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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39. 여기 불법은 어떻습니까?
[운문선사께서 한 때 법을 보이셨다.
남방의 선객이 국사에게 묻기를, "여기 불법은 어떻습니까?" 하니 "몸과 마음이 일여(一如)하여 몸 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하였다.]
이 한 향상일구(向上一句)를 운문선사가 예시하셨다.
여기서 “남방의 선객이 국사에게 묻기를”이란 말씀은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나누어 진 육조헤능선사 이후에 홍인선사의 인가를 받은 혜능선사와 홍인선사의 수제자인 신수의 북종선으로 갈리였는데
남종선이라는 것은 헤능선사의 제자들을 통칭하여 불렸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국사라고 하신 분은 바로 헤충국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혜충국가에게 남종선의 납승이 찾아와 법거량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납승이 혜충국사에게 물은 질문이 "여기 불법은 어떻습니까?" 하니 "몸과 마음이 일여(一如)하여 몸 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하였다.“라고 하십니다.
질문이 "여기 불법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당나라 당시 남북선으로 갈라졌는데 국사님의 불법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국사님은 북종선을 지향합니까 아니면 남종선을 기향합니까를 물었든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하나이며 석존의 현교(顯敎)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인 밀교(密敎)가 맞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혜충국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몸과 마음이 일여(一如)하여 몸 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하였다.“라고 하십니다.
현교와 밀교는 왜 갈라졌는가? 부처님의 팔만사천 경전을 사실 진리를 설하였다기 보다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진리를 채득하는 수행에서 갈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법시불언(法是佛言)이요 선시불심(禪是佛心)이라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진은 드러남으로 현교라고 하였고 부처님의 마음은 드러낼 수도 표현할 수도 드러낼 수 없으니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내려온 밀교인 것입니다.
그러니 선불교(禪佛敎)는 오직 수행을 그 근본으로 합니다.
불교의 수행이란 수행방법은 입 능가경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수행한 방편을 기록한 경전입니다. 보리달마가 전한 경전이며 부처님의 육년고행상을 그린 경전인데 사실 부처님 자신이 깨달음을 이루시고는 이 고행을 절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행의 결과로 성불을 이룬 석존이고 보면은 수행없이 저절로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전무합니다.
경전을 한 번 읽어 보는데도 수십년이 걸리는데 이것을 이해만 하려고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이나 지금이나 참선수행없는 헛 몸뚱이 살아도 삶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납승도 경전공부 10년을 하였으나 아무른 소용이 없어 오직 천태선사의 일관법(一觀法)으로 무자 화두로 참선방을 집에 시설하여 홀로 7년이 걸려 심법계의 28천을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를 해도 모릅니다. 오직 자기 스스로 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해 보면 다 알아 집니다. 오직 이 마음이라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설한 것이며 법화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오직 하나 마음이라는 이 일심(一心)이 부처이며 부처님의 경전은 다 불이법문(不二法門)인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말과 글과 행동을 해도 다 그 실체가 없음을 모르기 때문에 헛말이요 헛글이요 헛 행동인 것입니다. 진여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 설하는 선어록 역시 헛소리이고 도둑놈이요 사기꾼인 것이라고 임제선사와 운문선사는 꾸짓고 있습니다. 오직 성불인연은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천년을 수행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25년을 일승법을 설해도 한 사람 구경조차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혜충국사도 "몸과 마음이 일여(一如)하여 몸 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라고 하시어 몸이 있어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어 몸이 있듯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 심신일여(心身一如)라고 일승법으로 알려 주시었습니다.
그러니 이 일승법을 논리적으로 해석해 놓은 아미산의 글을 한 번 들어 보시면 많은 깨침이 있을 것입니다.
< 동정일여(動靜一如),몽중일여(夢中一如),숙면일여(熟眠一如) >
여기서 일여(一如)라고 할 때의 일(一)은 절대 하나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여(如)는 같다는 뜻으로 서로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일여(一如)’란 진여의 이치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대혜(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그의 저서 <서장(書狀)>에서 일여(一如)란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不二法)을 말하는 것이지 분별되는 경계가 아니다.
일여(一如)란 여여(如如)와 다름이 없는 말이니 불이(不二)의 법성(法性)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일여(一如)’를 ‘한결같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선문에서는 일여(一如)란 스님들이 화두참구를 열심히 하면 오매불망 화두가 잊히지 않고 생생하고 여여할 수 있게 됨을 말한다.
그리하여 동정일여(動靜一如 ; 가만히 있거나 움직이거나 같다),
몽중일여(夢中一如 ; 꿈속에서도 같다.) 숙면일여(熟眠一如 ; 숙면 속에서도 같다), 오매일여(寤寐一如 ;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같다),
어묵일여(語墨一如 ;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같다), 생사일여(生死一如 ; 사나 죽으나 같다) 등의 말이 있게 됐다.
특히 성철 스님께서는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는 공부를 하다가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경계라고 하시면서 이 삼관(三關) 돌파하라고 강조하셨다.
삼관을 통과하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내용을 검토해보자.
1) 동정일여(動靜一如)란 얘기하거나 밥 먹을 때와 같이 움직이거나 고요하게 있거나 동정(動靜)의 상태에서도 화두를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경지를 말한다.
화두라는 의심덩어리가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말할 때나 묵언(默言)할 때나,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상관없이 머릿속에 가득한 마음의 경계, 화두가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경계를 일컫는 말이다. 참선하는 선승으로서 빠지기 쉬운 여러 단계의 심리적 장애, 즉 산란(散亂), 혼침(昏沈), 수마(睡魔), 무기공(無記空) 등을 뛰어넘은 경지를 말한다. 마음속에 화두가 빈틈없이 꽉 찬 상태를 말한다.
가거나 오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늘 여여해서 잠시도 끊어짐이 없는 것을 말한다. 쭉 이어지다가 잠깐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그런 것은 "일여"라 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드는 순간까지 한 생각이 끊어지지 않는 걸 "동정일여"라 한다.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라는 말도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해도,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한 결 같이 화두 의심이 간절하다는 뜻으로, 동정일여와 같은 말이다.
2) 몽중일여(夢中一如)라 하는 것은 꿈속에서도 화두가 생시와 같이 성성하게 들리는 것이며, 비슷한 말 숙면일여(熟眠 一如)는 깊은 잠에 들어서도 화두가 한결같은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정도의 의정(疑情)이 이어지게 되면 몽중(꿈속)에서도 화두를 들어 의심하는 것이 평시와 같게 됨을 몽중에도 일여하다 하는 것이며, 이 말은 수행자가 이렇게 될 정도의 분심(憤心)과 간절한 의심으로 공부하라는 경책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고 해도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화두를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간절히 의심 지으면 자연히 몽중에도 화두공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몽중일여란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꿈에서도 부처님의 경계가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경계가 나타나는듯하고 화두가 조금 들리는 듯싶으면 그걸 ‘몽중일여’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몽중일여가 아니다. 잠이 들어 깊은 꿈속에서조차 변동 없이 여여부동한 것을 몽중일여라 한다. 그런 몽중일여의 경계가 되면 ‘화엄 7지 보살’의 경지라고 한다.
3) 숙면일여(熟眠一如)란 꿈 없는 깊은 잠에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이다. 숙면일여의 경계가 나타나면 8지 이상의 자재보살인데 이것조차도 제불조사께선 제8 마계(魔界-악마의 세계)라 해서 머물고 집착하는 것을 극력 배척했다.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계속 일으킴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하고,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하며, 오매일여(寤寐一如)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하게 되면, 다음에는 깊은 잠 속에까지 한결같게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공부의 숙면일여(熟眠一如)라고 한다.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가 있다 하면 벌써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만 가지고 봐도 선문에서 조사나 종사라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아무리 깨친 것 같고 지견이 분명하더라도 오매에 일여한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또한 무심의 경계를 체득했다 하더라도 그 곳에 머물면 마구니 경계가 됨을 알아 확연히 깨쳐 내외명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 성철 스님
영겁불망(永劫不忘)인 생사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이다.
참선은 화두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영겁불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숙면일여하면, 곧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된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眞如一如)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제8 아뢰야 위(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8 아뢰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만 돼도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 자유자재하다.
그러나 미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은 진여위(眞如位)의 자재함은 못 된다.
그러므로 아뢰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 위, 진여 위에서의 숙면일여가 돼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된다.
※분단생사(分段生死)---생과 사를 서로 떨어진 분단(分段)의 세계로 생각하는 생사관이 분단생사이다. 분단생사관에서 보자면 생사가 서로 격절돼 있어서 죽음은 엄청난 공포이다. 범부의 생사관이 바로 분단생사(分段生死)이다.
※변역생사(變易生死)---생사가 서로 격절된 세계가 아니고 단지 몸만 바뀌어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생사관이 변역생사이다.
생사가 서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비슷한 말에 오매일여(寤寐一如), 어묵일여(語墨一如)가 있고,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말도 있다.
• 오매일여(寤寐一如)는 잠자고 있을 때(寤)와 깨어 있을 때(寐)가
‘하나’라는 뜻이다. 즉, 불이(不二) 일여(一如)이므로 분별하지 말라는 뜻으로, <능엄경>에 나오는 오매항일(寤寐恒一), 오매상일(寤寐常一)과 같은 말이다.
간화선에서는 자나 깨나(寤寐)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하라는 뜻,
즉 삼매의 의미로 쓰고 있다.
• 어묵일여(語墨一如)는 말을 할 때나 침묵하고 있을 때나 같은 경지란 말인데, 고요할 때나 움직일 때나 한결 같이 기도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관세음보살"이 달아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더욱 마음을 거두어 잡으면, 말을 하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염할 수 있는 어묵일여(語墨一如)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 생사일여(生死一如)는 진여(眞如) 편으로 보면 생도 없고 사도 없어 그 사이에 조금도 차별이 없는 평등함을 말한다.
진여란 대승불교에서 이상적인 개념의 하나로 우주 만유에 보편한 상주불변(常主不變)하는 본체를 말한다.
우주의 무상변전(無常變轉)에 의해 난 것은 반드시 멸한다.
중생은 업인(業因)에 의해 났다가 죽고, 죽었다가 또 나서 육도(六道)를 윤회한다. 이를 바다에 비유해 생사해(生死海)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사의 바다에 어떤 경계를 긋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생이 사요, 사가 생이다. 궁극적으로는 생과 사는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는 「본래 생사가 없다」는 본무생사(本無生死)의 진리를 주장한다. 즉, 불법은 늙어가는 사람을 젊게 만들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본래 늙음」이 없고 「본래 죽음」이 없는 그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본무생사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이를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노병사(老病死)의 고통은 사라진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통은, 생사가 하나이므로 경계도 없고 차별도 없고, 또한 「본래에는 생사가 없다」는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서 생기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과 사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생과 사는 그냥 다른 이름일 뿐이다.
깨달은 분에게는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생사가 이미 없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윤회하는 중생들의 삶도 생사가 없다. 여기서 남이 전생의 죽음이요, 여기서 죽음이 내생의 남이기 때문이다. 생이나 사나 변화하는 무상한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생사일여(生死一如)라 하는 것이다.라고 아미산은 설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신심일여(身心一如)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이렇게 예시를 한 운문선사의 말후구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운문스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말씀하셨다.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화두같이 한 마디를 던집니다. 여려분은 어떻게 답을 하겠습니까?
산하대지라고 물었지만 이것은 나와 상대법인 산천대천세계인 경계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산하대지는 없지만 지금 여기서 내 마음은 온 삼천대천을 다 그려 내고 있습니다.” 돌~~!!!!!!!!!!!!!!!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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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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