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 로마서 8:18-25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300만명의 아사자들이 생겨날 때 일이라고 합니다.
그때 미국 동포 중에 어느 목사님께서 북한의 노인들을 만나서
탈출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노인네들에게 “왜 북한을 탈출하려고 하십니까?‘라고 여쭈어보았습니다.
그 노인들은 마음껏 찬양을 불러보고 싶어서 북한을 탈출하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노인들을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약 60여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들 모두를 구출시켜 드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서는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기도하고 돌아온 노인들은 눈물이 글썽글썽거리면서 탈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니까, 노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미국의 목사님이 우리들을 도와서 탈출시켜 주겠다고 하는데... 따라 갈까요?
어떻게 할까요? 하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이 북한 땅에 남겨둔 줄로 아느냐?’라고 하시면서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우리들이 굶주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까?”라고 여쭈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도 내 뜻이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핍박받아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것도 내 뜻이다.”
“우리가 제대로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것도 내 뜻이다. 그것이 너희들을 이 곳에 남겨둔 이유다.”
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탈출하지 않고
수용소로 끌려가서 모두 다 죽었다고 합니다.
갈기갈기 찢겨서 죽었다고 합니다.
아직도 북한 땅에는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싶어 하는 지하교회 신앙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속히 자유대한민국, 한민족이 자유 통일이 되어서 북한 땅에서도 마음껏
소리 지르면서 기도도 할 수 있고, 찬양도 부를 수 있는 날이 빨리 찾아오기를 소망합니다.
자유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은 얼마든지 마음껏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고,
찬양을 부를 수 있고, 성경을 읽으면서 예배드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저 늘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드리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33회 파리 올림픽이 내일 12일에 대 장정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초 금메달 5개를 목표로 했던 한국선수단은 벌써 금메달 13개로
8위를 하는 선전을 펼쳤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금메달을 따기 위해 엄청난 훈련을 하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훈련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 지옥훈련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훈련에 매진하고 땀과 눈물을 흘리는 단 하나의 이유는
훈련 뒤에 오는 영광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메달을 목에 건다는 그 목표를 위해 그 영광을 위해 선수들은
그렇게 어려운 훈련도 감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고난도 훈련도 어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합니다.
18절 말씀에서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다른 성경을 보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조금 힘들고 어렵지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힘을 내자고 독려합니다.
당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는 고난이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느냐고 항변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복은커녕 이런 고난을 당한다니
이게 웬 말이냐? 고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을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격려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냐? 고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체험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요,
자신은 십 사년 전에 셋째하늘에 이끌려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셋째 하늘은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 중에 가장 큰 계시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는 계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계시를 보고 경험했던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이 너무나 크고 화려하기에 그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 영광에 비교해보면 현재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니 그것을 참고 인내하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이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고
가장 귀한 일이고 우리가 한 일중에서 가장 잘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보다 더 복되고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저는 이런 고백이 여러분들의 입을 통하여 여러 번 고백되어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갔을 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격적으로
고백되어질 때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때에는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큰 축복이었고 이렇게 잘 한 일이었고
이렇게 굉장한 일이었구나 하는 고백을 감격적으로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렇게 크고 놀라운 축복입니다.
교부 크리스톰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모든 고난을 다 모아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에 단 1초에도 비교할 수 없다.”했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경험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 믿는 자가 받는 영광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탄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자기는 못 들어가는 그 영광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악한 사탄은
그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핍박하고 그래서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있다는 것은 영광이 있다는 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광이 있기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참고 이기며 승리한 자에게만 영광이 주어집니다.
고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자에게는
아무런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기 위해 예비하신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참고 이기며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먼저, 현재의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을 면하기 위해 미래의 영광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미래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참고 기다릴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늘 직면하는 신앙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고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현실 때문에 현실을 위하여 미래를 포기하고
미래를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현실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갑니다.
현실의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하게 살아갑니다.
현실의 재미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현실의 편함을 위하여 힘쓰고 애써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위한 삶은 필연적으로 미래의 삶을 파괴합니다.
미래를 가난하게 하고 희망이 없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현재를 위해 미래의 영광을 포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미래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가스펠 투데이라는 교단 신문에 대구 대봉교회 원로목사였던
박00목사님의 이야기가 최신예화로 소개되었습니다. (현재는 고인)
이 목사님이 목회사역을 마친 후에 한 번은 꿈을 꾸셨답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살게 되는 꿈이었는데 그 꿈에서 목사님은
그 천국에서 자신이 받을 상급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평생 목회를 하고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 총회장까지 했는데
막상 천국에서 상급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너무 깜짝 놀란 것입니다.
아무리 꿈이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목사님은 ‘왜 그럴까?’ 고민하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렸습니다.
‘내가 너무 대접만 받고 베풀지 못하고 현실을 위한 삶을 살고
미래를 위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 목사님은 남은 삶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삶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래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현재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미래의 영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을 조금 덜 받기 위해 미래의 엄청난 영광을 버리는 잘못된 자가 되지 않습니다.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2. 둘째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보이지 않는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영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바라보는 소망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잘 바라보지 못하고 중간에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고
중단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끝까지 붙잡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게 잘못하는 것이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목표를 두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사실 보이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이것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 소망이 깨어지고 실망할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었던 소망이 생각지 못한 이곳저곳 탈이 나고 병이 들면서
그 소망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쁘고 세련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소망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쓸데없는 소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보다 더 배우고 더 똑똑하고 더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소망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 똑같아 진다는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인 줄 믿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 쓸데없는 것으로 끝나지만
보이지 않는 소망은 영원한 소망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소망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실체가 있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을 소망으로 생각하다가 실망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간직하면서진정한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처럼 애굽의 모든 보화와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 받는 보이는 세상의 것에
너무 미련 갖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붙잡는 성도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셋째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25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절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진실하신 분이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장래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참고 장래의 영광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소망가운데 현재 잠시 잠깐 당하는 고통은
참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 약속을 분명하게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탄식하며 고통당해 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참고 견뎌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참고
견디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이 서겠는가?”
그러면서 임종할 때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을 계속 암송했다고 합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5번을 암송하고 마지막 16번째는 끝까지 암송하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갔던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도 비교가 되지 않고 이 세상의 고난도 비교가 될 수 없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어떤 것도 이길 수 있게 하고
어떤 것도 참을 수 있게 하고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소망하며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한 자가
최고로 성공한 자이고 최고로 지혜로운 자이고 최고로 행복한 자입니다.
그 나라와 영광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보이는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참음으로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의 주인공이 되시는 축복이
성도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차이 나는 신앙생활 에베소서1:3-14
어느 신앙이 좋은 주부가 친정엄마를 그리워하면서 드리는 고백입니다.
엄마의 말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늘 ‘조심해라’, ‘정신 차려라’, ‘자그마한 전기 제품으로도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등등
언제나 똑같은 소리를 하며 살았습니다.
지긋지긋하지만, 일단 엄마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내가 어느 곳에 가더라도 항상 나를 받쳐주는 버팀나무가 되어주었습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보니 어느새 나 자신도 친정엄마랑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정엄마랑 똑같은 말을 하고 있고,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마의 말은 늘 반복됩니다.
부모님은 늘 똑같은 소리로 반복합니다. 때로는 지겹도록 반복합니다.
그런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된 말이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아들딸의 인생에 큰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그 아들딸이 부모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온전한 뜻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엄마의 말, 그것은 사랑의 말이었습니다.
반복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하면서 똑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동안 내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하시고 또 하시고 또 하시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씀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보배, 가장 값진 진주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 봅시다.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5)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바울의 편지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뭔가 모순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또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성도들의 현실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그 속에 복음대신에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와서 그것이 마치 복음인 것 같이 자리 잡을 때가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물질이 많아지고 출세하고 자녀들이 잘되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가 없어지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도 침울하고 기운이 빠지고 슬퍼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세상의 물질이요 가치입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무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좌우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물질이나 가치가 우리 삶을 좌우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에게 있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요 가짜 복음입니다.
진정한 복음이 있다고 하면 세상의 것이 우리를 좌우할 수 없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복음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삶을 살아야 그것이 진정한 복음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세상의 것이 잘되면 더 좋겠지만 그것이 없다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을 믿고 있는 성도의 삶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미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의 소원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시 때때로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이 아닌 세상의 가짜 복음을 믿고
그 가짜 복음 때문에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복음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면서 세상을 뛰어넘는 삶으로,
세상과 차이 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론 부분입니다.
이 편지는 에베소라고 하는 지 교회의 형편 때문에 쓴 편지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돌려보도록 지 교회의 형편과 상관없이 쓴 회람서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와 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이 받은 축복을
길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4절까지는 우리 성경에는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실제 헬라어 원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실존하는 헬라어 문장에서 제일 긴 문장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받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감동적으로 길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크고 감동이었기 때문입니다.
크루즈 배를 타고 세계여행의 꿈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을 하면서 드디어
호화 유람선을 타고 세계일주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티켓을 끊고 유람선에 탔을 때 이 사람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배에서 사용할 돈은 별로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좋은 식당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간편식으로 배를 채우면서
좋은 식당과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이 재미있었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돈이 별로 없어서 배의 좋은 식당과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여 별 재미가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
티켓을 끊고 배에 탔으면 배에 있는 식당이나 시설은 무조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몰랐느냐?’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는 지나가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받은 권한과 축복을 알지 못하여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배를 탔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거지처럼 굶고 배고파하면서 별 재미없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방주에 올라탔으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특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특권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축복과 특권을 가지고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면 축복과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살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더 좋아 보이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게 되고
세상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세상 사람들과 차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이 땅의 축복과 안위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의 전부라고 한다면,
이제 그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거짓 복음을 버리고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졌고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그것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고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무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늘의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신령한 복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주어진 복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4절 5절)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에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말을
이성적으로 잘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입니다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구원과 축복은 결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였고 생각하지도 못하였고 그런 꿈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하나님은 갖고 계셨고 그래서 우리를 예정하셨고 택하여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 속에서 받은 하늘의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5절 말씀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받은 하늘의 신령한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누구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속에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다 포함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
지켜주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축복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자녀 된 우리를 축복하시고 지켜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목표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축복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강력한 손으로 이끌어 가실
하나님의 섭리요 주권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이 이 일을 시작하시고 계획하시고 섭리하셨기에
주님께서 끝까지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둘째는, 성자 예수님의 대속의 축복입니다.
7절 말씀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들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예수님의 피로써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이요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이
비 그리스도인입니다.
해결 받으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해결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해결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지만 해결 받지 못하면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해결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누구 때문에 해결 받았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 대속의 축복을 우리가 받고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입니다.
셋째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
인치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성자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알지 못하니까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까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통해서든지 가족들을 통해서든지 이웃들을 통해서든지
재미 때문에 갔던지 장난삼아 갔던지 우리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 복음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예수를 믿게 되고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절대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님의 역사인 줄 믿습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복음을 믿게 하시고 그 복음으로 자녀 된 자를 너는 이제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인쳐 주신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복입니다.
자녀 된 우리를 하나님이 늘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공급하시고 축복하시는 복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입니다.
이 신령한 하늘의 축복은 절대 우리의 힘으로나 능력으로나 지혜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대속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복음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나의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밖에 없습니다.
이런 신령한 하늘의 축복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세상의 가치관과 축복을 추구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자로서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을 떠나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보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부심을 갖고 영생의 삶을 바라보면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복을 주시고
우리를 책임지시고 가장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축복과 특권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세상과 차이 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