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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의 철학자들
행 17:16-21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16-21 / [아덴에 간 바울]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시내를 구경하다가 사방에 우상이 즐비한 것을 보고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17) 그래서 그는 회당에 가서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을 벌였고 날마다 광장에 나가서 거기 나온 사람들과도 토론을 하였다. 18) 바울은 또 에피큐로스파와 스토아파의 철학자들과도 토론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말을 하면 `이 사람이 꿈을 꾸나 보군' 하거나 `다른 나라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할 작정이군' 하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9) 그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였다. `그 새 교훈에 대해 말해 보시오. 20) 당신의 놀라운 이야기를 어디 한번 우리도 자세히 들어 봅시다.' 21) 아덴 사람들이나 그곳에 사는 외국인들은 모두가 늘 새로운 것을 찾아서 듣고 토론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베뢰아까지 쫓아와 핍박하였던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을 피해 아덴으로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의 격분(16)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삼대 도시 중의 하나로서 에게해의 싸로닉 만에서 25km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아마존을 정복한 아티카의 영웅 데시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44년에는 글라우디오에 의하여 고린도에 있는 총독이 다스리는 로마 원로원의 소속이 되어, 정치적으로 세계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학문에서는 철학, 문학, 예술의 중심지로서 서양문화, 나아가서 세계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이며 신전의 도시로서 지금도 헬라 문화의 영광을 능히 추측 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베뢰아에서 피신하여 거기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던 중,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함이 생겼습니다.
바울의 변론(17-18)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라고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교인과 개종한 사람들에게 율법적 근거로 전도했으며, ‘장터’(공중집회 장소)에서는 헬라인을 상대로 철학적 의식에서 전도했습니다. 이곳은 450년 전 소크라테스가 철학 강의를 하던 장소가 바로 ‘장터’ 곧 ‘아골라’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헬라문화의 심장부인 아골라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변론 하던 사람들 중에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있었는데, 이 학파를 일명 ‘정원파’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정원에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종교관은 말로는 신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나, 통치, 섭리, 초자연성을 거부하는 일종의 자연신 사상가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울을 가리켜 ‘말쟁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곡식 낱알을 줍는 사람’이란 뜻으로 당시 헬라사회에서 여러 지식의 단편들을 주워 모아서 나열시키는 말 장이들을 비웃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의 새로운 가르침(19-21) 당시 아덴 사람들은 범신론적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저마다 각종 신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유일신 사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데 바울이 예수님과 몸의 부활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18)에 이들은 바울을 가리켜 이방신을 전하는 사람으로 새로운 신을 소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어떠한 신들이나 철학에서육체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덴 사람들에게 있어 바울은 무슨 이상한 것을 귀에 들려주는 사람으로 보여 졌는데, 이들은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기질 때문에 언제나 종교적으로 새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용: 바울은 온 성에 우상을 보면서 분함을 나타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가득한 세속적인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독서는 가장 넓은 세계를 가장 손쉽게 경험하고 상상하게 만들어 주는 가장 좋은 스승입니다.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독일의 물리화학자 프레드릭 오스트발트는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독서'라는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그 좋은 예로, 시카고 대학은 1930년대에 그레이트 북(The Great Books)이라는 144권의 고전을 필독서로 지정하여 졸업할 때까지 다 읽어야 하는 '시카고 플랜'을 가동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계획에 대해 많은 반대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시카고 대학은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 설 교 >
의로운 분노
김영준 목사 / 사도행전 17:16-31
종교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이 세계평화를 위협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종교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종교를 염려해 주어야 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종교가 사람을 화합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분노는 달랠 길이 없습니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타협할 길이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무슬림의 분노를 말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없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분노로 말미암은 파괴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남의 종교시설에 들어가서 불상을 훼손시킨다든가 벽에 낙서를 한다든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놓는다든가 땅밟기운동을 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감정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저도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런 모든 분노의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상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 분노가 분노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죄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로지 미움과 정죄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고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나의 감정만 표출시키는 꼴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으로 족했을지 모릅니다마는 신약시대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아가 물맷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또 비느하스가 가나안 여자들과 행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도 진노를 느끼실 때가 있었지만 진노를 생명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식사하시는데 그 앞자리에 고창병을 앓는 환자가 앉아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실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에 예수님이 진노를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수님이 그들을 때렸다든가 상을 뒤집어엎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의로운 분노가 폭력이나 다툼을 낳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하나님 나라에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누가 이득을 얻습니까.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죽였을 때 예수님이 이 소식을 들으시고 빈들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애통하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촌뻘이고 의로운 선지자인데 악한 자에게 희생을 당했으니 예수님 마음이 얼마나 분하고 괴롭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빈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화를 내지 않고 그들 중의 병자를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라는 에너지를 사람을 구원하는 힘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신앙적으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느낀다는 말은 내 양심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불의함을 보고도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 양심이 죽었다는 것이고 무관심하다는 것이고 무력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느끼기 때문에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교회에서 어린이 부흥회를 하는데 부흥회를 앞두고 선생님들이 초청지를 들고 동네 초등학교에 갔는데 저의 아이가 하굣길에 반 친구들과 교문을 나서다가 초청지를 나눠주는 선생님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같이 나오던 반의 친구가 초청지를 받자마자 땅바닥에 던져버리더랍니다. 그래서 저의 아이가 화가 나서 그걸 왜 버리느냐고 항의했더니 저의 아이를 때리더랍니다. 둘 다 화를 낸 건 맞는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화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것입니다.
의로운 분노는 내가 믿는 것과 내가 확신하는 것을 더 굳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분노는 세상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 세상은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의로운 분노는 내가 더 이상 소극적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분노는 올바른 에너지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이 말하기를 ‘나는 화가 나면 설교를 더 잘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화가 나면 에너지가 분출한다는 얘기입니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분노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분을 내되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분노가 죄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불의한 일을 보고도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오늘은 분노 그 자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게 아니고 신앙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아덴에서 구경을 하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아덴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매일같이 우상을 보지만 무관심했어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 안했어요. 바울만이 온 성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마음에 분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얘기에요. 그 도성의 영적인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는 얘기에요.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분을 내느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이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설명한들 사람들이 알아듣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분노를 느낄 때 그 사실 자체로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오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면 안되는 게 아닐까. 성령 충만하다면 마음이 편해야지 내가 왜 마음에 분노를 느낄까. 그게 아닙니다. 적어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가 마음에 분을 느낀다는 말은 하나님의 메시지에요. 하나님이 느끼시는 분노를 바울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에요.
이 세상에 살면서 만일 우리의 마음이 늘 편안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롯이 소돔에 살면서 그들의 불법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느끼게 하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 몰라요. 그래서 무시하거나 억눌러 버립니다. 그러다보니까 영적인 분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그냥 싫을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 변태 같다, 저 사람 사기꾼 같다, 저 사람 진실하지 못하다, 그러고는 죄의식을 느낍니다. 내가 왜 저 사람한테 이런 생각을 할까. 그게 내 편견일수도 있지만 내 영적인 분별일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참모습을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다만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불편하게 생각하고 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애가 어떤 어른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어른의 입장에서 민망하게 생각하고 어른에게 사과하라고 야단을 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부모가 무식한 것입니다. 부모가 내막을 모르는 것입니다. 누가 압니까. 부모가 보지 않는 동안 그 어른이 아이를 학대하는지, 그 어른이 그 아이를 성추행하는지 부모가 모르는 거예요. 아이가 더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른은 그 감각을 상실했지만 아이는 그것을 느끼는 것인데 부모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억누르고 무시하고 위험을 자초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해의식을 가지시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직감 · 영적인 감각 · 영적분별 · 성령의 마음을 분간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건 합리적인 사고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도덕적인 차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느끼는 분노가 편협함, 불관용을 나타내는 게 아니냐. 왜 남의 종교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느냐. 이건 배타적인 것이 아니냐. 이것이 종교 간의 갈등을 발생시키지 않겠느냐. 만일 바울이 이 분노를 느낀 결과로써 남의 종교를 금지했다거나 탄압을 했다면 그건 불관용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한 사람일뿐이고 그 성의 방문객일 뿐입니다. 그 대신 바울은 무엇을 했느냐면 그들과 변론을 했다고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기독교 신앙을 그들에게 강요한 게 아니고 믿음을 강요한 게 아니고 변론을 한 것입니다. 대화한 것입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에요.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 신앙은 변론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대표적으로 그런 인물입니다. 그 이후로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마틴 루터, 요한 칼빈, 파스칼, C. S 루이스, 그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불신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하여 변론을 했습니다. 책을 썼고 사람들을 가르쳤고 생각의 시장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평이하게 전했습니다. 대화했습니다. 우리가 이슬람권에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함께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변론 자체를 금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금지하지 말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믿을 자유뿐만이 아니고 믿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고 있는데 왜 이 시대에 타문화권의 종교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는 만끽하면서 자기 나라에서는 그러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북한에 부탁하는 것도 단 하나에요. 신앙에 대하여 변론할 기회를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에요.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 Come, let us reason together’ 하나님도 변론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무슨 기적을 행한다면 모를까 변론을 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그건 모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변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만으로 승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바꾸는 것은 생각의 힘이에요. 아이디어의 힘입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구텐베르크가 그것을 성경으로 인쇄했더니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종교개혁을 가져온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소수의 목회자들은 정치의 힘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 교회가 득을 볼 줄로 생각했는데 그래서 지지했습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치와 종교를 섞을 수 없습니다. 섞을 필요 없습니다. 섞이면 안돼요. 초대 기독교가 예수 믿는 황제의 도움을 받아서 부흥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힘 · 말씀의 힘 · 믿음의 힘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변론을 한 것은 실패의 사례가 아니에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바울이 아덴에서 변론한 것이 실패의 사례라면 뭣 하러 누가가 바울의 말 전문을 여기에 기록했겠습니까. 이건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는 귀한 메시지입니다. 세상에 기독교 진리를 변론하는 좋은 사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는 반죽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복음이라는 누룩이 온 세상을 부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세상과 대화해야 됩니다. 말을 섞어야 됩니다. 묻고 대답하고 또 대화해야 됩니다. 우리의 믿는 바를 전해야 됩니다. 반죽에 누룩을 던져야 됩니다. 믿음의 선조들도 그렇게 했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으로 과거에 불신자들의 세상이 복음화 된 것처럼 이 혼동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덴에서의 바울
서금석 목사
지난 화요일 오봉산을 올랐습니다. 산 위는 여기 저기 눈도 있었고 잠깐 쉬면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는 평온해 보였습니다. 온갖 희로애락이 얽혀있는 사람사는 곳이 그렇게 평안해 보였습니다. 문득 '세상만사가 한치 건너서 좀 여유있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달리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보다 삶의 여건이 좋아졌는데도 불평은 더 많아졌습니다. 100년전 미국사람들은 꼭 바라는 것으로 16개를 꼽았는데 살기가 훨씬 좋아진 지금은 오히려 바라는 것이 92개로 늘었습니다.
바네트 깁슨의 저서 '행복한 하루'의 한 구절입니다. 「행운의 손바닥에 얼마나 많이 쥐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대의 행복과 관계가 없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한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것이다. 제발 부탁이니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라. 감사의 예술을 터득할 때 그대는 비로소 행복을 찾을 것이다.」
오늘 본문은 아덴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아덴에 대하여 같이 생각합니다. 흔히 '종교'하면 예루살렘을 말하고 '정치'하면 로마를 말하고 '철학'하면 아덴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아덴은 당시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전세계에서 배움에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드는 최대의 교육도시였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헬라철학을 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사람들이 철학을 깊이한다해도 헬라철학자들이 시작해 놓은 철학체계 이상은 넘어서지 못한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헬라철학이 세계철학사의 커다란 바탕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모두 아덴에서 있었습니다. 아덴은 철학뿐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의 중심지 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가장 학문적으로 발달되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아덴에 먼저와서 아직 베뢰아에 있는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리며 아덴을 돌아보게 됩니다.
1.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히 여기는 바울(16-17)
아덴을 돌아보던 바울은 분노했습니다. 아덴에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덴에는 당시 그리스 전체에 있는 우상들을 다 모은 것보다 더 많은 우상이 있었다고 하고, 아덴시 안에 있는 신상이 그 시에 살고 있는 헬라사람들의 수보다 많았다고 하니 짐작이 되지요? 아덴에서는 사람보다 우상을 만나기가 더 쉬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온통 아덴시가 우상으로 뒤덮혀 있다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여사는 철학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덴이 우상으로 꽉차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깊습니다. 아무리 교육, 경제, 문화가 뛰어나다할지라도 사람의 근본적인 속성은 타락한 상태입니다. 아무리 철학과 사상으로 외양을 치장한다할지라도 사람의 내면은 언제나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을 봅시다. 일본은 경제대국입니다. 그들의 전자제품은 세계 제1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일본차가 거대한 미국의 구석구석을 달리고 있습니다. After service는 또 얼마나 잘합니까? 이런 일본도 구석구석에 우상단지와 부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고합니다. 주머니에 부적넣고 다니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뿐 입니까? 중국이나 홍콩에 가면 이상한 향냄새가 진동합니다. 발리(Bali)에 가면 집문앞에서, 장사하는 가게에도, 심지어 운행하는 차에도 귀신 먹으라고 밥을 차려 놓아요.
그 옛날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애굽사람들. 피라미드 보셨지요? TV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피라미드는 현대인들에게도 불가사의로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그 큰 돌덩이들을 쌓아올렸는지 현대의 건축공학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과학이 뛰어났던 애굽사람들이 섬겼던 것들이 뭔지 아십니까? 벌레들이었습니다. 애굽에 내렸던 10가지 재앙들에 등장하는 것들은 바로 애굽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이었다고도 합니다. 우상숭배는 과학적인 사고와는 별개인 모양입니다.
남의 나라 얘기 해서 뭐합니까? 사업시작하며, 공사시작하며 돼지 머리놓고 입에 돈 넣어주며 절하지요? 성공하게 해 달라고. 공사장에서 사고나지 않게 해 달라고 돼지 머리에 절하는 것(웃으며 죽은 돼지 머리가 비싸다지요?)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병원에서 최첨단 의료장비를 들여놓고 고사들이지요? 최첨단 의료장비와 고사 - 아니로니칼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선거철이 되면 점쟁이 집 앞에 유수한 사람들이 몰려들고 박사학위가 있어도 주머니에 부적이 버젓이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당시 최고의 지성, 최고의 철학과 문화의 도시에 우상이 널려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많이 배워 안다는 것과 우상숭배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많이 안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더 많이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부많이 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잖습니까? '공부하다 보니 더 모르는 것 뿐이더라' 자기의 한계를 알게되니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의지하려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된 상태는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머리가 좋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죄인된 우리는 의로워집니다. 아덴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엇지만 그렇다고 철학이 교육이, 예술이 인간을 죄인된 신분에서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덴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후에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롬 1:21-23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禽獸)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의 마음 속에 분이 일었습니다. 격분했다는 말씀입니다. '분'이라는 헬라말 '파록쉬네토(παρωξυνετο)는 마음 속에 고통이 있을 정도로 분통이 터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최고 지성의 도시에 가득찬 우상을 보고서 느낀 바울의 분노? - 어떤 분노입니까? 바울의 분노는 하나님의 영광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죄와 우상과 타락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느낀 거룩한 분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물질이 우선시 되는 세상, 공의와 정의보다 힘있는 자들의 입김이 가난한 자들의 삶을 억압하는 세상,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일부 잘못된 의사들의 행태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왜곡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요 '열린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으며 내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에 위배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분노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너무 나약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옳지 않는 일을 앞에 두고서도 관여하기 싫어서 그냥 눈감아 버리지는 않습니까? 좋은게 좋은 거라고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세상의 욕심에 대하여 언제나 '아니오'라고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불의와 우상숭배를 지켜보며 눈감고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우상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불의와 우상숭배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회당에 들어가 날마다 변론했습니다. 변론이란 희랍어로 '디엘레게토(διελεγετο), 강의입니다. 2절에 강론과 같은 뜻입니다. 어떤 것을 증명하려고 애썻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은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지 않고 변론했다고 했울까요? 뭔가 아쉽기도 하고 뭔가 개운치가 않은 분위기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2. 쟁론에서 말장이로(18)
변론을 하던 바울이 드디어 아덴에서 당시에 유명하던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18절에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이 나오지요. 먼저 에비구레오 철학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에비구레오는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270)에 의해서 시작된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현재적인 쾌락추구를 우선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살아있을때는 죽음이 보이지 않고 죽을때는 이미 현실과 죽음에서 떠나 있으니 걱정할 것이 뭐가 있느냐?' 그럴듯하지요? 이들은 고통없는 행복, 고통없는 쾌락을 세상사는 동안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여깁니다. 신을 믿기는 믿었는데 인간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을 간섭하지도 않으니 있기는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있지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어요. 도덕성이 없어요. 세상 정치 사회 문화에 전연 관심이 없어요.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떻게든 나 혼자만 쾌락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에피쿠로스 철학은 그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주의, 우리나라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중에 가장 에피쿠로스 철학과 가까운 노래가 뭔지 아십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대부분의 범죄가 현실적인쾌락추구에서 옵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도덕적 개념이 없어요. 내돈 가지고 내가 즐기는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거지요.
스도이고 철학은 스토아(Stoa) 철학인데 제논(Zenon B.C.340-265)이 시작한 학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스토아 철학은 에피쿠로스 철학과 반대되는 것이 많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신은 자연이고 자연은 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는 것으로(여기까지는 우리신앙과 비슷하지요?) 인간에게는 아무런 자유가 없고 다만 신의 의지에 따라 정해진 운명을 살아야만 한다는 운명론을 주장합니다.(여기서 우리와 완전히 다르지요) 스토아 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금욕주의'입니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에 비해 스토아 철학은 철저히 정욕을 억제하고 쾌락을 멀리하라고 -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노라고 주장합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죄송한 이야기지만 철학이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바울이 철학자들과 만나서 쟁론했어요. 쟁론이란 '쉬네발론(συνεβαλλον), 한마디로 돌던지며 싸우는 것처럼 말싸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아덴을 돌아다니면서 널려져 있는 우상을 보았을 때 분노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철학에 능통한 바울이 자신의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변론했습니다. 변론이 발전되어서 뭐가 됐습니까? 논쟁이 되었습니다. 변론과 논쟁으로 바울은 그들이 복음에 굴복하도록 애썼지만 그게 쉽게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시간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철학적인 주장으로 사람을 굴복시키고, 구원시킬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논쟁에 대한 반응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뛰어난 철학실력으로 자신들과 논쟁하는 바울을 아덴의 철학자들은 '참 훌륭하네' '그래 맞아' 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말쟁이' 취굽했습니다. 말쟁이란 '스페르몰로고스(σπερμοχογοσ) - 본래는 곡식을 쪼아 먹는 새를뜻하였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사상을 얻어듣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것인양 도용하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을 사기꾼이나 떠벌이 정도로 취급했어요. 또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듣고 어떤 외국의 낯선 신을 전하는 사람 정도 취급을 했습니다.
이론가지고 논쟁으로 예수 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아셔야 합니다. 설혹 논쟁에 이겼다해도 '예수 믿는 사람 말은 잘해 ' '예수 믿으면 벙어리도 말하게 된대'하는 비아냥 듣게 됩니다. '회개하고 주예수 믿어라'단순하게 전해야 하는데 철학적으로 복음을설명하려하고ㅡ 철학적으로 논쟁에서 이겨 예수 믿게 하려 한다면 계산착오입니다. 때로 논쟁에서 이겼다해도 기분나빠서(졌는데 기분이 좋겠어요?) 예수 안 믿어요.
예수님은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강력한 이론도, 최고의 권력도,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군사력도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앞에서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능력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 믿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기는 겁니다. 져주는 것이 지혜로운 전도방법입니다.
후에 바울은 이 경험에서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딤전 6:20, 23 /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3. 새로운 것에만 관심이 있는(호기심만 많은)아덴 사람들.
행 17:19-21 /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는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당대의 아덴 철학자들과 바울이 쟁론을 하니까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 아레오바고는 일종의 법정입니다. 당시 아덴에서 종교적, 윤리적 문제가 생기면 이곳에서 재판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던 곳이었고 당시 통치자들이 대중들과 만나 대화하던 곳이었는데 바울은 죄수로서 재판받으러 온 것은 아니었고 바울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청문회 비슷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19절에서 21절에 내용이 나와있지요.
네가 말하는 새 교(敎)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우리가 듣기에 이상한 것을 말하니 그뜻이 무엇인가 알고 싶다.
아레오바고에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 세월보내기를 즐기는 아덴 사람들과 외국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잇었습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복음의 핵심과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울이 하는 말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므로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는 말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호기심은 막을 수 없나 봅니다. 호기심은 좋게는 많은 발명과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제임스와트(James Watt)는 주전자 물이 끓으면서 뚜껑이 움직이는 것 보고 증기기관을 만들어 냈지요. 뉴턴(Newton. I.)은 사과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호기심은 좋고 유익합니다. 그러나 호기심이 꼭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지마시오'하면 더 보고 싶지요. '미성년자 관람불가'하면 더 보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이쪽으로 오시오'하고 쓰여있어 호기심에 가보았더니 다시 화살표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계속 따라가 보았더니 마지막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습니다. "이 바쁜 세상에 왜 쓸데없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까? 바보같은 사람" 졸지에 그 사람은 바보가 되었습니다. 호기심은 때로 사람을 바보로 만듭니다.
당시 아덴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헬라인도 있엇고 철학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도 몰려 살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모여서 논쟁하기를 즐기고 새로운 것이 있다면 모두다 그런것에 시간을 보냈습니다. 삶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실천없는 주장, 사상, 새로운 이야기에만 정신이 빠져있었습니다. 새것! 좋지요. 그러나 너무 새것만 좋아하지 마세요. 새것 좋아해서 낭비하는 것 얼마나 많습니까? 휴대전화 - 조금 편하다고 조금 모양이 새롭다고 아직 쓸만한데 그냥 버리고 새번호로 새 모델로 바꾸지요? 일부러 옛날의 불편한 것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쓸만한 것 버리고 새것만 찾아 다니는 것 문제 아닙니까? 1989년 처음 태국에 갔을 때 안내하던 여행사 직원이 가방에서 손바닥 보다 큰 전화기꺼내서 국제전화 거는데 - (지금의 휴대폰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신기해 보일 수가 없어요. 그런 전화는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구닥다리지만 전화거는 것은 매일반 아닙니까? 해아래 새것이 어디 있겠어요?
새로운 것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하나님 말씀이 있지요. 이사야 40장 8절 말씀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상이나 문명은 계속 새것으로 교체됩니다. 교체된다는 것은 이전 것은 계속 시들어간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나 이땅에 영원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합니다. 호기심 많고 새것 좋아하는 사람 - 헛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13:8)
정리하면서
아덴에서의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자기가 배웠던 철학적 지식으로 기독교와 예수를 변론하다가 논쟁까지 했습니다.
논쟁으로는 상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말쟁이라 조롱만 받습니다.
당시 아덴의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들.
지금도 물질과 육체의 쾌락을 좇아사는 사람들 많이 있지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복음 바로 그 자체입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아덴처럼 철학사상도 풍부하고 우상도 많은 곳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논쟁을 통해 복음 전하는 방법은 지양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중심으로 그 내용과 복음을 전하는 방법과 자세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속의 아덴 사람
행 17:16-23 / 번영익 목사
여러분 ! 바울이 뵈뢰아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이 또 뵈뢰아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는 또 유대인들을 피하여 뵈뢰아를 떠나 아덴이라는 도시로 옮겨왔습니다. 아덴이라는 도시는 역사적으로 헬라의 수도이며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의 본산지이기도 합니다. 아덴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발상된 곳으로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지식의 우상이 가득한 도시입니다. = 역사적 문헌에 보면, 아덴 사람들은 먹고 하는 일이 새로운 철학의 이론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장 큰 관심사 옅다고 합니다. 본문(21절)에 보면 <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고 했습니다. 즉 아덴 사람들은 밥 먹고 하는 일이 새로된 철학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 이외에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 ! 한 마디로 아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철학적 개념으로 가득 차 있는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물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모두 철학적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인생을 논 할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 적 입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숙명과 운명철학으로 풀어가는 사람들이였습니다.
■ 재미있는 철학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에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인 제논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 인내와 체념의 철학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젊은 청년 노예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노예 청년은 그 주인인 제논을 골려주기 위해서 그 주인의 집에서 돈을 훔쳤습니다. 주인인 제논이 이 사실을 알고 노예 청년을 때리며 심문을 하니까 노예 청년이 말하기를 주인님 저를 때리지 마십시오, 내가 돈을 훔친 것은 돈을 훔치고 십은 운명에 의하여 된 일이므로 저에게는 절대로 책임이 없습니다. 책임을 물으시려면 제 운명에게 책임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운명에 희생자 일뿐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무식한 노예도 이런 철학을 했습니다. = 그때 이 제논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 때 제논은 오히려 화를 더 크게 내면서 그래 이놈아 네 말이 맡다, 나도 너를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나도 네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하여 너를 때리는 것이니 절대로 때리는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 무식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철학은 말을 가지고 말을 만드는 말장난인 것 같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과 실라는 이 아덴에서 전도의 큰 성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 이런 방해의 요소들이 많이 있는 곳에는 절대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덴에서는 다른 도시에 비하여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즉 우리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속에도 이 아덴 사람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 속에 있는 아덴을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속에 있는 아덴은 ....
1, 우리 속에 있는 우상.
= 여러분 ! 아덴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에 큰 은혜를 받지 못한 이유는 아덴에 가득한 우상 때문 이었습니다. 본문(16절)에 보면 <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 라고 했습니다. 우상에 종류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았지만 생각건대는 헬라의 철학 사상으로 만들어진 수 많은 우상들이 있었을 것을 생각해 봅니다.
= 여러분 !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곧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 제1과 제2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 것과 만들지 말 것에 대하여 제일먼저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있는 곳에는 저주만 있을 뿐 하나님의 역사나 축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 여러분 ! 본문에 보면, 온 성에 우상이 가득했다, 라고 했습니다. 아마 골목마다 거리마다, 그리고 가정마다,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가득했다는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거리에 가득한 우상을 보면서 마음에 분이 일어났다고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우상을 보면 바울과 같이 마음에 분이 일어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우상에 넘어지거나 우상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상이 많은 곳에는 절대로 복음이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과 우상은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 저 인도는 영국이 100년씩이나 통치를 했는데도 복음화 되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에는 3억 3천이라는 우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야 말로 거리마다 골목마다 가정마다 사람들마다 이상한 우상들로 가득 차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까지도 인도에서는 복음의 꽃이 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 ! 또 저 일본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 일본은 복음을 마음대로 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인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에서 가장 전도하기 어려운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 일본도 인도와 같이 우상이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도 별난 우상들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 여러분 ! 우리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속에 아덴과 같은 우상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의 이름들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우상의 이름이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우상이요, 어떤 사람이 취미생활이 우상이요,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육신이 우상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우상들이 복음을 방해하며 그런 우상들 때문에 내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는 이 시간에 내 속에 어떤 아덴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라며 내 속에서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우리 속에 있는 아덴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 우리 속에 있는 지식.
= 여러분 ! 본문(18절)에 보면 <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 자 들도 바울과 쟁론 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 는 말씀이 있습니다.
= 여러분 !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덴 사람들은 철학적 사고에서 만들어낸 많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상중에 하나는 보이지 않는 우상이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지식이라는 우상입니다. 아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지식의 우상은 복음을 받아 드리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 이였습니다.
= 여러분 ! 이 말씀은 무식이 지식보다 낳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를 들어 말하면 컴퓨터가 대단한 지식을 기억하고 있지만 컴퓨터를 만든 사람이나 프로그래머를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만일 자신이 지식이 더 우월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창조주를 무시하는 절대적 교만입니다.
# 옛날에 언젠가 혀끝에 암이 생긴 의사가 어느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매우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저는 오늘도 UCLA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보았는데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는 아무개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 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무지 그 말에 신뢰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여러분 ! 그 의사가 왜 목사님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 그 속에 아덴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의학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불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 병으로 죽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여러분 ! 아덴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드리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지식들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 지식은 좋은 것이로되 하나님보다 앞에 있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무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 님은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즉 무엇이든지 하시고 무엇이든지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 여러분 !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을 초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그가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지식은 어리석은 자의 교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지식을 내려놔야 하며 그의 말씀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은혜를 받게 됩니다.
=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이 있습니다. 즉 우리 속에 있는 아덴은 ....
3, 우리 속에 있는 불신.
= 여러분 ! 본문(22-31)까지를 보면 바울은 이 아덴 사람들 앞에 서서 여러가지 말로 길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긴 설교를 듣던 아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 본문(32절)에 보면 그들의 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하고 혹은 이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니라 > 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의 지식이 만들어낸 불신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바울의 말에 코웃음을 치거나 다음에 다시 듣겠다는 말로 불신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본문을 보니까 바울은 그들의 마음에 가득한 불신을 보고 더 이상 아덴에 머물지 않고 거기를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이 있는 곳에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각색 병자를 고치실 때에 먼저 꼭 확인 하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 그 속에 불신이 있는가, 아니면 그 속에 믿음에 확신이 있는가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속에서 불신이 아닌 믿음에 확신을 확인 하셨을 때에는 < 네 믿음대로 되리라 > 고 하셨으며 그 믿음의 결과는 기적이었습니다.
# 여러분 !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입니다. 무엇이 이 세상을 불신의 세상으로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 죄가 이 세상을 이렇게 불신의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다 도둑놈 같이 보이고 믿을만한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서울에서 미국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공항 대기실에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한국 애기 엄마가 큰 가방을 두 개나 가지고 아이와 함께 내 옆에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아이가 엄마에게 화장실을 가자고 합니다. 이 엄마는 화장실을 가려면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가방 두 개를 끌고 아이를 데리고 가야만 합니다. 이 여자 분이 여러 번 내 얼굴을 훌터 보더니 가방두개를 끌고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는 것입니다. 아마 내 얼굴이 사기꾼 아니면 도둑놈 같이 보였나 봅니다. 그 때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목사인데 나에게 부탁을 하면 아주 안전하게 지켜 줄것인데 나를 믿지 못하고 생고생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 여러분 !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왜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지 아십니까 ?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덴사람의 불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난 말로 오래 살려면 저처럼 절대로 생명보험을 크게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 보험이 크며 자식에게 죽던지 아니면 자기 아내나 남편에게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여러분 속에서 복음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라십니까? 혹시 내속에는 아덴 사람과 같은 우상은 없는지, 그리고 아덴 사람과 같은 지식은 없는지, 또 아덴사람과 같은 불신은 없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알지 못하는 신
행 17:16-31 / 이필재 목사
선교지를 다녀올 때는 두 가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게 이렇게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다고 하는 기쁨이 있고, 또 하나는 선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고 하는 기쁨이 언제나 있습니다. 목회자 세미나를 위해 한 주간 네팔에 가서 보니까 팔이 네 개가 아니고 저와 같이 정상적으로 두개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네팔은 오랜 내전이 있습니다. 정부군과 반군의 치열한 게릴라 전투가 계속 벌어지고 있는데, 제가 들어가는 날도 12명이 죽고 58명이 부상을 당하는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한밤중에 공항에 내렸는데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는 길목마다 무장 군인과 무장 경찰이 계속 보였습니다. 이 네팔은 힌두교의 나라입니다. 85% 정도가 힌두교 신자이고 7% 정도가 불교 신자, 3% 정도가 이슬람 신자이며 기독교는 0.5% 정도 밖에 안 되는 나라입니다. 한국에 와서 신학 공부를 하고 우리 갈보리교회와 관계를 하고 있는 쿠말 목사와 다와 목사가 ‘카트만두’에서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어서 연결이 되어서 이번에 갔다 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0.5%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다소 무시를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주 분명한 통계가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일찍 들어간 나라는 모두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이고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는 거의 발전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네팔도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이번 집회하는데 300명만 받으라고 미리 제안을 했지만 67개 교회에서 403명의 네팔 목회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네팔 지역에서 목회자들이 그렇게 많이 몰려와서 중요한 사람들이 다 몰려온 것 같았습니다. 또, 그 중에는 정치 지도자들도 기독교가 무엇인가 탐색하기 위해서인지 참석을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경청하는 것도 보고 받았습니다.
저는 선교지를 다니면서 확신하게 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여호와이레로 미리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네팔 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네팔의 교회 지도자들을 400명 이상 모아놓고 제가 어떻게 그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도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지도자가 있습니다.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28세의 청년과 연결이 되어서 그 청년 덕분에 이번 세미나를 아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한국어 전공해서 그곳에서 계속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에 와서 7년 동안 한국어를 익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카트만두에 있었기 때문에 그 청년을 통역원으로 세워 이번 세미나에서 나의 강의를 통역했는데 얼마나 통역을 잘 하는지 하나도 손색없이 훌륭하게 통역을 잘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제가 세계 어디를 가도 하나님이 준비한 일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 세미나에서 큰 열매가 생겼는데, 그 청년이 목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데, 한국에 와서 자기가 신학 공부를 해서 네팔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자기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 마음이 소명으로 연결이 된다면 그렇게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은 우리 갈보리교회가 할 테니까 나한테 통보해 달라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큰 열매 하나를 마련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선교를 다니다보면 이런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도 옛날 우리 고려족 아버지, 어머니가 사할린으로부터 그곳으로 가서 사는데 그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모스크바 대학 교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말을 안 잊어버리고 썩 잘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모스크바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는데 그분이 모스크바 집회에서 나를 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저를 통역하고 나서 자기도 목사가 되겠다며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드디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버지가 모스크바 정치 지도자로 북한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대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자기는 이 북한들을 드나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지금 두만 강변에다 탈북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목사가 되어서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고, 그 뒷받침을 제가 여기 갈보리교회로 오기 전까지 오랫동안 계속했습니다. 사실 모스크바 대학에서 교수직이 그 사회에서 얼마나 훌륭한 자리입니까? 그것 다 집어치우고 지금 선교사가 되어서 러시아와 북한을 드나들면서 열심히 선교하는 그런 큰 열매를 제가 과거에 선교하러 다니면서 얻었는데 이번 세미나에 가서도 그런 열매 하나를 마련하고 오게 되어서 매우 기쁩니다.
저는 이렇게 세계 여러 나라 60여 개국을 다니면서 선교하고 보고 다니면서 그 나라 전통 음식을 다 먹어 보았습니다. 부럽죠?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 제가 선교 갈 때 누구든지 따라 오십시오. 그러면 세계 모든 종족의 음식을 먹어보는 행복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맛이 있느냐? 선교지에 가서는 현지 목회자들이 먹는 그들의 음식을 같이 먹어야 선교가 됩니다. “아, 나는 이런 음식을 절대 안 먹으니까 너희들이나 먹어라.” 하려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서 함께 호흡을 할 수 있을 때 선교가 가능합니다. 제가 소록도에 처음 갈 때 그곳의 조건이 뭔지 아세요? “나병환자들과 악수할 수 있느냐? 같이 앉아서 함께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느냐? 나더러 와서 모두에게 안수기도 해 줄 수 있느냐? 할 수 없으면 오지 마시오.” 그거였습니다. 그거 맞습니다. 그래서 처음 가서 그렇게 하려고 보니까 정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약속했잖아요? 눈 딱 감고 100명이나 되는 진물이 줄줄 흐르는 몸에다 안수기도를 다 해주고 그들과 같이 앉아서 밥 먹고 악수하자고 해서 악수하고 왔습니다. 제가 먼저 있던 토렌스 교회에서 그렇게 하고 돌아왔다고 하니까 교인들이 나한테 오지 않는 거 있죠? 그 전에는 악수하자고 그렇게 오더니 그 후로는 그냥 멀리 멀리 도망을 가요. 이번에도 가서 그 나라 전통 음식을 그 나라 목회자들과 먹었습니다. 그분들이 건강식이라고 잘 먹는 음식이 나왔는데, 무슨 콩국 같기도 하고 죽 같기도 한데 마시는 겁니다. 그런데 냄새만 맡아도 어제 먹은 것까지 “웩~” 토할 것 같았습니다. ‘어휴~ 큰일났다.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구나!’ 선교지 같이 가자고요. 아무튼 이번 세미나 가서도 전통 음식 한번 먹는데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선교지 다니려면 그런 고난을 다 감수하고 다녀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저와 선교를 한번 갔다 오신 장로님과 그 장로님의 아내인 권사님은 선교 갔다 오신 후에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치료받으셨습니다. 아니, 먹긴 먹어야 되는데 먹을 수는 없지, 거기다 여행 다니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몸에 밸런스가 안 맞아 도무지 견딜 수가 없고 그렇게 힘이 듭니다.
저는 오래 전, 벌써 19년 전에 인도네시아 선교를 열심히 했는데, 제 아내를 한번 데리고 갔단 말입니다. “나를 따라 다니면 세상 구경도 많이 하고, 맛이 있는 세상 음식도 다 먹게 되고 얼마나 좋으냐? 왜 안 가느냐? 같이 가자!” 잘 꼬셔서 제 아내가 선교지를 처음 따라왔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첫 밤을 자야 하는데 우리가 자야할 방을 둘러보니까 도마뱀이 17마리가 벽에 붙어 있는 겁니다. 제 아내는 몸도 마음도 약해요. 그래서 활동을 안 하는 그런 사람인데, 그걸 보더니 비위도 약하고 기절을 하는 겁니다. “큰일 났다. 이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더러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내일 아침에 내가 깨어나지 않으면 장례식 치르세요.” 하고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어 버렸어요. 이거 뭐, 기절을 해서 못 자겠는걸 어떻게 해요? 제가 진짜 세어봤다니까요? 정확히 도마뱀이 17마리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곳에서 잠을 자야겠는데 인도네시아에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빠띡’ 이라고 하는 헐렁헐렁한 반바지 하나 입고 그냥 살아요. 저도 그거 하나 얻어서 입고 밤에 잠을 자는데 아, 몸뚱이와 얼굴이 밤에 근질근질하고 도마뱀들이 내 몸에 와서 이상한 놈이 왔다고 살림을 차린 거예요. 하도 간지러워서 한 마리 잡았는데 꼬리를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도마뱀이 꼬리를 끊어버리고 도망을 가더라고요. 꼬리가 내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거예요. 아,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선교사한테 나 어젯밤 도마뱀 한 마리 잡았다고 했는데 선교사는 그곳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도마뱀들이 너무너무 귀엽대요. 그렇게 해야 선교를 한단 말이에요. 그릇을 열어보면 설탕 그릇에 들어가서 설탕을 먹고 있지를 않나, 온통 살림을 다 차려놓는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이익은 그 도마뱀들이 집안의 모기를 다 잡아 먹어요. 그래서 너도 살고 나도 살고 그렇게 같이 사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자카르타 선교지가 아닙니다. 거기는 대도시입니다. “이제 선교는 시작도 안 했다. 이제 6인승 경비행기 타고 네 시간 인도양에 있는 니아스 섬, 그 정글로 들어가야 된다.” 그러면 제 아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정사정합니다. “아이고, 목사님! 선교든 목회든 목사님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십시오. 나는 절대 잔소리나 참견 안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더러 하라고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난 죽겠습니다.” 그래서 못 갔어요. 저 혼자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제 아내는 선교지 절대 안갑니다. 선교지 소리만 나와도 기절합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로 갑니다. 그렇게 다니다가 거기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선교지 다니면서 느낀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행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겁니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어떤 종족을 만나도 똑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神)개념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원시인 생활을 하는 부족들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공부라고는 한번도 해본 일이 없는 사람들만 모였습니다. 그런데 가보면 분명히 그들이 섬기는 신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 있습니다. 이 인도나 네팔에는 힌두니즘이 있는데, 이 종교는 다신 개념의 종교입니다. 그게 뭐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신이라고 하는 그런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물 센터에 가보면 제일 많이 팔고 있는 목조각이 있는데 코끼리 모양 조각입니다. 왜 코끼리를 이렇게 만들어 팔고 있는가? 코끼리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본래 이 네팔이라는 나라가 제일 유명한 것이 산이 높은 거잖아요? 에베레스트 산, 히말라야 산 그 높고 높은 산을 제가 이번에 갔어요. 그 정상에 신전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소원이 있으면 거기에 일단 와서 제사를 지내고 내려갑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는 형상이 뭐냐 하면 원숭이입니다. 원숭이 앞에 가서 염소를 잡아다 불을 태워서 제사 지내기도 하고, 비둘기 잡아서 제사 지내기도 하고, 돈 갖다 놓고 절하고. 제가 갔던 원숭이 신전에는 진짜 원숭이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원숭이 형상을 만들어놓고 거기 사람들이 그렇게 제사를 많이 지내고 온갖 향을 피우고 냄새가 나는데 원숭이 만들어 놓은 형상 외에 진짜 원숭이 한 마리가 떡 하니 앉아서 인간들이 드리는 절을 앉아서 태연하게 다 받고 있는 모습을 제가 봤습니다. 이 다신 개념이 있습니다. 여자 하나님도 있습니다. 여자 예쁘게 형상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모두 ‘여자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팔이 네 개입니다. 네 팔을 벌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앞에 가서 있습니다. 네팔에서는 왕도 하나님 중에 하나님입니다. 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지 소도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도, 네팔에 가서 소고기 요리 잡수시려면 안 됩니다. 없으니까요. 홍콩에 가시면 홍콩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서 예배드리는 신전이 있습니다. 365일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는지 마당에도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인데 그냥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향을 피우면서 드립니다. 손에 향을 수십 개씩 들고 수백 명이 향을 피워대니까 뭐, 그 일대가 다 불난 집 같아요. 그 향냄새 때문에 5분을 서있기가 힘들만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신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신전에는 누가 있느냐? 삼국지의 영웅 관우가 있습니다. 관우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이렇게 예수를 믿은 후에 세상을 보러 다니기를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불신자로서 세상을 구경했다면 나는 이 땅에서 종교 반대 운동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에도 단군 신이라고 해서 사람 섬기는 게 있잖아요? 간지승 강물이라는 그 네팔에 있는 성지라고 하는 그 강물은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더러운 물은 없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청계천도 그것보다는 깨끗할 겁니다. 온갖 오물이 다 내려가는데 거기가 성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거기 와서 다 장례식을 치르는데 어떤 때는 그 강물을 성수(聖水), 거룩한 물이라고 해서 시체를 마지막으로 그 강물에 씻습니다. 제가 간 날 세 사람 장례식 불태우는거 봤는데, 처음부터 봤습니다. 뭐, 꽃을 갖다 놓고 누구든지 장례식을 거기 와서 하니까 그 더럽고 더러운 물을 떠다가 시체 얼굴을 마지막으로 붓습니다. 거룩한 물로 닦아주는 겁니다. 그게 성수라고 믿으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그 오물 속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나오고, 머리에 뿌리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마시기까지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곳에 얼마나 그런 우상이 많았는지 신의 이름이 “알지 못하는 신”이란 것까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로 그것이 선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종교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본래부터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잘못 찾고 있기 때문에 그 진리를 밝혀주려는 것을 선교라는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27절에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찾고자 하는 자에게 나타나시도록 준비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약속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는데, 문제는 그 축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느니라.” 영적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 그렇게 많은 헛된 종교가 있는데 내가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것을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볼 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어떤 때는 오해의 동기가 될 수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아, 그러면 그렇게 해라! 그렇게 중요한 일을 빨리 하고 오너라.”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 그런 상식 밖에 말씀을 하시잖아요? 왜 그러셨을까요?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일 보다도 네 인생의 가장 중대한 기회가 이 문제이다. 이것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영생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어찌 그렇게 재물에 인생을 걸고 사느냐? 너는 그것이 너무 많은 것이 영적 장애가 되고 있다. 오히려 그것을 네 손에서 좀 없애라!”하셨는데 그 청년은 “그것만은 안 되겠습니다.” 하고 돌아갔다고 했잖아요?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발에 붓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 돈에 향유를 허비하느냐?” “300 데나리온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라고 잘했다고,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내게 임한 영적 축복을 최상의 가치라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영적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 축복 외에 시대적 축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하나님 자녀들은 영적 세계에서 시대적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 기독교 진리의 특징은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 희생을 하셨다는 간단한 진리에 고백적 믿음 하나이면 속죄와 영생이 약속되는 진리! 아주 쉽다는 겁니다. 믿음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인생 최고의 행복한 종교입니다. 어느 날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복잡한 교리를 따지고 구원의 문제를 논할 때 주님은 선포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게로 와서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 이 시대적 영적 축복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너희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느니라.”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장 축복의 시대적 은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은 현장 심판을 당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은 제사장인데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장 직분을 불성실하게 하다가 현장에서 불에 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사는 법궤의 거룩성을 무시하고 손댔다가 현장에서 죽었다고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현장 심판을 다 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죄에 대한 심판도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십니다. 왜 그럽니까? 마지막 때라서 그럽니다. 한 영혼이라도 빨리 구원해야 되는 구원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축복이 선교적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구약시대는 선교를 아무나 못했습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선교를 합니다. 선교 안하는 교회나 신자는 이상할 만큼 합니다. 주일학교에서부터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남녀선교회, 기타 온갖 이름을 걸고 온 세계를 다 뒤지면서 그렇게 열심히 선교합니다. 이것이 선교적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도록 노력해 주는 일은 영적 가치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 지금 대한민국 교회는 미국 다음으로 선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려면 두 가지가 소비됩니다. 하나는 인력 소모입니다. 대한민국은 해마다 선교의 이름을 가지고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이 일년에 수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력적 소모가 엄청납니다. 또 하나는 물질 소모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이 선교 이름으로 소모가 됩니까? 그러면 그런 소모적 나라는 얼마 안 가서 망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돈이 365일 계속해서 빠져나가는데 어찌 망하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의 정책이 다 돈 벌어들이려고 하는 것인데 선교는 돈을 내보내는 작업입니다. 성경의 진리의 성격은 파라독스, 역리적 교훈입니다. 상식적으로 망할 것 같은데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선교 공헌 민족을 부강하게 만드셨고 기독교 탄압 국가는 다 결과적으로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의 손을 부하게 하셨고 베푸는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드십니다. 그게 파라독스입니다.
자, 우리나라 선교 역사는 짧습니다. 그래서 다 기억합니다. 우리 솔직히 평가해 봐요. 미국이 대한민국 선교를 위해 쏟아 부은 돈을 생각해 보세요. 그 많은 학교 다 세웠죠? 그 많은 병원도 선교사들이 다 세웠잖아요? 그 많은 고아원, 그 많은 교회, 그 많은 구제 사업 미국이 한국에 선교 이름으로 갖다 부은 돈만 해도 계산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만 그렇게 했습니까? 이 지구상의 어떠한 나라도 미국의 선교를 받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해야 합니다. 다 빠져나가고 빈 깡통만 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20세기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요즘 통계는 제가 잘 몰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모든 나라들의 돈을 합쳐도 미국이 가지고 있는 것의 절반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큰소리를 치는 겁니다. 선교 많이 하는 나라를 하나님은 부강하게 하십니다. 선교하는 교회를 하나님은 튼튼하게 하십니다. 선교 많이 하는 손을 하나님은 뜨겁게 잡으십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선교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풍성해 질 것입니다. 선교가 뭐냐? 그 더러운 똥물을 마시며 머리에 뒤집어쓰며 성수라고 하는 저 무지한 백성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의 선교 열정으로 선교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갈보리 교인들에게 넉넉히 임재하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교회가 열심히 하고 있는 127군데의 선교지가 하나님의 큰 진리의 빛을 발하게 하시고,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튼튼하게 하시며, 오늘도 어려운 가운데서도 생활비를 줄이면서 선교헌금을 하고 있는 모든 형제들의 손과 주머니를 주님이 넉넉하게 채워 주시옵소서. 예수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능력있는 전도자가 됩시다
행 17:16-34 / 이수관 목사
제가 구약신약 번갈아 가며 책 한권에 한편씩 설교하기로 해서 오늘은 6번째 책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을 출발해서 세상으로 퍼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앞에서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하는 제자들에게 1장8절에서 성령 하나님이 오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땅끝에까지 가서 전하는 내 제자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약속대로 성령님이 오셨고,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대로 복음은 땅끝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인 28장 30-31절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땅끝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까지 가서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 한 전도자의 모습으로 사도행전은 끝을 맺습니다.
이렇게 로마로 간 복음은 그후 빠른 속도로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서 기원후 한 200년경만 되도 로마 정부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 비하면 대단한 속도입니다. 예를 들면 불교는 기원전 700년경에 인도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불교가 중국하나 건너서 우리나라에 전해질 때까지 1,000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할 때,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그리고 어떻게 복음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퍼질 수 있었는가 그것이 누가가 이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주 관심이었고, 그는 그 이유가 다름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제목을 사도행전보다는 성령행전이라고 불러야지 맞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이렇게 능력있게 퍼진 이유에는 그런 성령님께 사용을 받은 베드로, 요한, 바울같은 능력있는 전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이방인 전도의 꿈을 안고 그 당시 유럽을 세 바퀴 반을 돈 사도바울을 빼놓을 수가 없지요. 오늘 본문은 바울이 이방인들을 상대로 얘기한 것으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몇개의 대표적인 설교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우리는 능력있는 전도자로서의 사도 바울의 몇가지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 이방인들에게 접근했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설명하는가 등등.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런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배울점이 없는지 하는 것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우선 첫번째로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교훈,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2차 전도 여행때의 얘기입니다. 소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유럽으로 건너간 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이런 순서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베뢰아에서 바울을 싫어하는 폭도들에 의해서 소동 비슷한 것이 일어나자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둔 채로 급히 아테네로 피신을 오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에 아테네라는 도시를 돌아보게 되는데 이 아테네가 수 많은 우상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면서 격분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격분했다는 단어는 영어단어 중에 발작증이라는 뜻의 paroxysm 이 이 단어에서 왔으니까 “발작할 정도로 치를 떨었다”는 의미겠지요.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다른 곳도 아니고 어떻게 아테네를 보면서 치를 떨고 격분을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그렇게 느끼지 않으세요? 아테네가 어떤 곳입니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던 그리스사상의 중심지이고, 시와 연극과 그림과 조각등 세계의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파르테논 신전과 아크로폴리스같은 유적지가 있어서 지금도 유명한 휴양지입니다만, 1세기때도 마찬가지여서 인구는 많지 않았지만 늘 여행객들의 숫자가 실 주민의 숫자와 같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곳에 가서 신전이나 조각등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격분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날의 예로 들자면 경주 박물관에 가서 1000년의 찬란한 신라의 불교 문화를 보면서 문화적인 어떤 감탄을 느끼기 보다는 “아, 이 우상숭배.”하면서 치를 떨었다는 얘기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자,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중에 어떤 분들은 사도바울을 향해서 “아, 문화적 소양이 워낙 없는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곰곰히 생각해 보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느꼈는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선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외곡시켜 놓았을까 하는 사실에 분노가 느껴졌을 겁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나체의 사람으로, 짐승으로, 아니면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고 그런 것을 숭배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가 느껴졌겠지요. 하지만 그것 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상아래서 고생하고 사는 인간의 삶의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 문화나 신라의 문화나 우리가 지금 그 결과물을 보고 예술품을 보니까 아름답다고 하는거지 그 문화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거든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람들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러니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구요. 바로 그가 품고 있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그를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게 했던 겁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언제부터 그는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열정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어떤 분들은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한때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요. 또 어떤 분들은 사도바울은 워낙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런 강렬한 경험이 그를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강렬하게 만나는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바울은 뭐 전도에 조금 열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바울은 고향이 ‘다소’라는 곳인데, 당시의 ‘다소’는 소아시아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정치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거기도 마찬가지로 신전들이 있었고 거기도 마찬가지로 우상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또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도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거기에 그냥 머물러 있었는데 거기서 특별히 뭘 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도행전 11:25-26절에서 보듯이 바나바가 그를 ‘다소’에서 불러내서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전도를 열심히 하던 교회였거든요. 이런 교회에 와서 이방 사람들을 전도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방인 사역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나서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그의 눈이 열리고 그러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그러면서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왜 나는 저렇게 못하나 하고 부러워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기도를 열심히 할 수 있는가 부러워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열정을 부러워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저런 열정을 타고 났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그런 열정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처음에는 초보자로 시작합니다. 눈치 봐가며 하나 둘 따라 해보고 그렇게 조금씩 해 나가면서 나중에 그런 열정을 받게 된 겁니다.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장기 선교사로 나가신 분들도 처음부터 그럼 마음을 가진 분은 극히 드뭅니다. 전부 한번 단기 선교 따라가 보고, 한번 더 가보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거기에 재미가 생기고 꿈이 생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도 발견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믿음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믿음이 좋고, 처음부터 교회생활이 재미있고 처음부터 사역을 열심히 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다 우연한 기회에 사역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에서 애정을 느끼고, 그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하다보니까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고 나의 은사임을 발견하고 그러면서 조금 폭넓게 교회사역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면서 열정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어느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열정의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열정을 주실지를 모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오늘부터 시작하는 사역 박람회에 그냥 스쳐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새로운 세계를 맛보는 계기가 될 지 모릅니다. 한번 둘러 보시고 마음에 드는 사역에 참여를 해 보시고, 그렇게 사역에 한발을 내 딛여서 오늘이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을 받게 되는 첫걸음이 되시는 그런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현명한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두번째 어떻게 우리가 능력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의 전도에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좀 현명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적상태를 보고 그들의 필요를 읽는 현명함이 필요한데, 바로 바울의 설교에서 우리는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을 좀 배워 봅시다. 자, 첫번째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상대방의 필요를 발견하고 빈 공간을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1. 상대의 필요를 발견하고 빈 공간을 활용하라
자, 바울이 아테네를 돌아보는 가운데 많은 신전의 제단들을 보았는데 그중에 특이한 것이 바로 ‘이름을 모르는 신들에게 바쳐진 제단’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 그리스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리스 신화가 만든 제우스니 포세이돈이니 하는 그런 신들에게 제단을 지어서 바쳤지만 그렇게 수 많은 신들을 섬기고도 안심이 안되는 겁니다. 혹시 우리가 어떤 신을 몰라보고 제단을 안 지어 주었기 때문에 그 신이 노하면 어떻하나 하는 그런 염려 때문에 바로 ‘이름을 모르는 신들에게 바쳐진 제단’이라는 것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공허감입니다. 그들의 그런 공허감이 느껴지시지요? 이 사람들은 소위 진리라는 것을 향해서 끝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끝없이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나오고, 그리고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나오지만 그런 학문이 그들을 영적으로 채워 주지 못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영적인 문제는 철학으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저희 Staff들간에 책을 읽는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지난 번에 고전을 읽고 느끼는 점을 잠시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읽었고, 최목사님은 플라톤의 공화국을 읽었는데 두 사람 모두의 결론이 뭔지 알아요. “야, 대단하다. 그러나 공허하다.” 그래요. 말은 굉장하고 뭐 그럴싸하게 설명을 하는데 답이 없으니 공허할 수 밖에요.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끝없이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가 듣고 싶어하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제단을 지어서 바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이 사람들의 필요를 본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현명하게 접근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제가 보니까 여러분은 참 종교심이 많습니다. 좋은 겁니다. 오죽하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단을 지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두려움이 안 없어지고,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고 그렇지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라고 접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면 영적으로 공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예가 어릴 때 입양되어 간 사람들이잖아요. 아주 갓난 아이때 미국으로 유럽으로 입양이 되어 간 사람들이 가서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잘 사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보면 스므살이 넘으면 많은 경우 친부모를 찾겠다고 돌아와요. 우리 생각에는 뒤도 돌아볼것 같지 않은데 말이예요. 왜 그래요? 사람이 자기 뿌리를 모르면 공허함이 채워지지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우리 육신의 부모가 그럴진데 하물며 우리의 영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인생이 풍족하게 채워질거라고 생각해요. 안채워지지요. 그러니까 채우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사상으로 채우려고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채우려고 하고, 뭔가 세상적인 목표를 이루어서 채우려고 하고, 그렇게 막 달리다 어떻게 되요? 고장이 나지요. 건강이 상하던지, 부부사이가 깨어 졌던지, 친구가 하나도 없이 외롭던지, 뭔가 이루어 놓은 것은 있는 것 같은데 밤이 되면 허전하던지.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들만의 빈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세상사람들에게 그 해답을 제공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안믿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목장에 오세요. 그러지 마세요. 이제는 목장이 다 알려져서 말타고 우유먹는 곳인가보다 하고 따라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아요. 이제는 가정 교회 안하는 교회들도 죄다들 구역대신에 목장이라는 이름을 쓰기 때문에 다 압니다. 아 물론 교회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은 괜찮지요. 지금은 거부감을 가진 사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대신 그들의 필요를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부족을 느끼는가를 살펴보고 그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줄 수 있으시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부관계가 조금 않좋아 보인다 싶으면,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까 당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죠? 그래요 그러니까 일주일 한번 정도는 모여서 다른 부부는 어떻게 사는가 얘기도 좀 들어보고, 집사람이 나한테 무슨 섭섭함을 느끼는가도 느껴보고 그래야 되요. 둘이만 있으면 몰라요. 여럿이 모여서 얘기하다 보면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한번 와 보세요” 뭐 이렇게 얘기하고 말이지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도해야지요.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뭔가에 문제는 있습니다. 두 사람이 너무 사이가 좋다싶으면, 그러면 자녀의 문제든지 뭔가가 있습니다. 그걸 포착해서 목장이 그 문제에, 더 나가서는 하나님이 그 문제에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제시해야지요. 그리고 접근할 때는 바울처럼 칭찬으로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불교믿는 분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도덕성은 높거든요. 그거 칭찬해 주고 시작해야지요. “아- 그거 우상이야.” 이러구 시작하면 안됩니다. 칭찬으로 시작하고, 그러면서 그들이 부족함을 느끼는 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렇게 목장에 초대해서 섬기면서 직접 대안이 되어 주시고 그렇게 해서 전도에 힘쓰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기회를 보아서 하나님의 손길을 드러내라
자 이렇게 칭찬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을 제시한 후 기회가 되었을때 사도바울은 26-27절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얼핏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오해도 많이 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한 혈통으로’라는 말은 번역이 잘못됐고, ‘한 사람으로부터’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의역을 하면 이런 말입니다. “그분은 한 사람에게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만드셔서 온 땅에 살게 하시고,” 아담에서 출발했다 그 의미지요.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 인류의 역사를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조금 더 이해가 쉽게 풀면 이런 뜻입니다.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 지고 사람들이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 하나님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떤 민족이 생기고 거기에서 살고 그러다가 망하고 또 새로운 민족이 생기고 하는 것이 다 하나님이 정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역사의 흐름을 죽 보면 누군가 역사의 주관자가 있다는 것이 안느껴집니까? 그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 의미입니다.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다구요? 여러분의 인생 지나온 것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태어나고 어떻게 살다가, 결혼하고, 그러면서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것을 넘어 지내오다가 지금 휴스턴에 와서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 어떻게 우연이란 말입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신의 인생을 어떤 손길이 이끌어 왔다는 것을, 즉 어떤 주관자가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지요. 백번 맞는 말이지요. 어려움 가운데서도 날 이때까지 이끌어 주시고, 내 인생을 주관하는 그분이 계시는 것을 모르고 어떻게 우연히 살고 있다라고 하느냐 말이예요. 그분을 무시하는 것도 유분수지요. 28절도 이런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본능적으로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소립니다. 간김에 더 나가 볼까요? 29-30절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겠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죄입니다. 자기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를 두고 난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빡빡 우기고 살면 언제까지 그 사람을 참아야 하느냐는 얘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나의 고집에 불과합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냥 내가 아니야, 믿을 수 없어, 안믿어, 이러구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만 고집부리시구요, 하나님께 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 영접 모임이 있는 날인데 오셔서 예수님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전도를 할 때는 기회를 봐서 안 믿는 분들에게 그런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나의 간증입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을 모르시는 분에게 예수믿어, 교회 나가자, 목장와라. 이러구 끌고 가시지 말고,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알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부모님이 한국에 떨어져 계신 분들, 자주 전화해서 예수님을 믿었더니 이런 것이 좋더라. 이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풀어주셨다. 그런 간증을 하면서 그 쪽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면 그거 바로 하나님이 해 주신 거예요. 그거 모르시겠어요? 하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느끼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편안한 인도자,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자 세번째 우리가 바울에게서 발견하는 것. 하지만 전도를 하다보면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마 29절부터 시작되는 이 말을 하면서 조금은 망설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리스인의 사상은 부활을 인정할 수 없는 철학체계거든요. 그러니 부활 얘기를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앞에서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도 심판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은 타협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전도하면서 타협할 것과 타협하지 않을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왠만하면 다 맞추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따라가지 말아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은 해서는 안되는 것 같아요. 그 다음은 삶을 따라가는 문제입니다. 믿지 않는 분 전도한다고 술집을 따라간다거나, 도박장에 따라간다거나, 아니면 예배 빼먹고 낚시를 따라간다거나 하는 것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분들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뭔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에 은혜를 받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그분들이 하는 것을 따라 가서는 감동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저희 아버지가 한국에서 오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받고 돌아가셨거든요.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서 말씀드리지만 저희 부친은 교회다닌다 그러면 쳐다도 안보던 분이거든요. 그런 분이 2년전에 여기에 와서 뭐에 마음이 열렸냐 하면 목장을 하는 모습이었어요. 전 오셔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며 사냐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눈도 잘 안보인다는 사람이 젊은이 들을 위해서 매주 밥을 한다는 것, 뭔가 당신들과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움직인 거예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려면 그들과 뭐가 달라도 다르게 사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정직하게 산다던가, 알 수 없는 여유가 있다던가, 그럴때 그분들이 예수님께 호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타협하지 않을 것 잘 지키고 전도하셔서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된다
마지막 남은 것은 32-34절에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보인 세부류의 다른 반응들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복음을 비웃고 거부하는 부류, 또 한 부류는 다시한번 듣고 싶다고 관심을 보이는 부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부류. 그런데 아마도 믿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몇몇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라고 하고, 그중에 이름도 두 사람을 듭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저에게 얼핏드는 의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가가 이 글을 적을 때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적었을까? 그는 믿는 사람이 적었던 이 아테네에서의 설교가 실패라는 의미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 실재로 주석책을 읽어보면 상당히 많은 분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확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곳을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의 전도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깨닫고 돌아 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곳 아테네에서와 같이 적은 수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 하나가 다 성령님은 역사였고 그로 인해서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아테네를 떠나고 난후 그 곳에 교회가 섯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도 아테네에 교회가 있다는 기록은 AD170년 자료에 처음 언급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이름입니다. 판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부인. 누가가 이 사도바울을 쓴 것이 AD62년 정도로 보이니까 이 아테네를 지나가고 난 후 10년정도 후에 쓰여진 글입니다. 만약 이 두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후 몇년 후에 슬그머니 사라진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 이름들을 누가가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10년후에 이 글을 쓰면서 누가가 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이후에 이 두 사람이 기억에 남는 무슨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아테네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다가 순교를 당했는지, 아니면 이웃 도시로 가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당시 기독교가 퍼지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 기억에 남아있는 두사람을 것이 바로 누가가 이 두사람의 이름을 적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고 우리가 전도하는 것에 실망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가끔 목장 현황판에 서서 거기에 적힌 숫자들을 보고 서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느 목장이 요즈음 바글바글하구나, 와~ 저 목자 분가 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잘하는 모양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지만 정말 수고가 많은 분들은 적은 숫자를 가지고 성실히 하시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저도 목자 하지만 숫자가 많으면 그 맛에 하거든요. 그런데 적은 수의 분들과 전도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분들의 수고도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안되어 속상하신 분, 왜 이리 목장이 부흥되지 않는가 낙심되는 분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의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땅끝은 여전히 있고 여전히 구원해야 할 사람은 많습니다. 전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왜 예수님 안오시나 그만 오시지. 뭐 아직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 애착이 많으시나. 그런데요. 어느날 예수님 믿고 확 변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요. 그런 사람들이 아직 저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아직 쟤도 안 돌아왔고, 아직 쟤도 안 왔고.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 해.” 하나님이 그렇게 안타깝게 울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애타게 찾으시는 그 분들 열심히 전해서 한명이라도 구원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철학과 우상숭배 그리고 복음
행 17:16-34 / 조재진 목사
우리가 선교의 대상을 농촌과 어촌, 아프리카 등과 같은 미개척 지역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곳에도 복음이 필요하지만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대도시 한 가운데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선교학에서는 도시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 또는 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도시를 복음으로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시에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도시를 복음화하는 것은 한 나라를 복음화 하는 길입니다. 또 우상숭배와 미신이 농촌이나 미개척지에만 성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와 철학, 예술이 발달한 도시 한가운데, 그리고 고도의 과학이 발달한 곳에도 우상숭배와 미신이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숭배나 미신이 미개한 사람들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 예술이 있는 대도시나 지식인들에게는 우상숭배나 미신이 없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우상숭배, 미신은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것입니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대 도시에도 우상숭배나 미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혹시 지식이 최고로 발달한 나라 미국에는 우상숭배나 미신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이나 록 음악, 마약, 사단 숭배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은 청소년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자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일본은 어떻습니까? 그 나라는 800만 귀신을 섬기고 있고, 온 나라가 우상문화에 빠져있습니다. 최고의 첨단 과학과 물질문명이 놀랍게도 우상숭배와 미신과 교묘하게 만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입니다. 어쩌면 일본은 첨단과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미신과 우상이 지배하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어떤 마을은 개구리 신을 섬기는데 마을 축제가 있는 날에는 모든 사람이 개구리 복장을 하고 거리를 행진합니다. 우리 나라 역시 우상숭배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100만에 가까운 역술인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아예 무당을 만드는 학원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점을 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인생을 맡깁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귀신점을 보고 있고, 컴퓨터에서는 부적을 팝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역술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없는 인간에겐 두 가지 힘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우상이나 미신의 힘입니다. 자기를 믿든지, 미신을 섬기든지 합니다. 무식하면 무식한 방법으로 유식하면 유식한 방법으로 미신에 빠져들어 갑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뛰어나도 미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천국이 올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말이 "테크노피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지식이나 과학의 발달이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질병을 완전히 정복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경찰서를 많이 만들고 경찰 병력을 늘려서 죄인들을 잡아 가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힘으로 인간 속에 있는 죄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죄인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인간의 죄가 없을 질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지식이나 과학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먹는 것, 빵으로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과학의 발달과 관계없이 인간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예술과 문화활동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 화려한 도시에 살더라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만나야 행복합니다.
철학의 도시 아덴과 우상숭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거쳐 아덴이라는 도시로 오게 됩니다. 아덴은 로마시대 당시 알렉산드리아, 다소와 함께 3대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덴은 철학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계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아덴은 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성지요, 중심지요, 수도였습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철학의 두 학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에피큐리어스 학파와 스토아학파가 바로 그들입니다. 스토아 학자들은 인생을 매우 경건하게 살고자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인생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을 통제하고 강한 훈련을 통해서만 참된 기쁨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에게는 금욕생활이 중요한 훈련 수단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에피큐리어스 학파는 일종의 비종교적인 유물론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좋은 삶이란 쾌락, 그것도 감각적인 쾌락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것이 바로 좋은 삶이다" 이들은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철학자들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이런 저런 방법들을 제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철학의 도시요, 문화의 도시였던 아덴이 우상으로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철학이나 지식, 문화활동으로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16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라고 말합니다. 당시 모든 문화와 지식이 중심지였던 아덴에 우상이 가득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아덴 사람의 숫자보다 우상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파르테논 신전만 해도 삼 만개의 우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을 섬겼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흥미 있는 사실은 바울이 본 우상들 중에 유독 바울의 눈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이름 붙여진 우상이었습니다. 23절에 보면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우상을 섬기던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 에게도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제사를 해야 했을까요? 아마 그들은 세상의 온갖 신들은 다 생각해서 명부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신들의 이름 뒤에는 또 다른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모든 신들보다 더 힘있는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들은 그 신비한 존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능력에 걸 맞는 이름을 지어 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알 수 없는 신"이라고 불렀고 그 신에게도 제사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아덴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가지 더 흥미 있는 사실은 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늘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철학에는 그리 큰 만족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화적인 혜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섭니다. "어디 새로운 것은 없나?" "뭐 재미있는 것, 자극적인 것이 없나?" "이게 도움이 될까 모르겠어"
이런 모습은 소위 말하는 메트로 폴리탄의 성격중의 하나입니다. 아테네든 뉴욕이든 서울이든, 심지어 부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유행입니다. 항상 새로운 유행을 찾아다닙니다. 머리 모양도 그렇고 화장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의 디자인도 늘 새 것을 찾습니다. 도대체 만족이 없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패션이 며칠만 지나면 온 거리를 매웁니다. 요즘에는 겨울연가에 나오는 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 옷의 디자인이 유행한다고 하지요. 그렇게 유행에 따라 움직여도 만족이 없습니다. 또 바꾸어야 합니다. 늘 새로운 유행만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마음이 분한 바울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가득한 우상을 어떤 마음으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슴은 아덴에 가득 찬 우상들을 보면서 분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아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들을 보면서 예술적인 가치나 건축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분노했습니다. 우상으로 가득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바울은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분노는 죄에 대한 분노요 우상에 대한 분노요 사단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회당이든 시장이든, 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상이 답이 아니다. 하나님 만나야 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의 분한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삶의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에 그에게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은 갈급함이 있습니까?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자녀를 보면서 영혼을 찌르는 아픔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보다 훨씬 실력 있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좋은 건물과 좋은 시설을 갖춘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영적인 영향력을 잃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과 같은 "분한 마음"의 상실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갈급함이 한국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요즘 교회가 힘을 잃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닌 것처럼 복음증거의 힘을 잃었습니다. 마치 천국과 지옥이 없는 것처럼 소망을 잃었습니다. 보십시오 왜 이 땅에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것은 죄를 보면서도 악한 영의 역사를 보면서도 영적 분노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적당하게 "문화의 한 현상이니, 전통이니" 하면서 그냥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얼마나 교활한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합니다. 1900년 전 바울처럼 누군가가 말해야 합니다. 아덴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분노한 마음으로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비느하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민수기 25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싯딤 지역에 머물게 되었을 때 모압의 왕이 바알신에게 제사하는 자리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여 음식을 먹고 바알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에는 염병이 임하여 이만 사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에 참석한 이스라엘 두령들을 죽이고,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었는데 한 어리석은 사람이 모든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미디안의 한 여인 데리고 자기 장막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지요. 지금 우상숭배와 이방 여인과의 음행 때문에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방여인을 데리고 들어왔으니... 분노한 비느하스가 그 사람을 따라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창으로 꿰뚫어 죽였습니다.
비느하스가 살인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 일이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민25:11에 보면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 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비느하스의 분노가 거룩한 분노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죄에 대해 분노하여 그 남자와 여자를 죽인 이 일로 인해 오히려 이스라엘에 임하는 심판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거룩한 분노를 가졌던 비느하스를 축복하여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분한 마음을 가지는 것,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 불신자들을 보면서 영혼의 아픔을 경험하는 것,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죄 때문에 분노해 보셨습니까?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고 바울처럼 분노해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철학과 다른 기독교 복음
바울이 분노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하면서 돌아다니자 18절에 보면 에피규리어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을 가리켜 말쟁이 라고 했습니다. "말쟁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보면 이야기꾼이라는 말입니다. 소위 "Sophist" 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여기 저기서 주워 모은 정보들을 엮어서 말합니다. 요즘에 방송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닌 사실입니다. 어떤 생각이나 사상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 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몰랐던 그들은 말쟁이 바울을 데리고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
19절을 한번 볼까요?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지금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이 지역을 아레오바고 라고 한다고 하지요. "아레오 언덕"이라는 이 말은 원래는 재판과 입법을 주관했던 의회의 모임 장소였습니다. 차츰 이 지역이 종교 도덕, 철학에 대해 논쟁했던 장소가 되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자유토론을 할 수 있었던 곳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꽃피운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이곳으로 데리고 가서 새로운 교에 대해 네가 말한 이상한 것에 대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에 대해 "새로운 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은 세상의 철학이나 세상의 종교와 견해를 전혀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은 기독교 복음을 자기들과 비슷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 너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있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 그래야 서로 비슷하지 않느냐?" 세상은 서로 비슷해지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자, 좋은 일을 하자고 말합니다. 기독교 복음을 자기들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 이것이 세상의 요구이고 사단의 전략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기독교가 휴머니즘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교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세상의 요구는 여러 종교중의 하나가 되라고 말하지만 세상의 요구와 기독교 복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기독교 복음은 생명입니다. 사람이 만든 철학과 종교, 윤리를 가지고는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내가 잘해서 구원받는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고 예수 그리스도도 필요 없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의 메세지
그렇다면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증거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두 가지 중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 즉 신관은 모든 인생관과 세계관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르고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님 모르면 지식과 관계없이 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인생 최대의 과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을 세 가지 주제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고 온 인류와 우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창조론적인 신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부인하더라고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70억 세계인구가 다 하나님은 없다고 해도 그래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니체는 죽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온 땅과 세계역사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고,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우상과 대조되는 성격이지요.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서 한 곳에 세워둡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못질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절을 하고 복을 달라고 합니다. 우상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어떤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 속에 들어가 앉아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나무나 돌을 깎아 이상한 모양을 만들었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뭔가 부족해서 사람들의 헌금이나 사람들의 제물을 받아먹고 사는 그런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로 하나님을 옮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며 인간의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28-29절은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힙입어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에 대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요1:14) 그리고 예수님이 인간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선포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겐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이 아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또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실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즐겨들은 옛날 이야기나 전설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깁니다. 어떤 종교나 철학도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기롱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네 말을 다시 듣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저와 여러분들은 이 말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것이 믿어지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이 믿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역사는 지식이나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사실이 내 안에 믿어지면서 놀랍게도 우리 안에 있는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믿어지면서 우리는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3:5에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고 또 요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31절을 보면 바울은 긴 설교를 마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허물지 않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이상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에 의하면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만나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흑암을 권세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혹시 아직까지 방황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