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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30. 모든 사물 끝마다에서 나를 알아보아라.
[운문선사가 한 때 법을 보이셨다.
"모든 사물 끝마다에서 나를 알아보아라." 하신 협산(來山)스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합장하고 말씀하셨다.]
지난 시간에 협산스님에 대한 보설이 있었으니 본문에서 운문선사가 인용한 향상일구(向上一句)는 “모든 사물 끝마다에서 나를 알아보아라.”라는 말씀은 {모든 사물 끝마다에서 나를 알아 보아라“라는 말씀은 나와 나를 마주한 삼천대천세계 즉 경계인 것이니, 나와 경계에 대하여 이것이 상대법이니 나는 체가 되고 경계는 용으로 표현한 말이니 이것이 체용의 도리이며, 나를 위시한 삼천대천 세계의 관계에서 일으나는 나와 현상을 어떻게 설정하여 바로 보라는 것이다. 이것을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입장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것은 나와 경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경계가 하나라는 일숭법(一乘法)인 것이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불이법문(不二法門)인 것이다.
그럼으로 불교에서 사법계(事法界)와 이법계(理法界)관에 대하여 논술적으로 슆게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에서 이(理)와 사(事)>인 이와 사는 이렇게 아미산은 논하고 있다
이(理)란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이치를 이르는 것이므로 진제(眞諦)이며, 근본인 체(體)를 이른다. 즉, 체(體)는 근본이요 바탕인 것이며, 이(理)는 실상이며 진제이다.
사(事)란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이치를 말하며, 일체현상이므로 속제(俗諦)이다.
따라서 이(理)는 곧 실상의 체(體)인 묘유(妙有)의 반야(般若)라 할 것이요, 사(事)는 용(用)인 묘용(妙用)의 지혜작용(智慧作用)으로 볼 수 있다. 즉, 용(用)이란 그 체의 작용을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아서 이(理)는 체(體)요, 사(事)는 용(用)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화엄경>에서도 이(理)는 체(體)요, 사(事)는 용(用)이라 했고, 이를 일반 사회적 언어로 바꾸면, 체(體)는 근본(根本)이고, 용(用)은 현상(現象)이라 하겠다.
또한 체는 무(無)라 하겠고, 용은 유(有)라고 할 수도 있고, 체는 진공(眞空)이요, 용은 묘유(妙有)라 할 수 있다.
이(理)가 물이라면 사(事)는 얼음이나 구름 또는 이슬이라 하겠다.
이(理)는 근본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나의 본성(本性)인 자성(自性)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事)는 사물의 존재를 뜻하고 움직이는 인연의 모습을 의미한다.
사(事)와 리(理)는 일반적으로 사(事)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차원의 사실을 말하고, 리(理)는 본질적인 차원의 심오한 이치를 말한다.
이(理)는 근본이치(사물의 정당한 조리)를 뜻하는데, 현상의 사물(事物, 일과 물건, 세계의 구체적⋅개별적 존재)을 뜻하는 사(事)에 상대되는 말이다.
불교 문헌에서, 사(事)와 이(理)는 대개 다음의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事)는 상대 차별한 현상을, 이(理)는 절대 평등한 본체를 가리킨다. 사(事)는 현상계를, 이(理)는 그 현상계의 본질을 가리킨다.
사(事)는 모든 현상을, 이(理)는 참된 실재를 가리킨다.
사(事)는 차별 현상을, 이(理)는 깨달음의 진리를 가리킨다.
번뇌의 분류와 관련해서는 이(理)에 미혹한 번뇌인 이지적(理智的)인 번뇌를 견혹(見惑)이라 하고, 사(事)에 미혹한 번뇌인 정의적(情意的)인 번뇌를 수혹(修惑) 또는 사혹(思惑)이라 한다.
정의적인 번뇌인 수혹이 이지적인 번뇌인 견혹보다 더 끈질기고 끊기 어렵다. 견혹(見惑)이란 진실의 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알음알이에 따라 분별하는 것으로서 특히 사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잘못된 번뇌를 말한다. 견혹은 모두 견해와 관념상의 문제이다. 따라서 견혹을 때로는 이혹(理惑)이라고도 하는데, 관념적이고 지적인 번뇌이기 때문이다.
헌데 이러한 지적인 번뇌이므로 그 도리를 알면 단번에 해결할 수가 있다. 알게 되면 쉽게 해결돼 없어지는 번뇌, 이를 일컬어서 견혹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수혹(修惑)은 선천적 번뇌로서 습관적으로 사물에 대해 애착을 하는 번뇌, 사물의 참모습을 알지 못해 생기는 번뇌이다. 구체적으로는 탐(貪-탐욕), 진(瞋-성냄), 치(癡-어리석음), 만(慢-아만), 의(疑-의심)의 오둔사(五鈍使)를 말한다. 견혹(見惑)처럼 분별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번뇌가 아니라, 훈습적이고 감정상의 미혹이기 때문에 떨쳐버리기가 오히려 어렵다.
견혹은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성제(四聖諦)의 이치만 바로 알면 바로 해결되지만, 사혹(思惑)은 올바른 수행에 의해서만 닦아 없앨 수 있다. 즉, 생각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하고, 화두도 많이 들고, 이와 같이 해서 오랫동안 끊어야 하기 때문에 사혹이라 한다.
다시 정리하면---------- 이(理)란 진리, 이성, 보편적인 진리, 평등한 본체, 법칙을 의미하고, 사(事)는 사상(事相), 현상(現象), 사법(事法), 즉 차별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불이(理事不二)’, 즉 이(理)와 사(事)는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둘로 나눌 수 없다. 즉 이가 곧 사란 말이다. 보통 둘을 함께 묶어서 이사(理事) 또는 사리(事理)라고 한다.
나의 존재가 남의 존재와 연기적으로 상생(相生)의 관계에 있다고 보면, 누구나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연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기에, 자기를 독존(獨尊)적 존재라고 고집할 수 없고, 결국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통해 함께 발전하는 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법성게(法性偈)> 구절이다.
“이사명연 무분별(理事冥然 無分別)” 이(理)와 사(事)가 조화로우니 따로 분별할 것 없으니 라는 뜻이다.
이(理)는 본질, 진리, 이론, 진여, 원리, 체(體), 진체(眞諦) 등을 의미하고, 사(事)는 현상, 경계, 행동, 세속, 사건, 용(用), 속체(俗諦) 등을 의미한다.
<법성게>에서 “생사열반 상공화(生死涅槃 常共和)” 다음에 “이사명연 무분별(理事冥然 無分別)”을 읊고 있다. 생사와 열반도 항상 조화롭게 공존하듯이, 이와 사가 조화로우니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理)’는 열반계이고, ‘사(事)’는 생사계이며 ‘이(理)’는 깨달음이고, ‘사(事)’는 발심이고 ‘이(理)’는 하나이고, ‘사(事)’는 일체이며
‘이(理)’는 일념이고, ‘사(事)’ 는 무량겁이다.
이치인 열반의 세계(理)와 현실인 생사의 세계(事)의 경계가 모호해서(冥然) 분명하게 분별할 수가 없다(無分別)는 것이다.
이(理)는 사(事)를 따라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이루고, 이(理)는 사(事)를 잘 만나서 윤택하고 융성해져서 살맛이 나게 한다.
예컨대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나, 남편 만나기 따라 왕비도 되고, 가난뱅이 부인도 된다.
남자는 참한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면 그 삶이 윤택하고 안정되고 평화로워진다. 만약 못된 여자를 만나면 갈등이 끊일 날이 없어 가정이 모래바람만 몰아치는 사막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가 이(理)와 사(事)의 관계이다.
사찰에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관계도 꼭 같다. 이판이 사판을 잘 만난 그 절은 윤택하다. 그렇지 못하면, 절 살림이 곤궁해서 이판의 수행에도 지장이 많다.
문수보살을 이(理)라 하고 보현보살을 사(事)라 하고, 문수를 부처님의 소남(少男)이라 하고, 보현을 부처님의 장자(長子)라 하지만 어찌 문수보살은 이(理)만 고집하고, 보현보살은 사(事)만 고집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문수도 아니고 보현도 아닐 것이다. 문수의 묘지(妙智)와 보현의 묘용(妙用)이야말로 옹고집쟁이 아니니, 원융무애한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선사의 <참동계(參同契)>에 나오는 ‘회호(回互)’를 통해 석두 선사는 제법의 실상과 본래의 자기를 융합시키는 원리를 밝혔다.
개개의 주체가 상즉상입(相卽相入)의 회호(回互)를 통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총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불회호(不回互)란 낱낱의 숱한 것들이 각자의 처지에 머물러 있음을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회호의 입장에 서있다면 ‘물이 흐르는 게 아니고 다리가 흘러간다’거나 ‘구름은 가만히 있고 산이 움직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회호는 ‘물아일체의 총체’를 지향하기 때문에 대립적인 두 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융합하는 관계에 있어 자타가 일체가 됨을 의미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이(理)오, 손발이 움직이는 것은 사(事)이다.
발이 움직이는 것을 마음이 알아차리고, 마음은 발이 앞으로 가기를 원하자마자 앞으로 간다. 이렇게 앞으로 갈 때 몸과 마음은 분명히 다르지만, 개별적으로 놀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해서 ‘이사불이(理事不二)’라고 한다.
몸이 마음에 따라, 마음이 몸의 사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둘이 원만하게 융화하는 것이다.
사(事)는 이(理)의 본체(本體)의 현현(顯現)이므로 이(理)와 사(事)는 둘이 아니다. 이와 같이 둘이 아닌 이(理)와 사(事)를 나누고 달리 취급하면, 여기에 문제가 생긴다.
개인으로 보면 몸과 마음을 둘로 보고,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생각하고 취급하면 반드시 병이 발생한다. 몸의 병도 생기고 마음의 병도 생긴다. 조화를 이루지 못한 까닭이다.
둘로 보지 않는 것은 그 소중함이 원융(圓融)과 조화(調和)에 있다.
원융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걸리지 않고 자유로운 것이 이상적이다.
한 가정으로 보면 남편과 아내, 부부 사이가 내외불이(內外不二)일 때 원만한 가정이 된다. 부부가 각각 딴 생각을 하고 딴 짓을 한다면 원융과 조화가 깨진다. 어느 한 사람에게 치우쳐서 가정이 돌아간다면 병든 가정이라 할 수 있다. 동등하고 평등하고 원융하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원만한 가정이요, 병이 없는 가정이다. ‘원융(圓融)’이란 편벽(偏僻)됨이 없이 모든 것에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돼서 서로 융합하므로 방해됨이 없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은 겉보기에는 하나하나 떨어져 있어서 모두가 별개의 것으로 보이나 그 근원을 더듬어 들어가면 모두가 하나로 어울려 돌아간다고 본다. 이(理)와 사(事)가 하나라는 이치는 원융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자는데 그 의미가 있다.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핵심은 양극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에 있다. 따라서 불이(不二)와 원융(圓融)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갈등과 분쟁의 불씨를 떨쳐내는 사상적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理)는 진여본체(眞如本體)로서, 분할을 하거나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 비록 분한(分限)하여 각자 독립체가 있는 것 같지만, 전체가 이를 벗어난 것은 아니며, 일체사물 모두가 진여본체를 바탕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사무애(理事無碍)의 관계로서,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지도 또한 멀리하지도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모습을 체현하거나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했다. 즉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친다는 말이다. 즉,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여기서 월(月)은 부처님을 뜻하고, 천강(千江)은 중생(衆生)을 비유한 것이다.
이 같이 사물의 현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으로 전체와 부분을 들어서 설명한 것이 바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다.
즉, 동일한 본체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다양하고 복잡한 각종 사물이 구체적으로 체현된 것을 설명한 것이다. 부분(一)과 전체(一切)는 곧 ‘일즉일체(一卽一切)라 전체와 부분의 융화가 돼 현상세계가 나열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천차만별의 사물들은 모두 하나의 본체에 귀결된다는 것으로, 일체즉일(一切卽一)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법성게>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등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중국 화엄종의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우리들의 현상세계를 이(理)와 사(事)를 가지고 설명을 했는데, “사에 이가 두루하고, 이가 사에 두루하다고 여겼다.
즉, 제법의 현상이라는 것은 곧 이(본질)와 사(현상)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로서 중첩된 세계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이즉사(理卽事) 사즉리(事卽理), 본질과 현상의 상즉관계로 천지 만물이 형성됐다고 봤다. 이 가운데서 모든 작용의 근본은 이(理)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理)를 의지해서 천지 만물(제법현상)이 파생되고, 비록 사(事)가 형상을 나타내어 작용은 하지만, 이 사(事)의 모든 것은 허환(虛幻)이며, 자성이 없으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반드시 이(理)를 의지해서 나타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동시에 체용상즉(體用相卽)을 근거한 원칙으로, 이도 또한 반드시 구체적인 사(事)를 의지해야만 구체적인 사물을 나타내거나 작용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또 이러한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상태를 잘 설명한 것으로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를 들 수가 있는데, 이 중중무진법계를 설명할 때, 현수 법장이 측천무후에게 거울의 중앙에 금사자상을 놓고 거울 속에 겹쳐지는 금사자상을 통해서 중중무진법계를 설명했다는 고사는 유명하다.
이사일여(理事一如) 심경일여(心境一如)이며, 이사불이(理事不二) 귀재원융(貴在圓融)이라.
이(理)와 사(事)는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님의 존귀함은 원융에 있다.
이 말은 중국 법안종(法眼宗)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의 법어다.
이(理)와 사(事)는 본래 둘이 아니다. 실은 선(禪)과 교(敎)도 둘로 나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둘로 나뉜 것이 아닌 이(理)와 사(事)를 둘로 나누어서 다른 것으로 취급한다. 선(禪)과 교(敎)도 둘로 나누어서 다른 것으로 취급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화엄경>에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라 했다. <반야심경>에 색(色)이 즉 공(空)이고, 공(空)이 즉 색(色)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본래 이(理)가 사(事)이고 사(事)가 이(理)라서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걸림이 없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理)가 물이라고 한다면, 물이 안개도 되고 구름도 되며, 이슬도 되고 얼음도 되는 이치가 바로 사(事)다.
또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더도 덜도 아닌 인과(因果)에 따른 것이므로, 누구라도 결과적으로 더 얻고 더 잃는 법은 없으니, 더 얻으려 하는 만큼 더 잃게 되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작용하는 때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과 마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연기(緣起)하는 모습만 있을 뿐,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는 공(空)함만이 있음이니, 집착하는 마음만 허공을 휘젓는 수고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의 인연을 만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어서 좋다 싫다 하는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매사의 사(事)가 곧 이(理)가 되어 이사(理事)가 명연(冥然)하고 자유자재하여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하여, 그 어떤 일에도 분별(分別)하지 않는 마음으로 대하고 바라본다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저 꿈같고 환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음을 잘 알게 된다. 따라서 그 공(空)의 실체에 굳이 감정을 얹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터, 마음의 감정은 늘 한결같아져서, 꺼들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걸림 없는 편안한 마음 상태로, 매사를 그저 인과(因果) 인연에 맡김으로 모든 일은 저절로 풀리게 된다. 기도는 이사(理事)를 따로 보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고, 참선은 탐⋅진⋅치 삼독심을 잠재울 것이며, 보시는 욕심에서 오는 과보(果報)를 막아주게 되고, 정진(精進)은 이 모두를 성취하도록 도울 것이다.」 돌~~~~~~~!!!!!!!!
그러함으로 마치 선사들이 말하는 이치(理致)가 틀린다 하여 선과 교를 분리하여 마치 진리는 오직 선사들만의 전용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가 않다. 향상일구라고 하는 것도 다 풀어 보면 경전을 벗어 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오직 사람들이 의심이라는 믿지 못하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응병투약(應病投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회광반조 해 보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물 끝마다에서 나를 알아보아라." 하신 협산(來山)스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합장하고 말씀하셨다.라는 말을 운문선사는 데시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라고 하십니다.
왜 이리 헛웃음을 지를까요? 납승이 항상 말하지만 모든 법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진실여상한 진여이며 여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화가 전해 져 오지만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아무른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보는 정견이 지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나와 여러 분들은 이렇게 아무른 일없이 이렇게 법담을 나눌 수 있으니 찰나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니 모든 것은 그 실체가 없는 공(空)의 연기에 불과함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녕하십니까?라고 서로 법성원융하고 있지 않느냐고 헛웃음을 지어 보이십니다.
[다시 주장자로 법당 앞의 큰 기둥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저것 좀 보아라. 협산 스님이 노주가 되었구나."]
말후구는 이렇게 마음으로 본다면 협산 스님도 다 허망한 명색이며 작용면에서 본다면 형상은 어떻게 하든 생멸변천하는 허망한 존재임을 밝혀 주시면서 말후구를 마쳤습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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