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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어젯밤의 황홀한 기억들 안고 다들 0600에 벌떡 일어 났다. 원래 병선이 형이 준비한 누룽지를 먹으려 했으나 회장님의 추천으로 멘도롱에서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역시 거사를 앞둔 장수를 배려하는 마음이 물씬 묻어 났다. 국밥은 대단히 깔끔하고 시원했다. 국밥집에서 날씨를 점검해 보니 영실과 어리목에 안개비가 내린다는 거였다. 아침에 종원형이 이런 날씨라면 취소해야 한다는 언급이 있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0730에 출발하여 1100고지에 이르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안개가 자욱히 내려 있었다. 영실에 도착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이 어제부터 우릴 따라 다니고 있어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사실 어제는 일기예보상 일정 소화가 불가능했지만 하늘은 꽤청했고 나들이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0805영실에 도착하여 총무 종원형 호랭이 세명을 내려주고 희용형이 키를 받아 어리목으로 향했다.
두 팀이 다른 장소에서 한라산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실팀은 영실에서 출발하여 윗세를 찍고 남벽을 둘러 본 뒤 다시 윗세 대피소에서 함께 만나 12시쯤 식사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어리목팀은 병선형 만석이형 회장님 희용형 등이 어리묵을 출발(0830) 어승생오름을 둘러 본 뒤 다시 윗세로 온다는게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다.
우선 영실팀은 0805 안개자욱한 영실길을 사뿐히 올랐다. 소나무숲을 지나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를 한껏 들으며 걸음걸음 올라가는데 땀이 나는 듯 윗옷을 벗고서 계단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안개가 엄습하여 계단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곳이 오백나한, 아 저곳이 병풍바위, 아 저기가 기암절벽하면서 표지판을 사진으로 담아야 했다.
안개비에 추위가 느껴지는지 동행자 2인은 베낭을 씌우고 비옷을 입고서 걸었다. 그냥 반팔티 하나로 버티는 사람이 있는데 ㅎㅎ. 그렇게 춥지 않았는데 기온이 내려가면 큰 일 난다고 단장들을 했다.
우리는 분명 걷고 있는데 누가 보면 신선마냥 날아다닌다고 보았을게다. 끝없는 계단의 연속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고사목이 보이고 구상나무 나타나고 드뎌 안개속의 물기 한껏 머금은 진달래가 웃고 있는게 아닌가. 눈앞에서 방실거리는 진달래로 피곤이 사라지고 평화가 지속되었다. 종원형과 말동무되어 찍어주고 찍히는 놀이를 거듭했다. 그 시각에 하산하는 일행들이 있었다. 마실오듯 다니는 지역민들인가.
안보이면 뭐 어떠랴. 억센 비 아니 쏟아지는게 얼마나 다행이냐, 스스로 위로하면서 윗세로 한발자국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총무가 보이지 않는게 아닌가. 종원형 얘기가 저 밑에서 혼자 놀고 있는 이총무 가방을 보았다고 했다. 아마 큰 것 보고 있을 거라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안개속의 큰일은 추억거리가 될지니. 국립공원에 흔적을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그런데 휴게소 들어서는데 아 너, 뭐니,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보다 한참 뒤쳐져 있어야 하는 이총무가 앉아 있는게 아닌가.
그때의 놀람이란? 이총무 진짜 화장실 간다며 나가는 거였다. 형이 잘못 본 거유? 그래 그런 것 같다. 분명 총무 가방이었는데...
한라산 네 코스중 가장 쉽다는 영실을 출발하여 1000 윗세 도착. 느그적 느그적 오느라 두 시간 걸렸다. 원래 계획은 다시 남벽 가는거였는데 가도 암것도 보이지 않을거라 예단하면서 눌러 있기로 했다. 종원형이 끓여 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두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고 가방베고 드러누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가 싶더니 1100에 어리목팀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화들짝! 어떻게 된 일일까. 이 팀도 어승생오름을 가지 않고 0830 어리목 출발하여 사제비동산 지나 2시간 30분 소요하여 윗세 도착한 것이다.
반가운 사람들 재회하여 런치에 돌입했다. 종원형 병선형 희용형 등이 가져 온 끓인물로 유통기한 다 된 전투식량(고추비빔밥)을 먹어야 했다. 식욕은 동하지 않았지만 오후 산행을 위해 할 수 없었다. 다들 굿굿하게 식량을 비워 나갔다.
일정이 재조정되었다. 남벽팀과 어리목 하산팀으로. 남벽팀은 남벽분기점까지 간 후 영실로 하산하고, 어리목 하산팀은 곧장 내려가 어리목 주차장에 대기중인 차를 가지고 영실로 오는 것이었다.
어리목 하산팀은 이총무 혼자였고 나머지는 남벽산행을 희망했다. 책임감있게 이총무는 굳굳하게 홀로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남벽으로 이동했다. 그때가 1200이다. 윗세표지석에서 위대한 기념사진을 하나 남기고서. 아직도 안개가 주인이다.
그런데 말이다. 십여분 걸어가니 남벽의 장엄함에 감탄사를 쏟아냄과 거의 동시에 안개가 벗겨 지내는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일이? 안개가 날아가면서 장엄함이 확 드러난게 더 적확하겠지만.
반전이다. 세상에 이런 반전을 체험하다니. 행운의 여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여신과 함께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제주여행은 날씨가 구십을 차지한다. 하도 변덕스러워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날은 엄청난 감흥을 만들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람찬 남벽을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남벽의 반대편엔 소담스러운 진달래가 바알간 미소로 연신 반기고 있다.
흐드러지게 널려 있지 않고 듬성듬성 고개 내밀어 수수함과 애절함이 찐해 보였다. 최고의 그림이다.
대장군들 활보하는 남벽이 우뚝 우뚝 걸어가고, 옆집엔 섬색시 수줍음 가득 품은 진달래 송이 송이 가이없는 평원을 수눟고 또 수놓고 있다.
이게 그림이다. 이게 익사이팅이다. 이걸 보고 흥분안 할 사람 있을까. 알프스 가더라도, 네팔 가더라도 이런 풍광에 콩닥꽁닥할 수 있을까.
내가 조선사람인게 참으로 다행이구나. 조선인의 정서로 이걸 느끼고 기록할 수 있음에.
제주서 1년을 살았지만 남벽을 본게 처음이다. 당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병선형은 매년 오지만 이 날 가장 감흥이 크다며 연신 셧을 눌러댄다. 사십분을 걸었을까. 회장님, 만석이형, 종원이형은 하도 많이 보아 온 듯 되돌아 갈 준비를 하고 병선형,희용형은 남벽 분기점까지 가기로 했다.
가도 가도 남벽은 따라 붙는다. 볼 때마다 새로운 얼굴이다. 웃고 찡그리고 아파하고 다정한 미소까지 날려 보내 준다. 무엇에 홀린 듯 덤붕덤붕 날아다닌다. 자세히 보면 사람의 얼굴이 조각조각 되어 있다. 방아오름에서 작년의 시산제 기억을 더듬는 희용형은 잠시 쉬기로 하고 병선형과 둘이서 분기점까지 간다.
1250 분기점에 이르니 여러 사람들 런치를 즐기고 있다. 희열과 만족의 표정이 얼굴에 가득 가득 열려 있다. 순간 하늘에 용구름 솟은 걸 보고서 병선형 그걸 놓치지 않는다. 남벽을 배경으로 인생 샷 남겼다.
돌아가는 길이다.
홀가분하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신바람 불어 가며 걷는다. 발걸음 가볍다. 방아오름 도착하니 희용형 자연에 온 몸을 맡기며 쉬었다며 흐뭇해 했다. 그런데 갑자기 희용형 달리기 시작한다. 뭔 일이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쉬던 곳에 부부도 같이 쉬었는데 부인이 웃옷을 남기고 가는 바람에 그걸 전해주러 맹렬히 달린 것이다. 20분 쯤 달려 돌려주었다며 에피소드 한 자락을 남긴다. 기사도의 으뜸이다. 1335 윗세로 돌아왔다. 남벽분기점서 45분 걸렸다.
바로 하산길로 접어 들었다.
오면서 보지 못한 것이 모두 다 보였다. 이렇게 신비로울 수가 있나. 발걸음 하나 하나 떼어 놓기 아쉽고 아쉽다. 진달래 , 고사목, 구상나무가 무리지어 다가 왔다. 노루샘터가 흰 빛깔을 내보이고 기암절벽과 병풍바위가 선명하게 다가 왔다. 오르던 길 사해가 구름이었는데 어느새 신록의 바다로 덮여 버렸다. 꿈틀 꿈틀 대는 모습이 아기의 몸짓같고 요리조리 설렁설렁 숨었다 드러내는 것이 선녀와 나뭇꾼의 소꿉놀이 같다.
드넓은 바다를 보노라면 처음엔 뻥 뚫리지만 곧 흥분이 사그라드는데 신록의 망망대해는 보아도 보아도 전혀 지겹지 않다. 오히려 행복감이 열렬히 밀려 온다. 볼록 볼록 오름 천지가 열심히 마실을 다니고 있다. 맑고 깨끗한 햇살과 저멀리 바다의 물살과 어울려 열폭 아니 백폭의 그림을 헌정하고 만다.
내려가는 동안 올라오는 여행객들 많은데 여성은 가뿐한데 남자들만 쎅쎅거린다. 왜 이러는 것인가.젊은 친구들인데 산을 평소 접하지 않고 엉겁결 여행와서 한라를 접한 모양이다.
1455 영실에 도착하니 다들 탑승해 있었다. 산의 정기를 받아서 인지 행복해 보였다. 총무는 어리목에서 영실로 차를 이동시키고서 한 잠 취했다고 한다.
40분을 달려 1540 리조트 도착했다. 곧바로 휴식에 들어간다. 1800까지 쉬기로 하고 리조트내 해수 사우나에 몸을 맡긴다. 총무에 따르면 본인의 피부병까지 낫게 했다는 정말 좋은 사우나이다.
드디어 1830 대포동 해송횟집에 도착한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이다. 별도의 공간에서 횟감 한 상 그득 차려두고 17와 21도를 오고 갔다. 만석이형은 소맥을 즐겨한다. 다들 홑소주를 즐긴다. 다금바리 돌돔회 즐비한데 우리는 일십삼만원 참돔을 즐긴다. 433,000윈이 나왔으니 삼키로는 먹었나 보다.
횟집 앞으로 소나무 버쩍 서 있고 계곡이 졸졸거리는가 싶더니 바다가 저 앞으로 펼쳐져 있는 천혜의 경관을 고루 갖춘 맛집이다. 바다의 향기에 취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총무를 위해 대리운전을 불렀다. 총무님 맘 놓고 한잔 했다. 이 집을 안내해 주신 회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2000 리조트로 복귀하여 편의점서 소주와 안주를 준비한다. 그리고 곧바로 만찬을 벌인다. 저녁때 많이 먹고도 술은 아직 들어 갈 곳이 비어 있었다.
숱한 얘기들이 오고 갔다. 주로 화자는 희용형이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언변은 뭇 사람을 주눅들게도, 자신이 신이 되기도, 하지만 어쩔때는 사람들이 지겨워하기도 한다. 아재 개그의 달인으로 아세안게임서 금메달 서너개는 땄다는 얘기도 들린다. 어쨌든 우리 산악회에서 배출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희용형 없으면 무슨 재미로 시간을 때울까, 저으 걱정된다.
한창 17와 21도의 경계를 넘나들 즈음 용진이 형이 서울서 400키로 넘어 부산까지 달려서 왔다는 폭탄선언을 누군가 한다. 엔드라인을 넘는 사진에 자전거가 선명히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그 날 용진형 사건으로 다들 배꼽을 뽑았다.
그러고서 종원형과 안병규형이 역사적 통화를 한다. 카랑카랑한 그 목소리는 여전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야심한 시각에 잠을 깨운 통화였지만. 다들 취침을 하는데 종원형과 호랭이 토크는 멈추지 않았고, 병선형은 부부의 세계를 홀로 마스터했다. 종원형과 호랭이가 거실, 나머지는 방안 취침이었다. 또 하루가 저물었다. 우리의 사랑과 우정과 행복은 계속된다. 이 날 편의점 소주 안주비용은 53,650원이다.
(담호에 계속)
첫댓글 "우리가 여신과 함께 있으니" 와! 대단한 아부일세. '덤성덤성' ㅋㅋ
아이고. 사투리,나의 지방말 ㅎ 듬성듬성 고맙습니다
희용은 왜 호랑이 말이 언짢은겨? ㅎㅎㅎ 진짜 길게도 쓴다. 부지런하기도 하고, 일일이 시간과 가격까지 기록하다니...혼자서 뭘 챙기나 했더니 휴대폰에 적느라 바쁜 것이었군...암튼 장편 대하소설 대단하다... 수고 많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