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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8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코 2,23-28
안식일을 안 지키면 왜 대죄인가?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십니다.
배고픈데 일을 해서 먹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휴식과 행복의 시간이 아닌 자기 자신을 그 법에 얽어매는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진정으로 지키는 것은 ‘휴식과 행복’에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엔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최소한의 양식을 위해 안식일에 일했다면 오히려 안식일을 잘 지킨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행복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행복하려 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쉬는 휴식과 행복 자체여야 합니다.
성당 미사 나와서 인상을 찌푸리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낸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어기면 대죄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인 줄 알면서 휴식하는 것의 중요성은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면 삶의 방향을 잃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하시고 일곱째 날 쉬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휴식에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게 안식일입니다.
디오게네스는 거지였고 알렉산더는 대왕이었습니다. 술통에서 잠자는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가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디오게네스는 늘어지게 자다가 알렉산더에게 “햇빛 가리지 말고 좀 비켜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왜 놀기만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에게 왜 전쟁만 하느냐고 묻습니다.
결국, 전쟁이 다 끝나면 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 목적은 쉼입니다.
이것을 알게 만드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잘 지내지 않으면 삶의 방향을 잃습니다.
안식일이 행복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1998년에 NASA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화성 기후 탐사 궤도 우주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실패 원인은 역추진 엔진의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NASA가 다 만들지는 않기 때문에 아래도급 업체와 측정법이 다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NASA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다시 측정치를 자신들 기준으로 되돌려 놓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만성적 과로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 과정을 지나친 것입니다.
일정을 미리 짜놨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주님과 머물며 무엇 때문에 사는지 되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하면 마지막 때 이렇게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행복은 일주일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원한 안식의 상징이 됩니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의 저자 ‘니콜 르페라’는 4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SNS를 통해 도움을 받는 임상심리학자입니다.
그녀는 어릴 적 상처로 깊은 마음의 병을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본인이 심리학 박사이고 개인 진료소도 운영하고 있고 사랑하는 반려자와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공허감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게 다야?”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여전히 핵심적인 무언가가 빠져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녀가 각성하게 된 계기는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휴가차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연인과 함께 작은 오두막을 얻어 오트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휴식하러 와서도 여전히 책에 집중하였습니다.
정서적 장애가 있는 엄마에게 받는 상처에 관한 책이었고, 어쩌면 그 책을 읽는 동안 자신 공허함의 원인이 어렸을 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너무 지쳐 보여. 그만 읽고 좀 쉬어.”
하지만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던 그녀는 힘이 들면서도 쉴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나 쉴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그런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 것입니다.
그녀는 일에 지쳐 상담하는 중에 머리가 하얗게 되어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아 항상 어깨가 무거웠으며 자잘한 문제들이 쌓이면 기절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자신의 손아귀에 있던 에너지가 모두 바닥나 있음에도 충전할 줄 모르고 책을 읽으며 오트밀을 먹던 바로 그 순간 오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담자를 돕기는커녕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자기 한계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어렸을 때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건들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감정이 북받쳤던 것입니다.
엄마와 다른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지금의 자신은 엄마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숲속 오두막에서 오트밀을 먹으며 진심으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넘어 머리가 맑아지고 빛이 들어오며 깨달음을 얻습니다.
“난 변해야 해!”
이것이 그녀가 깨닫고 변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몸 어디가 안 좋은지 살피고 지금 필요한 것은 영양섭취와 운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채식주의자로 살며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은 자신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호흡 명상과 의식 성찰을 하기로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닙니다.
며칠 의식 성찰 명상을 빼먹기도 하고, 하지 않던 운동을 해서 근육통에 시달리고, 그래서 힘들어 울기도 하고, 이젠 그만두겠다고 선언도 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몇 개월을 그렇게 자신과 싸움을 하고 나서야 새롭게 개선된 의식으로 매일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더 강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육체의 고통이 정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육체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사고의 패턴과 습관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변화시켜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면 아이와 대면하게 되었고 신체-정신-마음의 관계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인스타그램 등으로 함께 나누고 내면 아이 치유 명상을 하자고 했더니 3천 명이나 신청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그녀가 진정한 안식일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휴식과 만나면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것의 의미를 파악하게 됩니다.
결국, 죽으면 그리스도와 만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이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아닌 방향으로 열심히만 살았다면 진정한 휴식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주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안식을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만큼 중요한 것이 안식일이기에 안식일을 올바로 지내지 못하면 삶의 길을 잃기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마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아무 기차나 잡아타며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아집니다.
하루의 안식은 언제일까요? 맞습니다.
잠들기 직전입니다.
잠들기 직전에 누구나 안식일을 짧게 경험합니다.
우리는 눈을 뜰 때부터 잠자기 직전의 그 만족스러움을 느끼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 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의미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은 안식입니다.
하루 눈을 뜰 때 편안한 잠을 잘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일주일의 안식은 주일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며 일에서 벗어나 쉬어야 합니다.
그러면 니콜 느페라처럼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결국 영원한 안식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대죄입니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8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독서 1사무엘 16,1-13
마음을 보시는 주님
주님께서 사울왕의 후임이자 진정한 이스라엘 왕으로 다윗을 선택하는 과정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이자 예언자였던 사무엘은 신정(神政) 체제를 왕정(王政) 체제로 바꾼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주님의 명을 받들어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를 찾아갑니다.
그의 슬하에는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사무엘은 그중에서 가장 풍채가 당당할뿐더러 귀공자답게 생긴
장남 엘리압을 하느님께서 뽑으시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기 상권 16장 7절)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보기만 해도 마음 든든한 건장한 7명의 아들들은 다 내치시고 막내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그는 아직 철부지 아이였습니다.
또래 아이들과 들에 나가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다윗을 불러왔는데...사무엘이 보기에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자면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 생긴 아이였다.”(사무엘기 상권 16장 12절)
이로서 주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천지차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바깥으로 드러나는 인물, 체면, 위신을 중요시여기는 반면 주님은 마음, 내면, 영혼을 중요시여기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관습, 전통, 법률, 규정, 자존심, 가이드라인을 중요시여기며 목숨을 겁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경직된 율법주의로 점점 빠져들게 되었고, 원래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 규정이
나중에는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올가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상황을 바라보셨던 예수님께서 강한 어조로 안식일 규정을 비판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코복음 2장 27절)
결국 안식일 규정의 목적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 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종교는 과연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가톨릭교회는 진정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으며 실추된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는 한 인간 존재가 성장을 거듭하고 활짝 꽃피어나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2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정의 무대’라는 텔레비전 프로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군인들의 장기 자랑이 주 내용이지만,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이며 가장 유명했던 것은 ‘그리운 어머니’ 코너였습니다. 어머니가 가림막에 실루엣만 보이고, 그 실루엣만 보고서는 자기 어머니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병이 무대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뒤에 계신 분은 제 어머니가 맞습니다!!!”
한 사병의 어머니일 텐데, 아들이라고 자청하는 사병이 자그마치 2~30명입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이유, 어머니에게 안부 인사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하겠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보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서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종종 잊어버리고 맙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착각 속에서 힘든 삶을 계속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철저하게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을 보려고 하지 않고 또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하여 바리사이들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질러가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손을 비벼 먹은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안식일에 걷는 행위도 금지되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금지사항이 39개나 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가벼운 산책은 할 수 있지만 1km 이상을 걸으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에 시계태엽을 감지 않으며, 편지를 뜯지 않으며, 불을 지피지도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이보다 훨씬 엄격했었지요.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신성한 것이라면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되기 위한 것이지 사람이 성전을 위하여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칙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진짜 주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지켜야 할 것,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의 명언: 아무리 수치스러운 일을 했더라도 땅에 떨어진 평판을 고치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라 로슈푸코).
죄책감과 수치심.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특정 행동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끼친 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후회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죄책감이 아닌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행동을 한 ‘나’라는 사람 전반을 부정적으로 인식합니다. 또한 잘못에 대한 뉘우침보다 부끄러움을 더 크게 느낍니다. 즉, 잘못에 대한 행동적 자기 비난은 죄책감을 가져오지만, 특성적 자기 비난은 수치심을 가져옵니다.
죄책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후회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나 보상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수치심을 느낄 때면 좌절감과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감정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래서 자신이 상처 준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겨를이 없고, 문제 해결보다 이대로 사라지거나 이 더러운 기분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됩니다.
죄책감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수치심은 내 삶의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분명히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