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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덴 설교
행 17:22-34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행 17:22-34 /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자 바울은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덴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매우 종교심과 신앙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23) 나는 시내를 다니며 여러분들의 많은 제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쓴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신이 어떤 신인지도 모르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내가 그분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해드리겠습니다. 24)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25) 또한 인간의 손으로는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채워 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분 자신이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만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26)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의 조상인 한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서부터 인류를 온 세계에 퍼져 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가 흥하고 어느 나라가 망하며 언제 그렇게 될 것인가를 미리 다 정하시고 그들의 영토도 정하셨습니다. 27)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누구와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중의 한 사람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29) 그러니 하나님을 인간들의 손으로 금이나 은이나 또는 돌을 깎아서 만들어 낸 우상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30)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무지를 참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든지 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설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31)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분을 통해서 ㄱ) 공정히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이 일을 맡기셨다는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ㄱ. 시9:8(참조,시 96:13, 98:9) 32) 바울의 말이 부활에까지 이르자 사람들이 비웃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는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나중에 더 자세한 것을 듣고 싶소'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3) 바울은 토론을 끝냈다. 34) 몇 사람이 바울을 따라 신도가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시의회 의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부인과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아덴 안에 있는 종교, 도덕에 관한 문제를 강론하고 재판하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설교(24-25) 아덴 사람들은 헬라적인 신관에 따라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들뿐만이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혹여나 자신들이 알지 못해서 부지중에 제사에 빠져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참 신이신 하나님을 소개하며,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천지를 주관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신들을 섬길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을 섬겨야 합니다(전 12:13). 또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심판에 대한 설교(26-31)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처럼 아덴 사람들은 자신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 인류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한 혈통(창 1:26-27)임을 강조하면서 오직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보여주고 있으며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자연만물을 통해서라도 어렴풋이나마 창조주를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우상을 섬길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참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심을 통해 공의로우신 심판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들은 자들의 반응(32-34) 바울의 설교를 통해 대부분의 아덴사람들은 바울을 조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종말론적인 심판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체면과 나약한 결단력이나 의지력 때문에 다음 기회에 듣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헛된 철학과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적용: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하여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독서 현실은 어떠할까요? 1년간 일반 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는 사람의 비율은 성인이 60%, 학생이 92%로 각각 나타났습니다. 성인의 40%는 1년에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말입니다. 독서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 유아와 청소년의 독서는 그들에게 많은 지적 소산을 안겨줌과 동시에 다양한 창조력을 키우고 풍요로운 감성을 보살펴줍니다. 한국인들의 독서 시간은 하루 평균 6분, TV 앞에서는 2시간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제 하루 20분만 독서에 투자하면 안 될까요? 1년이면 300페이지짜리 책 12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풍성한 인생의 코드, 멀리 있지 않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에 대한 3대 정의
행 17:22-25 / 이한규 목사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레오바고는 아덴의 최고 의사당 같은 곳이다. 거기서 바울은 아덴 사람의 성향에 맞춰 철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전도 설교를 했다. 그래서 설교를 “아덴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큰 죄인이오. 도처에 우상이 너무 많소. 속히 회개하시오”.라고 시작하지 않고 이렇게 시작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언뜻 보면 상대를 배려하는 느낌을 준다. 비록 그들이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모욕감을 주면서 설교를 시작하기보다 먼저 그들의 종교심을 인정해 주었다. 실제로 아덴 사람들은 종교심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3만 이상의 신이 있었고 아덴 자체가 거대한 신전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은 종교적이었다. 그들에게 설교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표현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1.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 23절을 보라.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아덴 전도를 위한 지혜와 전략을 얻기 위해 먼저 아덴 지역을 자세히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설교에서 ‘알지 못하는 신’은 누구인가? 당시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을 섬겼다. 그 신들 중 어떤 신이 빠져 그 신으로부터 저주받을 것을 염려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모시는 신전도 세웠다.
왜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 얘기를 꺼냈는가? 하나님은 ‘실체가 모호한 하나님’이 아니라 ‘실체가 뚜렷한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반전의 효과를 통해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지금도 뚜렷한 실체로 존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그 실체를 확신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희미하게 인식하면 우상숭배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도 다 아시고 나를 최선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
2.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만물을 짓고 주관하시며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크고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24절).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진심으로 믿으면 자연의 오남용도 일종의 죄임을 깨닫게 된다. 자연을 오남용하면 점차 사람을 오남용하는 지경에 이른다. 과학문명의 발전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펼쳐지기에 인간의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자연 활용은 불가피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은 잃지 말라.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진실로 믿으면 자연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고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게 된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 의식을 가지면 자연과 환경을 자신과 분리된 하위 객체로 여기지 않음으로 자연과 환경의 역공을 예방하는 지혜도 얻는다. 더 나아가 성육신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은혜도 생긴다. 광대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는 우주도 품지 못한다. 그런 하나님이 성도의 품에 안길 정도로 스스로를 축소시키고 성도와 친밀한 교제를 하시니 얼마나 큰 은혜인가?
3. 풍성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이다(25절). 하나님은 주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바치라고 하는 것은 더 많이 주시려는 조치다. 때로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은 나를 향한 멋진 생각과 계획을 금방 철회하지 않고 회개하면 늘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 주고 새롭게 일으켜 주신다. 영혼 속에 결핍과 공포 의식을 자꾸 심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의지하게 만드는 이단 교주의 미혹을 이기게 하는 강력한 면역제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라.”라고 하는 명령은 결국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믿으라는 암시가 담긴 명령이다. ‘오직 예수’라는 말은 ‘성령 충만’이란 말과 사실상 같은 말이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말씀과도 큰 의미에서 같은 말이다. 하나님을 믿어도 아직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들면서 자신이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 교주에게 미혹되지 말라. 인간적인 선행과 수행과 고행은 물론 많은 기도, 많은 은사, 많은 성경 읽기보다도 더 앞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행 17:22-34 / 서영성 목사
본문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그가 베뢰아에서 전도하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는데 데살로니가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혼자서 아테네에 갔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아직까지도 철학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물론 바울이 아테네에 왔을 때는 과거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은 여전하였습니다. 또한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는 아테네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도시를 둘러보았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로부터 받은 첫 인상이 어떠합니까?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태양의 신, 달의 신, 바다의 신, 대지의 신, 우레의 신, 바람의 신, 포도주의 신에 이르기까지 기능별로 다양한 신들을 섬기면서 행여나 빠진 영역이 있을까 우려하여 방어 장치로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설치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Pantheon(萬神殿)의 여러 신들의 제단을 돌아 마지막으로 ‘알지 못하는 신’ 제단에 향을 피운 후에 신전을 나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의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알지 못하는 신’의 정체를 밝혀주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도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국 장로교회 초대 목사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를 대표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 기독교인이 되기 전 그는 도교에 심취하여 오랜 기간 선도 수행에 전념하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도사로 불렸습니다. 웬만한 시내는 건너뛰었고 통나무 목침도 한 주먹에 부술 정도였습니다. 따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1893년 경 선교사와 조선인 전도자들이 평양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도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길선주가 이를 배척할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는 새 종교를 알아오라며 제자 김종섭을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김종섭이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와서는 오히려 길선주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김종섭은 교회신문인 <그리스도신문>과 전도책자 <이선생전>, <천로역정>등을 길선주에게 갖다 주면서 읽어보라 하였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길선주는 예수교에 대해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바뀐 김종섭의 생활태도를 보고 ‘어쩌면 예수교가 참 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20년 넘게 신봉해온 선도를 버리고 새 종교로 옮겨가자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김종섭은 고민하는 길선주에게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길선주는 자신이 섬기고 있던 삼령신군(三靈神君)에게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예수도가 참 도인지 거짓 도인지 알려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습니다. 김종섭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삼령신군께 기도하니 어떠하오?” “번민만 날뿐이오.” “그러면 이번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보시오.” “어찌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리오?” “그러면 아버지란 칭호를 빼고 그저 상제(上帝)님이라 부르며 그분께 기도해 보시오.” ‘상제’로 바꾸어 기도한 지 사흘 때 되는 날, “예수가 참 구주인지 알려 주소서” 기도하던 중에 옥피리 소리와 총소리가 방 안에 진동하고 공중에서 “길선주야!”하는 소리가 세 번 들렸습니다. 그 순간 길선주는 자신도 모르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를 살려 주소서”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방성대곡하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교인” 길선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예수의 도’를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 심성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몰라 모호하게 섬기던 신이 누구인가를 밝혀주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 마음속에 익명으로 존재하던 신이었습니다. 그분은 ‘삼령신군’이 풀 수 없었던 의혹을 해결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제일 먼저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을 벌이는데 그중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사후의 심판과 내세를 부정한 반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창조를 부인하고 생명의 발생이라든가 운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역시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며 비꼬았고 또 몇몇은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면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말쟁이로 번역된 spermologos라는 단어는 ‘씨앗을 줍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씨앗을 주은 다음에 집에 가져와 분류도 하지 않고 여러 곡식이 뒤섞인 추수를 거두는 어리석은 농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을 체계 없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워 모은 지식을 말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들어 그가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하여 토론을 하기 위하여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그리스인들의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을 의미합니다. 로마인들은 이 신을 마르스라고 부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고라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도중에 있습니다. 아레오바고가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만약 바울이 동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을 했다면 각종 신을 섬기는 파르테논을 마주 보면서 설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약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전도사역에 적용하기 원합니다.
아레오바고 설교
사도행전에는 9편의 바울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직 아레오바고 설교만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행해졌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상황과 그곳 사람들의 관심사에 맞게 설교를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1. 맹목적인 종교성과 우상숭배 지적(22-23절)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가 관찰한 내용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종교심이 많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때는 종교를 향한 열심이 있다는 뜻이고 부정적으로 볼 때는 지나치게 미신적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신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그것은 복음의 진리로 승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미신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이 가진 신에 대한 지식을 설교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단을 언급하자 아테네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우상에 비할 수 없는 참신이심을 하면서 그들의 우상숭배의 잘못됨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우상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를 가지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우상을 아울러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우상이 취미, 도박, 정욕,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녀나 일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끌려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를 종교적 다원주의 세대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세상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판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관용을 베푸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에는 각종 이방신을 섬기는 죄를 참으셨으나 이제 더 이상 우상 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부터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2.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소개(24-29절)
헬라인들은 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한분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시며,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주재자가 되신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신들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올림피아의 신들은 항상 무엇인가 부족합니다. 사람처럼 서로 질투하고, 사람처럼 자기의 부족한 것을 상대에게서 빼앗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신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하고 증거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태초에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모든 민족과 족속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과 족속의 연대를 정하시고, 그들의 삶의 영역을 정하셨습니다. 민족과 족속의 연대를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민족의 흥망성쇠를 정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거주의 영역을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특정한 민족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고 부르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기에 그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교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시 이방종교의 신관과 하나님을 비교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청중을 설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절대 주권자이심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대하여 인간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밝힙니다. 창조주와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할 것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겨야 하는데 이는 심지어 그리스 시인들조차 그 진리를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부분은 Epimenides의 ‘Cretica’에서 인용하였고,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부분은 Aratus가 쓴 ‘Phaenomena’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두 구절 모두 제우스신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만, 바울은 그것들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적용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민족들을 다스리시고, 자신을 계시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구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신 것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 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 복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까지 달리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한 심판 선언(30-31절)
바울은 하나님을 먼저 소개한 후 자연스럽게 구속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된 길은 오직 예수의 사역을 믿는 것이며, 그를 생명의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까지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기에 범한 죄를 회개하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약 회개하고 그분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 부활이 심판의 근거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전합니다. 비록 바울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십자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헬라 문화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상황에 맞게 전파합니다.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참 신임을 선포한 바울의 믿음과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죽으신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확실한 일인 것처럼, 주께서 세상 만민을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이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주님의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레오바고 설교의 특징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진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속사를 성취하신 분이요,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 온통 널려진 우상을 보고 흥분은 했지만 정작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는 듣는 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종교성을 인정하고 그곳 시인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폭넓은 접근을 했습니다. 복음전파는 영적인 전투이므로 말씀으로 강하게 도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상대방을 이해하며 부드럽게 다루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라는 놀라운 보배를 상황이라는 질그릇에 담아 청중들의 상황에 맞도록 적절한 변화를 주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복음적인 설교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와 죄를 정죄하고, 회개의 필요를 보여주며, 심판의 확실성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구원을 제시했습니다.
*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입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보통 호의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와 적대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로 나뉩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하였는데, 이는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다는 헬라사상에 젖어 있어 낯선 부활 교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한 것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을 더 요구하며 결단을 미루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학문처럼 이해하고 배우려고 했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 관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과 그 외 몇몇이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름만 거론되니 숫자로만 보면 바울의 아테네 사역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사역은 실패한 것일까요? 실패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고린도 전서 2장 2절을 근거 삼아 그러한 논리를 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바울이 아테네에서 논쟁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다가 별로 열매가 없었기에 자기의 사역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는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는 것으로 추측성 해석을 합니다.
문론 회심한 사람의 숫자만 보면 바울의 사역이 대단치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숫자에 상관없이 그 사역은 효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회심한 이후로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이 얼마나 놀랍게 확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전도로 회심한 디오누시오는 아테네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가 40여년 후인 96년 도미티안 황제 때 순교를 당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의 전도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네네 사람들은 바울의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익한 우상들로 가득 찬 그들의 판테온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 위에 선 그 날 이래 복음에 반응하는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버린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불신자들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과 부의 우상, 술과 마약의 우상, 정욕과 부도덕의 우상, 권력의 우상, 힘과 건강의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같은 설교를 기대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설교만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감동을 주는 설교, 자기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설교를 원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라는 설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선포되는 메시지를 아멘으로 화답할 뿐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성경을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현실이나 청중과 타협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현세기복적인 메시지나 철학적, 윤리적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을 아침마다 묵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한때는 풍미했으나 그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시켰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가에 달려 있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목표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전해야 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삶의 필요나 관심을 접촉점으로 삼아 주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바울처럼 항상 성령에 인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가 균형을 이룬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각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면서 구원을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
행 17:22-28 / 김영규 목사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
본문은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바울이 보통 유대인 회당에서 행한 설교와는 패턴이 전혀 다릅니다. 보통 유대인들에게 행한 설교를 보면 구약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도 전혀 몰랐고,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본문을 봅시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2-23) 바울은 우선 아테네 사람들의 풍부한 종교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 “종교심이 많다”는 말은 헬라어로 한 단어입니다. “deisidaimonevsterouj"”(데이시다이모네스테로스)라는 말인데, “dievdw”(두려워하다)라는 말과, “daivmwn”(신, 혹은 귀신)이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직역하면 신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인데, 비교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신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지구상의 어떤 종족들보다도 더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이 말에 대해서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성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는 해석입니다. 당신들은 정말 종교심 하나는 알아줘야 되겠습니다! “in every way you are very religious.”(NIV,RSV) 그들의 장점을 치켜세우면서 좋은 기분으로 말씀을 듣게 하는, 말하자면 웅변적인 수사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아테네 사람들의 과도한 종교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해석입니다. 당신들의 종교심은 과도한 면이 있습니다. “in all things ye are too superstitious. ”(KJV) “How extremely religious you are in every way.”(NRSV) 바울이 좋은 뜻으로 한 말인지, 혹은 비판적인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이 다음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Agnwvstw/ qew'/.”(UNKNOWN GOD) 아니, 아는 신만 섬기는 것도 힘든데,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깁니까? 일설에 의하면 이런 제단의 기원에 대하여, 주전 6세기에 아레오바고에 큰 질병이 유행했는데, 이 때에 구레네 사람 에피메니데스가 와서 이를 구원하고 많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는데, 그 때에 혹시 빠진 신이 있을까 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희고 검은 양들을 놓아 “!Agnwvstw/ qew'/.”(UNKNOWN GOD)라는 제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란 칭호가 대문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알지 못하는 신들이 섬김의 대상으로 일반화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다니? 바울이 볼 때에 기가 막힌 일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섬기는 미신의 대상들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산신령, 용왕님을 섬겼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뚜막 귀신, 장독대 귀신, 대들보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칠성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어떻게 존재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성품이 어떤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느냐구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게 다 미신의 특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깁니다. 알지는 못하지만 섬기는 것은 아주 열정적입니다.
바울은 이제 설교의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 여기에는 아테네 사람들의 지성적인 자만심에 대한 도전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철학을 많이 공부하고, 그렇게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알지도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아테네 사람이 아니면 다 바바리안이라고 해서 야만인 취급하지 않습니까? 그런 지식인들이 신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섬깁니까? 이제부터 내가 알려줄 테니 잘 들어보시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울은 우선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24) “oJ qeo;" oJ poihvsa" to;n kovsmon kai; pavnta ta; ejn aujtw'/,” 우주(kovsmon)와 만물(pavnta)의 기원은 인간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이 말씀에는 헬라 사람들의 우주 만물에 대한 다양한 철학을 비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우주(kovsmo")와 만물(pavnta)의 기원을 다양하게 주장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우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공기라 하고, 어떤 사람은 원자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물질세계가 보다 상급의 세계로부터 유출되어 생성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확실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첫째로,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써 존재한다! 둘째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이와 같은 창조 사상은 유물론자들인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나, 이성론자들인 스토아 철학자들 모두를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우주 창조에 이어지는 내용은 인간 창조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26) “ejpoivhsevn te ejx eJno;" ai{matov" pa'n e[qno" ajnqrwvpwn katoikei'n ejpi; pa'n to; proswvpon th'" gh'"” “And He has made from one blood every nation of men to dwell on all the face of the earth,”(NKJV) 인류의 기원 역시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에 “한 혈통으로 만드사”란 구절은 “한 혈통에서 만드사”로 표기해야 합니다. 한 피로부터 인류가 퍼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피에서 모든 족속을 만드셨습니다. 즉, 한 조상 아담을 만드시고 그로부터 만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그리스 사람들, 특히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다른 혈통, 특별한 족속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모든 종족(pa'n e[qno" =all ethnics)이 하나의 피로부터(ejx eJno;" ai{matov" =from one blood)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인간(a[nqrwpo")인 이상 인종, 혈통, 종족 차별이 없습니다. 다 혈액형을 보면 ABO 식 인간의 혈액형입니다. 종족이 다르다고 소나 돼지 피를 수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또한 사람을 만드신 인간의 창조주이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두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우주 만물에 대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철저한 통치자이십니다. “천지의 주재시니”(24) “oujranou' kai; gh'" kuvrio" uJpavrcwn” “He is Lord of heaven and earth,” 주재라는 말은 주인이요 통치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요 통치자이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여러 신들이 각기 자기 맡은 분야가 있습니다. 하늘은 제우스, 바다는 포세이돈, 지하 세계는 하데스, 불은 헤파이토스, 애정은 에로스, 술은 바쿠스, 전쟁은 아레스,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신의 통치를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았습니다. 바울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좋아하던 두 철학 사조가 그렇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신의 통치를 부정합니다. 그들은 유물론이나 운명론을 믿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한 후에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대단한 왕국을 세웠노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잠깐 정신이상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미쳐 있다가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단4:30-34) 핵심적 내용은 하나입니다. 온 천하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류의 통치자이십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살립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5)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은 생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 가운데 지구를 제외하고 생명체가 없거니와, 생명이 자연 발생한 사례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지구상의 선물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요6:48)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 우리 육체의 생명도 하나님이 호흡하게 하시면 살고, 호흡을 거두시면 죽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의 공급도 하나님 선물입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양식이 어디서 옵니까? 다 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비로 자라나고 생산됩니다. 만일 곡식의 씨앗을 뿌렸는데 생명이 없어 싹이 나지 않는다면 인류는 다 굶어 죽습니다. 생명과 호흡, 만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인생들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과 거주지를 정해주십니다. 한 인생이 얼마나 오래 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수명을 결정하십니다. “온 땅에 살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26) “oJrivsa" protetagmevnou" kairou;" kai; ta;" oJroqesiva" th'" katoikiva" aujtw'n”(26) “and has determined their preappointed times and the boundaries of their dwellings”(NKJV) 뿐만 아니라 거주지도 정해주십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이사 심방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산다는 것이 우연한 선택의 결과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결과입니다.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월세가 되었든 자택이 되었든, 강남이든 강북이든,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결과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됩니다.
수한과 거주지 경계를 정하는 것은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한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는 하나님이 정해주십니다. 지구상에서 지금까지 어떤 왕조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나라도 국경선이 무한정 지속 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국경선이 다 달라요. 하나님은 지금도 각 나라와 민족의 연대를 정하시고, 국경선을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 활동의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28) “!En aujtw'/ ga;r zw'men kai; kinouvmeqa kai; ejsmevn”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NASB) 이 부분은 크레타 출신의 유명한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의 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당신을 위해 무덤을 만들었네. 오, 거룩하고 높은 이여. 그테타인은 항상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배만 위하는 게으른 자들이라네. 그러나 당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살아있고 영원히 거합니다. 당신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에피메니데스는 제우스 신을 위해 이 시를 지었습니다. 헬라인에게 제우스는 평범한 다른 신들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지상의 사소한 것들을 관여하는 신이 아니라, 천상에서 신들을 지배하는 통치자 격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제우스를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제우스를 신으로 인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제우스를 힘입어 산다고 생각한 것을 바로잡아, 참 창조주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적용해서 말씀을 한 것뿐입니다. 에피쿠로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인간은 신을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단 한 순간의 생존까지도 하나님께 의존하여 숨 쉬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가까이 개입하십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 하나님은 어떤 인생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자녀이든 아니든, 적어도 그들의 모든 생존에 개입하고 계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돌아오라
그러므로 이제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첫째로,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 숭배를 버려야 합니다.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24-25) 하나님은 신전을 거처로 삼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각종의 신전을 지어 그 신들이 거기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대하6:18) 하나님은 신전에 거주하는 신이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주 위에 계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 신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50:12) 오늘 내가 하나님을 섬기든지 말든지 하나님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요해지시거나, 하나님이 더 커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 신상에 상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상들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필요 없는 신전을 짓는 일에 피땀을 흘리는 일이 필요 없습니다. 각종 신상을 새기는 일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 형상이 필요 없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저런 명칭의 신전들이 다 쓸데없습니다. 그것은 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각종의 우상들도 그렇습니다. 종교성이 있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원주의 사회라서 다 허용은 됩니다만, 그렇다고 다 진리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사회든지 자유와 개방이 극대화 되면 반드시 우상과 도덕적 해이로 멸망한 것을 봅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우상 미신으로 채운다면, 도덕적 해이가 오고 반드시 타락합니다. 오늘 우리는 내 주변에서 먼저 이런 우상과 미신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내가 해야 될 일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 원문상에 보면 찾아(seek), 더듬어(grope), 발견함(find)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열심히 더듬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케 됩니다. 찾아, 더듬어, 발견하라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내게서 멀리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유심히 관찰하면 하나님이 계심을 곧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정도를 알게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자세한 것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 계시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삶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내 삶을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내가 어떤 가문에 태어난 것, 내가 어떤 부모를 갖게 된 것, 내가 어떤 혈액형을 갖고, 어떤 모양으로 태어난 것, 내가 가진 국적, 혈통, 인종, 이 모든 것들 가운데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계절의 변화, 모든 동물과 식물, 생명체들의 생존 방식,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존재하며, 원인 없는 결과들이라고 한다면, 가장 비과학적이고 비지성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라고 한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신 계시, 즉 성경에 의지해서만이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만물을 관찰하고 더듬어 찾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자기 주변을 살피면서 하나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오늘 겸손히 자신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큰 특권이요 축복임을 또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매일의 삶을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믿는 하나님
행 17:22-29 / 손상률 목사
사람을 「종교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영적 욕구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성의 도시로 불리는 희랍의 수도 아덴에서 당대 최고로 명성을 떨치던 철학도들을 앞에 놓고 하나님을 논증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행한 종교 강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도 그 현장에는 동판에 새겨 놓고 기념을 삼고 있습니다. 22절에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시작된 그의 연설은 그 곳 사람들의 종교적 성향이 거리마다 붙어있는 각 종 신의 이름을 보아서 신을 찾고자 애쓰는 영적 욕구를 짐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된 종교적 성향은 제 나름대로 숭배의 대상을 찾아 거기에다 마음을 쏟고 정성을 드리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1:20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2-23절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만 섬겨야 되는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게 되는 것은 범죄 하므로 지식과 판단이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그래도 어디엔가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자연을 숭배하거나 조상을 숭배하는 헛된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계시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건전한 종교적 성향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도록 일러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실체를 바로 알고 증거 하는 사명에 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Ⅰ. 영원하신 자존자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3:15에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 할 나의 표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26:4에는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1. 유일하신 하나님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능하다"는 뜻과 함께 유일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말 「하나님」도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로 표현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0:1-3에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여러 가지 우상 숭배하는 것을 뜻합니다(출20:4-5).
그것은 참 신이 아닌 거짓 신이며 그 행위는 헛된 일입니다. 이사야 40:18-19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섬겨야 됩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신6:4-5).
사도 베드로도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설교하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4:12).
2. 스스로 계시는 분
하나님은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들처럼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스스로 계신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前提)가 됩니다. 마치 수학이나 기하학에 있어서 공식이 전제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로 우리에게 인식될 때 비로소 인간과 만물의 근원을 알게 되는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표현으로써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작용을 갖는 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부르며 그 앞에서 여러 가지 종교 의식을 행하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반응도 감정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신을 찾는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의 의지를 나타내 보이시고 적극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입니다. 사사기 6:25-32에 보면 기드온이 도끼를 들고 가서 바알의 신당을 모두 훼파해 버렸는데 그 일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자기 아들을 변호하면서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삿6;3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지는 정서를 발휘하십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시고(고후5:14), 노하기도 하십니다(민11:1). 질투하기도 하시고 미워하기도 하십니다(출20:5). 오래 참으시며(롬2:4), 그가 기뻐하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입니다(시18:20).
Ⅱ.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할 때 이는 모든 면에서 부족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곳이 없으시고,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못하는 일이 없으시다는 뜻으로 표현합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의도하시는 선한 목적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유롭게 행하십니다.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1. 창조주가 되십니다.
창세기 1:1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26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4절에도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은 이미 있는 소재를 가지고 개조 하셨다거나 재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신 완전창조요, 절대적인 창조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시인하고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11:3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2.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본문 말씀 26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개인의 영혼을 관리하실 뿐만 아니라 민족과 혈통, 그리고 국가와 세계까지 그의 영역 안에서 이를 관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에 공존하며 번영하게 하고자 하는 축복의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 자기가 의도하시는 바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년대와 국경을 정해 주시고 이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그 본분을 잘하게 되면 복을 주셔서 형통케 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길을 가거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배하게 되면 징벌하여 멸망케 하십니다(신30:15-18).
이처럼 하나님께서 상선벌악(賞善罰惡) 하시는 간섭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고 죄와 불의가 배척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중에도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나 다른 사물에게 또는 헛된 우상에게 돌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실망하신 나머지 진노하시게 됩니다. 이사야 42: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4:9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Ⅲ.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주님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지음 받은 모든 사물이나, 인간이 다 창조 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가 되는 사람은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43:4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 사랑과 아낌을 주십니다.
말라기 3:17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안다고 하였습니다(마7:11).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세상에서 부름 받은 그의 자녀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요3;16).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독생자까지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 이상으로 총애하신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신뢰와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 놓고 인간 나라를 경영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 또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을 이루어 가는 주역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엡1:4-5).
구약시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 후손들에게 특별한 관리를 하셨습니다(신8:1-10). 또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하시고(행13:22), 그의 생애를 지키고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들이요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에 참여하여 그 일을 이루게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요긴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손바닥의 보배처럼 아끼시고 특별관리를 하십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특별한 은사를 공급하십니다. 부지 중에라도 죄악에 손을 대거나 실수하는 경우가 있으면 이를 깨우쳐 주고 회개하게 하십니다(히12:5). 환난과 역경에 시달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이를 극복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슥4:7).
3. 영광스러운 기업을 주십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스러운 기업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이루어지는 그 과정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먼저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은 지극한 영광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빌2:6-11).
이 문제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4:17-18).
문화와 종교 그리고 공허함
서윤발 목사
Ⅰ. 서 론
최근에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집사님 한 분을 통해서 제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친한 친구 한 사람과 다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이스람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터어키에 나가서 7년째 사역을 하고 있는데 아주 어렵게 그곳 정부의 허락을 받아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터어키라는 나라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나라입니다.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그런 나라에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인들을 모으게 되었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사실 서로가 그렇게 귀한 줄 몰랐는데 이렇게 막상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서 복음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하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이제는 '이 사람이 그렇게 귀한 사람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특히 제 동기들 가운데는 어려운 지역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친구처럼 이스람교를 국교로 하는 지역에서 몰래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여자의 몸으로 아프리카 오지까지 가서 온갖 풍토병과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어느 국가라고 밝힐 수 없어서 선교지 소개를 할 때는 그저 A국이니, B국이니 하며 말해야 되는 그런 국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국내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복음을 전하러 어려운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소식을 한 번씩 접하게 되면 정말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또,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도 각자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나 항상 이런 선교사들의 소식들을 우리가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지금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지금도 복음이 땅 끝까지 확산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기억하게 되고 또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최근의 선교사는 아니지만 복음을 이방 지역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며 전 생애를 다 바쳤던 바울이라고 하는 성경에 나타난 선교사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Ⅱ. 바울의 선교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자기 핍박하던 그 예수님을 믿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사도가 된 뒤에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심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다른 사도들은 거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지만 주로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번에 걸쳐서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과거에 바울 자신이 바로 그렇게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옛날의 자기처럼 복음을 방해하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런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들이 있다 할지라도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는 그 날까지 전도와 교육의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바울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은 유대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중해 전역에 까지 확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선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모두 28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그 중에 절반 이상이 바울의 선교여행에 관해서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의 내용도 바로 그렇게 바울이 두 번째로 세계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일어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Ⅲ. 아테네
바울이 두 번째 세계전도여행을 할 때는 주로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했는데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그 중에서 아덴 이라고 하는 곳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이 아덴이라는 곳은 아테네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테네라고 하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곳입니다. 문화와 운동과 철학의 도시 아닙니까?
이 도시는 바울이 이 곳에 도착하기 4-5백년 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기원전 5세기에 이미 전성기를 누린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기원전 5세기경에 벌써 음악당이 있었습니다. 운동경기장도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운동경기장의 좌석이 6만개였다고 합니다. 지금 사직 운동장의 좌석이 몇 개입니까? 그렇게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음악당과 운동장 말고도 많은 웅장한 신전들과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 경에 세계 제일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고대의 문학이나 미술이나 철학같은 그런 문화들이 다 자라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은 다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바울이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과 쟁론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이 과거에 번역이 된 것이라서 이렇게 표기를 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에피큐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민주주의의 본산입니다. 우리나라도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이 아테네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를 우리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독재적이던 로마의 네로 황제도 이 도시만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이 도시는 고대세계에 있어서 정말로 인간 정신문화의 집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런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떠했겠는가?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이 도시에 들어서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웅장함? 설레임? 너무나 놀랍게도 바울이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받았던 그 첫 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웅장함과 위대함과는 좀 다른 것었습니다. 이 도시에 도착하면서 바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 온 것이 무엇이었는가? 우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이라고 사람들이 조각을 해 놓은 그런 신상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 얼마나 신상들이 많았으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것부터 보였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고 했죠?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아테네에는 어디에나 신전이 있었고 신상들이 있었는데 아테네의 공공장소에 세워놓은 신상의 수만 해도 30000개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파르테논이라고 하는 유명한 신전이 있었는데(그 신전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신전에도 신상들을 30000만개나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아테네는 그리이스의 수도로 남아 있는데 지금도 인구가 약 400만명 정도 됩니다. 면적이 부산보다 조금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산 길거리에다가 30000개의 거대한 석상을 세워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온 도시가 석상들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고층빌딩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신상을 세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겠습니까?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아테네에 그렇게 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도시의 이름이 아테네인데 이 도시의 이름 자체가 '여신'의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우상을 많이 섬기고 종교적인 사람들인지 심지어는 23절을 보면 바울이 이 성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어떤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그렇게 새겨 놓은 것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온갖 신들을 섬기면서 혹시라도 자기들이 알지 못해서 섬기지 못한 그런 신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가지고 그런 일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제단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그 제단에다가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그렇게 써 놓았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신이란 신은 자기들이 다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종교성이 많다. 물론 이 말은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경건하게 산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뭔가를 섬기고, 뭔가를 향하여 끊임없이 빌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심정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Ⅳ. 종교적 존재 - 인간
사실 이 종교성, 종교적인 성향. 이런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전혀 다른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서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또는 '이성적 존재'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만으로는 사람과 동물을 완전하게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며 거의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종교적 존재'(Homo Religius)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종교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창세기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내적 이미지)을 따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靈)적인 존재이시듯이 우리도 영적 존재로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 인격체이시듯이 우리도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를 찾는 것과 동일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지만 죄로 인하여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니까 어뚱한 신들을 만들어 섬긴다는 것입니다. 롬1:22-23---▷"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신처럼 만들어서 섬깁니다. 짐승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깁니다. 벌레 모양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또 그것을 섬깁니다.
이 아테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종교성은 많아가지고 뭔가를 섬겨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니까 온갖 것들을 다 신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많은 섬기고 있다해서 그곳에 만족이 있었습니까? 어떤 약속의 보장이 있습니까? 생명이 있습니까? 역사가 나타났습니까?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 많은 신들을 섬기지만 그 속에 아무 것도 분명한 것이 없으니까 이들의 심령은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신을 찾고 있지만 여전히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전통으로 남아있던 인간 정신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전통의 문화들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잠시 잠깐 동안은 즐거움을 줍니다. 자부심을 주고 의미를 줍니다. 그러나 돌아서서 보면 거기에도 만족이 없습니다.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도시야말로 정말로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해서 뭔가 더 확실한 것이 없을까?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그런 초라한 내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Ⅴ. 바울의 메시지
바울은 이 도시에 발을 디뎌 놓으면서 분노했다고 했다. 왜요? 인간 정신 문화라는 것이, 그리고 이들이 갖다 놓은 그 수 많은 신상들이 이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들을 죽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곳에서도 회당을 찾아가고, 시장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당시 시장에는 자유연설대라는 것이 있어서 누구나 나가서 연설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누가 연설을 하면 자연히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토론을 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것 전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집약된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 여기 이렇게 신전이 많지만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은 이렇게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신다.
2)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3)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고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시다.
4)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고
5) 인류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
6)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원하시고
7)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8) 아테네의 시인중에서도 사람을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노래한 사람이 있었듯이
9)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소생이다.
10) 그러니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지 말고 회개하라.
1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13) 그 부활이야 말로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의 사실만을 증거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사실들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아테네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문화를 발달시키고 그렇게 많은 신들을 섬겨왔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사역을 믿는다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들과 쟁론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들과 말싸움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문화를 가지고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그 내면에서부터 고민하고 죽어가고 있던 이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약속을 전달한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한 것입니까?
그럴 건데요, 그럴 수 있는데요, 이럴 수도 있는데요, 저럴 수도 있는데요... 만약에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면 여러분 확신하며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통해서 주님의 그 말씀을 따라가려고 하는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글쎄. 일단 와봐. 잘 될 수도 있겠지. 보장은 못한다." 주님이 그러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요14:6절---▷"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추측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떤 논리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포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그 사건 앞에서 우리가 회개하고 따라 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그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시는 너무나 분명한 약속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며 주님 안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제일 먼저 복음에 대해서 더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기 바랍니다.
Ⅵ. 아테네와 우리시대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보면 사실은 2000년 전의 아테네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테네는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듯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된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문명이 발달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 발달한 모든 문명들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만 켜기만 하면 집에서도 편안하게 앉아 가지고 하바드 대학의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이제 과거의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가리켜서 이 때 까지는 현대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부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를 더 현대라 부르지 말고 후기 현대라고 부르자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만큼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달하고 달라진 시대지만 이 시대속에는 2000년 전, 아테네의 사회와 너무나 비슷한 또 한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뭡니까? 바로 우상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영적인 시대' 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영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 영적이라는 것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그런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무당과 풍수와 점성술과 고대종교들을 각색한 수 많은 종교들이 지금 이 발달한 시대에 수도 없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973년도에 우리나라에 정식 등록된 무당의 수가 30,00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5년 뒤에 무당의 수가 80만명이라고 합니다.
이게 뭘 말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비적인 것,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로 신비한 것이고, 정말로 새로운 것들입니까? 아닙니다. 과거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따르다가 멸망하고 버렸던 것들을, 다시 주워가지고 재생시킨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종교, 이렇게 발달한 사회속에서 오직 복음만을 믿으며 산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너무 독단적이야, 기독교는 너무 자기 주장만 해. 그런 생각들 속에서 다른 어떤 신비한 것들을 향해 마음이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이것이 길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제시하는 그런 이론들 앞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신비한 효험이 있다고 하면서 소개하는 그런 수 많은 거짓 종교들의 이설들을 듣고 마음이 쏠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이 무엇인가요? 멸망인 것입니다.
Ⅶ. 결 론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발달한 아테네에 바울이 첫 발을 디디면서 분노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발달한 문화가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달한 지식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우상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참 진리를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마세요.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들을 기웃거리지 말고 이 복음안에서 영생의 선물을 얻고 진정한 위로를 얻고 평강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이 아테네에서 담대하게 그 복음만을 증거했던 것 같이 우리도 이 시대 가운데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먼곳에 가서 복음 전하지 못하고, 내 생애의 시간을 다 바쳐서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우리의 삶의 좌표를 그렇게 맞추어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뻐하실 수 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