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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교토 여행16 - 겐코안 절에서 원형과 방형 창문과 피묻은 천장의 유래를 생각하다!
2024년 11월 21일 206번 버스로 금각사 동북쪽 다이도쿠지 (大徳寺, 대덕사) 절에 도착해 료겐인
(龍源院 용원원) 에서 ‘가레산스이 (枯山水)’ 정원을 보는데, 이 절은 1590년 황윤길과 김성일
1607년에는 경섬 (慶暹), 1624년에는 강홍중 (姜弘重) 등 조선 통신사 가 3번이나 묵었던 곳입니다.
이어 호소카와 타다오키 와 기리시탄(예수교) 이었던 부인 타마코 가라샤의 묘소가 있는 고토인
( 高桐院 고동원 ) 을 거쳐 고호안 (孤蓬庵 고봉암) 을 찾아가니, 다도의 스승 센노 리큐가
머물렀던 절로.... 조선의 막사발이 소장되어 있으니 이도다완 (井戶茶阮) 으로 일본 국보 입니다.
불교대학 앞에서 6번 버스를 타고 금각사 북쪽 다카미네 겐코안마에 ( 鷹峯源光庵前)
정류소에 내려서는, 500엔을 내고 단풍이 좋다는 겐코안 (源光庵) 으로 들어
가는데...... 원형과 방형 2개의 유명한 창문 에서 바라보는 단풍 이 절경이라고 합니다.
본당에는 둥근 '깨달음의 창' 과 네모난 방형의 '망설이는 창' 이 있어 불의(佛意) 가 담겨 있으니
둥근 창문은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않는 기분을 “선과 원통” 의 마음으로 나타내고.....
사각 창문은 살기나 병, 죽음 등 매일의 다양한 고통스러운 “인간의 생애” 를 나타내고 있답니다.
겐코안 (源光庵) 은 단풍 시기에 원형과 사각형 2개의 창으로 경치를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방문한다는데....... 금년은 늦더위 로 인해 단풍이 제대로 들지 않아
아쉬우니 12월 초순이면 원형 창으로 빨갛게 물든 단풍 을 볼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 겐코안 (源光庵) 본당의 천장은 얼룩덜룩 한게 특이한데.... 히데요시가
지은 교토 남부 후시미성 (伏見城) 의 유구 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때 초기
전투에서 낙성(落城) 의 비극을 전하는 피가 묻은 천정 이 있어 섬찟한 느낌을 줍니다.
“아즈치 모모야마 (安土桃山) 시대” 는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를 추방한 1573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 에도(도쿄) 막부 (江戶幕府) 를
수립한 1603년 까지를 말하는데.... 노부나가의 본거지가 비와호수 아즈치성 (安土城)
이고 히데요시의 거처가 교토(京都) 모모야마 (桃山) 후시미성 (伏見城) 이라 붙은 명칭 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후시미성 (伏見城) 에서 1598년 사망하였고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불탔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재건되어 에도 막부의 쇼군 선하(宣下) 의식 장소로 사용
되기도 하였으나, 히데요리를 죽인 오사카 전투후 역할이 오사카성 으로 옮겨가면서.... 결국
후시미성은 이에야스가 에도에서 시즈오카의 슨푸성(시즈오카성) 으로 은거한 1625년에 폐성 됩니다.
1598년 히데요시가 후시미성 에서 죽으니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는데 후계자는 5살 도요토미
히데요리 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자 이시다 미쓰나리 는 아이즈
(후쿠시마 서부) 의 우에스기씨와 접촉해서 에도를 포위하려고 하자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유인 하기 위해 가신 도리이 모토타다를 후시미성 에 두고는 아이즈 정벌에 나섭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는 서국 영주들을 규합해 모리를 총대장으로 추대하니 1600년 7월 17일
히로시마의 모리 테루모토 는 오사카성에 입성해 히데요리에게 문안하고는
서군의 총대장으로 취임하자...... 미쓰나리는 거병 선언을 발표하니 주고쿠
(中国), 시코쿠(四国) 및 큐슈 (九州) 의 다이묘가 추종해 오는지라 10만 병력 이 모입니다.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숨을 거둔 교토 후시미성 (伏見城) 을 8월 26일에 4만 병력으로
공격하자 2천으로 성을 지키던 도리이 모토타다 는 20분지 1 병력에 불과하나 성을
베개삼아 13일이나 버티니, 서군은 발목이 잡혀 사기가 떨어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 합니다.
미쓰나리는 일본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거성을 차지 해야 한다는 명분 에 사로잡혀 집착했던 것인데,
그냥 이 성을 놔두고 세키가하라로 갔더라면.... 2차 세계 대전때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를
무리하게 공격해서 대세를 그르치는데, 이는 “스탈린” 이라는 도시 이름, 그 명분에 집착 했기 때문입니다.
미쓰나리가 후시미성을 못본체 지나쳐 세키가하라로 갔더라면 승리할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대군을 거느린 장수들은 큰 전투를 앞두고 작은 승리를 쟁취해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싶은 유혹 을 떨치지 못하니.... 세번째 사례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고.... 네번째 사례는 임진왜란 남도근왕군 전라도 관찰사 이광 입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는 38,000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가는중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성
수비병이 불과 2천 인 것을 보고는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동군과 합류하니.... 이에야스가 격분했지만 온화한 성품 덕분에 차기 쇼군 이 됩니다.
임진왜란때 전라관찰사 이광 4만, 충청관찰사 윤선각 8천, 경상관찰사 김수등 5만 남도근왕군은 북진해
1592년 6월 3일 용인에 이르니 8만 대군을 이루는데, 왜군 와타나베 시치에몬 6백명 이 지키는
산채에 이르자 광주유수 권율은 그냥 지나가자고 했으나 이광은 서전에 승리로 사기 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 서울에서 내려와 보강된 문소산을 6월 5일 백광언 2천이 공격 했으나 패하는데, 다음날
왜군 1천 6백명이 아침밥을 짓던 조선군을 향해 돌격해 내려오자, 급습을 당한 8만 조선군 은 달아
나느라 밟혀죽고 깔려죽으니 후퇴해 집결한 부대는 권율의 1천 뿐이라.... 선조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도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 는 우에스기 정벌에 나선 이에야스에게서 "후시미성 수성명령" 을 받는데,
1600년 8월 26일 2천명 수비군은 무려 20배에 달하는 4만명의 서군에 포위되니...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시마즈 요시히로등 대군이 공격하자, "도리이 모토타다는 미끼로 버려진 말" 이
된 셈이었지만 13일간 저지 하는데 “싸우는 것이야말로 장수의 참된 길” 이라며 할복 권유를 뿌리칩니다.
결국에는 전사하니 "미카와 무사의 귀감" 이란 칭송을 받는데... 성안에 배신자의 방화로 적군이 쏟아져
들어오자 모토타다는 자결 했는데, 후시미성 마루에 피가 배었을 정도로 치열한 격전이었으니
이에야스는 모토타다의 희생을 발판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 했으니 전후 유족인 장남
에게 야마가타번 24만석의 다이묘로 승격시키는 파격을 연출했고 1603년에 에도 막부를 열게 됩니다.
도리이 모토타다와 병사들의 유해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2개월간 후시미성에 방치 되었고
혈흔 을 비롯 흔적들이 마룻바닥을 붉게 물들였으니, 아무리 지우고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지라
결국 마룻바닥의 판자를 뜯어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겐코안등 절로 옮겨서 천장 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 전투 직전에 후시미성을 구경한 조선 선비 가 있었으니, 일본에 성리학 을 전해주게
되는 “간양록 (看羊錄)” 의 저자 강항 (姜沆) 으로... 1597년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
갔다가 히데요시 사후에 일본인 승려를 따라 후시미성에 몰래 들어가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귀환후 선조에게 올린 간양록 (看羊錄) 에서 후시미성의 모습을.... "다섯 걸음마다 절 이 하나씩 있고
열걸음마다 누각이 있는데, 어느 길을 따라 나가야 할지를 모른다." "귀신이 재목을 가져다가
돕는다 해도 1, 2년으로는 공사를 마치지 못할텐데 1년만에 지었다니, 왜놈들이 얼마나 백성을
혹사 시켰는지... 왜인들이 얼마나 힘을 쏟아 일했을지를 족히 상상하고도 남았다." 고 적고 있습니다.
강항(姜沆) 은 임진왜란이 수년간 종전협상으로 멈추자 모친병환으로 형조좌랑 에서 휴가를 얻어 영광으로
내려왔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량 조달을 맡았는데,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가 점령되니
고향 영광으로 돌아오는데.... 정유재란 병력은 왜군 14만명에 명군 11만 7천과 조선군 3만 8천 이었습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북진하자 황석산성에 조선군 5백, 남원성에는 조선군 1천 과 명군 3천이 수비했고
전주는 명군 2천과 조선군 500 그리고 충주에 명군 4천이 있었지만 그외 조선군 약간을 합해도 명군
9천과 조선군 2천등 1만 1천으로는 왜군 12만 을 저지할수 없으니 왜군은 충청도 천안을 넘어 북진 합니다.
강항은 영광에서 의병 수백 을 모았지만 고니시등 왜군에 흩어지자 식솔 60명이 2척 배 에 나누어 타고 이순신
장군의 진영을 찾아가지만, 명량해전 승리 7일 후인 1597년 9월 23일 우수영을 돌아 멀리 전라남도
와 전라북도의 경계인 영광 까지 북상해온 왜군 배 에 사로 잡혀서 무안과 순천을 거쳐 일본으로 끌려 갑니다.
이순신 장군은 9월 16일 명량 해전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투 후에 백성들이 기다리는 우수영에는
들러지도 못하고 노를 저어 당사도에서, 배에서 밤을 세우고 금강 하구 군산 선유도 로 후퇴하는데,
왜군은 아직 300척이나 남았으니 진도 바깥 바다로 우회 하면 포위 당해 조선 수군이 전멸 할 것을
염려하셨는데 전사자 2명에서 보듯 원거리 대포사격은 화약과 포탄 이 거진 소모됐으니 싸울수가 없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도도 다카토라 왜군은 다음날 진격해와 우수영과 진도 를 초토화 하고,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 영광 까지 북진하며 조선인을 살육하고 방화하니 전라도 해안은 아비규환 지옥 으로 변하는데....
살육의 광풍 이 지나간 후에는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포로로 잡아 끌고가니 강항 일행등 만여명에 달합니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조선 내륙에는 포장도로 가 없는데다가 의병으로 보급 이 안되고 명군의 참전에 겨울철
혹독한 추위로 고생한 경험에 비추어 정유재란은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에 28개 왜성 을 쌓고 늦봄
이면 출격해서 경상, 충청, 전라 3도를 휩쓸고 늦은 가을 남해안 왜성으로 돌아와 휴식하면서 겨울을 납니다.
이렇게 몇년만 되풀이 하면 이미 쇠퇴해 가던중이라 제 코가 석자인 멀리서 온 명군은 장거리 보급
문제로 철수 할 것이고, 홀로 된 조선은 전국토가 피폐해져 더 버틸힘을 소진하고는 화의에
임할수 밖에 없게되면..... 경상, 충청, 전라 하삼도 를 얻을수 있다면서, 장기전 으로 들어가니
9명 장수가 조선 8도와 서울을 하나씩 나누어 점령했던 임진왜란과는 전쟁 목표가 전혀 다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음력 10월 2일 (양력 11월 초순) 까지 남해안 왜성으로 철수 하라고 명하니
충청도 직산 까지 북상해 조선군이 모두 도주한 가운데, 명군 기병 4천을 격파 했던 모리등
왜군 4만이 물러가고, 영광 까지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 올라갔던 왜 수군도 순천으로 물러
가는데 왜군은 서울로 진격할 생각이 없었는데 한양에서는 피난가느라 난리가 벌어졌던 것이라?
이순신 장군은 왜군이 모두 물러간 10월 3일 군산 선유도를 출발해 우수영 에 돌아온 날은 후퇴한지
24일째인 10월 9일 로, 성 안팎에 거주하던 그 많던 조선인들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으니....
영화 명량에서 응원하던 조선 백성들은 전부 학살되거나 포로 로 잡혀 끌려간 것이라? 장군
께서는 비통한 심정으로 안편도로 물러나 왜군이 여수 서쪽에 없음을 보고 목포 고하도로 가십니다.
명량해전에 대해 교과서와 인터넷 지식백과며 연속극 및 "영화 명량" 등에 보면 왜선 31척을
격파하니 왜수군은 패해서 도망 치는지라 바다를 지켜 냈으며, 조선 수군이 제해권 을
차지했으니 백성들은 안전해졌고...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 로 전환했으며 충청도 직산까지
올라와 서울을 위협했던 왜군이 "서해 바다를 통한 보급" 이 불가능해지자 물러갔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기록은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후 4시 명량해전 대승에서 멈추고 13개월후 노량해전으로
넘어가는데.... 전라도 바다에는 얼씬도 못한줄 알고있는 왜 수군은 다음날 다시 쳐들어와
우수영과 목포 를 점령하고, 이순신 장군의 행방을 뒤쫓아 영광까지 북상하면서 전라도 해안의
조선 백성들을 무참히 살륙하고 방화하며 아수라 지옥 으로 만든 일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뭅니다?
10명 장수가 이끄는 왜군 14만 중에 모리와 구로다 2명 4만이 천안 까지 북상할 때 맞선 조선군은 초기에
1천 5백뿐이고 도주하니, 명나라 파새와 해생의 4천 기병 이 9월 7일 직산에서 하루 싸우고는 수원으로
물러났고, 승리한 왜군은 3~4일간 약탈후 9월 12일 물러갔는데..... 그보다 4일 후인 9월 16일 에 벌어진
명량 해전 패배 때문에 바닷길이 막혀 후퇴했다니? 왜군은 10월 2일 까지 남해안 28개 성채로 물러 갑니다.
하지만 양호가 명군 5만 8천에 조선군 1만 1천5백을 동원해 28개 왜성중에 동쪽의 울산 도산성 을 포위하니
가토군 외에 나머지 26개 왜성에서 일본군이 겨울에 쉬지못하고 울산성을 구원 했으니, 1598년 늦봄에는
쉬는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니 철수준비하다가 또 다시 양호가 명군 106,000 에 조선군 25,0000 을
동원해 4로 병진 공격하자 4곳을 모두 이긴후 물러가니, 이순신과 진린이 순천왜성을 막은게 노량해전 이라?
"영화 명량" 에 보면 배설이 왜군과 짜고 거북선 을 불태우는데.... 배설은 전투 전에 도망갔으니
현장에 없었고, 거북선 역시 없었으며... 이순신 장군의 배에 왜군이 올라와 수십분간 백병전
이 이어지고 부숴진 배를 백성들이나룻배를 타고와 밧줄로 끌고 가는데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접근전 은 조선 수군은 겁이 나서 뒤쪽에 쳐져 있다가 이순신 장군이 호통을 치니 혼이 나가 나오다가
너무 나간지라 왜선 3척에 둘러싸인 안위 장군의 배가 유일 한데..... 왜선 31척을 격파할 때
조선군 배는 피해가 전혀 없고 전사 2명에 부상 2명 이 전부이니, 왜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
이지만 조선 대포는 평균 700미터이니, 400미터 정도 원거리에서 대포로 적선을 격침한 전투 입니다!
명량해전 승리 7일 후 영광 바다에서 나포된 강항등 조선인 들은 시코쿠섬 에히메현 이요국 오즈로 끌려가는데
강항을 나포한 왜군은 9월 16일 명량해전에 참가한 도도 다카토라의 휘하 로, 시코쿠섬 이요(伊豫) 국 오즈
(에히메현 오즈시) 의 성주 사도(佐渡) 의 부하 노부시치로 (信七郞) 였으니 도망쳤다는(?) 왜군이 북상했네요?
1598년 6월 강항은 에히메현 오즈에서 교토 후시미성 으로 이송되어 이안과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의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 등에게 성리학 을
가르치는데, 후지와라 세이카는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다고 합니다.
강항이 주자(朱子) 의 주석에 따라 훈점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 은 다지마 성주가 재정을
후원하고 후지와라 세이카 가 편찬을 총괄하니, 책은 일본 최초의 성리학 저서 로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스승의 추천으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강(侍講) 이 된후 4대 쇼군까지 시강합니다.
책이 무사히 출판된 후에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는 다지마 성주인 아카마쓰 히로미치
에게 청원해 강항 일행의 통행증명서 를 발급받게 해주고 여행 비용 까지 대주니
1600년 4월 2일 식솔 10명과 다른 선비와 사공등 38명은 교토 후시미성을 출발 합니다.
일본인들이 사공을 붙여 대마도 까지 인도해 주어 1600년 5월 부산 으로 돌아와 임금
선조를 만나고 경과를 적어 올리는 책을 지으니... 간양록 (看羊錄)” 인데
조용필이 부른 MBC 문화방송의 1980년 방영 드라마 “간양록 주제가" 입니다.
“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귀국을 도와준 아카마쓰 히로미치 는 주고쿠 공략때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다가 항복 한후 공을 세워
다지마의 다케다성 (효고현 북부) 2만 2천석의 성주 가 되었으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및
임진왜란에 참전했는데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가르침을 받는등 문학자적 일면 도 있었다고 합니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일본 무장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마음' 을 지녔으며 공자묘를 세우고 3년상 을 치르며 중국
의 제도와 조선의 예법을 착실히 따랐으며 조선 선비들에게 유교 경전의 필사를 요청하고 옷과 음식 마저
조선을 본뜨려고 했으며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말 위에서 까지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고 간양록에 적었습니다.
절 구경을 마친지라 화장실에 갔는데, 문 입구에 동사(東司) 라는 간판이 보이고 안쪽에는 흔한
슬리퍼 대신에 나무 게다 가 보이는게 특이한데..... 절에서 7당 가람 은 산문 - 본전 - 법당
(석가모니, 미륵불, 아미타불을 모심) - 승당 - 고원(庫院) - 욕실 - 화장실(東司) 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겐코안 절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가는데.... 조금 전에 버스에서 내린 반대편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정류소가 보이지 않기에 이쪽에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탔는데.... 목적지가 먼 곳으로 나오는지라 잘못 탔다 싶어서 다음 정류소에서 내립니다.
버스 정류소 이름이 "현돈" 으로 가만히 보니, 여기 버스는 도로가 너무 좁은 지라
반바퀴를 도니 일방 통행 으로.... 그냥 타고 가야 했었는데 잘못 내린 것 입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서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고 마을을 둘러 보는데.... 여긴 아주 조용하고
한가로운 전형적인 주택가 로 사람들도 별로 지나 다니지 않는지라 이집, 저 집을 구경합니다.
일본인들은 자동차를 도로는 물론 이고 단독 주택의 경우에도 자기 집 담장 바깥 골목길 에도 불법
주차 하는 법이 전혀 없으니... 집을 조금 들여서 짓거나 해서 집 안에 주차장을 만들며....
이게 불가능한 경우는 월세를 주고 사설 주차장 에 넣는걸 봅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