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사랑이었다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세상을 만드신 분, 세상보다 더 크신 분께서
우리가 먹는 작은 빵 속에 담긴다 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리적으로 가당치 않기에 이해시킬 수 없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비유하자,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요한 6,60)고 한 제자들의 반응과
사람들의 일반적 지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빵에 비유하신 일련의 말씀들과,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들을 연결해서
곰곰이 들여다보면, 왜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빵과 동일시하고 당신 피를 포도주와
동일시하며, 그 마지막 식사를 제자들에게 되풀이하여 행하고 살라 하셨는지
가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성을 초월해 계신 하느님께서 쉬이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알아 달라 예수님을 통해 호소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제로 살며 교우들께 성체를 분배해 드릴 때 성체를 모시기 위해 받쳐 드는
교우 여러분의 손에서 사랑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혹은
또 다른 누군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주름지고 패였을 손은 고단했을 여러분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지요. 그리고 그 힘들었던 삶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생각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 한 명
한 명에게 빵을 떼어주시며 그들의 손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도,
훗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당신께서 먼저 가신 고난과 죽음의 길에
동참해야 하는 제자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의 눈길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았고, 그 사랑이 또 사랑을 증거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쪼개지고 나누어질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여러분도 부족했지만
쪼개며 나누었던 사랑이 오래도록 기억에도 가슴에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지금껏 쭉 사랑하며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세상살이라는 고달픈 현실은 사랑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몰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고, 하느님 사랑을 닮을 기회도 끝나지 않았음을…
그래서 닮고 싶은 숭고한 사랑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여전히
우리 앞에 열려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도 사랑에 분투하는 하루를 보내셨으면 합니다.
글 : 노현석 Peter 神父 – 대구대교구
내 삶의 끝을 내가 결정할 수는 없는 건가요?
지난해 말 우리나라에서 한 불치병 환자가 ‘安樂死(안락사)’를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그는 하반신이 마비된 척수염 환자로,
스스로 배변 활동을 할 수 없고 수시로 찾아오는 강한 통증은 진통제로도
소용없는 지경이 됐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조력자살’을 돕는 스위스의 한 단체에
가입했지만, 스위스에 동행해야 하는 딸이 국내법에 따라 자살방조죄로
처벌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스위스 행을 단념하고 결국 헌법소원을 냈지요.
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죽음이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속하는지 여부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그러면 안락사는 무엇이고, 교회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요?
안락사(euthanasia)는 어원적으로 볼 때,
그리스어 “eu(좋은, 아름다운, 편안한)”와 “thanatos(죽음)”가 결합된 단어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임종 자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온히 맞이하는
‘평화로운 죽음’을 지칭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극도의 고통을 피할 목적으로 죽음을 초래하기 위한 행위나 방조’로
이해되고 있지요. 한마디로 안락사는 환자의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흔히 말하는 ‘尊嚴死(존엄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존엄사는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진입한 환자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과도하고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것이 존엄사라면,
피할 수 있는 죽음을 적극적인 행위나 소극적인 방관을 통해 인위적으로 앞당기려는
것이 안락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에서도 안락사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단호한 어조로
비판하고 반대하지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입장은
이미 1957년 비오 12세 교황 이후로 견지해 온 것이지요.
그러면 교회는 왜 안락사를 반대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되어야 하고, 인간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권한이 결코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교회의 확고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락사가 합법화될 경우, 무언의 압력(경제적 이유나 부양가족의 부담 등)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환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예수님 지상생활의 마지막 여정을 떠올려 봅니다.
하시고자 했다면 간단하게 세상을 구원하고 승천하실 수도 있었을 그분이,
굳이 사람들로부터 매 맞고 채찍질 당하고 갖은 모욕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이 성화(聖化)되었고,
그분의 고통으로 우리의 고통은 구원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더는 무의미한 고통은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불치병 환자는
스위스의 자살여행 소식을 접하고 ‘희망’이 생겼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과연 그가 희망했던 것은 죽음일까요? 아니면 구원일까요?
글 : 朴燦浩 Philip 神父 – 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