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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일어난 가나안 전쟁에서 자아론의 그림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만든다.
그러나 자아는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넘어뜨리고자 한다.
자아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길이 없는 강한 것이다.
그래서 자아를 처리하는데 온갖 것을 지불하고도 수십 년이 걸리고도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며 날마다 경건을 훈련해야 한다.
내 뜻을 꺾고 순종하는 것이 곧 자아 처리된 아름다운 모습이다.
(강해)
그돌라오멜의 침략
(창 13: 14 - 14: 16)
이 시간에는 “그돌라오멜의 침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건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주와 역사를 섭리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임한 환경을 우연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라면 우리는 기록자의 의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은 문자적인 의미에서도 여러 교훈을 주지만 영적 비유의 면에서도 좋은 이야기를 줍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의 가나안 전쟁을 통해서 자기 주관을 이기고 하나님 주권으로 사는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하셨습니다. 나를 죽이라는 교훈입니다. 이 말씀은 내 몸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고 내 주관대로 살아가려는 그 마음을 죽이고 주를 위해 희생하라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주님을 따르는 자라면 대단히 귀히 여겨야 할 교훈입니다.
그럼, 어떻게 내가 죽고 하나님 주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자아가 죽어집니다.
14-18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했습니다.
여기 18절의 “이에”는 ‘그리고 (즉시)’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이 있을 때 그는 즉시 순종하여 헤브론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모습은 예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갈대아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후 하란에 오기까지 얼마고 가나안에 온전히 정착할 마음을 굳히기까지 시간이 얼마였습니까?
그러나 이제 아브람은 여러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가장 현명한 일임을 깨달았고, 또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그 말씀을 듣고 믿었기에 예전에는 사람 두려워서 생각조차 못했고 가장자리로만 뱅뱅 돌던 그였지만, 그리고 제단을 쌓음이란 제사 그 이상의 의미로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 땅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래서 주변 족속의 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 말씀 믿고 담대히 가나안의 중심부 헤브론에 와서 거하며 제단을 쌓습니다. 이것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말씀을 믿고 순복하는 아브람의 담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처럼 나를 처리한다는 것은 아주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냥 순순히 믿고 순종하면 이 이상 쉬운 것이 없어요. 그러나 끝까지 자기 고집 피우면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어요. 그러므로 자아처리란 하나님 앞과 그 말씀 앞에서 100% 그 말씀을 믿고 절대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유 붙이는 것은 내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시요 참 진리이시기 때문에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처리란 목석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이요 믿음이요 겸손이요 사랑이요 충성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입니다.
2.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창13:18절을 보면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했습니다.
여기 헤브론 마므레 수풀은 어떤 곳일까요? 이곳은 나중에 아브라함 자신이 묻힐 무덤이 있을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요, 장차는 메시야의 예표인 다윗이 유다 왕이 되어 그 곳에 수도를 임시 정하고 다스리는 장소입니다. 이 자리에 아브람이 장막을 치고 거기서 제사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줍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쌓은 제단이라면 이 제단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십자가 부활의 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문제에만 매달려 이 문제로 이 제단에 가득 쌓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사랑을 바라보며 자기 신앙을 위한 수준 높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제단을 내가 죽는 자기 무덤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제단이 나는 사라지고 다윗이 왕 노릇했듯 하나님이 주가 되시어 왕 노릇하시는 복종과 순종과 경외의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십자가 아래 나를 매장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서 내 주장으로 더 강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나를 채우는 그런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성령으로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랑을 믿기도 하고 그 사랑에 감동도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감복하여 내가 죽어져 하나님 앞에 겸손히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십니다.
구약 율법에 히브리의 종이 주인의 은혜에 감복할 때 일생을 주인에게 드려야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래서 종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귀를 구멍 뚫어 일생 섬기는 종이 될 것을 자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복하여 주님께 순복하는 겸손한 종이 될 것을 교훈합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자리가 나의 무덤이 되고 하나님이 왕권으로 임하시는 자리가 되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자아처리를 위해서는 고난 속에서 순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4절에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 년에 배반한지라” 그랬습니다.
왜 사해지방을 중심으로 있던 가나안 5개국이 북부의 그돌라오멜을 배반했을까? 여기에 대해서 가나안에 있었던 극한 기근을 원인으로 듭니다. 그들은 12년간이나 자나 깨나 생각한 것은 그들을 배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서 감히 모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되는 기근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가중되는 조세 부담을 견딜 수 없어서 기근으로 죽나 전쟁으로 죽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면서 모반을 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가 만 12년이 지나고 13년째였습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정확히 년 수를 언급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배경 제시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적 관념에서는 수효를 중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수효에 대한 관념은 성경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적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즉 12수가 차니까 비로소 배반할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12는 훈련의 수요 제자의 수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고난이 연단이 되고 교훈이 되어 내 인격에 그 정신이 꽉 차서 행동화하게 되는 그 때를 가리킵니다.
인간은 완악해서 고난이 아니면 절대로 자기를 내려놓거나 순순히 순종하려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할 때 당하는 무수한 고난을 통해서 이것이 연단이 되고 교훈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잠22:15에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했습니다. 잠23:13-14에도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했습니다.
히12:9-13에도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연단의 교훈을 받을 때 그 교훈은 우리 마음 속 깊이 뼈 속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히5:8-10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고난 받지 마시고 내 자아를 배반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4. 그러나 자아를 배반할 때부터 끊임없이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1-3절에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했습니다.
가나안 남부 사해지역의 5개 국가가 배반하자 그돌라오멜 왕을 중심으로 한 북부의 메소보다미아의 4개국이 침공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가나안 북부 국가는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으로 셈 계통의 사람이고, 남부 가나안의 5개국은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그리고 소알로서 함 계통의 사람들입니다.
이 북부동맹군이 남부 국가들을 지배하려는 형태는 바로 내 주관적인 삶으로 회귀하려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자아란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간단한 예로 사람들 성미들 제발 참으라고 그토록 일러도 그것을 못 참습니다. 그 고집 변하면 얼마나 변합니까? 우리 성도들이 그 고집과 성미와 개성까지 변해야 진짜 변화된 성도입니다.
북부동맹국가가 있는 땅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대항하려던 바벨탑이 있던 시날 땅입니다. 그리고 그돌라오멜은 북부지방을 이끄는 강한 통치자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동맹을 맺어 가나안 국가를 침략했습니다. 이름풀이를 해봐도 재미있습니다. 아므라벨은 “신들을 지키는 간수, 강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아란 강성입니다. 아리옥은 “존경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자아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돌라오멜은 “한 웅쿰의 곡식알”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이처럼 자아는 번성력과 정복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디달 왕은 “두려워하다, 빛나다, 경외” 등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자아란 자기도취적인 것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국가를 지배하고 조공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철저한 내 중심의 인본주의 모습입니다. 이 내 중심의 삶을 버리기가 그리 쉽지 않아요. 그래서 야곱도 이것을 깨뜨리려고 20년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다 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도 40년이 걸렸습니다. 베드로도 주님께 칭찬 받다가 어느 순간 사단의 종노릇했지 않습니까?
5. 자아의 위세는 대단해서 어떤 수단으로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5-7절에 “제 십사 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 나오는 르바 수스 엠 호리 아말렉 아모리 족속이 바로 군사 도로상에 위치한 강력한 족속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대부분 거인족들이며, 악한 족속이요, 엠 족속의 경우 두려운 족속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나라를 건설하고서 버티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건드릴 수가 없는 강한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그돌라오멜의 침공 앞에서는 그들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들이 침공해 올 때 그냥 오지 않고 내려오면서 먼저 군사 도로상에 위치한 이 가나안 족속들을 치면서 옵니다. 대단한 위세입니다.
이처럼 자아란 어느 누가 막을 수가 없어요. 사람의 힘으로도 안 됩니다. 꾀로도 안 됩니다. 강압으로도 안 됩니다. 악으로도 안 됩니다. 물리력으로도 안 됩니다. 정치로도 안 됩니다. 화해로도 안 됩니다. 도덕으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낳은 자녀들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들에게 있는 성미도 맘대로 안 되어요. 자기도 자기 마음을 가누지를 못해요.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려는 참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6. 이 완악한 자아는 우리를 깊은 시험과 실망에 빠뜨립니다.
8-12절에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이 싯딤 골짜기는 ‘울창한 숲으로 된 골짜기’, ‘소금계곡’ 등의 의미인데 이 이름처럼 이 곳에는 울창한 숲도 많았고 소금도 많고 또 역청 구덩이가 많았습니다. 역청은 아스팔트인데 한 번 빠지면 나오기 어렵습니다. 가나안 국가들이 이 곳을 전장으로 삼은 이유는 이런 숲과 역청 구덩이를 저지선으로 이용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쟁에서 오히려 밀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완고한 자아는 우리를 깊은 시험과 실망에 빠뜨립니다. 이 자아에 깊은 상처라도 생겨지는 날이면 여러 사람을 괴롭힙니다. 우리가 일생 연단을 받는 것도 다 이것을 깨뜨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고함을 깨뜨리기 위해서 부르짖어야지 복만 달라고 한다고 복을 받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복의 제목으로 가득하지만 왜 복 받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되고 바로 되어 신앙 생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 때 교만적인 자아를 이기게 될까요?
한 마디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이기게 됩니다. 13-16절에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했습니다.
여기 성경 기자는 이 사건을 말하면서 아브람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되어져야 함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잘 연습된 군사 318명이 롯을 구해왔습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믿음으로 그냥 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경건의 연습을 통해서 되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경건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딤전4:7-8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심에 적극 임하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주는 시험일 때는 물리치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심이라면 물리쳐도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 때는 순종하세요. 예를 들어 우리를 낮추시면 겸손 훈련시키시는 줄 알고 더욱 낮추시면서 감사하세요. 혹은 불만투성이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면 감사 훈련시키시는 줄 아시고 감사하세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을 시키시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 훈련입니다. 그 때는 대개 사단의 역사라면서 순종하지 않는데 부덕 되지 않을 만큼 시늉이라도 순종하세요. 순종 훈련이란 순종 못할 만큼의 제목이어야 훈련이 되기 때문에 그런 소제를 주신 것입니다. 물론 사단의 역사도 그와 비슷한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가나안 전쟁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높이시고 가나안에서 그 입지를 강화시켜 그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과 환경 속에서 늘 훈련 받아 우리 주님의 위치를 온전히 확보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하나이다”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 이런 하나님 주권중심의 아름다운 신앙으로 가나안 복지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