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42
8월7일[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vVbCNE7SsU
[의정부교구 백병훈 요셉 신부(덕정성당 협력사목)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 딸만 살려주신다면>
가끔씩 아주 어려운 부탁을 누군가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청원은 죽기보다 싫지만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몇 번이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어렵게 부탁합니다.
어떤 경우,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힘들겠네요.”
이런 말과 함께 거절당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네요!”
“그게 어떤 부탁인지 알고나 하세요?”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 역시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마귀에 걸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몹시 시달리고 있다’는 여인의 말을 통해, 그리고 처절하게도 간청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귀에 시달리는 모습, 생각하기조차 싫은 모습입니다. 한 사람 안에 마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립니다. 몇 시간이고 발작이 계속됩니다. 입에서는 하느님을 모욕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괴상한 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라도 하시려는 듯이 일부러 뜸을 들이십니다. 일부러 냉정한 모습으로 대하십니다. 묵묵부답으로 응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이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다 해도 여인은 상관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여인은 길길이 뛰고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딸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꽤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 앞에 크게 낙담하고 즉시 돌아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심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이방인들을 ‘개’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 텍스트에서는 ‘개’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강아지’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표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오직 딸만 생각합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 돼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을 향한 투철한 믿음, 철저한 겸손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던 가나안 여인은 백인대장과 함께 큰 칭송을 받습니다. 교부들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확신하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와 똑같이 여기는 겸손...”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Q3eftS-byA
++++++++++++++++++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능력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며
기적의 은총을 주기를 거부하는 모습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하며 희망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가나안 부임을 칭찬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부모는 자신을 낳았으면 분명 자신을 사랑할 것이란 믿음이 있고, 또 자신을 낳았으면 키울 능력이 있는 분이란 믿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낳는 것인데 그런 사랑이 있다면 키울 능력도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자는 사랑이셔야 하고 능력자셔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그래서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은 그 능력과 함께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다 사랑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사탄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폭력이나 속임수 등을 써서 성공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공한 이들 중에 많은 수는 사랑이 커져서 능력도 커진 경우가 많습니다.
2014년 이전 현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대표 박지형은 중소기업의 기업가로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회사가 20~30억의 매출로 그리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2024년 위장암과 판막 전이로 4기 진단받았고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6개월 뒤에 어렵게 가진 딸이 태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딸을 위해 무언가라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돈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보험회사였습니다. 자신은 6개월 뒤에 죽을 것이 확실하니 6개월 치 이자를 제하고 사망보험금을 미리 달라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 청에 보험회사 직원들이 몰려와서 조사해보고는 정말 보험금을 주었습니다.
보험금이 생기자 아내와 딸이 먹고살 수 있는 더 큰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줌줄을 차고 그는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2~3년 뒤 복막을 어찌할 수 없지만, 위는 절제할 수 있어서 수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암 말기 환자로 백 차례가 넘는 항암을 맞았습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그렇게 그는 10년 만에 부동산만 600억이 넘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이전에 하던 스크린골프회사까지 합치면 약 800억에 가까운 자산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모든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 하나씩 가지게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의 이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자 능력도 향상했습니다. 박지형 대표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서 이전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모든 사람을 연결하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연결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능력의 향상 없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데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런 경우 자녀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녀를 방치하거나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자녀를 많이 낳으려고 하는 마음은 또한 능력의 향상도 가져옵니다. 이것이 혼자 살거나 많은 자녀를 키우며 살거나 결국 나이가 들면 재산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동기가 없으면 일도 하기 싫어집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 합시다. 그러면 더 큰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린 브로커비치도 생각해 봅시다. 영화로도 유명한 이 실화는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를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쳤던 PG&E에 대한 분노,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모성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96년에 3억 3,300만 달러의 합의금이 받아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직접 소송 합의금이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을 키워줍니다. 그리고 이는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자존감을 가지게 하고 그 자존감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받아 놓은 날은 꼭 오기 마련입니다.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내일이면 돌아옵니다. 남은 일정 잘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여행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던 둘째 아들을 큰 사랑과 자비로 기쁘게 받아들였던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두 팔을 벌려서 환영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희망이며,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어느 성당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성당에 다닙니까?’라고 누군가 물으면 저와 비슷한 대답을 할 겁니다. 지금 성당은 '2111 Camino Lago Irving TX 75039'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2017년에 완공했습니다. 그 전에는 창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창고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성당 전에는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당은 건물과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당에 주보성인을 정해서 공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당은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다운타운 성당이 팔렸어도, 창고 성당이 팔렸어도, 언젠가 아름다운 지금의 성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계속된다면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옥중에서 쓴 서한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짝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품과 비슷하지만 가짜입니다. 예전에 ‘비가 올 때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가면 짝퉁, 가방을 가슴에 품고 가면 진품’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진품인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진품인 신앙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따르는 것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세례는 받았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짝퉁인 신앙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는 짝퉁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는데, 요즘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진품 신앙은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품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자캐오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식탁에서 흘린 것은 개도 먹는다며 주님께 자비를 청했던 이방인여인처럼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품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5,21-28: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가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게 하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신다.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인의 믿음을 더 크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 한다.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모호합니다. 가나안 부인이 뒤에서 부르짖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지도,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가나안 부인을 강아지라고 부르시는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 전체 안에서 이 단락을 비추어 보면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장의 족보에서부터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또 마태오 복음서에서, 아기 예수님을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들은 동방 박사들입니다. 예루살렘이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죽이려고 할 때, 먼 동방에서 온 이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그분께 경배합니다(2장 참조). 그리고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기에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만으로 충분히 낫게 하여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결국 그 여인은 자신이 청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강아지도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병행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당신 능력의 한 조각을 나누어 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이 이방인들은 구원의 한몫을 누리게 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이방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이방인들은 모두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지만,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2) 이 이야기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 진주’는 ‘복음, 성사’ 등을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 말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상 “줄 수 없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강아지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개들’은 주로 ‘들개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강아지들’은 집에서 기르는 개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자가 마음의 상처를 덜 받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바꾸신 것 같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묵시 22,14-15)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묵시 21,6ㄷ-8)
우상 숭배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3) 그러면 우상 숭배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습니다. 자기가 섬기고 숭배하는 우상을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은 채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씀은, “자녀들의 빵을 먹기를 원한다면, 우선 먼저 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로도 해석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자녀가 되면 됩니다.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이라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4) 예수님께서 처음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청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태도로) 예수님께 청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상 위치로 끌어내린 모독죄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는 말씀은 유대인들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의 양’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여자의 말은, “제가 강아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의 겸손한 고백과 회개와 변화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믿음 없이 왔던 여자가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록 딸의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어떻든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회개했고, 변화되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 청했던 은총도 받았고, 청하지 않았던 더 큰 은총도 받았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은총이고, 가장 중요한 은총입니다.
=====================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때때로 성경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당혹감을 줄이고 읽는 이가 받을 충격을 조금이나마 약하게 하고자 “강아지”로 표현하였지만,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이 ‘자녀’ 또는 ‘양’이라면, 가나안 여인, 곧 이방인을 가리킨 “강아지”는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개’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로 지칭되었고(이사야 예언서 40,11 참조), 이방인들은 대단한 혐오의 대상으로 흔히 ‘개’로 불렸습니다. 개는 아무리 해도 개이고 양은 어떻게 해도 양입니다. 개가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그분의 개입 없이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방인인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개’입니다. 그런데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개가 양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당혹스러운 정황 설정과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처지를 가나안 여인과 “호되게 마귀가 들린” 그의 딸로 지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시간으로도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도 베푸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전까지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들을 수 없었던 놀라운 말씀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곧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방인에 대한 멸시와 그들의 불결함과 무자격성에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강조하려고 오늘 복음은 극적인 대비와 반전의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엄연히 차별이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 거룩한 이들과 죄인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늘 대단히 끈질깁니다. 스스로 열심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일수록 자신은 선별되고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간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차별을 멀리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별과 민족, 나라, 종파, 소속, 학연, 지연, 빈부, 장애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인이 볼 때 어긋난 신앙을 지닌 사람을 상징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 참된 신앙인의 모범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애타게 구원을 청하여, 그것을 아무런 자격 없이 거저 받았음을 잊지 맙시다.
=====================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졌던 체험을 다시 하게 되리라 상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야에서 누린 바 있던 하느님의 자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화답송도 독서에 이어지는 주님의 신탁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바오로 사도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코린토2서 12장 9절)
=====================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그 누구도 원하는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대단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가나안 입성을 코앞에 둔 채 다시 물러나 사십년을 꼬박 광야를 떠돌아야 했으니까요.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이 이렇게 꼬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하느님의 힘을 믿지 못했던 이스라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그들의 아둔함이 딱하고 안타깝지만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는 주님의 결정에 한편 고소하기도 합니다.
‘된통 쓴 맛을 봐야, 정신 차리지’ 싶으니까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약속 그분께서 이끌어 가시는 가나안 땅, 그 곳을 향해 우리는 나아가고 있습니다. 믿으시나요? 그 좋은 약속 그 좋은 곳이 눈앞에 선 한데도 돌아서 그분의 방법과 뜻과 이끄심에 투덜대고 있지 않나요?
문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간다면서도 지금 내가 이겨야 할 유혹 ‘아낙의 후손들’의 막강한 체구와 힘에 겁을 먹는 일이라 싶습니다. 세상은 아말렉족, 히타이트족, 여부스족, 아모리족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산악 지방에 자리한 그들은 막강한 힘으로 우리 앞에 버티는 바로 그 장벽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그들은 모두 키가 크고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기만 합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는 명령에 멈칫하여 다른 방법을 찾고 그분께서 주신 계명을 어떻게 따를 수 있냐고 머리를 굴리는 이유입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정말 메뚜기같습니다. 절대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는 힘 쎈 용사들은 세상에 산재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길 사람을 고르지 않으십니다. 혼자 힘으로 이긴 사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메뚜기처럼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위해 싸우겠다 하십니다.
우리가 힘없고 가엾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에 돕고 살피고 함께 하여 세상의 권세와 싸우고 세상의 악을 이기고 세상의 편견에 도전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해서 이 어둔 세상이 모두,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함께 하시는 그분’을 알아 돌아서게 하시기를 꿈꾸십니다.
메뚜기같이 약한 우리들에게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 같고 도무지 가당찮은 그 엄청난 일들을 하라고 부추기시고 할 수 있다고 힘을 주시며 해 내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까닭입니다.
이기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메뚜기로써 족합니다. 그 분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우리는 메뚜기처럼 작고 보잘것없어야 합니다.
높아지기는커녕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허약한 우리이기에 그분의 사랑은 곁을 떠나지 못하시고 내내 눈을 떼지 못하시고 돌보십니다. 이보다 큰 은혜는 없습니다.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큰 성서인 자연의 이치를 더 잘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대한 이해도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나안 여인에 대한 태도는 예전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 중 하나였습니다. 딸의 병고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가나안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15,22)라는 소리를 못 들으시지는 않으셨을 텐데도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15,23) 그런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제자들은 그 여인의 성가심에 시달리다 귀찮아서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15,23) 하고 여쭙니다. 그런데도 고작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말씀이 비수가 되어 그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팠으리라 짐작합니다. 이해받지 못한 설움에 이방인이라는 거부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물러서기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서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15,26) 하고 마지막 시험의 문제를, 질문을 그녀에게 던집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깊은 절망의 시간과 자리를 견디어 낼 때만이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세상에서 참으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 될 것이며 참으로 참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그녀는 개 취급받아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을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히 그런 무시와 맞설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 따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을 강아지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더 처절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원망보다는 오직 자녀의 치료를 위해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라고 절규합니다. 언감생심이란 말뜻처럼 감히 겸상兼床은 바라지도 않으며 다만 주님께서 자녀들과 잡수시다가 혹여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족하고 족합니다, 는 그녀의 진솔한 마음을 예수님은 듣게 됩니다. 당연히 밥상에서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자부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낮춤과 신뢰에서 솟아 나온 의탁의 마음 소리를 듣고서야,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서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 28)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런 것을 기대하고 갈망하면서 그녀를 모질게 대하셨고 상처받을 말씀을 하셨지만, 이 또한 그녀의 마음 깊이 숨겨 내재된 보물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의 의도이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순간은 단지 그녀 딸의 치유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도 구원을 받았으며, 이미 천상의 식탁에 앞서 이 땅에서 말씀의 식탁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고 관심을 쏟고 은총의 치유와 기적을 보고서도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느꼈을 실망과 안타까움을 이 이방인 여인에게서 예수님에게서 인간적인 위로와 희망을 보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들어 깨우려는 예수님의 극단적인 교육 방법이 마침내 그녀를 통해 드러난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빠 하느님께서 그녀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 이끌려 온 그녀를 통해 하늘나라의 구원 의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15,28)
“주님, 저희 또한 가나안 여인이 당신에게서,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하신 칭찬의 말씀이 저희를 흔들어 깨웁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저희 또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은총이며 사랑의 안배임을 감사하면서 살아감으로써 ‘너희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칭찬받는 오늘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텍사스대학교 제임스 패너베커 교수 등은 개인 블로그 3만 5천 개와 학생들의 에세이 1만 5천 개를 분석해서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들은 질병, 외로움, 신경증, 우울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반면 긍정적인 단어를 다채롭게 구사하는 이들은 직장생활과 여가 활동 등에서 성실하고 적극적이었으며 당연히 몸도 더 건강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연구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이 1950년에 입회했던 수녀 180명의 입회 청원서를 분석했습니다. 이 청원서에서 긍정적인 단어를 별로 쓰지 않은 수녀들 가운데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34%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 ‘매우 행복한’, ‘정말로 기쁜’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한 수녀 중 85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무려 90%나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부정적인 말, 절망적인 말을 줄이고 긍정적인 말, 희망의 말을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모두 공짜라는 것입니다. 좋은 단어라고 해서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공짜이기에 기왕이면 모두에게 유익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말과 희망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도 커집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려고 합니다. 불평불만이 많아지고, 따라서 삶에 대한 기쁨도 줄어듭니다.
어떤 가나안 부인이 와서 마귀가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와서는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말하면서, 여자를 쫓으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는 것처럼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여인의 믿음이 대단했습니다.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로 낮추면서 자기 믿음을 훌륭하게 드러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예수님께 믿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야 믿음이 커질까요? 아닙니다. 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커지게 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내고 맙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환히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마태 15,21)고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요?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예수님을 안내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튼튼한 만큼 충만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 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어 간사한 마음을 다스리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믿음>
마태오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나의 믿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내가
작아질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커집니다
나를
낮출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깊어집니다
나를
비울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채워집니다
내가
여릴수록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은
굳건해집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처음 이태리에서 언어를 배울 때 힘든 것은, 이태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혹시라도 나의 문법이 불완전하거나 틀릴까봐였습니다. 특히 유럽 언어권에서 온 사람들은 금방 금방 이태리어를 배우고 말도 빨리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자꾸 뒤처지는 느낌이 들고 주눅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학 초기에는 말수를 줄이고, 다른 사람들의 말만 경청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그들이 하는 이태리어를 들어보니 그들 역시 문법적으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사 변형도 틀리고 전치사도 완전하지 않은데 그들은 자신들이 부족한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언어를 쓰고자 시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저는, 제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많이 말하려 노력하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화를 주도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많이 듣는 조언은, “틀릴까봐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해라”라는 것입니다. 즉,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시도해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고 몸으로 그 언어를 체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굳건한 마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딸의 완쾌를 청하는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은 유대인들과는 원수처럼 지내던 이방인들의 지역이었으며, 당시 유대인들은 이들을 주로 강아지 혹은 돼지에 비유할 정도로 혐오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여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즉 이 비유 안에서 자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고 빵은 구원을, 강아지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거절은 다소 냉정해 보이고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언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이방인들에게도 손을 내미시고, 특별히 병자와 같은 약자들에게 헌신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즉,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강아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멸시를 받는 처지에서도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앞에서 타인의 시선, 개인의 부끄러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는 그저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분명하게 거절을 당했음에도, 이를 참고 견디어내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전히 자신의 믿음을 드러낼 때 성숙합니다. 그리고 거절을 당한 것처럼 보이고 당장 자신의 손에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믿음이 변하지 않을 때 신앙은 견고해집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가나안 여인의 신앙의 견고함은, 구원의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엎드려 청하는 겸손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모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신앙인의 모범, 주님께 바라는 것을 인내로 성취하는 신앙인의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적인 어려움 앞에서 하느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에 좌절을 느끼며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공생활 중에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결코 부모의 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의 말에 성실하며 언제나 부모의 도움과 사랑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께 아무런 의심 없는 확고한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적 상황과 관계없이 온전히 자신을 겸손하고 항구하게 내보이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서 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실천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
-기도가 답이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31,10ㄹ)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사제들은 물론 믿는 어른들은 세상의 소리에 예민해야 하겠습니다.
“어른의 위로는 고요해 보이는 세상 속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다산>
“세상 모든 것은 평온하지 않았을 때 소리가 난다.”(당송팔대가 한유의 송맹동야서>
어제 수도사제답지 않았던 언행을 심히 부끄러워하며 회개합니다. 솔직히 말해 깊이 들여다 보면 겉은 화려하고 빛나는 천국같아도 안은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입니다. 작열하는 불볕더위에 기후위기를 실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기도의 끈을 붙잡고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분들을 대하면 숙연해 집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류가 맞이하는 온갖 불행과 재앙의 궁극의 원인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잊은 데 있습니다. 새삼 기도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어디서나 두손들어 기도하라 눈들면 하늘이요 직립인간입니다. 작년 8월 광복절부터 시작한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7창”이 취침전, 기상후 지금도 계속되니 직립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보이는 희망이 인간이요 자연이고 궁극의 희망이자 미래가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잊으니 인간도 자연도 잊혀져 가고 병도 깊어져 갑니다.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자연을 버리니 자연은 인간을 버립니다. 소멸되어가는 지방과 시골의 무수한 빈집들을 보면서 점차 조화와 균형을 잃어가는 나라의 앞날이 심히 우려됩니다. 어제 매달 날마다 특별히 미사를 봉헌 부탁하는 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지옥같은 세상에서 기도의 끈을 잡고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는 분입니다. 온통 심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기도같은 내용의 편지 중 몇 구절을 인용합니다.
“제가 요즘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면서 정말 인생이 별거 아님을 느낍니다. 신부님께 편지 올리면서 좀 정리가 됩니다. 언제까지 누워서 허우적댈 수만은 없지요. 동네에서 아파계시는 사모님이 그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었습니다. 그 많은 돈을 다 놓아두고 빈손으로 가는 걸 보니 더 무서웠습니다. 딸은 필요한 것을 사달라고 카톡 넣으면 그래도 꼭 사서 놓고 갑니다. 직업이 있고 그래도 믿을만 하니까 부탁을 하는데 그도 미안합니다. 이젠 제가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저를 살려주세요.” 어쨋거나 신부님, 남의 기도하다가 제몸이 망가지는 줄 모르고 살고 있으니. 그래도 제가 죽기전까지는 좋은 일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말그대로 고해인생입니다. 고해인생중에도 구원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의 끈, 믿음의 끈, 하느님의 끈을 꼭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 축제인생을 살려고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자매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닮은 분입니다. 가나안 여자의 탄력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겸손한 기도가 정말 감동적입니다. 불퇴전의 기도의 전사를 연상케 합니다. 주님과 기도의 싸움이 전개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니 참 냉정합니다. 제자들이 한마디 거들자 재차 말씀하시는데 정말 너무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예나 이제나 세상은 길 잃은 양들로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길 잃는 자본주의 문명이요 길 잃은 각자도생의 세상입니다. 갈 길의 방향을, 희망을, 빛을 잃고 뿌리없이 표류 방황하는 병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다음 재차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간청의 기도입니다. 가나안 여자와 주님의 대화내용이 점입가경입니다. 결코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기도의 전사, 가나안 여자입니다. 그토록 주님께 대한 신뢰가 깊었던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기도가 겸손의 절정입니다.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흔쾌한 항복 선언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합니다. 가나안 이교 여자의 믿음이 참 놀랍습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인류의 보편적 감동의 언어가 이런 믿음임을, 정말 부러워할 것은, 주님께 청할 것은 이런 큰 믿음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감동케 하신 가나안 여자의 순수하고 진실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임을 입증한,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사람, 가나안 여자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간청의 기도에 응답됨으로 드러나지만, 또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 전능이 드러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젊고 건강하고 힘있을 때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건강에 찬양과 감사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제 좋아하는 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저절로 찬양과 감사입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찬양과 감사의 양날개를 달았을 때 하느님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노니는 영혼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양으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 감사로 인생을 끝낸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가 고단한 광야여정중의 우리에게 참 좋으신 하느님을,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먼 곳에서 와 광야의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우리 하느님께 나아가자. 기쁨으로 환호하고,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오늘 지금 여기서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연옥같기도 하고 지옥같기도한 고해인생중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우울과 슬픔, 고통을 말끔히 털어내고 노래하고 춤추며 찬양과 감사의 축제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시며 도와 주십니다.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예레31,13ㄴ).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식의 영원한 사랑>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오늘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영원한 사랑’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순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인데 이 영원한 사랑에는 달콤한 것만 있지 않고, 벌로서 좌절을 주실 때도 있으며, 깨우치시고자 큰 고통도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벌도 사랑이요 고통도 사랑이라는 말이고, 사랑하기에 벌을 주시고 사랑하기에 고통을 주시는 거라는 말이며, 더 나아가서 구원을 위해 벌을 주시고 구원을 위해 고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또 이런 얘기도 되겠습니다. 영원한 사랑은 순간을 사랑하지 않고 영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한순간도 무관심한 적이 없고 미워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에 비해 저의 사랑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영속적인 사랑이 아님은 물론이고 무관심하거나 미워한 적도 많은 사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닮을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미워하며 사랑할 것입니다.
미워하다가도 사랑할 것이고, 미워하다가도 다시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포기했다가도 다시 사랑할 것입니다.
영원히 무관심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 식의 영원한 사랑이고 내 식의 영원한 사랑일 것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것이다."(마태15,28
<흔들리지 않는 믿음!>
오늘 복음(마태15,21-28)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자는 이방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여자가 나와 예수님께 소리를 지릅니다. 이 울부짖는 소리를 시작으로 가나안 여자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이렇게 이어집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15,22)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15,24)
"주님, 도와주십시오."(15,25)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15,26)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15,27)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15,28)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이 선포되는 바로 그 시간에 가나안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여자와 예수님과의 대화 안에 머물러 봅니다.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던 가나안 여자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당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구원으로부터도 외면 당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이방인 여자인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을 바라봅니다.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불편한 말 한마디를 듣거나, 크고 작은 시련 앞에서 흔들리는 나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자는 강한 무시, 곧 강아지(개) 취급을 당했는데도 예수님께로 향한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이 자신의 딸을 낫게 합니다.
'지금 나의 믿음을 바라봅시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오늘 복음은 ‘가나안 부인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마귀 들린 딸의 어머니인 가나안 여인은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렸습니다.”(마태 15,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 제자들마저도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아니 거부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참으로 착잡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침묵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때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 더 예수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그야말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또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 하시며 또 다시 냉혹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욕과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 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결코 단순히 거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침묵’은 가나안 여인의 갈망을 깊게 하였고(아우구스티누스), 여인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야말로 그분의 침묵과 냉대 속에는 당신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말없이 ‘침묵’으로 풍랑 속에서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지만 끝내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침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골고다로 끌려가시지만 끝내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아멘.
------------------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의 침묵 앞에서 견고해지게 하소서!
거부당함 속에서도 새로워지게 하소서!
더 큰 소망을 품고 끝없이 간구하게 하소서.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놀라운 사랑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아멘.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크구나."
(마태 15, 28)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또한
우리가 지나가야 할
여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식을 향한
진심어린 기도가
바쳐지고 있습니다.
아픈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우리 삶에는 기도가
전부입니다.
우리의 무기력과
약함으로 주님께
다가서게 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무기력을 우리는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찾으려 했던 것은 분명
참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믿음의 길은
치유의 유일한
길이 됩니다.
믿음은 서로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믿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위로하며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서로를
살립니다.
몸과 마음을 낮추는
가나안 부인의
겸손한 믿음에서
우리의 길을 되찾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진정한 치유이며
새로운 창조임을
예수님에게서
만나게 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