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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인 약력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시인이자 철학자.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화여대 철학과 및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 박사 학위 논문은 《니체와 차이의 철학》.
시인 최승자가 진은영을 두고 “드디어 나를 정말로 잇는 시인이 나왔다”고 말함. 정치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조화 실험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 책의 첫머리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을 최승자에게 헌정했다.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수상경력
2022 제24회 백석문학상
2013 제2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2013 제15회 천상병 시문학상
2010 제56회 현대문학상 시부문 - 《그 머나먼》
2009 제4회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철학 책
《들뢰즈와 문학-기계》(소명출판, 2002) : 고미숙 등과 공저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그린비, 2004) ISBN 89-7682-939-5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2007)
《코뮨주의 선언》(교양인, 2007) : 이진경 등과 공저
《문학의 아토포스》(그린비, 2014)
진은영 시모음 1
방법적 회의 / 진은영
너는 못 믿을 테지만,
동상이몽은 아름답다
너는 전나무의 보랏빛 꼭대기를, 나는 교회의 흰 첨탑을 사랑한다
다정히 누운 댐 위로 물이 차기 시작하면 우리는 함께 잠길 거다
이 삶은 어리석게도 금잔화를 망치로 내려친다
너는 못 믿을 테지만
별이 우리 입속으로 달콤하고 어둡게 떨어진다
죽은 쥐와 고양이의 부패한 몸에서 흘러나온 녹색 웅덩이
취객이 남긴 슬픈 웅덩이에 우리가 누웠을 적에
너는 못 믿을 테지만
딱총나무 열매가 너의 눈을 저격한다
만일 가을까지 살아 있다면
들장미들아 너희의 가시를 밤의 부드러운 목구멍에 꽂아 넣으렴
우리는 별과 죽음을 교환할 것이다
어느 그림 속
붓꽃 가득 핀 꽃밭에서 갇힌 한 사내가
부서진 배의 노처럼
두 팔을 휘젓는다
우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그가 될 것이다
충족이유율 유감 / 진은영
이유 없이 내 심장ㅡ 바다 한가운데 혼자 떠도는 빨간 튜브
이유 없이 이를 기다렸다 철교 위에서, 약국 앞에서, 대전차 밑에서
이유 없이 많은 이를 남몰래 미워했다
바람이 내게 종이 나뭇잎을 날려 보낸다
이유 없는 열두 개의 길을 담은 여행 가방처럼, 진창 위에 신발
이유 없이 풍선처럼 날아가고 싶다. 한 줄의 문장에 매달려
이유 없이 부자들은 돈을 벌고 기계들은 팔다리를 휘감으며 돌아가고
이유 없이 갓 구운 파이처럼 콘크리트 천장들이 부서지고
이유 없이 빨갛게 젖는 어린이날 솜사탕
이유 없는 슬픔이 시냇물처럼 졸졸 그들의 생을 따라갔다
아이와 노인, 여자와 남자, 모든 색의 개와 고양이를
이유 없이 무(無)의 금 밖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색칠 공부
이유 없이 맵시 있게 사라지고 싶어서
이유 없이 충분한 이유의 입속에서 다시 나는 태어났다
이유 없이 모든 곳에 너무 늦게 도착하는 이유들이
모두 잠든 한밤의 정원에서 빛난다 야광장미가시처럼
이유 없이ㅡ
인식론 / 진은영
호랑이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요
작은 나무 의자에 어떻게 앉게 되었는지 몰라요
언제부터 불행을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정원사가 가꾸지 못할 큰 숲을 바라보듯 말이죠
언제부터 너의 말이 독처럼 풀리는지 몰라요
맑은 우물은 여기부터
하나,
둘,
셋,
이 낡은 의자에서… 언제쯤 일어나게 될는지
몰라요 나의 둘레를 돌며 어슬렁거리는 녹색 버터의 호랑이들
대체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
점 / 진은영
데카르트의 점
폐곡선 안의 점
아무리 보아도 넓이를 가진 이면지가 되지 않는 점
유일무이한 점
너의 콧등 위의 점
박하 잎 가득 담은 양가죽 주머니를 쥐고 하얀 하늘로 달아난 흰 올빼미의 발톱 같은 점
내가 사랑하는 권태로운 점
우주의 콧속에 떠도는 별의 후추씨
가벼운 재채기같이
네 얼굴 신비한 기하학의 하얀 무화과
글 쓸 자유 / 진은영
우주 속에 같은 장소는 없다
심장⸺ 하루하루 다른 색으로 변해가는 과일
우리가 서로를 포기했던 곳
파란 손잡이 가위를 써 봐, 종이를 자를 땐
기분이 좋아
잘못된 질문에 괄호를 친다
【헛된 대답들은 우정으로 간직하자구】
후설은 말했다 에포케, 라고
몰라도 된다 풀로 붙인다 오려도 된다
텅 빈 가방을 들고 있다
뭐가 안 들었길래 이렇게 무거운 거야
【지저분하게】 풀로 붙인다
【삐뚤빼뚤】 오려도 된다
【그대로】 남아있다⸺ 피 묻은 휴지처럼
그날 / 진은영 (1970~ )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놓았다
멸치의 아이러니 / 진은영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 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 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짓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하나 골라내곤 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 달 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는 반찬 칸을 뛰어넘어 언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고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 뚜껑을 넘어 흩어져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斜視)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인공호수 / 진은영(1970~ )
죽은 식물과 동물의 냄새가
내 얼굴에 배어 있다
조금만 햇빛을 쬐어도
슬픔이 녹색 플랑크톤처럼
나를 덮는다
쓸모 없는 이야기 / 진은영
종이
펜
질문들
쓸모 없는 거룩함
쓸모 없는 부끄러움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
너에 대한 감정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자비로운 기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 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죽은 향나무 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무질서한 이야기들 / 진은영
"네 멋대로 자고, 담배 피우고 입 다물고, 우울한 채 있으려무나"
출처를 잃어버린 인용을 좋아해
단단한 성벽에서 떨어진 회색 벽돌을 좋아해
매운 생강과자를 좋아해
헐어가는 입과 커다란 발을
끊어져 흔들리는 철교의
빨갛게 녹슬어가는 발목 아래서나
썩어가는 두엄지붕들 위에서
저 멀리
평원에서
들소의 젖은 털 사이로 불어오는
달착지근하고 따스한 바람을
손가락으로 좋아해
아니라고 말하는 어려움을
모든 습작들을 좋아해
서툰 몸짓을
이사 가는 날을 좋아해
죽은 사람의 아무렇게나 놓인 발들의 고요를
그 위로 봉긋하게 솟은
공원묘지에 모여든 초록 유방들
산 자의 기침과 그가 빠는 절망의 젖꼭지를
좋아해
그러나 꿀과 눈이 섞이는 시간을
너의 얼굴에서, 목에서
허리에서
얼음 같은 파란색 흐르는 시간을 좋아해
우리가 타버린 재 속에
함께 굽는
마지막 청어의 탄 맛을
우주의 옷장 속에서 / 진은영
옷장 속에서 사랑을 했네
하늘의 흰 무릎이 내려와
땅의 더러운 무릎에 닿았네
간지러워 나무들은 재채기했네
가슴이 부끄러워 두 개의 언덕으로 솟아났네
놀라서 구름은 달아나고
아름다워서 웃음이 흩어졌네
아아 너무 웃어 비가 내리네
하얗고 더럽고 무서운
알몸으로 나는 쏟아졌네
흐르는 별들처럼
밤의 깨진 술병 속으로
얼굴 위로
텅 빈 옷걸이들 흔들리네
청혼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나는 도망 중 / 진은영
머릿속에 놓인 누군가의 일기장
펼치면 한 줄도 씌어있지 않다
무기력의 종이 위에
나는 따스한 손바닥으로
펜을 쥐었어, 부화시키려고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의 알들을
그거 알아? 나는 생쥐가 파충류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이 별이 내 별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내가 남자인 줄 알았어
그거 알아? 나는 펠릭스를 훔쳤습니다
그거 알아? 슬픔이 하느님보다 힘세다는 거
그거 알아? 계산이 잘못 되었어
그거 알아? 너는 텅 빈 목욕탕에 남겨졌어
그거 알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이 찾아왔어
그거 알아? 죽은 친구의 소식을 가져온 우편배달부를 위로했어
그거 알아? 노른자가 깨졌다 식탁 위에서
나는 단단히 살아있다! 잘 익은 간처럼
불안의 형태 / 진은영
낡은 태양이 창유리에 던지는
여섯 번
무감한 입맞춤
그리고 문득
일요일이 온다
죽은 연인의 흰 목을
마지막으로 만질 때처럼
서먹하게
심장 안쪽으로
뒷걸음치던 누군가
피에 절은 팔꿈치로 치듯이
천장에 매달린
하얀 도기인형이 떨어진다
빛에 활짝 벌린
천진한 튤립 꽃잎 위로
느린 오후
술과 피 섞인 물에 잠겨 있던 생각 하나
희미하게 자라난다
세계의 무성한 끝을 향해
물속에서 / 진은영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노을 / 진은영
하늘이 저기 있다
입은 채로 자신의 나일론 치마를 불태우는 여자처럼
벽에 걸린 그림 속에는 전나무의 녹색 바늘, 옥수수알의 노란빛이
눈을 찌르는 오후가 있다
불꽃, 너는
내부에 젖은 눈동자가 달린 동물 하나를 키우고 있다
사랑의 전문가 / 진은영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오필리아 / 진은영
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흰 종이배처럼
붉은 물 위를 흘러가며
나는 그것을 배웠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심장들이
뜨거운 모래 위에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난다
어느 눈먼 자의 젖은 손가락을 위해
텅 빈 강바닥을 서성이던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먹을 것을 사간다
유리와 밀을 절반씩 빻아 만든 빵
있다 / 진은영
창백한 달빛에 네가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 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 진은영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 진은영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 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그 머나먼 /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망각은 없다 / 진은영
세상에서 나를 제일 증오하던 이가 죽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 내 몸이 되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가 죽어
그는 강이 되었다
그는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부드러운 머릿결이
모든 계절에 과일과 별의 향기를 뿌리며 네 개의 강으로 지나갔다
어린 시절 읽었던 천일야화 속에서 어느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가 되었다
그들은 물을 따라 허락 없이 흘러 다녔다 그래서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그는 죽었다
태어나 정치가가 되었다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
그를 정치가로 만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곳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
거기는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꿀, 나의 담즙, 나의 거기
어린 시절 천일야화 속에서 어느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가 되었다 강은 죽었다가
곧 태어나 내 몸이 되어 올 것이다
신비한 질병과 미지의 악취를 릴레이 주자의 날쌘 팔다리처럼 달고서
어떤 시절에 어느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였다 한때 그들은 제 생각을 따라
텅 빈 광장으로 물처럼 흘러갔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오래된 이야기 / 진은영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을 넘고 아홉 개의 강을 건너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원한도 떨어뜨리고
사연도 떨어뜨렸지
아홉 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조각들을 모아
새하얀 달에 비추면
빨간 양귀비꽃밭 가운데 주저앉을 듯
모두 쏟아지는 향기에 취해
그만 살인자를 잊고서
집으로 돌아갔대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 들, 강을 지나
달아났다
흰 밥알처럼 흩어지며 달아났다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나라도,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 진은영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에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당신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차림으로 창문 너머의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들판의 귀리 싹이 몇 인치의 초록으로 땅을 들어올리듯
차력사인 봄을 불러다주세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립니다
별과 알코올을 태운 젖은 재들이 휘날립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 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나간 문고리와 골목길과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도둑고양이, 모든 울음들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들,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들,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이 모든 것 / 진은영
비눗방울 하나가 투명한 기쁨으로 무한히 부풀어 오를 것 같다
장미색 궁전이 있는 도시로 널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겨울과 저녁 사이
밤색 털 달린 어지러운 입맞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광할한 사랑의 벨벳으로 모든 걸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
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 도시는 똑같은 문장 하나를 영원히 받아쓰는 아이와 같다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
수천 개의 회색 종을 달고서 부드러운 날개 하나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
초록빛 묽은 토사물 속에 구르는 별들
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인 것 같다
천사들이 처방해 준 약을 한번도 먹지 않은 것 같다
푸른 캡슐을 쪼개어 알갱이를 다 쏟아버리는 것 같다
안녕, 안녕,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로 눈이 내린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달에 매달린 은빛 박쥐들의 날개가 찢어져 내리는 것 같다
지난해의 비밀 / 진은영
구름이 물방울들, 발 없는 영혼들의 몽유병이라는 거
청춘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청춘이 끝난 뒤에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어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는 거
나무들, 나무들의
회색 밑동 아래로 슬픔의 기름이 흐른다는 거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감리 보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시가 새겨진다는 거
내가 너를 이미 떠났다는 거
봄이 오고 구름이 지나가고
꽃들은 시를 떨어뜨리고, 거리에서
어느 한 줄의 문장을 읽을 무렵
붉은 윤전기가 돌아간다는 것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
어디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모두 떠나간 자동차 공장에서
아이들은 유리로 된 껌을 씹고
아 아 아 웃으며 지나가는 아가씨의 순결한 옆구리에서
창이 튀어나오고
필름을 넣지 않은 사진기의 눈빛으로
네가 그 풍경을, 나를 철컥철컥
찍어댄다는 거
배고픈 아이와
죽은 사람의 흰 달을
비 갠 거리, 핏방울
싸움꾼이 잠시 후면 늙어간다는 거
종이의 깊은 속에서 가래가 끓고, 그 거품들
너의 왼뺨이 오른뺨보다
따듯하다는 거
내가 네 연인의 연인을 사랑했다는 거
벼락 맞은 한밤의 나무처럼
태양이 동그랗고 노란 나뭇잎이라는 거
그래서 매일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새삼 5월을 노래할 필요가 없다는 거
1월에도 12월에도 평등하게, 사이좋게
죽음이 흰 유방 열두 개를 전부 드러낸 채 거리를 뛰어가고 뛰어갔으니
지도를 찾아서 / 진은영
녹색 오렌지로 태양을 그리는 아이들은 어디 있나
바다를 술로 만드는 마술은 어디에 있나
망루에서 죽은 자에게
빌딩처럼 멋진 묘비를 세워주는 도시는
어디 있나
어디에 있나… 콜크 마개처럼 가볍게
제가 빠져나올 술병 속에서만 떠도는 영혼은
어디에 있나
핏자국 얼룩진 제 모포로만 상대의 노란 얼룩을 덮어주는
다정한 의사당은 어디에 있나…
가던 사람들이 죽은 정어리처럼 꼼짝 않고 서서 바다를 찾는 도시는
자기만의 무지개로
소년들이 목을 매는 하얀 철탑은
어디에 있나
무덤에 뿌려진 꽃송이를 씨앗으로 바꾸는 마술사들은
신문이 시처럼 읽히는 둥근 십자로에서
못 박히는 시간들은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진은영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 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의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 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 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 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 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그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늘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고백 / 진은영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고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 대신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할 말이……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긴 손가락의 시 / 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
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
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연애의 법칙 / 진은영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 가의 따스한 자갈들,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멜랑콜리아 / 진은영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 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 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라, 라, 라푼젤 / 진은영
그는 도둑고양이와 그림자를 사랑하고 그가 누운 관에서 흰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나는 드넓은 상추밭을 가꾸고 푸르고 여린 잎들 사이로 불쑥 솟은 거대한 굴뚝에 사네 낡은 성당의 저녁종이 들판에 울려 퍼지고 그의 목소리 가까이 들린다 계단도 없고 문도 없으니 아가씨, 좁은 창문으로 너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 좀 내려 줘
아주 오래 연주되기 위해서
긴 머리를 가진 여자들……
벌써 여덟 번째야 그가 머리채를 잡고 올라와 내 목을 친 것이, 그가 머리통을 창문 밖으로 던진다 나는 바람 빠진 공처럼 튀어 오르며… 소리지른다 여보세요 야옹, 야옹 저도 고양이의 일종이에요 나는 오늘로 아홉 번째 태어났다 그러니까 달팽이는 백 마리, 아무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도화지 속을 나 혼자 뛰어가기
찢어진 상추잎들, 바람에 날아오르며 얼굴을 후려친다
메피스토 왈츠 / 진은영
뚜껑과 시신을 잃어버린 관 속에서
붉은 샐비어꽃들이 피어날 때
밤이 깜짝 놀란 두 눈썹을 치켜뜨고
묘석 모양이 담쟁이 잎을 응시할 때
불안이
부서진 어깨뼈의 십자가에서 포도송이처럼 열릴 때
사물 하나를 물고와 심장의 텅 빈 수조
어두운 피의 찰랑거리는 기억 속에서 헤엄치게 할 수 있다면
다시 낯선 비밀들이
몸 속으로 뛰어들게 할 수 있다면
페르시아도기의 깨지기 쉬운 색깔에 포박되어
미친 양탄자의 춤 위에 올라탈 수 있다면
모든 구멍을 틀어막는 슬픔의 막대기여
무취의 거리를 짓이기며 달려가는 라벤더 꽃잎의 타이어
고대 화폐처럼 닳아버린 달의 입술이여, 사라진 역병들이여
어둠의 찢어진 자루에서
썩은 양파들이 굴러 떨어지는 밤
네가 마시는 알코올 속 얼음으로 녹아들기 전에
바이올린 화염으로 흰 자작나무 언덕을 모두 태우기 전에
그가 왔다
나의 죽은 귓속에서 푸른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공정한 물물교환 / 진은영
그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서리맞아 얼어죽은 무화과 꽃나무
한 그루와,
주근깨 많은
그 여자에게 보내는
주홍빛 엽서의 우표 몇 장과,
그저 한심하고 가벼운 안부를 묻는
안녕하세요?
그는 그것을 판다
"먼 나라의 허름한 가옥들이 줄지어 폭발했다"는
단 한 줄 인용구에
가끔은 형이상학적 감정의 고리대금을 물기 위해
더 가끔은 재미 삼아 그것을 북북 찢는다
반짝이는 얇은 면도칼
물기 많은 푸른 오이들
언 사과들
유리로 된 바퀴는 어디로 굴러가는지
그는 그것을 산다
평생 동안의 월급과 술병 더미들
단 하나의 녹색 태양, 비밀들과 양쪽 폐를 팔아서
이상한 물건
상점 주인들이 종종 문학이라고 부르는!
지나가던 사람이
붉은 칠 마르지 않은 벽에 등을 기댄다
5월의 별 / 진은영
늙은 여자들이 회색 두건의 성모처럼 달려와서
언덕 위 쓰러지는 집을 품 안에 눕힌다
라일락, 네가 달콤하고 하얀 외투로 달려와
바람에 무너져 가는 저녁 담을 둘러싼다
면식 있는 소매치기가 다가와
그의 슬픔을 내 가방과 바꿔치기해 간다, 번번이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닌다 꽃이 진다 바람 분다 여름이
파란 얼음처럼 마음속으로 미끄러진다
하늘의 물방울이 빛난다
내가 사랑했던 이가 밤새 마셨던
굳어 가는 피의 거울 속에서
사람들이 제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제 속눈썹의 흰 별자리가 떨리던 것을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 진은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 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 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라고 대접해주는 예절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밀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하면서, 그 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 거
어릴 적 소풍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 놓았나 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 진은영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물 위를 고요가 흘러간다는 사실
물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
오늘 밤에도 그 애가 친지들의 심장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물을 무사히 건넌다는 사실
한양대학교 옆 작은 돌다리에서 빠져 죽은 내 짝은 참 잘해줬다, 사실은
전날 내게 하늘색 색연필을 빌려줬다
늘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많다, 사실일까
사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죽은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못한 것도 많을 텐데
노래가 여기저기 떠도는 이유 같은 거
그 사람이 꼭 죽어야 했던 이유 같은 거
그 이유가 여기저기 떠도는 노래 같은 거
사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짝은 입을 꼭 다물고 건져졌다는데
말할 수 없다
그 애가 들려주려던 사실
어둠의 긴 팔에 각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파울 클레의 관찰일기 / 진은영
사랑이나 이별의 깨끗한 얼굴을 내밀기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의 신은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닳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온다
두 손을 문지르며 사라질 때까지 경배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과 전쟁의 심벌즈는 내 유리 손가락, 붓에 담긴 온기와 확신을 깨버렸다
안녕 나의 죽은 친구들
우리의 어린 시절은 흩어지지 않고
작은 과일나무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그 시절 키높이만큼 낮게 흐르는 구름 속으로 손을 넣으면
물감으로 쓸 만한 열매 몇 개쯤은 딸 수 있다, 아직도
여러 밝기의 붉은색과 고통들
그럴 때면 나폴리 여행에서 가져온 물고기의 색채를
기하학의 정원에 풀어놓기도 한다
나는 동판화의 가는 틈새로 바라보았다
슬픔이 소녀들의 가슴을 파내는 것을
그녀들이 절망을 한쪽 가슴으로 삼아 노래를 멀리 쏘아 올리는 것을
나는 짧게 깎인 날개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조금씩 부서지는 누런 하늘의 모서리
나쁜 소식이 재처럼 쌓인 화관을 쓰고
나는 본 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영원히 날아가려 했다
폼페이의 잔해더미에 그려진
수탉들처럼
어찌할 수 없는 폭풍이 이 모든 폐허를 들어 올릴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그 절망 속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나를 좋아하던 어느 문예비평가가 말했다지만, 글쎄……
그는 국경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나는 해부학과 푸생, 밀레와 다비드를 공부했고
이성과 광기의 폴리포니를 분간할 줄 아는 두 귀에,
광학을 가르치고 폐병과 심장병의 합병증에도 정통했지만
슬픔으로 얼룩진 내 얼굴과의 경쟁에선 번번이 패배했다
그때마다 나는 세네치오를 불렀고
부화하기 전의 노른자처럼 충혈된 그가 왔다
*출처: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