를 통해 다시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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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위로자이며 스승이요 치유자이신 연민의 하느님>
"주님을 기대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이사30,18)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참으로 가까이 계시어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위로자 하느님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이어 위로자이자 동시에 스승이신 주님이심을 밝히십니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스승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순전히 우리 책임임을 통감합니다. 침묵중에 깨어 경청하는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 영적자세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삶의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임을, 하느님은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자 치유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으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얼마나 부지런히 우리를 살리시고 치유해주시는 치유자 하느님이신지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해 언제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살게 하시고 치유하시는 연민의 하느님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대림시기는 오시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이런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새로 임명된 교황청의 설교가 파솔리니 신부의 대림 첫 강론은 주제는 “하느님의 새로움의 기적에 우리 마음을 열라(Open our hearts to wonder of God’s newness)”였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살리시고 치유하시는 연민의 하느님의 늘 새로운 기적에 활짝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주님은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시며 전방위적으로 활약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수확할 밭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라 하시고 당신 친히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을 당신 능력으로 충전시킨후 파견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허약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며,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느니 거져 주어라.”
당대의 예수님 열두제자들은 물론 오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인간들의 불행한 현실입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문제투성이, 무지의 인간에 대한 답은 주님과의 일치뿐이 없습니다. 주님을 떠남으로 자초한 온갖 죄와 병이요 불행에 비극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일치로 영혼의 치유와 건강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제 아무리 첨단 문명의 인공지능 시대라 하지만 인간의 가련하고 불쌍하고 병든 무지의 현실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아니 인간의 정신력은 영성은 날로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고갈되는 지구의 자원과 더불어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탐욕과 야만의 총체적 위기시대입니다. 언제나 인간이 문제입니다. 해방 80년이 되가는데 우리의 정치현실은 좌우의 극단적 대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인간성의, 영성의 진보가 참 미미해보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단 하나,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암브로시오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성인은 340년경 현재 독일의 트리어에서 태어났으며,그의 아버지는 갈리아 지방 로마 제국 출신 장관이었습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교황 그레고리오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합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암브로시오 이름뜻은 ‘불멸’을 뜻합니다. 태어날 때 꿀벌들이 날아와 그의 입술을 지식의 단물로 축였다고 전해오며 이런 은총으로 후세에 뛰어난 설교자로 추앙받게 됩니다. 374년 11월30일 세례를 받고 일주일후 주교로 임명되며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가가 됩니다.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는 신념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사회선교에도 충실했으며 서방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들 매일같이 그의 들으려고 찾아왔으며, 그는 겸손한 태도로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입니다.
“그는 방문자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아주 짧은 시간뿐이었습니다),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도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리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제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기로 하자면 그가 무척 한가했어야 하는데 그가 그런 여유가 있는 경우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백성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그의 말씀을 주일마다 들을 뿐이었습니다.”<고백록, 성염역주,203-204쪽)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내용이라 자주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그와 황제와의 대립시 승리일화도 유명합니다. 390년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한 책임을 물어 테오드시우스 1세 황제에게 회개를 명했고, 그가 주교에게 항복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받았을 때 성찬례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후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됩니다. 이를 상징하는 듯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은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책 제목에 최초로 표지 사진은 황제가 아닌 ‘성 암브로시오' 사진이 나옵니다. 397년 4월4일 향년 57세로 선종할 때 성인의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다는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얼마나 고단한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이었는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저는 이룬 일도 없이 부끄럽게 성인보다 무려 18년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는" 무욕의 초연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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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과 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마태 10,1)
나를 믿으시는
님께서
나를 바라시는
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님께서
님 닮게
나를 빚으시어
님께서 몸소
계시고픈 때에
님께서 몸소
머무시고픈 곳에
님께서 몸소
만나시고픈 이에게
님 닮은 나를
보내시니
오로지 님 계시듯
그리 나 있기를
이리 나 있음이
오로지 님 계심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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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의 무딘 마음을 벌주기를 삼가셨을 뿐 아니라,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온유함을 알려 주는 또 다른 증거이며, 그들의 악의적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이루어질 표징들과 더욱 명확하게 전개될 논박으로 당신의 영광에 관한 더 많은 증거될 논박으로 당신의 영광에 관한 더 많은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온 고을과 마을과 회당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을 공격하는 이들
에게 똑같은 욕설로 대하지 말고 더 자비롭게 대하라고 모든 이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동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도 그에게 선을 행하십시오. 그들이 어떤 짓을 하든 그들에게 선을 행하기를 그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더욱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욕을 먹고 선을 행하기를 그만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바랐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는 당신은 오직 선올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이 당신께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복음과 그들의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가지고 몸소 서둘러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아무리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고 온갖 곳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하나가 신적이라면, 여럿은 어떠한가? 엑카르트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다양한 사물을 보지 말고, 우리의 통합적인 의식을 발전시키라고 말하고 있는가? 엑카르트라면 우리의 문제는 존재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고 답했을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서로 의존한다”고 엑카르트는 잘라 말한다. 모든 존재는 맑고 투명한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들을 볼 때 그들에게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도 참말이다. 그렇지만 분리 자체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분리는 맺음말이 아니다. 참된 앎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가르는 앓이 아니다. 참된 앓은 양지를 아우르는 앎이다. 바꾸어서, 이분법은 앎이 아니다.
변증법적 의식이 참된 앎이다. 우리는 변증법적 의식을 통해 사물을 알고 그들의 차이를 존중하되, 만물이 맑고 투명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29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본질계와 현상계, 초자연계와 자연계, 영원과 시간, 성(聖)과 속(俗)의상호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 철학과 종교의 성격을 규정 하는 관건이 된다. 흔히 전자를 후자와 엄밀하게 구별하든지 ,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진지를 후자보다 높은 차원의 실재로 규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대승 불교의 특징은 그 양자를 매우 역설적이게 ‘하나’라고 파익히여 불가분리적 관계로 보며, 진여로서의 실재가 나타내 보이는 두 가지 면이라고 이해한다. 이를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라고 부르면서 <대승기신론>에서는 그 양자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마하야나의 기르침은 다음과 같다. 즉 마음은 하나이지만 그것은 두 개의 상이한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각각 ‘실재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心眞如門)과 현상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心生滅門)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측면은 그 각각이 ‘총체' (總禮)로서, 각각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포괄한다. 이것은 곧 이 두 측면이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위에 인용한 (대승기신론서>의 지론이 저 유명한 <반야심경>의 중심 주제인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의 기신론적 표현이다. <반야심경>에서 색계(色界)란 생멸문을 말하며 공계(空界)란 진여문에 해당된다. 대승 불교의 이러한 실재에 대한 인식론적 구조는 현대 과학 철학의 태두라 일컫는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적 실재관과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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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우리는 얼마나 일꾼을 잘 관리하는가?
강만연 [fisherpeter] 241207. 01:10 ㅣNo.178252
오늘 복음은 사목하시는 신부님과 평신도로서 사목에 협력하는 신자들이 특히 주목해서 묵상해야 할 복음입니다. 얼마 전 동아일보 기사를 포털에서 봤습니다. 천주교와 조계종을 언급하면서 향후 10년 정도 지나서는 심각한 성소자 부족현상에 직면할 거란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난 후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조계종은 동남아 쪽에서 스님을 모시고 와야 할 정도로 심각하고 우리도 그와 같은 비슷한 양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이미 이건 사실 지금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예견된 현실입니다. 신학생이 적어서 부산가톨릭대학도 폐쇄를 하고 그쪽 신학생이 광주가톨릭대학 신학교로 가 통합하는 현실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 앞전에 보면 옆 본당도 작은 수녀님이라고 해서 오셨는데 처음엔 오히려 원장 수녀님보다 더 연세가 들어보일 정도였습니다. 실제 연세는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습니다. 수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소자가 많이 줄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추세로 간다면 앞으론 수녀님이 안 계시는 본당도 세월이 지나면 많이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소자는 갈수록 줄기 때문에 그렇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 이게 우리 교회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사실 천주교회도 이런 현실이 심각하다는 것은 인식은 하는데 그렇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책을 세우려고 해도 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넋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만 태산일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단 한 줄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드렸는가 하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해야 이런 게 좀 심각하다는 걸 좀 더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약간 상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실제 더 이야기를 하자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인식을 하면서 오늘 복음을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일꾼이 부족하신 것에 대해 염려를 하십니다.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은 많은데 그 일을 해낼 케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특이한 본당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게 현실적으로 전국 어느 본당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개신교는 아직까지는 우리와 비교해서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천주교는 상당히 고령화된 게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현실을 고려했을 때 지금까지 영세받은 지 13년 하고 1개월 동안 보고 느낀 점을 토대로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어떤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인지를 한번 체크해보고 싶습니다.
원론적으로는 유입, 즉 다시 말해 세례 받는 사람이 많이 늘어야 하는데 실제는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유입보다는 이탈을 막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탈은 냉담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가정을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가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정을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이 온전히 신앙생활을 잘 해서 냉담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는 가정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성직자, 수도자 수 감소 걱정은 별론으로 하고 교회로서는 축복입니다. 이건 너무 과한 가정이고 반만 제대로 계속 신앙을 유지하기만 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개신교랑 비교하면 천주교가 대처하는 능력은 아주 부족합니다. 예전에도 언제 한번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자 새끼 생존방식으로 생존해야 계속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만 주고 나면 세례 이후 케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이후에는 각자도생입니다. 각자도생을 잘 하면 살아남고 여기서 생존하지 못 하면 냉담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서울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영혼 없는 지식인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마치 이 표현과 같습니다. 좀 리얼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애만 낳고 자식을 방치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부모와 같습니다. 자식은 신영세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좀 더 나아가 깊이 생각해봐야 하고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이런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기존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건 제가 개신교와 비교해봤을 때 사목자도 마찬가지이고 또한 사목을 보조하는 일반 평신도 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성당 나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성당을 옮겨도 정당한 사유가 있어서 옮기면 모르는데 이사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처럼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외 다른 사유로 옮긴다고 했을 때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입니다. 물론 전체 가톨릭 측면에서 보면 이탈은 없지만 한 본당 공동체 관점에서 보면 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 상당히 무감각한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표현처럼 길 잃은 양이 된 것과 같습니다. 세례는 운전면허를 획득한 것과 같습니다. 운전면허를 획득했으면 도로 주행을 많이 하고 새로운 길도 익히면서 운전감도 읽혀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때까지는 지속적인 케어가 필요하듯이 교회도 신자를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조성해 인공위성이 안전궤도에 진입할 때까지 지상관재소에서 계속 예의주시하듯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려고 해야 교회의 앞날이 밝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유럽 교회가 지금 처한 현실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걸 깊이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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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착한 목자 따르는 양 떼인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024. 12. 06. 21:26 ㅣNo.178250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선종일(397년 4월 4일)인 아닌 주교 서품일이다. 성인은 통상 천상으로의 탄신, 즉 선종일을 기념 축일로 삼는데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독 다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성인은 340년 무렵 현재 독일의 트리어인 이탈리아 트레비리의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주요 공직 생활도 하였다. 서른 살인 370년에 황제는 그를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주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지금의 도지사 신분이다. 당시 그곳 주요 도시는 밀라노였다.
그때 밀라노교구 주교가 선종한 뒤, 후임 주교 선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는 정통 교리 수호자들과 아리우스 이단에 물든 세력 사이의 알력 때문이었다. 이에 성인께서는 밀라노 대성당에서 ‘평화롭게 주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 도중 누군가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하고 소리치자, 군중은 모두 그를 따라 외쳤다. 그렇게 주교로 추대된 그는 일주일 만에 세례와 견진까지 받고서는, 이어 주교로 서품까지 받았으니 그날이 12월 7일이었다. 이렇게 그는 뜻밖에 밀라노의 주교가 되어, 올바른 신앙 교리를 내세웠다.
주교가 된 성인께서는 열심히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공부에 몰입하여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성경의 깊은 묵상에 의한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기도 하였다. 성인은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리고 대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크게 칭송받고 있다.
이렇게 암브로시오 성인께서는 학자 주교로 착한 목자에 비유될 수가 있다. 교회의 최소 단위는 교구일 게다. 성인은 교구 공동체를 지키는 양들의 문지기이다. 특히 이 직책은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없는 도둑과 강도가 이리마냥 드나든다. 그러면 양들은 그들을 따라 나설 수도. 이리마냥 위선적인 그들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기에 교구의 문지기는 하느님을 따르는 수많은 목자들을 잘 다독이면서, 자기 양들을 잘 이끌어야만 한다. 누구든지 문지기를 통해 들어오면 구원 받고, 또 드나들며 편안함을 얻도록.
영원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에, 이리가 오면 자기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그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흩어진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는 관심 없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또한 나에게는 우리 밖의 양들도 있기에 그들마저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는 알아듣는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린 백성인 양들을 지키는 착한 목자로 지상 순례를 오셨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 목숨마저 기꺼이 바치시고자.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다시 얻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가진 하느님의 아들이신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다. 대림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늘 착한 목자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으며 깨어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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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가엾은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9,35)라고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그런 존재입니다. 외면하거나 잊을 수 없으며,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우리 모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셔서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라는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하십니다(마태 10,6 참조).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 전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10,5).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이나 사마리아인들보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보다 하느님의 구원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아주 익숙하면서도 그분께 가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엾은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이들까지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그분께 단 한 순간도 잊힌 적이 없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모두 고쳐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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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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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치유 행위가 함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선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가엾이 바라보시는 것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명이라고 더
복음을 전해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이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치유하게 됩니다.
우선 오늘 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를 걱정하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희망을 잃고 기가 꺾여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려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모른척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쁨의 삶으로, 자유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몸소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하십니다.
그 마음은 제자들을 통해 더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똑같은 능력을 지니고
사람들에게 파견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능력을 받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얻었고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기쁨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늘 나라를 예수님 곁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합니다.
그들이 하늘 나라를 직접 살아보았기에
그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늘 나라는 더 넓게 퍼져나갑니다.
우리 각자의 어려움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그 어려움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하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꿈꾸십니다.
그분은 나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기쁨과 자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하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도 제자들처럼
옆 사람에게 하늘 나라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 출발점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탄을 기다리면서
우리 각자가 꿈꾸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희망의 불씨도
다시 살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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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내가 친히 나서겠다. 내가 직접 목자가 되어 주겠다!
한순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지금 온 백성이 큰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가 저지르고 있는 각종 기행으로 인해 국격은 급격히 실추되고, 그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제 손실로 나라의 근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소상공인들, 자영업자들이나 서민들이 겪는 피해, 그리고 이 큰 부끄러움은 오로지 우리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몫이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쉼없이 흔들리는 이 지상 여정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마지막 희망이 되어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백성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시어, 조속히 상식과 기본이 통용되는 정상적 나라로 회복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격 미달의 지도자들, 그래서 백성들의 기쁨이요 위로가 되기는 커녕, 고통의 근원이던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신랄한 지적을 통해 당시 사이비 목자들의 악행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에제 34, 2-4)
당신 보시기에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거짓 목자, 사이비 지도자들의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군중은 영적 양식을 조금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한 영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언자의 경고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이런 부적격 목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질 부족한 목자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양들의 현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꽤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친히 나서겠다. 내가 직접 목자가 되어 내 양 떼를 찾아 보살펴주겠다.
나와 함께 일할 협력자들, 참된 목자들을 직접 선택하겠다.”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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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에 잡힌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을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성령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과 닮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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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목자의 역할은 양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왜 뽑으셨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파견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수 온 마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군중에게 당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었다.”라는 동사는 “흐립토”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지쳐 넘어짐을 의미합니다.
삶에 지쳐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 다시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 많은 목자가 존재합니다. 부모님도 자녀에게 목자고 학교 선생님도 목자이며 물론 사제들도 목자입니다.
이들의 역할이 기를 세워주는 것인데, 가끔은 이들이 양들의 기를 꺾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체가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운은 바로 ‘성령’을 의미하는데 그들도 그것을 받지 못하니 남에게도 줄 수 없습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3천 원짜리 김치찌개 파는 이문수 신부’의 에세이
『누구도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의 내용입니다.
이문수 신부는 낙담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청년들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청년 밥상 ‘문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식주의’라는 곳에서 인용합니다.
“김치찌개 3천 원, 무한리필 공깃밥은 공짜. 개업 이후 거의 매달 적자를 내는 이 식당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저의 원래 직업은 ‘가톨릭 신부’인데요, 어쩌다 보니 4년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김치찌갯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식당 사장이 되기로 한 건 고시원에서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저 역시 한때 ‘배고픈 청년’이었습니다.
한 달간 세 끼를 모두 라면만 먹거나 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습니다.
입시도 취직도 더 힘들어진 지금의 청년들은
그때의 저보다 두세 배는 더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테지요.
저는 누구나 언제든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길 1년여.
후원금 3천만 원으로 밥집을 열 공간을 찾다가 지금의 이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북한산 전경이 보이는 옥상을 보자마자 청년들이 이곳에서 잠시나마 숨을 쉬고,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로 정하고, 가격은 대학교 학식의 평균 가격인 3천 원으로 정했습니다.
학당을 하다 보니 신부로서 일만 할 때와 다르게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오픈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당을 찾았습니다. 얼른 팔팔 끓는 찌개를 대접해 몸을 녹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저를 수줍게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더군요.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제가 식당에 관해 설명했더니 아이가 1년 넘게 모은 저금통을 기부하고 싶다고 해서요.’
엉겁결에 받아 들었는데 세상에, 나중에 세어보니 10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열 살짜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요. 누군가를 위한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그 정성과 선량함이 저를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50대 여성이 어둑해진 저녁에 식당에 들어와서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러고는 계산을 하겠다면 카운터 앞에 섰습니다. 돈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이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여기 계신 손님들 것까지 다 계산해 주세요, 신부님.’
손님은 그렇게 모두의 밥값을 계산하고 가셨습니다.
각자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청년들은 비로소 누군가 밥값을 대신 내주고 갔다는 이야길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다니 너무나 놀랍다고들 했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죠.
‘저도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을 꼭 도울께요.’
아마 그 손님께서 가장 듣고 싶으셨던 말이 아닐까요.
최근에는 김치찌개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 지기로 사는 삶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도 있었습니다.
식당을 이대로 유지할 것인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버겁더라도 점포를 늘릴 것인가 고민하던 시점에 ‘유퀴즈’ 섭외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방송에는 게스트 몇 명 중 하나로 짧게 나갈 테지만, 식당이 분점을 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렵게 녹화를 마치고 4월 21일에 본방송이 나갔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습니다.
후원 문의로 전화가 불이 났고, 가게에는 손님들이 줄을 섰지요.
모두 파김치가 되어 뻗어 있는데 한 직원이 저를 다급히 부르더군요. ‘신부님…. 이것 좀 보셔야겠는데요.’
제 눈앞에 놓은 것은 유재석 씨가 아무 말도 없이 5천만 원의 후원금을 입금하신 통장 내역이었습니다.
‘아무리 유재석 씨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주시죠?’
유재석 씨의 기부가 기뻤던 이유는 액수 때문이 아닙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부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을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신 것이죠.
저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 식당이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돈보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말이지요.”
유재석 씨나 이문수 신부님이나 모두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기를 살려줄 수 있을까?’입니다.
이런 분들이 오히려 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참 목자들입니다.
저에게 참 목자는 유학할 때의 논문지도 교수님이었습니다.
제가 로마라는 곳에 다시 가게 되었을 때 저는 한 목자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죠르지오 마짠티’라는 교수입니다.
제가 석사 때 성경을 공부할 때는 기가 많이 꺾여 있었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님은 기를 많이 꺾으시는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논문을 열심히 써가면 그냥 쓰레기라고 하시며 몇 장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커다랗게 빨간 볼펜으로 엑스를 그리고 툭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다시 돌아가기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옆집 할아버지 같은 저희 교수님이 희랍어 성경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 말을 찾아내 증명해 보이니 성서 교수는 오히려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들여 함께 살고 학교에 와서는 주류 세력들에 주눅 들지 않고 그렇게 싸우시고 학생들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며 당신이 밤을 새우시며 우리 논문을 고쳐주셨습니다.
학생들은 그분의 편이었고 학교의 높으신 분들은 이분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그 신부님을 매우 좋아했는데 언어가 딸리는 우리 마음을 아시고 손수 다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엑스를 하고 화를 내던 성서 교수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나갈 때는 성서를 포기하고 교의 신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학교로도 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 교수님께 배우고 싶었습니다.
로마라는 두려운 곳에서 저에게 기운을 불어넣을 참 목자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덕분에 저는 기죽지 않고 5년 동안 그분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처럼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목자는 기가 살았고, 어떤 목자는 기가 꺾여 있을까요?
삼구 때문입니다.
죄는 성령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따라서 육체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기가 꺾여 있어서 남에게 기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꾸 양들의 기를 살리려고 하면 나에게 나가는 것이 나를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양들에 대한 사랑이 목자의 기까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어라.”
그러나 오히려 거저 주기 때문에 거저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흩어진 양들의 기를 살리는 참 목자로 파견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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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나를’ 찾으려고 오신 ‘목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9,35-10,1).”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6-8).”
1) 12월 7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은 ‘참 목자’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대림 시기는 ‘잃은 양’인 나를 찾아서 오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시기이고, 예수님에게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모님처럼 진실하고 충실하게 늘 주님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 한가운데에서 살다가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세속 생활에 바빠서 신앙생활이 느슨해지고, 또는 눈을 어지럽히고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눈을 팔고, 병에 걸리는 등의 사정 때문에 영혼의 일은 뒤로 미루고 몸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몸만 함께 있고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면,
그것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대림’이라는 말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대림 시기는 나는 가만히 있고, 떠나 계셨던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시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찾아다니시고, 또 나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에게로 돌아가려고 ‘나도’ 노력하는 시기가 곧 대림 시기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으시고, 나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바로 잃은 양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위선자들처럼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고, 그 교만 자체가 곧 ‘잃은 양’이라는 표시가 됩니다.
자기 스스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목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이 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즉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못 받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10).”>
3)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사정을 모르는 채로 세상에 오셨다가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비로소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의 문’으로 데리고 가시는 ‘목자’이신 분이고, 데리고 가신 다음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우리 쪽에서 할 일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가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5절에 있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이방인들에게는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가라고 하신 것은,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부터, 또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부터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선교활동을 할 때에도, 식구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기 식구들은 내버려 둔 채로 다른 집에 가서 선교활동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비웃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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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9,35-10,1.5-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9장이 끝나는 부분과 10장이 시작되는 부분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다보니 원래는 각각의 독립된 단락이 지닌 두 가지 메시지가 하나로 이어져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는 메시지에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직접 파견하시는 내용이 연결되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다른 이들이 참여하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너희가 직접 가라’는 새로운 메시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눈 여겨 볼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과 똑 같은 일을 제자들에게 ‘소명’으로 맡기셨다는 것인데, 병자들의 치유와 구마 그리고 복음 선포가 그것이지요. 예수님을 스승이자 주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완수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기 때문일 겁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군중들을 구원의 길, 참된 기쁨의 길인 하느님 나라로 한 명이라도 더 인도하려면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니,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그런 목자가 되어주기를 바라셨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자들이,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그런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방법으로 우리가 두 가지를 느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책임감’이고 다른 하나는 ‘측은지심’입니다. 첫째, ‘책임감’이라는 관점에서,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 중 한 사람이 유혹에 빠져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매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로 여기며 무관심하게 대하지 말고 ‘나의 일’로 여기며 주님과 함께 그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가 죄를 지어 길을 잃은 건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세상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서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기에 내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구원’은 나 혼자만 지옥에서 벗어나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측은지심’이라는 관점에서, 죄를 지어 하느님 사랑에서 멀어진 이들을, 그래서 하루 하루를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사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이 모두 소중한 존재이니, 또한 ‘아픈 손가락’일수록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게 부모 마음이니, 내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사랑하는 만큼,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내 형제를 안쓰럽게 여기며 그들이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래서 아버지께서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큰 기쁨을 누리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의 잔치가 벌어지는 기쁜 자리에서 혼자 분노와 억울함으로 씩씩댔던 불쌍한 ‘큰 아들’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주위를 둘러봅시다. 고된 세파에 시달리느라 기가 꺾여 있는 이웃이 없는지,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죄를 지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형제가 없는지… 그리고 그런 이웃과 형제를 찾아가 함께 있어주고 위로해주며 힘을 줍시다. 주님께서 나에게 거저 그렇게 해주셨으니 나도 그들에게 거저 그렇게 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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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힘이 없어서 그럴까요? 자식이 부모 사랑보다
부모가 자식 사랑이 크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가까운 이웃에게서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부모를 봅니다.
평생을 천직으로 해 오던 세탁소를 자식에게 물려주었지만 얼마 못가서 말아 먹는 것을 봅니다.
이뿐 아니라 제가 아는 분 중에 한 분은 평생 농사를 하다가 야트막한 언덕에 과수원을 했는데 한때 그것이 잘 되어서 돈을 모으고 땅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아낌없이 외아들에게 주었는데 그 일대가 택지개발이 되어서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생을 모르고 컸던 아들은 부모의 덕도 잊은 채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나중에 아주 형편이 구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모를 찾으면 늘 아들
걱정이었습니다. 그게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 사랑만큼 희생적인 것이 있을까요? 사랑은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고 댓가를 바라지
않지요. 그 사랑의 마음은 보모가 자식을 생각하듯 ‘측은지심’으로 나타나납니다.
하느님 사랑도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러 온 군중을 보시며 마치 목자 없는 양들이 떠올라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십니다. 이런 정경을 마태오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제자들은 스승의 분부대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쫒아내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종말에 오시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이사 30,26)
예수님 시대에 왜 군중은 목자 없는 양같았을까요?
그들에게 희생적인 종교적인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라의 주권이 로마 제국으로 넘어가서 왕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대 사제가 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대사제의 역할이 그렇게 드러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종교 지도자들의 발판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재력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재력의 힘을 받아들여 로마 제국의 관리들과 친분을 쌓다보니 자연 서민은 관심에서
밀려 났던 것입니다. 서민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실망을 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젠가 자기들 눈에서 눈물을 닦아 줄 목자, 메시아가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목마른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군중은 불붙듯이 희망과 위로를 받으며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외딴 곳도 마다하지 않고 주님이 가시는 곳이면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일꾼들이 주님의 그 일을 함께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청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우리도 주님께 복음 선포를 위해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부족한 우리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소명을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 주님의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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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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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하느님의 연민'이 가득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인류를 죄악과 암흑에서 구하시려는 구원 계획은 하느님의 연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창조하신 당신 자녀들이 겪는 온갖 한계와 어려움, 고통이 그분의 시선과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게 하였고, 그분 심장을 연민의 눈물로 채웠습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9,6).
가엾은 이들에게 당신이 해 주시는 일을 제자들도 하라고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치유와 회생, 정화와 구마,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이 사명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제자들이 먼저 그 모든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허약했고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부정했고 마귀에게 시달렸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도 잃어가고 있었지요. 그들 역시 지치고 지친 이스라엘의 보통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 그들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고 뽑으셔서 고쳐 주고 일으켜 주고 깨끗하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구원의 희망을 주셨기에 지금의 그들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모두 거저! 무상으로! 공짜로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는 '주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이사 30,19).
우리는 이미 어려서부터 울지 말라는 다독임이, 더 나아가 이제는 울 일이 없으리라는 약속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체험해 왔습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이 하느님 말씀은 그 자체로 유배와 억압에 지친 이스라엘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네가 부르짖으면 ...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리라"(이사 30,19).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이사 30,21).
주님과 우리가 서로를 듣습니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그분이 들으시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습니다. 서로에게 귀가 되어 주고 서로를 경청합니다. 서로의 현존을 의식하고 귀기울이며 서로를 향해 응답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다가올 메시아 시대, 하느님 나라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이 사랑을 회복하는 "때"입니다.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이사 30,26).
그날에 쏟아질 빛이 상상이 가십니까? 일곱 배 밝아진 햇빛, 이레 동안 비칠 빛의 모음... 하느님께서 7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더 이상 밝을 수 없을 만치 온전한 광채로 찬연히 빛나십니다. 세상 어느 구석에도 어둠이나 그늘을 찾아볼 수 없는 그날, 피조물 중 어느 누구도 그 빛의 광채에서 제외되지 않고 온전히 빛 안에 머무를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분은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이사 30,20). 우리는 더 이상 모호하고 막막한 실존의 멍에를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눈이 그분을 뵙고 그 빛에 온전히 노출되어 소독되고 정화되고 밝아집니다. 빛 앞에서 빛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결정적인 구원의 그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매년 대림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성탄을 맞이하지요. 우리 앞에 놓인 가난한 구유 속 아기가 그 빛이십니다. 매년 반복해 다가오지만 매번 같을 수 없는 구원의 선물을 안고 하느님께서 내려오시는 겁니다.
거저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는 것이 모든 믿는 이들의 사명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솟아나는 연민을, 주님의 "가엾은 마음"에 합하고, 오늘 예수님께 파견받는 제자들과 함께, 우리가 체험한 구원의 희망을 안고 나아갑시다.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속삭이고 다독여 줍시다. 누구에게건 주님의 위로가 되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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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거룩한 성도답게 살아가는 삶
<2024.12.7> 아침을 여는 묵상 (암 3:9~4:3절)
❚ 거룩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 거룩한 성도는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나눔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9~12절).
아모스는 블레셋의 도시 아스돗과 애굽을 언급하면서 사마리아 즉, 이스라엘이 행한 ‘요란함’과 ‘학대함’을 목격하라고 말합니다(9절). ‘요란함’은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 가운데 느끼게 되는 공황 상태를 나타내며, ‘학대함’은 타인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협박 공갈하여 불의한 재산권을 유지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즉, 공적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법적 무질서가 횡행하게 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들이 자기 궁궐에서 쌓는 것은 포학과 겁탈이며, 바른 일을 행할 줄로 모른다(10절)고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일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과 물욕에 어두워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은 이방의 대적들을 통한 심판인데, 사치스럽게 살던 부유층들이 멸망하고 그들이 사용하던 사치품의 일부만 남는 비참함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남은 사치품과 같은 존재를 ‘...사마리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12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의 실천입니다. 그 실천의 구체적인 행동이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진정 부유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쌓아 놓는 욕심을 버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공권력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고,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결국 참담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왕궁에 쌓아 놓은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는 작금의 이 나라를 보면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욕심과 탐욕과 탐심이 어디까지일까? 하는 울분이 끓어오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참담한 결과에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나눔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 창고에 쌓을 때가 아니라, 나눌 때 풍성해집니다. 아울러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거룩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만 예배하는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13~15절).
다시 아모스는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합니다(13절). ‘야곱’이라는 이름의 지칭은 이스라엘 전 족속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죄악은 이방인들이 증거할 정도로 심각하고도 부끄러운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는’이라고 말하면서 심판의 때가 임박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심판 내용의 첫 번째는 ‘...벧엘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제단 뿔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겠다...’(14절)는 것입니다. 당시 ‘벧엘’은 여로보암 이후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잘못된 예배 장소였으며, 모든 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제단 뿔을 꺾어 땅에 떨어뜨린다는 말은 당시에는 쫓기는 사람들이 속죄제물의 피를 바른 제단의 뿔을 잡으면 보호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15절)입니다. 상아 궁은 내부를 상아로 치장한 호화스러운 집으로 백성에 대한 약탈과 지배층의 사치를 상징합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들이나 지배 세력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 나아가야 하는 역할을 망각하고 자신의 부와 권력만을 추구했던 집단으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이유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7:16)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진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거룩한 예배란 하나님 한 분께만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상과 재물을 섬기는 것은 거룩한 예배의 사명을 망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예배를 드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예배 속에서는 이러한 거룩이 희미해져 가는 보게 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며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예배하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4:1~3절).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지배층을 향하여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바산은 요단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비옥한 목초지를 자랑합니다. 당연히 이곳은 목축업이 발달했고 살찌고 질 좋은 가축들이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집권자들을 사치하고 비만한 바산의 암소라 부르며 책망합니다. 이들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해 자신들의 배만 살찌웠습니다. 이들의 사치와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너희 코가 갈고리에 꿰어 끌려갈 날이 반드시 온다. 너희 가운데 남은 사람마저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끌려갈 것이다. 너희는 성벽의 무너진 곳을 통해 밖으로 끌려나가 하르몬에 던져질 것이다...”(2~3절,쉬운성경)...
하나님은 불법과 탐욕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과 은혜는 생명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성도들이 이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현실은 물질을 주인으로 삼아 물질의 종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욕심의 그릇을 비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 됨의 귀한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북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오늘 내 자신의 신앙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안에도 끝없는 욕심의 그릇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은 천국을 소유할 것(마 5: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의 문 앞에 서지 않도록 배부른 신앙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연약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이우을 사랑하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거룩한 성도답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실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하는 성도답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연약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암 3:9~4: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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