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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36. 빈손엔 호미를 잡고 길을 갈 땐 물소를 탄다
[운문선사께서 법을 보이셨다.
"빈손엔 호미를 잡고 길을 갈 땐 물소를 탄다." 고 하신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오늘의 운문선사의 한 마디 향상일구로 인용한 말씀은 부대사의
“빈손엔 호미를 잡고 길을 갈 땐 물소를 탄다”라는 이 말씀은 좀 살펴본다면 “빈손엔 호미를 잡고 길을 갈 땐 물소를 탄다”라고 하신 말씀은 너무나 깊은 현지를 품고 있는 말입니다.
먼저 “빈손엔 호미를 잡고 길을 간다”는 말은 빈손은 이 사대육신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몸은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인연따라 서로가 연기적 현상으로 모여져 이루어 졌으니
그 실체가 없다는 뜻을 나타낸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실체가 없는 이 한 물건인 환화공신이 어떻게 길을 알고 손에는 일하러 가면서 호미를 들고 갈 수가 있느냐?
그래서 환화공신이 가는게 아니라 “물소를 탄다”라고 하신 것은
몸이 가는게 아니라 몸과 함께하는 신령서른 한 물건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물소를 탄다는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물소는 “물빛 소”라는 위앙종의 종조이신 위산(潙山)의 물빛 소 즉 수우(水牛)를 나타낸 말입니다. 물빛 소라는 화두는 물은 절대평등을 나타낸 말이고 빛은 태양이나 다른 밝음으 나타낸 말이며 소는 십우도(十牛圖)에서 나타내듯이 우리들의 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 뜻을 따라 “빈손엔 호미를 잡고 길을 갈 땐 물소를 탄다” 즉 환화공신인 이 사대육신은 빈손으로 나타낸 것이니 이 형상도없고 사대로 모인 한 물건이 어떻게 움직이고 길을 알고 일을 하러 가는 것은 오직 마음이란 한 물빛 소가 “이 몸뚱이를 움직이게 한다는 뜻으로 읊은 이 게송을 거량하여 운문선사는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라고 법거량을 합니다. 여기서 부대사(傅大士)는 누구일까요 먼저 부대사를 좀 알아보고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부대사傅大士(497~569)는 16세에 결혼하였고, 24세에 인도의 승려 숭두타를 만나 불교에 귀의하였다. 거침없는 수행으로 출가자와 재가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특히 양무제를 귀의시켜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미륵보살의 응신應身이라고 전해진다.
497년경에 태어나 569년(혹은 그 무렵) 열반한 중국 계 남조(南朝) 시기 양무제(梁武帝) 시대의 불교의 대 거사(居士)입니다.
본명은 부흡(傅翕), 자(字)는 현풍(玄風), 호(號)는 선혜대사(善慧大士)라 전해집니다. 출신은 동양군 오현 금(今) 절강성(浙江省) 의오시(义乌市)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엄격히 말해 ‘출가 승려’가 아니라 거사인 재가신자로서 활동했으며, 선(禪)·정(定)·혜(慧)를 중시하는 수행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남조(南朝)의 일환으로, 특히 梁나라(502–557) 시기와 겹칩니다. 그의 영향력과 전승이 그 시기 불교 발전에 일부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흔히 보리달마(菩提達摩) 및 보지선사(寶志禪師) 등과 함께 ‘양대삼대사(梁代三大士)’로 불립니다.
부대사의 심왕명이 유명하니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부대사(傅大士)의 심왕명(心王銘)
관심공왕(觀心空王) 마음이란 공의왕을 관찰함에
현묘난측(玄妙難測) 현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도다
무형무상(無形無相)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유대신력(有大神力) 크나큰 신통력이 있느니라
능멸천재(能滅千災) 능히 천 가지 재앙을 멸하여
성취만덕(成就萬德) 만 가지 덕을 모두 성취하며
체성수공(體性雖空) 본체의 성품은 비록 비었으나
능시법칙(能施法則) 능히 참된 법을 베풀어 주노라
관지무형(觀之無形) 관할 때에는 모양이 없으나
호지유성(呼之有聲) 부르면 곧 응답함이 있으니
위대법장(爲大法將) 참된 법의 장군이 되고
심계전경(心戒傳經) 마음의 계로 경을 전하누나
수중염미(水中鹽味) 바다 가운데의 소금의 맛과
색리교청(色裏膠淸) 채색 속의 맑은 물 기운이여
결정시유(決定是有) 결정코 그것이 있기는 하나
불견기형(不見其形) 그 형체는 보지를 못한다네
심왕역이(心王亦爾) 심왕도 또한 그와 같아서
신내거정(身內居停) 몸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면문출입(面門出入) 얼굴을 통하여 드나들면서
응물수정(應物隨情) 사물과 정에 응하고 따른다네
자재무애(自在無碍)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고
소작개성(所作皆成) 짓는 바는 모두 다 이루나니
요본식심(了本識心) 근본을 깨치면 마음을 알고
식심견불(識心見佛) 마음을 알면 부처를 보느니라
여기서 참선경어(參禪警語) 5장 / 공안을 참구하는 납자를 위한 글[시선인참공안경어(示先人參公案警語)에 나오는
물빛소 공안에 대하여 그 현지를 투둑하시길 빕니다.
「위산 스님이 말하셨다.
“내가 죽은 뒤에 산밑에 가서 물빛소가 되어 왼쪽 겨드랑 밑에다
‘위산의 중 아무개’라 쓰겠다.
이때 위산이라 하면 물빛소를 어찌하며 물빛소라 하면
위산은 무어라 해야 하겠느냐?”]
허공까지 닫도록 물결을 일으켜도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기 알맞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라
붉운 심장 속에 따끔한 몽둥이질 가해서 입가에 흰거품 생겨나게 한다면 불법과 티끌세상 함께 평탄하리라.
바른 생각에는 바늘끝도 칼날도 들어갈 틈 없고
철면피 낯가죽엔 인정이란 없다네. 예가 아니면 경거망동 하지 말며 가고 머뭄에 자재해야하느니라.
멀다 가깝다 부질없이 지견을 내지말고
의단을 부딪쳐 깨고 묘하게 깨달을지니 의단을 깨지 못하였거든
맹세코 쉬지 말고
이산스님의 물빛소를 놓아주었다가 하루아침 달려가 코를 꿰어 돌아오면 저 멀리 하늘 가득 물빛소 한 마리일 뿐이리.라고 읊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운문선사께서 법을 보이셨다.
"빈손엔 호미를 잡고 길을 갈 땐 물소를 탄다." 고 하신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라고 예시한 후에 이렇게 말씀을 던지신다.
["그대는 북쪽에서 한 마리 물빛 소*를 타고 여기 왔구나."]라고 하시어 그대는 북쪽에서 한 마리 물빛 소를 타고 여기 왔구나 하신 것은 그대가 북쪽에서 한 마리 물빛 소를 타고 왔다는 것은 마음이란 물빛 소는 부대사와 똑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 물빛 소는 무엇일까요? 몸뚱이가 온 것이 아니라 함 마음의 본래면목이 왔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산의 물빛소가 부대사가 설한 물빛소나 지금 운문선사가 말씀하신 물빛 소는 그럼 다 같은 것인데 그럼 우리 마음의 심체이며 심향(心香) 것은 바로 말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본성이며 지상이며 불성인 본래면목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아미산의 설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에서 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시기 전, 내가 지니고 있는 참 본성”이란 뜻이다.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부모의 유전자와 상관없이 내가 지닌 본성, 인간이 지니는 본성,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순수한 마음을 말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부모의 유전자에 의한 ‘본능(本能)’이라는 오염된 인자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그런 본능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양, 귀에 들어오는 소리, 코로 들어오는 냄새, 입으로 들어오는 맛, 몸의 느낌으로 들어오는 촉감, 이들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인식하는데, 그 들어오는 것을 한 점의 가감도 없이,
전혀 선입견 없이 들어오는 그대로,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하게 인식하는 그 주인공을 말한다.
선불교에서는 이상형의 인간상을 ‘참사람’ ‘참나’ 혹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한다. 참사람은 번뇌라고는 조금도 없는, 전혀 때 묻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데, 바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사람, 곧 부처님이 그런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자연인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유전자에 의한 본능(本能)이라는 때가 묻어서 나온다.
그러니 자연인이란 갓 태어난 어린아이조차도 때가 묻어있으니, 선불교에서 이상으로 생각하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참사람은 자연인으로 태어난 후, 수행 정진을 해서 해탈한 사람이라야 한다.
부처님이 그런 사람이다.
수행을 하지 않고, 자연인 상태에서는 부모로부터 갓 태어난 갓난아기조차 참사람일 수는 없다. 그런데 해탈한 참사람을 쉽게 볼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상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해탈하면 그런 상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참사람이 현실에서 구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자연인도 참선 수행을 통해 해탈하면, ― 성불하면, 참사람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함이 선불교가 지향하는 목표요, 이상이요, 선불교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선불교의 정체성이다.
그런 참사람이 지닌 본래면목에서는 그 어떤 차별과 구별이 없다.
그래서 본래면목은 법성(法性), 본성(本性),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선불교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시심마(是甚磨)
‘나’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나’의 참모습(본래면목)은 어떤 것인가를 묻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나’가 참으로 ‘나’이다. 시공간 이전, 육체라는 형상을 갖기 이전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나’라는 이 육체에는 이미 부모라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온갖 수작이 다 포함돼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 이전의 ‘나’를 말한다.
애초에 이름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데 인간이 온갖 생각을 일으켜 이름이 없던 ‘그것’에 별의별 이름을 붙여 ‘그것’을 규정해버린다. ‘본래면목’이란 이런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이름이 있기 이전, ‘무엇이라’ 규정되기 이전, 천연 그대로의 ‘그것’이다.
‘그것’을 선문에서는 본심, 본성, 불심, 불성, 혹은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분소식(本分消息), 주인공(主人公),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도 한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은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를 나타낸 말인데, 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는 때 묻지 않은 성품, 어떠한 미혹도 번뇌도 없는 부처의 경지를 말한다.
천연 그대로여서 조금도 인위적인 조작이 섞이지 않는 진실한 모습, 그러니 본래면목이다.
그리고 본분소식(本分消息)이라 했을 때, 일반적으로 ‘소식’은 서로의 안부(安否)나 어떤 상황 따위를 알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문에서는 그와 다르게 쓰인다. ‘소식(消息)’이라는 말은 원래 호흡과 관련이 깊다.
식(息)이 그렇다. 내쉬는 숨, 날숨은 호(呼)다. 들이마시는 숨, 들숨은 흡(吸)이다. 내쉬면서 들이마시는 게 호흡(呼吸)이다.
이 한 차례의 호흡을 식(息)이라고 한다. 그리고 소(消)라는 글자는 사라짐을 뜻한다.
그래서 소멸(消滅)이라 하고, 음식을 소화(消化)한다고 한다.
둘을 합치면 소식(消息)이다. 원래의 뜻은 ‘사라짐과 생겨남’이다.
‘살아서 숨 쉬는 것과 죽어서 사라지는 것’, 즉 생(生)과 사(死)라는 뜻이다.
생과 사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입니다. 따라서 본분보식은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원초적 모습, 본래면목과 같은 말이다.
죽음은 육체란 형상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그러나 본래면목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거나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형상하고는 상관이 없는 ‘나’, 어떤 사건하고도 상관이 없는 ‘나’, 그 게 진짜 ‘나’이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라는 화두는 백장(百丈懷海) 선사의 제자인 위산(潙山靈祐, 771~853) 선사가 사제 향엄(香嚴智閑, ?~898) 스님에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런데 향엄 스님은 이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그가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고, 그가 가지고 다니는 모든 책을 뒤져봤으나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향엄 스님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책을 불태워버린 후, 위산 선사를 다시 찾아가서 그에 대한 답을 가르쳐 줄 것을 몇 번이고 부탁했다. 그럼에도 위산 선사는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몹시 불친절하고 매몰차게 거절했다. 스스로 찾아보라고 한 것이다.
이후, 이 문제의 답을 찾다가 지친 향엄 스님은 이럴 바에는 차라리 환속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했다.
환속하기로 결심을 하고 마당에서 풀을 메다가 주은 기왓장 조각을 멀리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부딪치면서 '딱'하는 소리가 났다.
그 '딱'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확철대오 해서 그 문제가 해결이 됐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라는 화두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각(覺)은 ‘아(我)’가 사라질 때에만 가능하다.
즉, 개체적(個體的) 인식 이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개체를 ‘나(我)’라고 착각하는 순간 개체의식에 속아, 모든 것을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시비 분별하는 개체 의식구조 때문에 진리의 전체성을 바로 보지 못한다.
결국 무아가 돼야 전체를 볼 수 있으며, 우주와 하나가 되며, 진리와 하나가 되며, 생로병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은 부모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이미 있었는데 누가 주고받을 수 있단 말인가.
지배하는 자도 없고 속박하는 자도 없다. 그러나 속된 인간은 오직 한 생각 일으켜서 스스로 온갖 시비장단 분별을 하고 업장을 짓고 그 안에 갇혀 세세생생을 윤회하느라 본래면목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내던지고 무아(無我)로 흐르는 물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천하를 유행(遊行)하는 수행자를 일러 운수납자(雲水衲子)라 부른다.
남루한 누더기에 걸망 하나가 전 재산이어서 버리려 해도 버릴 것이 없고, 가지려 해도 가질 것이 없으며, 가고 싶어도 갈 곳도 없는, 오도(悟道)의 세계를 향한 지극히 고독한 나그네가 구도수행자다. 가령, 이렇게 도(道)를 구하는 구도수행자(求道修行者)가 산길을 가다가 사나운 짐승에 쫓겨 도망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나아 갈 곳이 없는 천 길 낭떠러지 벼랑에 이르렀다.
뒤로는 사나운 짐승이 다가오고 앞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 벼랑에 처해져 있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다.
자 이때를 당해 과연 어떻게 해서 살아 날 것인가?
상식과 지식의 범주로 분별로 해석하려 든다면 사구백비(四句百非)에 걸려들 뿐이다.
그러니 생생하게 살아있는 참다운 자기의 소리 한 마디를 일러라!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 진일보 할 곳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이 화두가 지닌 의미이다.
선(禪)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전혀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외면의 무엇에 이끌려 물결이 일게 되면 ‘향상일로(向上一路)’에서 벗어나고 만다.
‘향상일로’란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로 향하는 유일한 길 뜻입니다.
문의 근원을 쫓아 일시에 문틀을 부셔야 한다.
즉, 안이든 밖이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사물에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된다고 당나라 시대의 임제 의현(臨濟義玄) 선사가 말했다.
선(禪)은 오직 경험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진정한 나의 소리, 나의 참모습, 나의 본래면목은 직접 경험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엄요삼촌설(噞搖三寸舌)에 불과할 뿐이다.
직접 경험한 것만이 절대적 본질요소인 견성(見性)이다.
선의 경험은 오직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향상일로(向上一路)에서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의 사생결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허긴 이런 설명초자도 다 허망한 ‘귀신 굴’의 소리다.
우리의 육신은 부모로부터 비롯됐다. 부모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찌 될까? 아마도 지⋅수⋅화⋅풍(地水火風-四大)이 모였다 흩어짐이라고 할까? 이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본래 없는 곳에서 왔지, 있는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 본래 마음에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 생로병사도 없다.
상주불멸로 여여하다. 인연 따라 경계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보인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부모님 이전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불교에서의 본래면목은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 또는 진실한 모습이나 ‘참 나’, 인간 누구나 지니고 있는 불성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부모는 나를 낳으신 부모가 아니고 천지 즉 우주를 말한다.
우주가 생기기전부터, 즉 아무것도 없는 절대 무의 경지, 먼지도 없는 허공, 다시 말해서 시공도 유무와 생사도 없는 절대의 경지 ‘공(空)’을 말한다. 그런 곳에 있는 때 묻지 않은 참나가 본래면목이다.라고 설파하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이어서 주장자를 세우더니 말씀하셨다.
"안 보이느냐? 천 마리 만 마리가 이리로 몰려오는구나. 한 마리만 알아보도록 하라."]라고 하십니다.
“안 보이느냐? 천 마리 만 마리가 이리로 몰려오는구나”라고 하신 것은 삼라만상에 흩어져 사는 사람의 숫자로만 본다면 수억 수십억이넘는다. 이 수많은 사람중에 오직 깨달음을 얻은 이는 오직 천ㅎ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친 석존 밖에 없다 그러니 “한 마리만 알아보도록 하라.”라는 말씀은 그대가 바로 그 한 사람이니며 부처라는 말씀이다“ 돌~!!!!!!!!!!!!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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