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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양심 추적 (2) (창43:1-14절)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가 내린 선과 악의 정의는 간결하고 명쾌합니다. ‘선은 무엇인가. 뒷맛이 좋은 것이다. 선한 일을 하면 마음이 기쁘고 흡족하다. 남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긍지와 만족감이 반드시 따른다. 선을 행하면 보람과 즐거움을 느낀다. 악은 무엇인가. 뒷맛이 나쁜 것이다. 악한 일을 하면 마음이 괴롭고 가책을 느낀다. 자기혐오와 자멸감을 느낀다. 못할 일을 했다는 괴로운 후회가 따른다.’ 행동적 문학인이었던 헤밍웨이는 선악의 판단을 문학인답게 뒷맛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직감적 선악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과연 양심이 죽어 있는 사람들도 이 선악의 뒷맛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타인의 죄를 말할 때마다 너 자신의 양심을 반성하도록 하라.’ 고 하였고,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양심은 인간의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정이다.’ 라고 했으며,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궁전이고, 성령의 전이고, 기쁨의 낙원이고, 성도들의 영속적인 안식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죽어 있는 양심을 살리고 선민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일곱 가지 양심의 추적이라는 방법으로 저들의 마음을 압박하여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의 추적은 기근이었습니다. 기근이라는 것은 생활 속의 부족함입니다. 환경의 어려움입니다. 힘든 인생살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동지역 전역에 내린 7년 대기근으로 야곱의 일족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떠나서 마침내 요셉의 수하에 무릎을 꿇습니다.
두 번째의 추적은 거친 말이었습니다. ‘너희들은 정탐들이라.’ 는 거칠고 가혹한 말로 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당혹하게 만듭니다. 거친 말은 인간의 심령 속에 있는 깊은 죄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속을 뒤집어서 스스로 자기 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추적은 고독입니다.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앞날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으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20년 전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을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진정한 회개의 단계도 아니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여전히 저들의 마음을 향하여 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 번째 하나님의 양심 추적이 시작됩니다.
4.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날 이국땅에서의 외로움과 서러움, 가족과 형제들을 향한 그리움 등으로 20여 년의 세월을 살아 온 요셉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형들을 떠나가서 울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와 형제들과의 재회로 인한 감사와 감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요셉은 형제들 중에서 시므온을 결박합니다. 왜 요셉이 많은 형제들 중에서 시므온을 결박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가 세겜 족속을 학살하는데 앞장 섰던 것과 같이 요셉을 죽이는 일에도 주동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후일에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할 때 ‘시므온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한 것을 보면 그는 영악하고 차가운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르우벤 다음으로 연장자였기 때문에 모든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시므온을 옥에 넣은 요셉은 형제들의 자루에 곡식을 채우고 각인의 돈도 그 자루에 넣어서 가나안으로 올려보냅니다. 형제들이 길을 행하다가 객점에서 자루를 풀어보니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탐꾼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영영 햇빛을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겨우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이제는 도둑으로 몰리게 되었으니 그들의 당황하는 모습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창42: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고 하고..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서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선을 행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곡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행하는 동안 먹을 양식을 따로 주었고 또 곡식값으로 받은 돈을 다시 자루에 넣어주었습니다. 이것은 후일에 그들에게 다른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가족에게 돈을 받고 곡식을 파는 것 자체를 가당치 않은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기근을 내리신 것은 그들을 굶주리게 하실 목적이 아니라 기근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회복과 그들의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아주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사55:1-3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 말씀 속에는 네 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은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이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물 뿐만 아니라 생활필수품인 포도주와 우유도 값없이 사라고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축복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한 번 먹거나 마시면 다시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는 영적 양식이며 음료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반드시 구원할 것이라고 다윗과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축복은 백성들의 자의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라” “들으라” 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요셉의 형들은 갑자기 당한 일에 혼이 나서 덜덜 떨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갑작스럽게 발생하자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창42:28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투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는 간접적인 표현으로써 자신들의 일상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심 추적은 저들이 과거의 죄를 깨달은 후에 다음 단계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죄를 기억은 했지마는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죄가 생각날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분을 가까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고, 내 죄를 다 아신다고 느껴질 때, 내게 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내가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저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습니까. 에덴의 동산에서부터 노아의 홍수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에서부터 이삭의 하나님, 나아가 자신들의 아버지가 만났던 하나님에 대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이나 살았던 이야기이며, 아버지의 외삼촌이 자기들을 추격해올 때 보호해 주셨던 마하나임의 하나님! 큰아버지 에서를 만나기 전에 그렇게 두려워 떨었던 얍복의 하나님! 동생 디나의 사건으로 세겜을 도망쳐 나와 다시 올라가서 제단을 쌓았던 벧엘의 하나님! 얼마나 많은 하나님을 체험했지만 저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낸 적도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선택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저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특별한 경우에만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나님은 선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무상으로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각인의 자루에 돈을 도로 넣어주셨는데 저들은 오해하기를 그들이 애굽에 내려가면 도적 누명을 씌우려고 애굽 총리가 일부러 저지른 일로 착각한 것입니다.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 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정탐으로 몰려 혼이 났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크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저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교회에서 기적이 일어나면 야! 하나님이 정말 계시구나.. 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평소에는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사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병원을 가고, 먹고 마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다섯 번째 양심 추적은 대기근입니다.
*창43: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심하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베드’ 로서 맹렬하다, 무겁다. 라는 뜻입니다.
*출9:24 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시38: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 말의 뜻은 도무지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네 번에 걸쳐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양심을 추적하셨지만 아직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는 했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붙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정하면서도 통회하고 자복하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좀 더 강력한 추적을 시도합니다. 그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기근을 주신 것입니다. 주후 800년 경에 로마에 대기근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웠든지 기록에 보면 사람이 사람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셨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자기의 어린아이를 잡아먹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근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기근으로 저들을 몰아붙였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애굽으로 다시 가려면 반드시 베냐민을 동행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의 애굽행을 명령한 것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영육 간의 갈망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고통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이 뒤따르듯이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 가문으로 하여금 대기근이라는 추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극약처방에 대한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기근의 추적으로 세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첫째는 르우벤의 변화입니다.
*창42: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르우벤이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의 소욕 때문에 아비의 침상에 올랐던 자입니다.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지도력이 부족하여 장자의 명분을 다 감당하지 못한 자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찾아왔을 때 그를 죽이자는 동생들의 모의에 비록 죽이지 말자고 제의는 했으나 끝까지 만류하지 못한 무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요셉이 시므온을 결박하고 감옥에 수감했을 때에도 자신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동생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도망쳐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강한 책임 의식과 형제 우애를 회복하고 시므온의 구출과 베냐민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잡히기로 한 것입니다. 족장 시대의 가부장적 제도하에서는 아버지는 자식의 생사 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르우벤의 제의는 실제 두 자식의 생명을 야곱에게 합법적으로 위임하겠다는 비장한 결사 각오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일은 소돔 성의 멸망 시에 롯이 천사를 위하여 자기의 두 딸을 소돔 성 사람들에게 내어 주었던 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우벤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내어 준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둘째는 유다의 변화입니다.
*창43:3-5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성민으로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사람이며 가나안 족속 중에서 며느리를 삼았고 나중에 그 며느리와 함께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던 사람입니다. 유다가 비록 요셉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했다고는 하나 그도 요셉을 해치는데 동조한 사람입니다.
*창37:26-27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유다는 자기위주의 사람이요 계산에 치밀한 사람입니다. 가나안에 세속화된 사람이요, 영적인 일 보다도 육신의 일에 더 치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셋째 아들을 며느리에게 주기를 주저했던 사람입니다. 동생 야곱을 애굽에 팔았으면서도 그 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를 속였던 사람입니다. 그 후에 지금까지 20년 동안이나 살아오면서 죄책이나 후회가 없는 불신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야곱에게 베냐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다는 넷째 아들이었으나 맏아들인 르우벤의 간청이 아버지에게 거절되었고 둘째 아들 시므온은 애굽에 억류되었으며 셋째 아들 레위는 세겜의 살육사건으로 아버지에게 신용을 잃었으므로 자신이 나설 차례가 된 것을 인식한 것 같습니다.
*창43:8-9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르우벤은 베냐민을 못 데려올 경우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했지마는 유다는 베냐민을 담보하는 조건으로 자기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만약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영원히 죄를 짓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동생 베냐민을 위하여, 모든 가족들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놓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의 유다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기근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려는 비장한 결심과 과단성이 있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변화한 사람은 아들들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입니다.
*창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기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 아들들의 요청에 야곱이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낳은 마지막 아들마저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라고 고백한 이 말은 야곱이 자신의 인간적인 마지막 기쁨을 온전히 포기하였음을 뜻합니다. 즉 이것은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아끼고 사랑했던 것들을 완전히 다 내려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사닥다리 환상을 보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후손들에 대한 모든 약속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미모의 여성인 라헬을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라헬을 무자하게 하심으로 야곱의 고통을 더하셨고 마침내 두 아들을 생산하게 하셨으나 결국 라헬을 데려가심으로 야곱의 사랑의 대상을 바꾸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관심을 바꾼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헬을 잃어버린 야곱은 라헬 대신에 그녀가 낳은 요셉을 사랑했으며 요셉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마저도 내려놓도록 요셉을 애굽으로 옮겨버렸습니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야곱이 그의 죽음 앞에 삶의 방향을 잃어버릴 정도로 애통했습니다.
*창37:33-35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이런 야곱이 마지막 남은 라헬의 혈육 베냐민을 붙들고 온갖 사랑을 다 주면서 겨우 살아왔는데 이제 그 아들마저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들이 애굽에서 돌아와서 다음에 양식을 사러 갈 때에는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할 때에 그가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창42: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창43: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얼마나 인간적인 표현입니까. 영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육적인 야곱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고 얻은 새 이름인 이스라엘은 간곳이 없고 계속하여 옛 이름 야곱으로 살아가는 육신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야곱이 하나님의 계속되는 양심의 추적 앞에 고스란히 무너져 내립니다. 모든 가족이 다 죽어야 하는 대기근의 재앙이 왜 두 번째 왔는지, 그 이유도 모르는 체 오로지 애굽에서 양식을 사오라는 육신의 야곱에게 하나님은 가혹할 정도로 베냐민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그의 마음을 시험하고 계셨습니다.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야곱은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베냐민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합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 놀라운 선언은 제2의 얍복 강의 체험입니다. 다시 한 번 야곱이 이스라엘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에스더 왕비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할 때 한 말과 같습니다.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죽으면 죽으리이다.” 똑같은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말입니다. 신자는 이 단계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 희생적인 결단은 기독교적 역설의 진리를 다시 입증해 주었습니다. 실로 죽으면 살고, 썩으면 열매를 맺으며, 낮아지면 높아지고, 버리면 얻게 되는 놀라운 기독교적 진리를 생생히 보여준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비로소 하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내려놓았을 때 그는 반대로 만백성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고,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 베냐민을 내놓았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만은 도저히 내려놓지 못한다는 이삭은 없습니까. 아직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베냐민은 없습니까. 그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나의 아집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더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결단처럼, 에스더의 결단처럼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로다.’ 라는 자기희생적 결단으로 자기의 가장 귀중한 것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포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만을 완전히 의뢰하게 되고 하나님은 놀라운 은총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 놀라운 변화가 어디서 왔습니까. 이것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양심 추적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가루를 싣고 빵 공장에 가는 트럭과 시멘트를 싣고 벽돌 공장으로 가는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트럭 운전수는 휴식 후에 착각을 하고 차를 서로 바꾸어 타고 달렸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차가 바뀐 것을 알았지마는 ‘알게 뭐야’ 하면서 그대로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시멘트를 실은 차는 빵 공장으로, 밀가루를 실은 차는 벽돌 공장으로 간 것입니다. 공장 기술자들도 ‘알게 뭐야’ 하면서 빵 반죽에다 시멘트를 부어 넣었고, 벽돌 반죽에는 밀가루를 쏟아 부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빵은 가정으로, 벽돌은 집 짓는 현장으로 옮겨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집은 무너지고 이빨은 통째로 부셔졌습니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양심이 사라진 세상!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일가를 향해 양심의 추적을 계속하시고 마침내 그들의 죽은 양심을 살리셨습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장자크 루소는 말하기를 ‘양심은 영혼의 소리이며 욕정은 육체의 소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돌아보고 오늘도 나에게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양심 추적에 귀 기울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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