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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어려서 부모를 여윈데다가 집안에 가산이 없었으므로 개국공신의 후손이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청년기 역시 불우하게 지냈다. 자를 자준(子濬)이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사귄 친구 권람 등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다가 교리(校理)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를 알게 되었고, 수양대군을 소개받았다. 수양대군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게 된 그는 수양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았다. 글을 읽어서 학업을 쌓았으나 오래 과거를 보지 않다가, 뒤늦게 여러번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고 가세도 빈한해져 그는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다. 37세에 음보(蔭補)로 처음으로 출사하여 송도(松都-개성)에서 경덕궁직(敬德宮直)이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수양대군과 자주 교류하였고 뒤에 그의 모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4]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 그는 역시 같은 경덕궁직에 있던 무사 홍달손(洪達孫), 홍윤성, 양정 등을 만나 사귀게 되는데, 한명회는 이들 30여 명을 수양대군에게 적극 천거하여 이들의 인맥을 통해 거사를 일으킬 병력을 모으게 된다.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1453년(단종 1년) 사람과 재물을 동원,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의 집권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막강한 권력에 반발하는 뜻에서 한명회를 지지하는 여론도 조성되었다. 이어 한명회는 모사가들을 시켜 잔존 세력을 숙청한 후, 직접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에 찾아가 김종서 등과 황보인 일족을 참살케 한 후 군기녹사(軍器錄事)·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 1등관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영의정부사가 되면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발탁되었다가 1454년(단종 2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한다. 1455년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겸판사재감사(兼判司宰監事) 지예조사(知禮曹事)를 거쳐, 그해 6월 우부승지(右副承旨), 세조가 단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국왕으로 즉위하자 한명회는 다시 좌부승지(左副承旨)에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가 곧이어 우승지에 올랐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의 무사로 하여금 김종서를 살해하게 했고, 이른바 '살생부'를 작성해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4] 계유정난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 세조에 대한 지지, 설득의 가능성 여부 등을 파악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다. 이후 살생부는 숙청과 제거, 인사의 대명사로 널리 통용되었다. 1456년 2월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 3부자를 연회장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미 세종으로부터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들었다는 것을 안 한명회는, 연회장에 별운검으로 임명된 성승, 유응부, 하위지의 출입을 차단한다. 그는 정창손에게 사위를 설득하게 했는데, 사육신과 함께 세조 3부자 척살에 가담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의 가담자들을 폭로함으로써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등을 체포하여 국문 후 처형하고, 800여 명의 관련자들을 처형했으며, 수천 명을 유배시켰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사형된 후 사육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 이조판서를 지냈다. 셋째 딸을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에게 출가시켰으나, 셋째 딸은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는 산욕으로 요절한다. 외손자 인성대군 마저 요절하면서 한명회는 해양대군과는 다소 껄끄러운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해양대군이 곧 예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1457년 이조판서가 된 뒤, 상당군(上黨君)에 책봉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병조판서 재직 중 평안도와 함경도에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변방을 출몰하는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고, 북변을 수습한 뒤, 북방에 축성하여 방어를 확실히 하고 되돌아왔다. 그뒤 황해·평안·함길·강원도 체찰사 등을 역임했다. 그해 숭록대부가 되었고, 1458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서 다시 병조판서를 겸했다가 1462년 우의정이 되었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그의 빈인 수빈 한씨는 궁궐에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세조의 배려를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인수대비의 친정과는 10촌도 더 차이가 나는 먼 친척이었으나 인수대비의 집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는 인수대비에게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제의를 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4] 그는 우선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5] 왕후로 삼게 했다.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 혈과 그의 넷째 딸을 혼인시키는데, 후에 예종이 일찍 죽자 한명회는 신숙주, 정창손 등과 함께 자을산군을 추대하여 성종으로 등극시키게 된다. 또한 권람·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인척 관계에 의한 요직 장악이라는 인사 폐단을 낳기도 했다.
한명회는 칠삭둥이라고 불리는 조산아로, 조산아는 뇌와 면역체계 미성숙으로 사망률이 높다. 살아남아도 질환에 걸릴 확률이 크다. 평균 지능도 정상아보다 떨어지는 편이다. 동의보감 내경편 임신의 시초[胎孕之始]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上陽子曰人初受氣也 九日而陰陽大定四十九日而始胎 상양자(上陽子)는 "사람은 처음 기를 받을 때에 9일이 되면 음양이 정해지며 49일이 되면 먼저 태가 생긴다. “ 然後七日而一變故滿三百有六日者滿二百九十六日者皆上器也.有二百八十六日者二百六十六日者中器也.有二百五十六日者二百四十六日者下器也. 그 후 7일 만에 한번씩 변하기 때문에 만 306일이나 296일이 되어 낳은 아이는 상등인품이 되고 286일이나 266일이 되어 낳은 아이는 중등인품이 되며 256일이나 246일이 되어 낳은 아이는 하등인품이 된다. 盖天干甲必合己而方生地支丑必合子而方育自非天地合德則人必不生也. 대체로 천간(天干)인 갑(甲)은 반드시 기(己)와 합쳐야 곧 낳게 되고 지지(地支)인 축(丑)은 반드시 자(子)와 합쳐야 곧 자란다. 또한 천지의 덕이 합치지 않고서는 사람이 생겨나지 못한다. 故云九月神布氣滿而胎完亦云十月懷胎也. 그러므로 9달이 되면 의식이 생겨나고 기가 그득 차서 태아가 다 자란다. 此天地之德合於氣而後生也. 또한 태아가 10달 동안 태(胎) 속에 있다가 천지의 덕이 기(氣)와 합친 다음이라야 나오게 된다"고 하였다. 즉 엄마 뱃속에서 오래 있을수록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크면 머리도 크기 때문에 출산시 어머니에게 진통의 고통을 줄 확률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아무튼 임신을 하면 튼살이 생겨서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한의원에서는 종아리, 허벅지 뿐만 아니라 배의 복부튼살도 ST침으로 치료하는데 배의 튼살은 출산후 1개월이후부터 서둘러서 치료받는 것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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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3.13 16:19
첫댓글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1453년(단종 1년) 사람과 재물을 동원,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의 집권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막강한 권력에 반발하는 뜻에서 한명회를 지지하는 여론도 조성되었다
한명회는 모사가들을 시켜 잔존 세력을 숙청한 후, 직접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에 찾아가 김종서 등과 황보인 일족을 참살케 한 후 군기녹사(軍器錄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