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산부인과 의원 인사동에 처음으로 생긴 남자가 하는 산부인과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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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3. 02:46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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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산부인과 의원
인사동에 처음으로 생긴 남자가 하는 산부인과 의원
요약 1925년, 황해도 연안에 최초로 남자 의사가 하는 '신필호 산부인과 의원' 등장. 의사는 신필호.
당시 출산을 할 때는 대개 산파나 조산원을 불러 출산, 남자가 산부인과를 한다는 것은 충격적.
인사동 사거리에 다시 개업, 신문에 병원 광고도 냄. 새로운 의술로 평판이 좋아짐.
초기에는 한국인이 찾았고 경쟁 관계인 고토 의원보다 유명해져 일본인 환자도 늘었음.
산부인과 회진 장면
출처: 문화콘텐츠닷컴(문화원형백과 근대병원 이야기), 한국콘텐츠진흥원
우리 나라에서 산부인과 의원이 맨 처음 등장한 곳은 황해도 연안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의사는 놀랍게도 남성이었다.
때는 1925년.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남녀가 한자리에 있기만 해도 서로 쑥스러워하는, 이른바 내외라는 것이 미덕일 때였다. 여학생들은 교복을 입어도 발목이 나왔네, 안 나왔네로 시비의 대상이 될 때였고, 미장원은 내놓고 영업을 할 수 없어서 우편으로 질의응답식의 미용지도를 해야만 할 때였다. 개화 바람이 일찍 불어왔다는 예배당에서도 출입구부터 남녀용이 따로 있었으니,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남녀칠세부동석'의 윤리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애를 받는 병원이 생기다니, 기가 막히다 못해 해괴망측하기조차 한 그 사건은 그러나 분명 엄연한 사실이었다. 병원의 이름은 '신필호 산부인과 의원'.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병원의 의사는 신필호라는 남자였다.
나이는 34세. 충북 청주 출신. YMCA 총무이던 신흥우, 독립운동가인 신규식·신채호 등이 모두 그의 일가다. 선각자적인 면모를 다분히 느끼게 하는 이런 내력은 신필호의 산부인과 개업에서도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연안을 개업 장소로 선정한 것은 그곳이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여 덜 보수적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산부인과 의사가 된 내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세브란스 의전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전공했다. 그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해는 1914년. 그러나 개업을 하지 못하고 7년 동안이나 모교에서 강의만 했다.
당시 산모가 출산할 때는 대개 산파나 조산원을 불렀다. 그들은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쳐 자격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남성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남성이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황해도에서 개업했던 신필호는 3년 후 기어이 서울로 올라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인사동 사거리 부근에 똑같은 간판을 내걸었다. 병원은 한옥이었고, 그 인근에 자택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의 산부인과 병원은 서울에서도 최초였다. 그리고 금방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신필호는 신문에 병원 광고까지 냈으므로 서울에 남자의사가 산부인과를 개업했다는 소식은 살이 붙고 발이 달려 널리 퍼져나갔다.
그런데 때로는 비난과 경악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이 병원이 차츰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시작했다.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는 병원이라는 인식이 차츰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롭게 보여준 그의 의술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형편이 어려운 산모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아 인술의 참뜻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그는 환자들에게 약을 주지 않는 의사로 유명했다. 아프면 우선 약을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의 치료방법은 의아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왜 약을 주지 않느냐, 약을 줘야 할 게 아니냐 하는 환자에게는 약을 주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소화제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약을 주었을 때와 안 주었을 때가 똑같았다.
그의 병원은 화제만큼이나 유명한 곳이 되었다. 환자들은 대기표를 가지고 기다려야 했고, 연안 사람들은 병원 근처에서 투숙하며 치료를 받고 내려가기도 했다.
그런 환자들은 초기엔 대부분 한국사람들이었다. 그런데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 여자들이 인력거를 타고 한국인 의사에게 와 출산을 하는 것이다.
당시 서울에 일본인 산부인과 의원이 없지는 않았다. 고토라는 의사가 하고 있는 산부인과 의원이 있었다. 말하자면 신필호와 고토는 서울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러나 그중 명의는 신필호라는 소문이 나면서부터 일본인들이 인사동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산부인과 의원은 신필호가 개업한 이후 10년간은 뒤를 이은 사람이 없었다. 신필호는 산부인과 명의로서 명성을 날리며 그 방면의 개척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혔다. 그의 아들, 손자도 역시 산부인과 전문의로 뒤를 이었다. 신필호는 195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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