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2014-12-16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심종미 수녀
아버지의 마음까지 가기
우리는 요즈음 소통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소통은 의사소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의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가 아닌가. 가정, 학교, 일터에서 소통이 잘 되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소통이 잘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자리’에 서보는 것이 필요하다. 영어에서 ‘이해하다understand’는 ‘아래under에 서다stand’, 곧 상대방과 같은 위치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 밭에 가라 하신 이유가 뭘까 생각하며 아버지의 마음까지 가본 것이 아닐까. 여기서 ‘포도밭’은 결국 ‘아버지 마음의 자리’가 아닐까. 맏아들은 포도밭에 가서야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시고 계신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동안 무뚝뚝하고 엄격하게만 보였던 아버지, 아버지의 주름과 굽은 손과 축 처진 어깨, 아버지가 흘리는 땀방울에 담긴 힘겨움과 보람을 알고는 결국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아버지가 일구고 계신 포도밭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밭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거운 짐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 안에 담긴 참된 사랑을 깨닫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시고 오늘도 우리를 ‘포도밭’으로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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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비유>
마태오복음 21장 28절-32절, '두 아들의 비유'는
당시의 사제들, 원로들, 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포함해서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일을 하라고 했을 때,
한 아들은 싫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고 일하러 갑니다.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싫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일하러 간 아들은
죄 속에 있었지만 회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아들이 싫다고 대답한 것은 정말로 일하기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가겠다고 대답만 하고 가지 않은 아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을 가리킵니다.
(그 아들이 가겠다고 대답한 것은
실제로 일할 생각이 없으면서도 대답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인간들만 말씀하셨는데,
언급하시지 않은 두 부류가 더 있습니다.
대답도 잘하고 실제로 일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성모님입니다.
정반대로 싫다고 대답하고, 실제로 끝까지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을 안 믿고 신앙생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 될 말씀을 더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당시 사람들은, 특히 사제들이나 원로들이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를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구제불능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너희보다 먼저 회개했기 때문에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한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보다 먼저' 라는 말은 '너희는 나중에' 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들어가지 못해도 그들은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은 "너희도 회개하면
그들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회개를 안 하면 못 들어가고...)
여기서 '세리와 창녀들'이라는 말은 '모든 세리와 창녀들'이 아니고,
'세리와 창녀들 가운데 회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또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죄 속에 있었지만 회개하고 그 죄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어떤 사람을 죄인이라고 낙인찍으면
그 사람의 회개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정말로 회개했는데도, 그래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전과자라는 것만 보고 그의 회개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또는 직책이나 신분만 보고,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판하거나 착각하거나 자만심에 빠져 있다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회개할 생각도 안 하게 될 것입니다.
루카복음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경우에, 그는 그 자신이 말한 대로
다른 사람들처럼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을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그대로 죄가 되어버렸습니다.
죄 없는 사람의 교만죄는
그의 '죄 없음'을 가치 없게 만들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이 모두 위선이었음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세리의 경우에, 그는 실제로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뉘우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다른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자비를 청하기만 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죄인의 겸손한 회개는 그의 죄를 모두 없애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의 죄가 아니라 현재의 회개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모님처럼 죄가 없으면서 겸손한 사람들과
죄가 있었지만 겸손하게 회개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다른 죄는 없지만 교만한 사람들은
그 교만죄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만죄 외에는 다른 죄가 없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교만죄는 다른 죄들을 짓게 만드는 방아쇠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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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을이 깊어 가면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슬슬 ‘가을 야구’를 입에 담습니다. 응원하는 팀의 성적에 따라 각자의 심기도 달라집니다. 운동 경기 관람에 지나치게 빠지면 정작 중요한 일에 소홀하는 부작용을 낳지만, 건전하게 즐기는 것은 기분 전환에 좋고, 가족과 동료 간의 대화에도 활력소가 됩니다. 주변 신부님들이나 본당 청년들과 함께 야구장에 가는 것은 제게도 늘 즐거운 일입니다.
요 즘은 미국에서도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하여 그 중계방송도 가끔 보는데, 올해가 미국의 유명한 야구 선수 루 게릭의 감동적인 은퇴 연설 75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포의 강타자로 실력이 출중하였습니다. 그를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한, 이른바 ‘루 게릭 병’이었습니다. 루 게릭은 신경 조직이 붕괴되는 이 희소 질환으로 말미암아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그만두어야 했고, 은퇴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뜹니다.
“여 러분, 지난 2주간 여러분은 저의 어려움에 대해 들으셨겠지만, 오늘 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7년간 이 야구장에서 늘 호의와 격려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고별사는 자신의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감사와 찬사로 이어집니다. 또한 이러한 이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이 얼마나 크고 특별한 축복을 받은 행운아인지를 고백한 뒤 이렇게 마칩니다. “비록 저는 아주 나쁜 병을 안고 있지만, 아직 살아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만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불행은 분명히 고통스럽지만, 지금껏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면서 ‘현재’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가혹한 운명일지라도 결코 그의 삶의 의미를 허무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신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인기를 끄는 책은 대부분 건강과 관련이 있거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들입니다. 그 책들에서 주장하는 건강과 성공의 비결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스스로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 몇 권 읽고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쉽게 바꾸고 다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생각에는 자신의 가치관, 고정 관념, 사고방식, 자존심, 본성적 욕구 등이 걸려 있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전 생각들을 비우고 새로운 생각이 자리 잡아야 비로소 바뀔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각을 비우는 것은 수련으로도 어렵습니다. 생각을 버린 빈자리에 금방 다른 생각들이 들어차서 우리를 점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는 말이 있듯이, 실제로 우리는 하루에 오만 가지 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꽉 찬 생각을 비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새로운 생각을 불어넣어서 불필요한 생각을 몰아내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불어넣어야 하는지요? 우리 신앙인에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례력에 따라 그날의 독서와 복음이 정해져 있습니다. 비록 매일 미사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녁에 자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의 말씀을 읽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생활을 하면서 온갖 근심과 잡념이 들 때, 그날 읽은 말씀을 떠올리고 거듭거듭 생각하면 그 말씀이 우리 안의 오만 가지 생각을 밀어낼 것입니다. 생각이 말씀으로 단순해지며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아들은 아버지가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일렀을 때 “싫습니다.” 하고 거절합니다. 그러나 큰아들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말씀이 계속 맴돌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생각이 바뀌어’ 아버지의 뜻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말씀을 늘 기억하고 되새기고 살면 번잡한 세상에서 올바른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주님께서 바라시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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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하지만 나중에는 따릅니다. 작은아들은 따른다고 해 놓고서 실제로는 모른 체합니다. 인간의 변덕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모습은 있기 마련입니다. 변덕은 본능인 탓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변덕에는 너그럽지만 타인의 변덕에는 날카로워집니다.
하느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의 마음이 오락가락하니까 주님께서도 그러시려니 생각하지만 그것은 유혹입니다. 변덕은 인간의 용어이지 주님께 속한 말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이 변덕 부린다고 선뜻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랑이신 주님께서 인간의 변심을 참아 주지 못하실 리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인간의 변덕을 주님께 적용하지 말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을 두둔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 세리는 남자들이 경멸하던 직업이었습니다. 창녀 역시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습니다. 말단의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오히려 기존의 신앙인들은 아직도 헤매고 있다고 질책하십니다.
신앙인은 세례성사 때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때의 다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첫 길이 변덕 부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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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사랑으로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라도 회개하여 당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만 희망을 두고 의지한다면, 우리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비추어 주시고 지켜보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는 게 병?
-박용식 신부-
고사성어 식자우환(識字憂患)은 '아는 게 병'이라는 뜻으로, 올바로 알지 못해 걱정거리가 되거나 피해를 볼 때 쓰는 말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 역시 이와 비슷한 뜻으로 쓰입니다.
반대로 '아는 게 힘'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그 나라 말을 할 줄 알아 큰 힘이 될 때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언젠가 한 중년 남성이 지하철 안에서 붉은 성경책을 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자기를 모교회 담임목사라고 소개한 남성은 "성경을 읽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주 예수를 믿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좀 조용히 해달라"고 항의하자 중년 남성은 더 큰소리로 "강릉과 동해안에 큰 수해가 난 것은 주님을 믿지 않아 받은 벌"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엄마 품에 안겨 새록새록 잠을 자던 아기가 고함소리에 깨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승객들은 중년 남성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며 웅성거렸습니다. 이에 중년 남성은 승객들을 향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하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지하철 문이 열리자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그 붉은 성경책의 주인인 중년 남성은 "예수님 말씀대로 복음을 선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면서 잠자리에 들었겠지요? 그러나 그 행위는 복음 선포나 증거의 삶을 실천했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과 아이에게 일종의 폭력을 휘두른 것입니다.
이 중년 남성이 바로 '식자우환'이라는 고사성어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는 신앙을 알지만 잘못 알아서 이웃과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그 뜻을 세상에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뜻에 어긋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큰아들은 처음에는 "안 간다"고 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일을 하러 갔습니다. 아버지의 똑같은 말씀에 작은아들은 순명하며 "일하러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일을 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 중 아버지 뜻을 따른 것은 큰아들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아들처럼 엄마가 하라고 시킨 것을 실천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어린이는 엄마가 저녁기도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숙제 끝내고 나중에 혼자 할게요"하고 말해놓고 기도를 안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한 어린이는 방 청소를 하라는 아빠 말에 싫다고 투정을 부린 후 마음을 바꾸어 방 청소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하느님 뜻을 따른다고 말해놓고 거역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큰아들처럼 처음에는 그 뜻을 따를 마음이 없었지만 곧 뉘우치고 따르는 사람인지 말입니다. 혹시 지하철에서 하느님 뜻을 거역한 중년 남성처럼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역해 버린 사람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받기 전에는 큰아들처럼 포도원에 가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자녀가 된 후에 포도원에 가겠다고 마음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포도원에 가야 하고 당연히 하느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만을 믿겠다고,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겠다고, 기도하며 봉사하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병이 되지 않고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는 것을 잘 실천하는 진짜배기 신자들은 신앙에서 큰 힘과 활력소를 얻지만 실천하지 않는 무늬만 신자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작은아들이 되지 말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큰아들이 됩시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참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롭게 일어서려는 겸손함
-최인각신부-
참으로 아름다운 삶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며,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마을에 ‘착하고 의롭다고 소문난 신사’와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신사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깔끔하게 차려입고 출근을 하였고, 그 여인은 아침이 되어서야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두 사람 모두 죽었는데, 그 여인은 천국에서 아주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는데 반해 그 신사는 어두운 곳에서 지친 모습으로 울고 있었답니다. 이 모습을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하늘나라 문지기인 베드로 성인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저 신사는 아침 출근 때마다, 아침에 퇴근하는 여인이 무슨 일을 하는 여인인가를 생각하며 그 여인의 단정치 못한 행동을 상상하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 신사의 삶은 점점 자신이 상상한 대로 바뀌었고, 그 여인은 아침에 출근하는 신사를 보며 자신의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일렀을 때, 맏아들은 “싫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반면에, 다른 아들은 처음에는 “예”하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시며,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예제키엘 예언자는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며, 현재의 의인이 미래의 의인이 아닐 수 있음을, 현재의 죄인이 미래의 죄인은 아닐 수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최종적으로 하시는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잘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순교 성인들 가운데에도 처음엔 신앙을 배교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죄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서, 장렬하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여 승리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삶은 겸손한 삶’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의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이미 교만의 길을 걷고 있었고, 내가 잘났다고 뻐기고 있을 때 이미 빗나간 삶을 살고 있었고, 내가 많이 알고 있다고 느꼈을 때 이미 지적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내가 건강할 때 함부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자신의 이기심과 허영을 버리고 겸손함을 추구할 때, 나는 항상 인정받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았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 주변 여건이 어려울 때, 나는 겸손해질 수 있었고, 그때마다 하느님은 제 곁에서 전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나를 아름답게 해 주는 것임을 새삼 느끼고 깨닫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회사 사정이 너무 어려워, 열심히 일해 번 돈은 빌린 돈을 갚고 직원들 월급을 주고 나면 항상 적자가 나곤 해서, 집에 생활비도 갖다 주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밤에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새벽에 마지막 손님을 내려준 곳부터 집까지 걸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꿈꾸며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부인이 해 주는 발 마사지를 받으며 잠시 쉬고 또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고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자기 처지에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시리라는 것을. 지금은 어쩌다가 잘못되어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고 일어서려는 겸손함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별님이 반짝이며 밤길의 친구가 되어주며 희망을 선물해 주듯이, 하느님께서 새롭게 일어서려는 이의 친구가 되어 복을 선물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
-허영엽신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감옥에 있는 동안 종교로 귀의해 세례를 받고, 회개의 삶을 살다가 죽기 전에는 장기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형집행이 끝난 후 그를 신앙으로 이끌어준 선교사에게 기자들이 질문했습니다. “그토록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회개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려고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신학교에서 강의시간에 교수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천국에서 세 번 놀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와! 내가 드디어 천국에 왔네!” 두 번째, “어떻게 저 사람도 천국에와 있지?” 세 번째, “어? 천국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네?” 물론 우스갯소리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은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세리나 창녀들의 죄를 두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인 척하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염두에 두고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종교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인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천시와 냉대를 받던 세리나 창녀들은 늘 자신들의 죄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관장 자캐오와 세리 마태오, 창녀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세속적으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진정한 신앙인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나는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다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부단히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다가가는 삶입니다. 또한 회개는 평생 끊임없이 계속되어야하며,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제 용기를 냅시다. 우리의 손과 발이 착하고 좋은일을 하는데 더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입이 불만과 불평이 아닌 칭찬과 평화를 노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입니까?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반명순 수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가 주님의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굳셈을 허락해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하느님을 아는 것과 그 실천은 사람이 지닌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앎은 완고함을 불러올 뿐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2327절)에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본문의 후(後)문맥은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33ㄱ절)하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3346절)로 전후 문맥이 서로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 대한 일차적 청중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23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권한이 어디서 오는지를 추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누구로부터 받은 권한인가를 반문하여 그들의 말문을 막은 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28ㄱ절) 하시며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똑같이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28절) 하고 일렀을 때, 두 아들의 즉각적인 대답은 순종과 불순종으로 드러납니다. 맏아들의 불순종은 한순간 아버지를 상심하게 했지만, 그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감’으로써(29절) 아버지의 상심한 마음은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응답만 했을 뿐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은 작은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실망은 그 아들이 ‘네’라고 순종했을 때 얻었던 기쁨을 뒤엎는 결과가 되었습니다.(30절)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은 두 아들의 ‘싫습니다.’와 ‘가겠습니다.’라는 단순한 응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도밭에 ‘일하러 갔는가, 가지 않았는가.’ 하는 실천적 행동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포도밭’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이사 5,17; 예레 12,10 참조) 또는 ‘하느님 나라’(마태 20,16)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바라는 ‘아버지의 뜻’은 “의로운 길”(32절)에 있습니다. 지혜문학에서 ‘의로운 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생활방식을 뜻합니다.(시편 1,16 참조)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의로운 길’을 어떻게 받아들여 행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이 유다의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ㄷ)고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길을 닦으라고 외쳤습니다.(3,23 참조)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를 믿고 회개했지만 유다 지도자들은 요한이 전하는 의로움의 길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 전에 먼저 ‘의로운 길을 가르치는’ 요한을 거부했던 것입니다.(32절) 또한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도 깨닫기는커녕 요한의 말을 끝내 믿지 않았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 요한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21,11.26.46),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3,15) 분들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요한은 함께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3,2; 4,17) 선교사명을 수행했습니다.(12,34; 23,33) 그러므로 요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되고, 이것은 곧 하느님께 대한 태도가 됩니다. 따라서 요한에 대한 거부는 예수님에 대한 배척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628)라고 합니다. 비록 죄인이라 일컫는 세리와 창녀들이라 할지라도 요한이 전하는 의로움의 길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에 그들은 유다 지도자들보다 먼저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31ㄷ절)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파견되어 ‘의로운 길’과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생명의 길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주겠습니다.”(야고 2,18)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믿음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유다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의 믿음이 생활화되기를 촉구하십니다.
묵상(Meditatio)
예수님께서 그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ㄷ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먼저’라는 우열 앞에 ‘어떻게 그들이….’라는 사고의 기준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그들이….’라는 ‘편견’은 이웃과 우리를 가르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편견은 이웃을 배제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이웃의 선행보다 악행을 먼저 보고, 선행에 대한 찬사보다 악덕에 대한 기억만을 고집합니다. 이는 “가겠습니다.”(30ㄴ절) 하고 하느님을 향해 가지 못하는 빈곤한 믿음의 발로일 것입니다. 이웃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외시키는 마음에는 하느님의 자리도 없다는 것을 제 마음의 터전에서 다시 만납니다.
기도(Oratio)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예수님께 정향된 삶
-전진 신부-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육신을 입고 현실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기에 항상 갈등과 긴장과 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방향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에 기울어지는 것이 우리의 약하고 부족한
현실입니다. 칼날 위에 서 있듯이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칼에 베이듯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가 비록 상처를 입고, 걸려
넘어지더라도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걸려 넘어지면 그에 맞갖는 도움과 은총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
방향을 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십자가의 예수님을바라보면서, 나의 삶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응답하셨을까, 또 어떻게
행동하셨을까’를 헤아리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 허물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나의 가슴앓이 했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보다 이미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만을 바라보면 하느님 앞에 당당히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 존재는 너무도 작고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허락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으로 알아듣고 하느님 뜻을 따라 기쁘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콩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콩을 너무나도 싫어했습니다. 밥 안에 콩이 들어 있으면 일일이 다 골라내면서 밥을 먹는 사람이었지요. 따라서 자신의 밭에서 콩이 나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더군다나 올해에는 콩이 전체적으로 풍년이라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콩이 아닌 팥은 오히려 가격이 올라서 팥을 심은 사람은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답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 부디 저에게서 콩을 거두시고 팥을 내려주십시오. 경제적으로 저에게 윤택함을 가져다 줄 팥을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열심히 기도했다고 콩 심은 곳에 팥이 나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 스스로 팥이 날 수 있도록 전혀 노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터무니없는 기도는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담처럼 콩 심은 곳에 콩이 날 것이고, 팥 심은 곳에 팥이 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노력입니다.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은 채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불만 속에 빠지고 있다면 이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의 성실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두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큰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했으나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일하러 갑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처음에는 일하러 가겠다고 했으나 정작 가서 일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말만 하는 아들이 아니라, 가서 직접 일한 아들이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말만 하는 기도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걸맞게 자신의 몸으로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이러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이고, 우리 역시 이 마음을 간직하면서 적극적인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냈다면 그것은 커다란 손실이다. 하루를 유익하게 보낸 사람은 하루의 보물을 파낸 것과 같다. 하루를 헛되이 보냄은 내 몸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아미엘).
끈질긴 씨름꾼
-김찬선신부-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잘 못했을 때 잘 못했다고 빌라고 하면 얼른 빕니다.
그래서 부모는 형을 늘 착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에 비해 동생은 끝까지 자기 잘못을 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저 놈의 고집은 쇠심줄이라고 야단을 치고
고집이 센 작은 아들을 안 좋게 생각하며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크면서 보니까 그 반대였습니다.
형은 빌기도 잘 하였지만 잘못을 반복 하였습니다.
잘못하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잘못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기에
잘못했다고 쉽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동생은 쉽게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 잘못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을 가지고 오랫동안 씨름을 하고
충분히 반성을 한 다음에는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형은 씨름하기 싫어 자기 잘못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동생은 자기 잘못을 오래 가지고 씨름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형은 뭘 하라면 예라고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잘 하여 칭찬을 받았는데
동생은 못하겠다거나 토를 달거나 하여 늘 부모 속을 썩였습니다.
그런데 크면서 보니
형은 예라고 대답은 잘 하였지만 실천을 하지 않고
동생은 쉽게 대답하지는 않지만
한 번 하겠다고 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형은 동의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쉽게 대답을 한 것이고,
동생은 마음으로 동의를 해야지만 대답을 한 것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중히 여긴 것은 형이 아니라 동생이고
부모의 말씀에 진심을 가지고 대한 것은 동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도 두 아들 얘기가 나옵니다.
성서에서 포도밭은 늘 주님께서 돌보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즉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님 포도밭에서 일할 사람은
봉사하라는 주님의 뜻을 소중히 받드는 사람만 봉사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개떡만치도 못하게 생각하면
예라는 대답 수 천 번 해도 실천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 즉 주님 포도밭을 주님처럼 돌볼 사람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인 야곱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야곱은 결점투성이인 사람입니다.
욕심이 너무 많고 편애를 하였습니다.
야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그지만 하느님과 밤새 씨름을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씨름에서 이겨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에게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정말 결점이 많고 고집도 센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야곱처럼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결점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아니 결점을 가지고 하느님과 씨름하고
고집을 가지고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를 고집하던 것이 하느님을 고집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동이 틀 때까지
즉 하느님이 졌다고 할 때까지, 내가 이길 때까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조용한 명상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씨름이 기도입니다.
야곱이 야뽁 강 너머로 가족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아 동 틀 때까지 하느님과 씨름하듯 씨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새벽을 열며
옛날 어떤 왕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형인 왕의 지위를 이용해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동생이 국법을 어겼습니다. 그러자 왕은 이러한 명령을 내렸지요.
“왕의 동생으로써 이런 죄를 짓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특히 동생이기 때문에 더욱 더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너를 일주일 뒤에 사형을 시키도록 하겠다. 그러나 너를 특별히 불쌍히 여겨 일주일 동안이라도 왕처럼 즐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
동생은 기왕 죽을 바에야 실컷 즐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침마다 험악하게 생긴 장사가 나타나서는 “죽을 날이 엿새 남았소이다!”, “죽을 날이 닷새 남았소이다!”라는 식으로 외치고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생은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왕은 동생에게 잘 즐겼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동생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저기 저렇게 험악하게 생긴 장사가 눈을 부릅뜨고 시시각각 남은 시간을 말하는데 어떻게 즐길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누구나 죽을 날짜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단다. 그러니 어찌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겠느냐?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들은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이렇게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그것도 매일 아침에 며칠 남았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마지막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만 해주셨지요. 따라서 그 시간을 위해서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음에 하지 뭐...’, ‘지금은 피곤해.’, ‘조금 기다렸다 하는 것이 더 좋은거야.’라는 식의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 현재라는 시간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똑같은 명령을 내리지요.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먼저 맏아들은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뉘우치고서 일을 하러 갑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기꺼이 간다고 말을 하지만 가지 않지요.
이 맏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면서 살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 즉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나 창녀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지만 막상 회개할 것을 촉구하자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절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사제들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이 두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보다 행동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지금 당장 행동의 실천을 하라고 주님께서는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 응답하고 있나요? 혹시 둘째 아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매주 성당에 나오면서, 그리고 자주 기도하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들 자신의 변화는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그리고 그러한 실천은 나중에 시간 날 때 하는 것이라고 미루면서, 오히려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복음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지요?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큰 아들의 모습입니까? 둘째 아들의 모습입니까?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
-강영구신부-
+나는 분명히 말하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그대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음식점 현관에 너무도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이 있었습니다.
감탄하며 다가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생화(生花)보다 더 싱싱하고 아름다운 조화(造花)였습니다.
잎사귀에 달린 물방울도 물방울이 아니라 물방울처럼 생긴 합성수지 방울이었습니다.
감탄은 한번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생명도 없고 향기도 없는 그 조화(造花)에 두 번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온갖 지식과 명예, 지위와 재산으로 자신을 화려하게 겉꾸미고 거기에 말까지 번지러하게 하지만, 그의 삶에서 향기가 나지 않고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외모와 지위와 재산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산골짜기에 이름 없는 꽃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피어있습니다.
계절의 변화와 비바람 속에서도 끊질 긴 생명으로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찾지 않지만 벌과 나비와 갖가지 곤충들이 향기에 이끌려 찾아옵니다.
꽃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명망으로 자신을 겉꾸미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습니다.
당신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자기 격려하기
-조성풍 신부 -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권하는 말이나 행동이 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더욱 생각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받기 어려울 자녀는 오늘 복음에서의
작은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예’라고 대답만 했을 뿐
포도원에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사랑받을 자녀는 ‘예’라고 대답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는 자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두 아들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큰아들에게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큰아들은 처음엔 ‘아니오’라고 대답했지만, 뉘우치고서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의
부족함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격려하며 일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자신에게 실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서 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대상으로 하신 비유 말씀이라고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말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공인된 죄인들입니다.
오늘 말씀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 유대아의 종교와 정치를 장악한 실세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 사회가 보장하는 권위를 가진 이들입니다. 그들은 유대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권위 있게 해석하면서, 그 말씀을 가장 잘 따르는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은 아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그 시대 죄인들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그 사회가 인식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포도원에 가서 일한 아들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알려진 세리와 창녀들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유대교로부터 유산으로 받아 신앙의 핵심으로 간직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믿는 마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신앙인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내세이든 현세이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그 실천은 구약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출애 33,19)이고,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루가 6,36) 사람이 되는 실천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권위와 존경으로 치장한 지도자들보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더 잘 실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라는 그 시대 지도자들은 가진 것이 많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많이 알고 있다고 믿어져서 사람들 앞에 권위를 가진 이들이고, 사람들의 존경이 보장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 권위와 존경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것이 너무 소중하여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으면서, 율법과 성전 제물 봉헌만을 소중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행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일부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외치면서, 국민을 잊어버리고, 정권 장악과 그것의 연장만을 꾀하는 현상과 같습니다. 또한 오늘의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종과 같이 봉사한다고 구호로만 외치고, 실제로는 권위와 독선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들의 영광만 찾는 현상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르치신 ‘하느님 자비’의 실천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성찬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이다’, ‘쏟는 피다’라는 말씀으로 그 의미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에 충실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위해,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기에 그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입니다.
이 실천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일로 보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질서 안에 살고, 그 실천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어리석음이지만...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고린 1,1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우리를 위한 득과 실을 먼저 계산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만을 위해 하는 일은 허무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끝까지 긍정하면 그 말로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를 쓴 사람은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4)고 고백합니다. 이런 헛됨을 우리도 때때로 체험합니다. 남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해도, 어느 날 허무로 돌아갑니다. 때가 되면 사라져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우리 자신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협소한 시야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그 주간을 위한 신앙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미사는 앞으로 한 주일 동안 하느님과 함께 살겠다고 약속하는 신앙행위입니다. 미사는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의례입니다. 우리 자신만 보이는 우리의 협소한 시야를 치유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넓어진 시야를 가지고 새로운 한 주일을 위해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 따라 포도원에 일하러 가는 오늘 복음의 아들과 같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갑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성체를 몸속에 모시고 갑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서 아들 됨을 배워 실천할 것을 바라면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하느님
-조재형 신부-
예 전에 서서울 지역 교육 담당을 했을 때, 모범 구역장 반장에게 상패를 드렸습니다. 각 본당에서 2명씩 추천을 받아 주교님께서 시상하셨습니다. 상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하였거나, 공동체 발전에 공헌을 하였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했을 때 주어집니다. 또는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겼을 때 주어집니다. 저는 평범한 삶을 살아서인지 상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상은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도 중요합니다. 상을 받는 사람도 상을 주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명예와 기쁨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에게 상을 받아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상을 받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오 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는 방법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하 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업적을 보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를 보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다. 비록 잘못했다 해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열등감과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포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돌아와서 뉘우치면 상을 주십니다.
‘난 안 돼!’ 이 생각과 말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악의 큰 유혹입니다. 예전에 일제가 우리에게 심어주었던 ‘패배의식’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아픈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든 하느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부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비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오 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십니다. 맏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둘째 아들은 말은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입니다. 신앙은 생각이 아니고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비록 죄인으로 여겨지지만 ‘세리와 창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 당에서도 많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대림과 사순 시기에 특강이 있습니다. 봄과 가을에 성령기도회에서 피정을 준비합니다. 각 구역과 레지오에 성당 청소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봉사활동을 할 기회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우리가 조금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 상을 받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 사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도 상을 받을 것입니다. 가끔 감사 헌금을 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상을 받을 것입니다. 뒤에서 경적을 울리면서 비키라고 하는 차량에 기쁜 마음으로 차선을 바꿔주면서 살짝 웃는 형제님도 상을 받을 것입니다. 성적이 떨어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들에게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고 말을 하면서 보듬어 주는 어머니도 상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받는 길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은 우리가 생각만 바꾸면, 바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신 앙에 충실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오늘 제2독서는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살지 않으며 겸손하게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삶입니다.

촉망받는 아들의 회개
-권동국 신부-
오 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가장 핵심이 되는 두 주제인‘회개’와‘하늘나라의 수용’(마태 4, 17 참조) 중에서, 선결 요건인 회개에 대해 묵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마주합니다. 그들과 당신의 권한에 관해 논쟁을 벌이시고 난 후에, 오늘의 비유를 들어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신앙의 지식과 경륜에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앞서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으로,‘알면서도 행하지 않음’을 꾸짖습니다. 대답은‘예’를 하고서도 가지 않는 아들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행태에 대한 예수님의 불쾌함은 세리와 창녀만도 못한 사람이란 비난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평가는 결국‘믿지 않았다.’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가정을 해볼까요? 결국에 두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대면해야 합니다. 응답은‘No’, 행동은‘Yes’인 맏아들은 두려움 없이 아버지 앞에 나설 것입니다. 나아가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뵈며,‘다음번에는 더 좋아지도록 응답부터 고분고분해야지’하는 다짐을 하며 행복을 키울 꿈을 꾸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대답은 곧잘 해놓은 아들은 어떨까요? 여러분의 경험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기대치가 높은 자녀일수록, 아버지께 실망을 안겨드리는 일은 큰 두려움입니다. 아버지의 두터웠던 사랑과 신뢰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혼내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거두어 가실 것들을 상상하게 되고 두려워하며 피하게 될 것입니다. 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꼬여만 가서 자책감이 늘다가 자신을 저주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영문도 없이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다가 만나기 싫은 한순간에 아버지와 만나게 되고, 참 못난 모습으로 억지 용서를 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처투성이이기만 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실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혼내려 했다면, 이미 일이 벌어졌을 테니까요. 아버지는 아들을 내칠 꼬투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반성하고 올바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고 싶으실 테니까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혹시 지금 성전에 근엄하고 경건하게 앉은 나 자신이,‘난 아무 잘못도 없어’하며 친구들 앞에 거짓으로 꾸며 대는 모습인지. 혹은, 실감 나게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에 있는 모습인지요. 오늘,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의 참모습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세리와 창녀들은 유대교 사회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 유대아의 종교와 정치를 장악한 실세들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로, 권위를 가졌고, 백성으로부터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잘 따른다고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포도밭에 가서 일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만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은 아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알려진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한 맏아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은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알려진 세리와 창녀들이,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유대교로부터 유산으로 받아 신앙의 핵심으로 간직한 것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여기 믿음은 눈감고 하는 맹신(盲信)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자기의 삶으로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그것이 현세이든, 혹은 내세이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 실천은 구약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탈출 33,19)이고,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셔서’(루가 6,36) 그 자비를 우리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오늘의 말씀은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이 권위와 존경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들보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 혹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더 충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많은 것을 누립니다. 그들은 생활도 보장되고, 존경도 받으며, 권위도 지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분이 보장해주는 것에 집착하고, 그 특권을 계속 누리며 행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서,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물 봉헌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 착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율법조항을 많이 만들었고, 그것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제물봉헌의 의례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백성들 앞에 행세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행세하면서 하느님은 사라지고, 지켜야 할 율법과 제물봉헌 의례만 남았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은 무자비한 그들의 배경이 되었고,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빙자하여 인간이 행세하면, 하느님은 무자비한 심판자가 되고, 사람들은 죄인이 됩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생명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지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성찬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이다.’, ‘쏟는 피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헌신과 희생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 곧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며,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신앙인이 할 말은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하는 일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와는 달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상을 얻는 길도 아니고, 입신출세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도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어리석음이지만...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고린 1,1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득(得)과 실(失)을 먼저 계산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은 허무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을 끝까지 긍정하고 확대하면,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4)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헛됨을 우리도 때때로 체험합니다. 사람이 죽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호화찬란하였어도, 어느 날 모든 것은 허무로 끝납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한 줌의 재가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비법(秘法)을 배워, 행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그분의 넓은 지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그것으로 하느님을 위한 한 주간의 의무를 다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미사는 앞으로 한 주일 동안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마음다짐 하는 시간입니다. 성찬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자신만을 보는 협소한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 따라 포도밭에 일하러 가는 오늘 복음의 아들과 같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갑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갑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그분의 자녀 되어 살 것을 바라면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질서를 어긴다면
-이기정신부-
고집불통, 오만함, 도도함, 교만함, 잘난 체 같은 감정들이 실수를 냅니다.
그러면 이런 실수는 자연 질서상 책임을 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누구나 자연 질서를 따르면 실수도 없거니와 책임질 일도 없을 겁니다.
비록 기분대로 말할 때야 있겠지만 질서까지 따르지 않는 건 잘못입니다 질서는 법이지요.
양심이나 자연법 신법보다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되지요.
반대로,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질서를 어긴다면 이는 아주 잘못이겠고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오 21,31)”


제 가 전에 본당 신부로 사목활동을 하던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교우들이 제게 자주 화초를 선물로 주셨는데, 솔직히 식복사 없이 혼자서 생활하고 또한 화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 화초 선물이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를 생각해서 주시는 화초이기에 기쁘게 받으면서 ‘그래 한 번 잘 키워보자.’라는 마음을 먹었지요. 더군다나 주시는 분도 “신부님, 이것은 물 많이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것이니까 키우는데 어렵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셨기에,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 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저는 창가에 놓여 있는 화초의 잎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지런히 잘 자라고 있었고 또 잎이 무성했던 화초였지요. 더군다나 여름 장마로 인해서 무척 습했거든요. 습한 계절이라서 물을 많이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저는 며칠 동안 물을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누구나 쉽게 키울 수 있다는 화초의 잎을 축 늘어지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저 의 무지와 게으름이 화초를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초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혹시 라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저는 놀라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들어서 죽은 것만 같았던 화초가 다시 싱그러운 모습을 띄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었다고 판단해서 그냥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 쩌면 우리의 사랑 실천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 쉽게 포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늦었다는 이유로, 나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내가 하지 않아도 할 사람이 많다는 이유 등등으로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냥 입에서만 맴도는 사랑은 아니었을까요? 즉, 말만 하는 사랑이고, 행동하는 사랑이 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 수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실천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주십니다.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일하라고 말했는데, 맡아들은 처음에 싫다고 대답했다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나갔지만 작은 아들은 가겠다고 말만 하고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냐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는 곧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말만 하고 전혀 실천하지 않는 모습,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말로만 그럴싸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지요. 반면에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세리와 창녀들은 주님을 만난 뒤에 마음을 바꿔서 열심히 사랑을 실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회개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세리와 창녀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활짝 열려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지 금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말로만 외치는 사랑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섣부르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 당장 자기 스스로를 뉘우치면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실하게 사랑하며 조용히 침묵을 지켜라. 성실한 사랑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프리드리히 제나인).

서두르다 잃어버린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중에서(Gordon Livingston)
재 앙을 겪은 사람은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그럴 때면 “왜 당신이 겪으면 안 되는데?”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치밀곤 합니다. 악운을 당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닥쳐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생이 공평하다거나 착한 사람에게는 신이 복을 내린다는 맹목적인 생각에서 오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만한 근거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불행을 당하면 차라리 “이왕 벌어진 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 편이 낫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복 권에 당첨되는 일과 같은 행운은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일 거액의 돈이 생긴다면 인생의 많은 고민들이 풀릴텐데 왜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자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어마어마한 불행을 겪으면 복권 당첨 따위의 행운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도 안 되는 행운을 바라며 쓸데없는 패배감에 젖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삶이 지독하게 비극적이지만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행운아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21,310
-김대열신부-
죄를 짓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간단명료합니다.
회개 하지 않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좀 더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세리와 창녀가 상징하는 것은 세상이 인정한 죄인들입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상징하는 것은 세상 안에서 죄를 판단하고 심판할 권리를 가진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가 죄인들이었습니다.
단 차이가 있다면, 한 쪽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있고, 그 죄로 인해 힘들어했고, 그리고 용서를 청하는 마음조차 죄송해서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쪽은 자신의 죄를 부정했고, 오히려 타인의 죄를 밟고 일어서려 했고, 위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분명 선과 악이 공존한다면, 어느 누구도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죄 역시 나의 죄가 됩니다.
즉, 누구나 죄에 묶일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덜 지은 사람과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을 구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오신 이유는 자신 안의 죄를 알고, 그래서 힘들어하고, 그래서 용서를 청하고픈 상처투성이의 마음들을 위에서 오신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교만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악마의 가장 큰 술수는 죄에 대해 면역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분명 죄는 미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자신 안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복음적 실천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 믿음이 실천일 수밖에 없는 이유 >
-전삼용신부-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죠. 아들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며 날만 새면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대접하느라 돈을 낭비하는 것을 예사로 알았습니다.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을 보고 타일렀습니다.
“얘야, 너도 이제 집안일을 돌 볼 생각을 하거라. 어째서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만 돌아다닌단 말이냐?”
“아버지,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친구들이 모두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 친구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버지.”
“그건 그렇지, 하지만 친구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 웃는 얼굴로 어울리는 친구는 많아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드문 법이니까.... 혹시 네 친구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은 너에게 받는 것에 재미를 들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냐?”
“아버지는 제가 아직 어린애인 줄 아시는군요. 제 친구들은 모두 진실한 친구들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친구를 사귐에 참으로 성공했는지 아닌지를 이 애비가 시험해 보아도 되겠느냐?”
“아이 참, 아버지! 아버지는 평소에 친구가 많지 않으셔서 저희들의 우정을 이해하실 수가 없으신 거예요. 하지만 좋습니다. 이 기회에 저희 친구들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약속한 아버지는 그날 밤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거적에 쌌습니다. 그리고 지게에 지게하고 맨 먼저 아들과 가장 친하다는 친구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들은 친구 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보게 실은 내가 조금 전에 실수를 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여기 시체를 가지고 왔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좀 도와주게.”
“뭐라고! 시체를 가지고 왔다고?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내 집에서 냉큼 사라지게.”
아들은 이렇게 가까운 친구의 집을 연달아 찾아가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두 다 냉정하게 거절만 당한 것입니다.
“자, 이번에는 내 친구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두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 갔습니다. 사정을 이야기 하자 아버지의 친구는 두 사람을 집안으로 안내 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샐 것이네. 이 시체를 지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그러니 당분간 저 나무 밑에 내려놓고, 자네는 내 옷으로 갈아입게나. 그리고 수습책을 함께 생각해 보세.”
아버지의 친구는 거적에 쌓인 것을 번쩍 둘러메고 자기 집 안마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서야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말씀 하셨습니다.
“친구여! 미안하네. 그 거적에 쌓인 것은 시체가 아니라 돼지고기라네. 내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네 그려!”
“뭐야? 에이 짓궂은 친구 같으니!”
“자, 우리 돼지고기 안주해서 술이나 싫건 마시세!”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을 것이다. 친구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요, 친구를 날마다 만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많으나 위급한 처지에 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니라. 그것은 참 된 우정을 나눈 자 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 현석 김형용 다음 블로그, 급난지붕(急難之朋)]
술자리에서 잔을 부딪치며 하는 구호 중에 한 사람이 대표로 “은생은~!”이라고 하면 모두가 잔을 부딪치며 “만남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정 인생은 만남입니다. 사람은 만남을 통해 온전히 사람이 되고 온전히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만약 이 일생동안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삶이 되어버립니다. 가리옷 유다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과연 진정으로 만났을까요?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믿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참된 우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가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아들이 나옵니다. 첫째 아들은 처음에 아버지가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고 하는데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바로 말로만 하겠다고 하고 하지 않은 둘째가 아닌 첫째임을 알려주기 위한 비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믿음’과 연관시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여기서 믿음은 곧 실천과 직결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말로는 한다고 하면서도 실천은 하지 않는 이들로 비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믿음만으로’란 기치를 들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는 처음에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하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제외시켰었습니다. 물론 동료들의 권유로 다시 성경에 넣기는 하였지만 믿음과 실천은 굳이 공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동이 아니더라도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받았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곧 받아들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당신은 여인 중에 복되십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은 당신 안에 하느님을 잉태하게 함으로써 당신이 인간임에도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곧 자신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만남이 참으로 나를 변화시키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곧 실천인 것입니다.
이번 복자품을 받으신 124위의 순교자들 중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는 부부로 혼인을 하였지만 동정으로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권 데레사는 17세 때 일어난 신유박해로 온 집안이 풍파를 입어 의지할 데 없는 조카 하나와 한양으로 올라와 동정을 지키며 살아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인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혼인을 하지 않고 동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친척들의 권유로 20세에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혼인 날 밤에 자신의 신랑인 조숙 베드로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남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숙 베드로는 냉담 중이었습니다. 조숙 베드로도 박해받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주변의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신앙을 잊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혼인을 해서 반가웠는데 신부가 동정을 지키며 살자고 글을 써서 주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조숙 베드로에겐 그 순간 아내의 청을 받아주는 것은 곧 아내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잃었던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베드로에게 신앙의 열정이 다시 불붙었고 그날 아내의 청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지 않았던 베드로는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수차례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데레사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습니다. 순교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자주 약해져 배교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실 순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며 남편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함께 참수형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순결한 부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조숙 베드로-권천례 데레사 편]
조숙 베드로는 아내 권천례 데레사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믿는다면 권천례 데레사의 뜻을 따라주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뜻을 따라주지 않으면 진정으로 믿지도 진정으로 아내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받아들임은 곧 자신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동정을 지켜야만 했고 아내를 따라 신앙을 다시 찾아 증거의 삶을 살았으며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순교의 월계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변화되지 않았다면 진정 믿음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실천과 변화는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뜻대로 삶이 변화되었습니까?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아직도 세상 것에 집착하고 겸손해지지 못하고 남을 판단하는 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그분을 만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참 믿음을 통한 만남은 내 삶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
-최인각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며,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마을에 ‘착하고 의롭다고 소문난 신사’와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신사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깔끔하게 차려입고 출근을 하였고, 그 여인은 아침이 되어서야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어 느덧 시간이 흘러 두 사람 모두 죽었는데, 그 여인은 천국에서 아주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는데 반해 그 신사는 어두운 곳에서 지친 모습으로 울고 있었답니다. 이 모습을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하늘나라 문지기인 베드로 성인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저 신사는 아침 출근 때마다, 아침에 퇴근하는 여인이 무슨 일을 하는 여인인가를 생각하며 그 여인의 단정치 못한 행동을 상상하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 신사의 삶은 점점 자신이 상상한 대로 바뀌었고, 그 여인은 아침에 출근하는 신사를 보며 자신의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오 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일렀을 때, 맏아들은 “싫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반면에, 다른 아들은 처음에는 “예”하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시며,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십니다.
오 늘 제1독서에서도 예제키엘 예언자는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며, 현재의 의인이 미래의 의인이 아닐 수 있음을, 현재의 죄인이 미래의 죄인은 아닐 수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리고 그 판단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최종적으로 하시는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잘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순교 성인들 가운데에도 처음엔 신앙을 배교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죄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서, 장렬하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여 승리의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삶은 겸손한 삶’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가 의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이미 교만의 길을 걷고 있었고, 내가 잘났다고 뻐기고 있을 때 이미 빗나간 삶을 살고 있었고, 내가 많이 알고 있다고 느꼈을 때 이미 지적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내가 건강할 때 함부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자신의 이기심과 허영을 버리고 겸손함을 추구할 때, 나는 항상 인정받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았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 주변 여건이 어려울 때, 나는 겸손해질 수 있었고, 그때마다 하느님은 제 곁에서 전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나를 아름답게 해 주는 것임을 새삼 느끼고 깨닫습니다.

산티아고 입성
-이수철신부-
오늘은 순례40일차, 연중 제26주일 입니다.
이냐시오 형제와 저는 마침내 9,27일 어제 아르카에서 산티아고까지 20km,
새벽 5:20분에 출발하여 오전10:30분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 대성당, 주님의 집에 도착했고
'우리집민박' 김정수 형제의 환대 속에 말그대로 우리집 같은 분위기의 민박집에 안내 받았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뻣노라."
시편말씀 그대로 기쁨에 나는 듯, 발걸음도 가볍게
단숨에 주님의 집, 주님이 계신 곳, 산티아고에 도착했습니다.
산티아고 대성당 드넓은 광장은 순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이어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12시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했고,
생장에서 여기까지 800km의 여정중 처음으로 우리민박집에서 점심으로 '라면+밥+김치'라는
한국 식사를 했습니다.
민박집 형제의 친절한 환대와 자상한 설명이 온갖 피로를 씻어내어 참 편안했습니다.
이미 머물고 있는 분들도 한가족같이 따뜻했습니다.
'산티아고 입성'
마치 승전보를 알리듯 한국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고
진정성 가득 담긴 축하인사도 많이 받았습니다.
몇 분 형제의 카톡 축하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오늘 참 기쁜날입니다.
신부님과 도반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모 엄마 만세,
신부님 오랫만에 만세삼창하니 눈에 이슬이 맺힙니다.-
-신부님 만세! 무사히 잘 다녀오신 것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신 모습 뵈오니 너무나 감사해요. 역시 신부님이 최고세요!!!-
-축하합니다. 성공하셨네요. 건강해보이십니다.-
-입성 축하 알렐루야!! 이수철 신부님 만세!!!-
-축하, 축하, 장하십니다. 하느님께 영광 찬미 드립니다. 역사적인 날입니다.-
-신부님!!! 제가 더 행복합니다. 제가 산티아고에 입성한 것 같은 느낌이예요. 만세!!! 만세!!! 만세!!!-
-제가 눈물이 나네요. 신부님 이젠 긴장을 푸시고 푹 쉬시기를!-
-22년 수도원장 직분보다도 더한 일 하신 것 같네요. 수고하셨어요-
이렇게 감격에 벅찬 축하인사 많이 받아보긴 난생 처음입니다.
800km 이냐시오 형제와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무수한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와 사랑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이요, 비우는 길이 채우는 길이요, 작아지는 길이 커지는 길이었습니다.
산티아고 입성의 의미입니다.
바로 필리피서의 케노시스, 비움 찬가가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제가 그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도 된 듯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지니라 주신 산티아고 순례길의 축복임을 믿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아 지셨습니다.
사랑의 극치, 겸손의 극치입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의미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회개의 길입니다.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 보속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저도 800km 끊임없이 기도하며 회개하는 마음, 보속하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구원의 지팡이 묵주를 들고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주님도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악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마치 우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바로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과거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는 회개의 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둘째, 순종의 길입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 믿으면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어, 좋아서 하는 순종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기에, 하느님 사랑하기에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좋아서 고향땅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순종하여 떠났듯이
저도 하느님의 뜻이라 믿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리라곤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하여 조금이라도 주님을 본받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오로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가 끝나도 순종의 순례여정은 평생 계속될 것입니다.
셋째, 비움의 길입니다.
영성생활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는 것이오, 버리는 것이오, 떠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버리고, 떠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닮는 길은 이 십자가 길을 빼고는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아지신 주님이
바로 순종의 모델, 비움의 모델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또한 비움의 길입니다.
바로 복음의 맏아들로 상징되는 세리와 창녀들이 회개의 모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에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죄없어 순결한 마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로 마음을 비울 때 순결한 마음입니다.
하여 순결한 창녀라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회개를 통한 자기비움의 열매가 순결한 마음이요 세리와 창녀들이 마음이 바로 그러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가 끝날 무렵의 순수로 빛나는 얼굴들, 바로 자신을 비워 순수해진 마음의 표현입니다.
40여일의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무수히 만나고 헤어졌던 사람들을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아, 평생순례여정중 무수히 만나고 헤어졌던 이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나겠구나!' 깨닫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은혜로운 깨달음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매일의 순례여정 하늘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아멘.

-한상우신부-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회개를 통해 드러납니다.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이
일치하는 지점은
언제나 회개입니다.
회개는 먼저
나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놓아버려야 주님처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회개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회개의 길을
지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이를 수 없음을
주님께서는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가깝고도 먼 것이
마음을 바꾸는 회개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
버리고 돌아서야 할 곳은
아버지 하느님의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진짜 죄인은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죄인입니다.
회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보고 맛들이는'(시편 34, 9)
기쁨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짐을 믿습니다.
회개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살기위해서는
이와같이 믿음으로
버리고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가장 좋으신
주님과 함께 하기에
가장 충만합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이 회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