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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산 원문보기 글쓴이: 멩이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다
성장과 성숙
여기저기서 성장을 말한다. 경제만이 아니라 교육도. 교육의 관심도 아이의 성장인 것 같다. 성숙이라는 말은 인격에 한해서 개인적으로 칭찬할 때 쓰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숙이다.
성숙 없는 성장, 이것이 교육과 사회에 대한 내 진단이다. 사회든 교육이든 진정한 목적은 성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토마토가 자라는데 토마토는 열리지 않고 잎과 가지만 무성하게 자라면 그게 어디 토마토겠는가? 자연의 모든 존재는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그것이야말로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요인인데- 적정 수준에 도달하려고 한다. 바로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해 성숙이 가장 필요하다. 끝없는 성장은 존재를 위협할 뿐이다. 곰팡이처럼 급속한 번식이나 공룡처럼 지나친 비대는 쉼없이 몰락의 불안을 유포한다. 그런데 왜 성장만이 미덕이 되고, 성숙은 사회와 교육에서 사라지게 되었을까?
성장과 성숙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크다(자라다)’는 동사다. 아이가 많이 컸다고 말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육체적으로 많이 자랐다는 의미에서의 성장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인격이나 태도 면에서 어른스러워졌다는 의미에서 성숙을 의미한다. 성장은 자연의 적응과 관계된 자연적 변화이고, 성숙은 사회의 적응과 관계된 사회적 변화다. 물론 사회인으로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적으로 성장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숙 안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기 통제력과 책임의식이 자리 잡는 것을 필요로 한다. 즉 성숙엔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교육에서 성숙은 사라지고, 개인의 성장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장을 얘기할 때 ‘크다’ 대신 ‘잘 한다’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한다. ‘잘 한다’는 말은 능숙 곧 능력신장을 의미한다. 교육이 학생에게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능력을 신장하는 일로 변질된 지 오래 되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체육, 미술 등 수많은 과목을 통해 우리는 성숙이 아니라 성장을 이루려 노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육이 성장을 위한 인위적 노력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이것은 제도화하고 일상화하여 청년기를 지나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이르고 있다. 아동의 전 성장기간은 교육 제도 안에 장악되었다. 자연의 성장이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왜 교육은 이렇게 각종 능력의 인위적 성장에 매달리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성장 강박을 안고 능력주의 신화에 매달려 살게 되었을까?
제도권 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성장강박과 능력주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성숙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워진 이유는 또 뭘까?
교사도 유능해야 하고 학생도 유능해져야 한다. 사회가 유능한 사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사회에서 유능한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이어른과 성장사회
성숙의 부재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도 어른이 아닌 아이어른으로서 남게 한다. 나는 교사와 학부모들 속에서 어른이 아니라 아이어른을 만난다. 그것은 내면아이라기보다 성숙이 불필요해진 사회에서 성장만을 과제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교사든 학부모든 안정된 어른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피터팬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어른들은 과연 성숙을 거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망각한 것일까? 나는 이 시대를 성숙이 사라진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 때문에 인격의 지체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어른의 특징은 자기(ego)가 강하다는 것이다. 교사는 남을 가르쳐야 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 생각과 지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가르칠 수 없다. 더구나 학생과의 권위적 위계는 이를 더욱 강화시켜 교사를 성장신화와 능력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한편 학부모들도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아이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맞벌이 일자녀 시대를 겪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문제가 발생한 경우 아이어른 부모는 아이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일체화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심리적 편들기에 쉽게 빠져들기도 한다. 아이가 자신의 호흡과 방식으로 어른이 되어갈 수 있도록 기다리거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 쉽게 개입하고 대신 판단한다. 부모와 아이가 ‘아이나’로 심리적 일체가 되어버린 경우도 발생한다. 그런 경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아이어른-어른아이로 기묘하게 융합되어 이후 신경증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직장에서 유능한 사람도 부모 되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지나치게 자본주의화 되면서 사람들끼리 서로 지지해주는 유대와 안전망이 사라진 까닭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불완전한 아이어른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성장신화로 길러진 성장에 적합한 개인들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은 삶을 시장화하고 인간 자신을 상품화한다. 자본주의는 무한경쟁의 시장사회로 무한성장을 지향한다. 삶의 모든 영역이 상품화 되었고, 삶의 형식은 무한경쟁이 지배하게 되었다. 무한경쟁이 합리화되는 근거는 무한성장에 대한 신화에 의해서다. 물론 무한성장은 물질적 부의 팽창을 의미한다. 왜 자본주의에는 한계가 없을까? 왜 한계를 그으면 안 될까? 그것은 무한경쟁과 무한성장의 맹목적 신화가 아니면 극단적 이기심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 승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자본주의는 절대로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한계를 아는 성숙한 사회는 이기심을 채우는 발전 동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끝내 미숙한 사회로 지속되어야 존속가능하다는 모순에 빠졌다. 그리고 이렇게 미성숙한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들이 바로 성숙이 지체된 채 성장신화에 매몰된 현대의 아이어른들이다.
아이어른은 자본주의 시장경쟁 원리 안에 생존하기 위해 이기심으로 무장하고 자기 성장에 매몰된 개인들인 것이다. 아이어른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인간인 것이다. 성장사회과 성숙사회를 거부하듯, 아이어른은 어른 되기를 두려워한다.
개인과 사회의 성숙
그렇다면 성숙한 개인과 성숙한 사회란 무엇일까?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그리고 토마토가 익으며 붉어지는 것처럼 성숙은 외적 성장화의 과정을 멈추고 내적 숙성 내지 변성의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이기적이기보다는 성찰적이고, 성찰적임으로써 이타적으로 변한다. 생존에 매몰된 자연의 존재는 우선 이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생존의 절박함 때문이다. 생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기적인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무한경쟁으로 개인들에게 생존위협을 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존의 절박함이 이기심과 비도덕성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은 자기의 이기적 욕구를 무한히 채울 수 없다. 개인의 무한한 성장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억제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개인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거듭나야 한다.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과 평등한 관계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회적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숙한 개인이란 사회와 조화롭고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개인인 것이다. 성숙한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지 않고 다른 사회와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자연과도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가능성을 실현한 사회를 가리킨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가 성장에 매몰된 상황이라면 생존에 지나치게 매몰된 상황이고, 이들은 이기심에 의해 언제가 더 큰 공동체와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으로 위험사회인 이유는 무한경쟁의 시스템이 생존의 불안을 자극하고 개인과 사회가 생존을 위한 성장게임에 매몰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없이 성장만 한 숲의 결과는 뻔하다. 성숙 없는 성장은 한 번의 태풍에 모두 넘어지는 숲과 같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영양과잉으로 부풀기만 하던 식물이 하루아침에 말라죽는 것과 같을 뿐이다.
성숙은 적정 수준을 알고 유지하게 한다.
이 즈음에서 모든 인류가 경험했고 원시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통과의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통과의례야말로 인위적 교육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학교사회에 살고 있다. 20,30이 되어도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학교를 졸업하고도 학교와 학원 주위를 얼쩡거리며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자식은 30이 되어도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고, 심지어 결혼하여 부모가 된 뒤에도 부모에게 의존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자립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성숙이 미뤄진 아이어른으로 살아가곤 한다.
성인식
하지만, 원시사회의 성인식을 보자.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어른이 되는 연령이 20에서 30대까지 늦춰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예외적인 것인지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인류사회는 사춘기인 15세의 전후를 성인식 시기로 삼는다. 통과의례의 핵심을 차지하는 성인식은 아이의 어른 되기 과정을 집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축제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전체 구성원이 보는 앞에서 아이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아이에게 주어진 시험은 주로 고통에 대한 인내와 비전을 보는 일로 나타난다. 신체적 고통과 시련을 견디며 아이는 자기를 억누르고 공동체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공동체는 아이의 성숙과정을 응원하고 격려하여 아이가 공동체가 요구하는 인격에 자기를 극복하고 도달할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돕고, 아이가 성취한 것을 승인하며 축하해 준다. 성인식이 끝나면 아이는 정식으로 공동체의 일원인 책임 있는 어른으로 대우받는다. 성인식은 짧은 기간에 인견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방법이다. 성숙의 의례를 통해 아이의 자아는 어른이 된다. 이제 아이는 의존 대신 자립과 독립을 실천한다. 남녀 관계에 대한 권리와 책임도 부여받아 성적으로도 자유를 부여받는다. 원시사회가 좀 더 너그럽고 덜 억압적인 이유는 이렇게 아이를 자연의 성장에 맞춰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와 가족에 의존하는 심리적 탯줄을 끊고 사회에서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로 살아간다. 성인식 과정에 특히 아이를 고립시키고 비전을 만나게 하는 것은 자연과 1:1로 마주한 가운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심리적으로 완전히 홀로 서게 하는 방법이다. 아이는 그 과정 속에서 몸과 마음과 정신을 통합한 하나의 인격으로 등장한다. 그러던 성인식이 샤먼의 등장과 의례독점으로 약화되기 시작하더니 문명화 과정 속에서 종교와 국가 권력에 의해 사라지고 교육으로 대치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인격도 변화해 갔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의 자유인 대신 거대사회의 의존적 개인으로 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숙 없는 성장교육
개인을 사회화 한다는 점에서 교육은 성인식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교육이 점차 본업이 되어야 할 성숙을 폐기하고, 부업인 성장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보자. 원시사회에서 성장은 자연의 과정일 뿐이다. 아이는 15세까지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능은 생활 속에서 차츰 습득해 간다. 의식적 교육이 있기보다 그 때 그때 필요에 따라 익히고 배웠다. 아이의 성장 안에 담긴 교육은 생활이 요구하는 자연스런 과정이지 인위적 과정이 아니다. 거기에 인위적이고 집약적인 방법으로 교육의 전신인 성인식이 배치가 되어 자연의 성장 위에 사회적 성숙이 자리 잡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교육은 20세까지의 모든 연령을 교육제도 안에 가두고 성장을 강요한 뒤, 권력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근대교육 안에 자리 잡은 거대한 왜곡을 느껴야 한다. 성숙을 폐기하고 성장만을 주입하는 교육은 생존경쟁을 조장하면서 전체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도록 개인을 유도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특히 제도권 교육에서 주입된 능력주의 신화에 의해 평생교육으로 사회자체를 학교화하고 있다. 한편 학력과 각종 시험 제도, 그리고 자격증이 성인식을 대체한 느낌이다. 물론 그 안에도 성장이라는 것이 있고, 어른스러움에 대한 용인이 있다. 그러니 차라리 어른에 대한 관념이 아이어른으로 변화했다고 해야 할까?
성숙을 위한 교육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숙한 개인과 성숙한 사회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 국가와 자본이 강요한 성장신화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교육의 목표는 성장이 아니다. 인위적 사회화로서 교육은 성숙을 목표로 삼았던 성인식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아직 우리사회에 적합한 성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성장을 위한 평생교육에 매몰되기 보다 성숙을 위한 기회와 축제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사회는 성장을 개인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놔두고 그 환경을 조성하며 지지하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참된 성장은 내적 필요와 욕구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장 강박적 교육은 아이들의 다양한 욕구와 가능성을 억압하고, 권위적 위계에 복종을 강요하는 알묘조장의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나친 경쟁은 생존에 대한 불안을 조성하고 성장강박에 매몰되게 하였다. 개인들은 성장의 노예가 되었다. 그것은 오직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본가와 기업에게 유리할 뿐이고, 성숙을 모르는 무한성장 사회는 파멸로 귀결될 것이다. 성장강박과 경쟁불안을 벗어날 때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막상 이 시대와 사회에 적합한 성숙이란 바로 이런 각성에서 비롯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뱡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