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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2월26일 주일 [(녹) 연중 제8주일]
[수도회]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청지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9,14-15
○ 제2독서 1코린 4,1-5
† 복음 마태 6,24-34
오늘은 연중 제8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굽어살피시며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쌓여 가는
노고와 걱정 가운데서도 탐욕과 이기심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를 깊이 신뢰합시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읍시다.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경제적 불평등과 이민족의 지배로 인해
군중이 겪는 빈곤과 박탈감, 분노와 슬픔은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군중을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쾌하면서도 감동적인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먹고, 입고,
자는 일, 곧 의식주입니다.
여전히 절대적 빈곤층이 지구상에 넘치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모질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며 걱정하는 것은, 절대적 빈곤층이 겪는 고민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넘치는 먹거리들 가운데 골라야 하는 어려움을
느끼고,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건강 관리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옷장에 가득 찬 옷들을 보면서도 ‘입을 옷이 없다.’며 한숨을 쉬고,
남들이 살고 있는 집과 자동차, 연일 텔레비전에서 등장하는 멋진
남녀들의 모습을 보면 없던 걱정도 되살아납니다.
우리의 걱정거리가 정말 우리가 살고 죽는 본질적인 고민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걱정거리 이전에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해 온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을
실천해 왔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내가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고, 더 잘 입는’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고,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나를 더 귀하게 여겨
주시고, 훨씬 더 잘 입혀 주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내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게 한다면, 나는 분명히 재물의 풍요로움에 마음이 갇혀,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로 살지 못하고, 내일을 미리 오늘로
앞당겨 사느라,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잊고
살아도, ‘내 바위, 내 구원’이신 하느님께서는 나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하느님을 재물보다 첫번째 두는 사람
2017년 가해 2월26일 연중 제8주일
제1독서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4-15
제2독서
<주님께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4,1-5
복음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4-34
몇 주 전에 갑곶성지에서 운영하는 영성센터에 어느 성당의 중고등부
피정이 있었습니다. 피정을 마치면서 피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받았는데, 그 중 불만 사항 1위가 식사인 것입니다. 식사 양이 적어서
배고파서 밤에 잠을 못 잔 학생도 있더군요. 이런 대답을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에 주방 팀장님께 어떻게 된 일인지를 여쭤 보았습니다.
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반찬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뷔페식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 덜어갑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반찬만 가득 담아 갔고, 그래서 딱 하나의
반찬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반찬이 떨어진 것을 모든 식사
양이 적다고 불평을 해댔던 것입니다. 부족한 한 가지에만 집중하다보니
모든 것이 다 부족하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문득 어렸을 때 먹던 어머니께서 싸주셨던 도시락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이야 학생들은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먹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도시락을 싸갔습니다. 그때의 반찬은 어떠했을까요? 딱 한 가지 반찬,
그것도 주로 거의 김치나 깍두기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소시지라도
싸오는 날에는 그 주위에는 반의 모든 친구들이 모여서 한 조각
얻어먹으려고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에 먹었던 밀가루 소시지가 떠올려져서 안식년 때에 밀가루
소시지에 계란을 입혀서 요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최고의
반찬이었는데, 커서 먹은 소시지는 도저히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퍽퍽한 것이 뭐 그렇게 맛있다고 난리를 쳤을까요?
어렸을 때에는 반찬 한 가지에도 만족하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만족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음에 위축이 되고 또 불평불만을
갖게 됩니다. 부족한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커다란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두
주인으로 하느님과 재물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이 주인인 것을
이해하겠는데, 왜 재물이 주인이라고 하셨을까요? 바로 지금의 우리들
모습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재물 앞에서 굽실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굽실거리는 종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우리를 만드시고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재물은 우리를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하늘의 새나 들에 핀
나리꽃들이 특별한 노력 없이도 살아가는데,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재물을 첫 번째 자리에 두기 때문에
온갖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종이 받는
최고의 축복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경고하십니다.
재물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비유 말씀
38가지 중에서 16개가 재물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재물 자체가 나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재물을 하느님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첫 번째 자리에 두는
사람은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버리고 대신 작은 것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기쁨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야 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질투는 언제나 타인과의 비교로 인해 생겨나며, 비교가 없는 곳에는
질투도 없다(프랜시스 베이컨).
오늘은 나이떡과 볶은콩을 먹는 날이라고 하네요.
사람들의 판단이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닙니다.
브라질의 사회 운동가 까마라 주교는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물으면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교인들과 대화할 때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거나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실천하면 또라이 취급
받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이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 굳이 기준이 맞춰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맞춘다면 어떨까요? 보다 더 올바른 삶, 그리고 확고한
기준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청지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2월26일 연중 제8주일
이사 49,14-15; 1코린 4,1-5; 마태 6,24-34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청지기
살면서, 특히 우리나라의 안타깝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서, 그저
열심히 살고 재력과 금력을 다 지닌다 하여도,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면, 아무 쓸모가 없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시종이요,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의 신비, 선과 정의를
관리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 근본 사명을 소홀히 하며, 다른
데 마음을 두고 힘과 열정을 쏟는다면, 우상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려면, 무엇보다도 신비의 샘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늘 생각하고 그분의 말씀을
밤새도록 묵상할 때, ‘송이꿀보다 더욱 단’(시편 19,10) 말씀의 맛이
온몸에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
좋음을 자신 안에만 가두어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으신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했다면,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깨달을 수는 없기에, 완벽하게
실행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나를 찾아오시어 머무르시는 그만큼의
신비를 품고 다른 이들을 만날 때, 하느님이 드러나고 그분의 신비가
모든 이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 선교’입니다.
하느님 신비의 청지기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않습니다
(마태 6,24). 세상과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것은 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필요가
인간의 판단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절대 중심’,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목적’ 자체인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인이 제 몸에서 난 아이를 가엾이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넓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이사 49,15). 따라서
하느님 신비의 청지기는 그 사랑을 믿고, 세상이나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내 삶의 결정적인 길잡이로 확고히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과 성실성이 우러나옵니다.
하느님의 고귀한 보물인 자기 목숨보다 있다가도 사라져버릴 ‘몸’과
‘재물’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좇으며,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는 그 순간마다,
거저 쏟아부어주시는 은총을 헛되이 버리며, 영혼을 썩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내일의 근심걱정은 주님께 맡겨드리고,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열심히 찾으려 힘써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신비를 올바로 관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도 곁들여 주실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누구이며, 하느님의 신비를 잘 관리하고 있는지 되새겨보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26일 연중 제8주일.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 34)
믿음과 걱정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믿음보다는 걱정에 더 가까운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살게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지 걱정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과 괴로움까지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을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은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모든 걱정에 앞서 주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시간입니다.
주님안에서 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진정한 삶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 힘으로 결코 살 수 없습니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게하는 이 믿음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26일 연중 제8주일: 가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라!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부를 이루어 안락한 생활, 행복을 보장받는
듯하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생존
자체는 물론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의혹감을 갖게도 된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의
힘에만 의존했던 인간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두려움을 갖게 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오늘의 전례는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보다 하느님께 더 의지할
때 ‘보다 더 인간다워’질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의
섭리에 의탁하지 않는다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제1독서: 이사 49,14-15: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제1독서에서도 신뢰와 희망에 관한 메시지가 모성적인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15절) 하느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이어서 결코 깨뜨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낙태를 보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결코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의 당신 백성에 대한 사랑이(이사 54,8 참조) 자기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호세 11장) 또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
(호세 1-2장; 이사 1,21; 6,4-5; 예레 2,2; 3,1.6-12; 에제 16장.23장
참조)으로 비유되지만, 모성적 사랑이 더 감동적이지 않는가? 그것은
모성적 사랑이야말로 완전히 무상적이며 온유함의 극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계시다. 하느님을 신뢰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우리의 신뢰심을 키워가야 한다. 그분의 섭리는 우리의 삶 매 순간마다
현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숨 쉬는 공기, 빛을 비추어주는 해, 갈증을 풀어주는 물, 밭에서 자라고
있는 채소, 우주 공간으로 튕겨나가지 않도록 하는 만유인력의 법칙,
그리고 심장이 규칙적으로 잘 뛰어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것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이다. 우리는 모두
이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는 그 무한한 사랑의 숨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맑은 눈으로 모든
창조물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지를
이해하고, 나아가 내일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24절) 여기서 말하는 맑은 눈이란
우리가 만든 우상에 빠지지 않을 때 가질 수 있다. “하느님과 재물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느님의 뜻은 재물의 요구와 대립된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한다는 것, 즉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형제의 요구에 이기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쌓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라는 즉, 재물에 대한
이기주의적인 예속으로부터 해방을 선택하라는 권고가 내포되어있다.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우상을 부숴 버려야 한다.”
(G. Barbaglio, in I Vangeli, Assisi 1975, p. 19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25-32절)
예수님께서는 게으름이나 준비 없는 태도를 옹호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다만 물질적인 것들을 가장 중요한 듯이 여기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물질적인 것에 온통
신경을 쓰는 모습을 나무라시는 것이다. 자기 운명을 자기가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실 곳이 없게 된다.
그러기에 신앙을 잃게 되며 “믿음이 약한 자들”(30절)이 된다. 믿음이
약해질 때 걱정이 나타나고 삶을 병들게 한다.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27절) 믿음으로 그 걱정을
없애야 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오늘 말씀의 요약이다. 이
말씀은 삶의 모든 차원과 가치의 균형을 다시 세워줄 수 있는 삶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삶을 살 때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인간은 기도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그에 대해 감사를 드리지만,
그에게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는 일이다. 기도와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인간에게 음식을 마련해 준다.”
(S. Kierkegaard)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34절)는 말씀은 지금 이
순간을 잘 살라는 말씀이다. 이 순간을 잘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우리를 온통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써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제2독서: 1코린 4,1-5: 주님께서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모든 인간적 타산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께
의탁하라고 한다. 코린토 교회의 분열이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머지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연중 제8주일
2017년 가해 2월26일 연중 제8주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마태 6,24-34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분이 길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종이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배고 고픕니다.
도와주십시오.’ 사람들은 글을 읽었지만 그냥 지나가곤 했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분이 종이에 이렇게 글을 고쳐서 썼습니다. ‘저는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하늘과 예쁜 꽃을 보고 싶답니다.’ 사람들은
구걸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너무나 쉽게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동정하게 되었고, 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니,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매 미사에 외국의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자고
강론을 해도 교우들은 쉽게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하나의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치킨 집에서 먹다가 버린 닭을 주어서
먹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어머니는 작은 접시에 아버지가 주어온 닭을
올려놓습니다. 아이들이 먼저 먹으려고 하자, 어머니가 같이
기도하자고 이야기 합니다. 비록 아버지가 주어온 닭이지만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닭을 먹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당
앞에 작은 모금함을 놓았습니다. 영상을 본 많은 교우들이 정성껏
성금을 하였고, 어려운 나라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마음이 움직이니,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성금을 하였습니다.
저도 작은 경험이 있습니다. 본당에 성모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제게 얼마간의
정성을 가져 오셨습니다. 저는 형편이 어려운 자매님이 성모상을
모시고 싶어 하셨고 제게 얼마간의 성금을 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성모님을 모실 수 있고, 그 자매님의 소망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주일 후에 성모님을 모실
수 있을 만큼의 정성이 모였고, 우리들의 손으로 성모님을 모실 수 있는
작은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성모님을 모시는 날, 자매님께서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토아학파인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인간의 가치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에 결정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이 바로
자기 마음의 크기를 더욱 더 키워서 세상에 주님을 알리는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조그마한 틀 속에
가두어 놓고만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결혼을 앞둔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아파트를 준비했고, 여자는 그 아파트에서 살아갈 살림살이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했고,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여자는 결혼 비용으로 준비한
것들을 아버지를 위해서 써야했고, 살림살이를 장만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나도 아파트가
없습니다. 둘은 할 수 없이 작은 월세 방에서 아무것도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아버지는 병세가 호전되었고,
사업도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여자는 다시 살림살이를 마련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아파트가 없는 것이 생각났고,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불평을 어머니에게
이야기 했더니, 어머니가 이제는 말 할 때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말을
합니다. ‘사실 아버지의 빚은 남자가 아파트를 팔아서 갚았고, 남자의
월급에서 아버지의 병원비를 지급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서 도움을 준 남자가 생각났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파트를 내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고,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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