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의 이름이 인터넷 기사검색에 뜬 건 소은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 초여름이었다. 소은이는 레이첼의 소식을 혹시라도 알 수 있을까 해서 그동안 자주 그녀의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왔는데, 드디어 근황을 알 수 있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약 한 달 후 여름방학 시즌에 맞춰 국내에 헐리웃의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영화의 조연 중에 레이첼 데이비스라는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애스터로이드(The Asteroid)’였다. 희귀한 소행성 하나가 화성 주변에 포착된다. 그 행성의 크기는 일반적인 축구경기장 크기로 매우 작지만, 전체가 다이아몬드로 돼 있는 행성이었다. 미국의 탐험대원들이 그 소행성을 차지하기 위해 우주선에 오른다. 우주선이 발사되고 소행성을 향해 가는 도중 탐험대원들은 우주 한복판에서 다른 나라에서 발사된 또 다른 우주선 두 대와 만나게 된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발사된 우주선들이었다. 그 우주선들 역시 소행성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소행성을 둘러싼 묘한 경쟁의식을 갖게 된다. 급기야 러시아 우주선에서 교신이 들어온다. 함께 연합해서 우주선에 장착된 무기를 사용하여 중국우주선을 파괴하자는 것이었다. 함장은 당연히 그건 안 된다며 거부의사를 보냈다. 그 이후 러시아 우주선으로부터 우주미사일 한 대가 발사됐다는 걸 알게 되는데, 미사일은 다름 아닌 미국우주선인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인터넷에 소개돼 있는 줄거리는 대략 이랬다.
소은이는 포스터에 뿌려져 있는 깨알 같은 영어이름들 속에서 레이첼 데이비스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알파벳으로 써 있는 이름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지고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소은이는 빙긋이 웃었다. 너 결국 배우가 된 거구나. 한동안 근황을 몰라 궁금했지. 이런 블록버스터 영화에 출연도 하다니, 이제 어엿한 배우구나. 어쨌든 너무너무 반갑다. ‘애스터로이드’는 한국에서 틀림없이 대박칠 거야. 영화가 대박치면 그 영화에 출연한 너 또한 우리나라 언론에 조명되겠지. 비록 조연이더라도 말야. 그렇게 되면 너의 과거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 일단 영화부터 봐야지. 개봉 첫날에 꼭 보러 갈게. 소은이는 레이첼의 이름을 보면서 연신 미소 지었다.
‘애스터로이드’개봉을 1주 앞둔 어느 날, 또다시 뜻하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영화의 감독과 작가, 그리고 세 명의 출연 배우들이 홍보차 한국을 방문하는데, 세 명의 배우 중에 레이첼 이름도 포함돼 있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한국 팬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영화 소개 및 팬들과의 질문과 답변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고 기사는 전했다.
7월 10일 오후 3시, 서울 강남에 있는 한 멀티플렉스 극장의 대형 상영관. 레이첼을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였다. 소은이는 휴대폰과 자신의 수첩에,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 그 사실을 진하게 메모리했다.
문득 나무컵이 생각났다. 맞아, 나무컵. 레이첼을 만나면 꼭 돌려주려고 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미나가 가지고 있다. 미나는 외고에 다닌다. 고등학교마저 갈라진 지금은 서로 연락한 지 오래고 거의 남남이 된 듯하다. 하지만 미나의 전화번호는 아직 소은이의 휴대폰에 저장돼 있다.
소은이는 미나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모처럼만에 연락해서 나무컵을 되사겠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미나는 소은이 부탁을 들어줄 리도 없을 테고, 설령 나무컵을 되샀다 하더라도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러 방한한 레이첼에게 인파로 가득한 그 장소에서 그것을 꼭 전해줘야 할 만한 의미도 아니지 싶었다. 그냥 레이첼을 보러만 가자고 생각했다. 멀리서 보며 옛날 [해결사가족]의 레이첼 열혈 팬으로서 환호를 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은이는 그래도 궁금했다. 미나가 아직도 나무컵을 간직하고 있는지. 아직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연락을 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소은이는 휴대폰 주소록에서 미나 이름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소은이구나.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듣는 미나의 목소리가 화사하니 듣기 좋았다.
“잘 지내?”
소은이도 목소리를 밝게 하여 말해 주었다.
“나야 항상 그렇지. 내가 먼저 전화 하려고 했는데 선수 뺏겼네. 넌 별일 없지?”
“나도 항상 그래. 그냥 문득 생각도 나고 해서.”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거 아냐?”
“나무컵은 잘 갖고 있지?”
“그거 물어보려고 했구나.”
“그것도 그렇고 오랜만에 통화할 생각도 났고.”
소은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오글거리는 기분이었다. 미나는 자신과 그렇게 가깝게 지낸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통화할 생각이 났다니, 미나가 속으로 웃으며 거짓말하지 마라 그러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또 연락 하마. 잘 지내라.”
미나와 몇 마디 일상적인 말을 주고받은 소은이는 짐짓 소탈한 말투를 가장하며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애스터로이드’의 배우들과 약속이 돼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은 입구부터 많은 인파들로 붐볐다.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이 영어로 쓰여 있는 피켓들이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은 인파들 위에 넘실거렸고 웰컴 투 코리아 라 쓰인 대형 플래카드가 대형 상영관의 후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소은이는 인파를 헤치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많은 좌석이 이미 다 들어차 있었고, 좌석과 좌석 사이 계단조차 사람들로 점령당해 있었다. 소은이는 여기저기 옮겨가며 앉을 만한 데가 있나 둘러보다가 계단의 적당한 공간을 찾아 다른 사람들을 비집고 앉았다. 곧 있으면 나타날 배우들이 서게 될 무대가 그제야 보였다.
잠시 후 멀티플렉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배우들과 감독, 그리고 통역사 하나가 차례로 무대에 등장했다. 일제히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소은이는 준비해 온 카메라를 꺼내 최대한 줌을 당겨 무대 위 배우들에게 렌즈를 향했다. 감독과 작가를 제외한 두 젊은 남녀주연배우와 한 중년의 흑인여자배우가 카메라의 화면에 들어왔다. 소은이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어 무대 위를 바라봤다. 카메라의 화면에 들어온 배우들 말고는 직접 본 무대 위에도 더 이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레이첼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레이첼은 어찌된 걸까.
진행자가 마이크를 들고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했다. 감독과 작가를 차례로 소개했고, 그들은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한국어로 짤막한 인사 한 미디씩 했다. 이어 두 주연배우를 소개했고, 배우들은 객석의 함성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역시 한국말로 짤막한 인사와 한국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진행자는 마지막으로 한 중년의 흑인여배우를 레이첼 데이비스라며 소개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소은이의 손이 카메라 무게를 못 이겨 슬그머니 내려졌다. 포스터에 쓰여 있는 레이첼 데이비스는 저 배우였다는 얘기야? 결국 같은 이름이었다니. 소은이는 멍한 눈으로 무대 위를 쳐다봤다.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흑인여배우가 소은이의 눈에 흐릿하게 보였다. 소은이는 잠시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슬며시 일어섰다. 아까처럼 사람들을 비집으며 계단을 올라, 상영관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멀티플렉스 매표소 장소는 아까와는 다르게 거짓말처럼 한산했다. 소은이는 매표소 앞 의자에 앉아 상영중인 영화들의 포스터를 눈으로 훑었다. 온 김에 영화나 한 편 보고 갈까 싶었다. 상영시간표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뒤돌아서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고등학생인 듯한 남학생이었다. 남학생은 “엇!”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얼른 휴대폰을 주워 액정을 확인하고 곧 울어버릴 듯 얼굴을 찡그리는 남학생. 소은이는 목례하며 “죄송해요.”하면서 남학생의 얼굴을 미안한 듯 쳐다보았다. 남학생은 소은이를 힐긋 보며 휴대폰 액정을 소은이 눈앞으로 보여주었다. 휴대폰 액정은 금이 가 있었다.
“어머, 지금 깨진 거예요?”
“예.”
“이를 어째. 정말 죄송해요.”
남학생은 휴대폰 전원을 켜고 손가락으로 액정을 몇 번 터치해보더니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터치도 안 되네.”
“터치가 안 된다구요? 이리 줘 보세요.”
소은이는 남학생에게서 휴대폰을 낚아채듯 가져가 홈화면에 떠 있는 어플들을 터치해 보았지만, 남학생 말대로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았다.
“어머 어쩌냐. 고장이 난 거 같은데. 통화는 되나?”
“그거야 모르죠. 해 봐야 알죠.”
소은이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번호 알려주세요. 제가 걸어볼게요.”
남학생이 알려 준 번호를 누르니 신호가 가면서 남학생의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하지만 터치기능이 마비됐으니 전화를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수리를 맡겨야 될 것 같은데 고치면 수리비하고 제 계좌번호 문자로 넣어 드릴 테니까 그 때 송금해 주세요.”
“저기요, 이거 제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게 아니고 그쪽도 잘못이 있는 거 같은데요.”
“알아요. 그래서 수리비 절반만 알려줄 참이었어요.”
뒤돌아서 가는 남학생의 뒤를 향해 소은이는 입을 비죽거렸다. 수리비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됐다며 그냥 기분 좋게 자신을 보내줄 수는 없는 거였는지 좀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멀티플렉스 극장 건물을 나와 가까운 버스승강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승강장 저만치에 아까 그 남학생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남학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자신을 쳐다보는 소은이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저 좀생이도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는구나 하면서 소은이는 다시 입을 비죽거리며 버스가 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은이가 타려는 버스가 도착했다. 사람들을 따라 버스에 오른 소은이는 맨 뒤쪽으로 가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