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선의 시 명상] 겨울 숲 (복효근)
눈보라를 함께 맞고 있는 지금
픽사베이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 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 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12월, 숲에 가보면 나무들은 잎사귀를 떨구고 홀로 서 있다. 간혹 푸른 나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나무들도 잎을 떠나보내고 겨울 채비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겨울을 맞는 잎의 색이 다르다.
숲이 숲인 것은 수많은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숲을 이루는 그 구성원인 나무는 제각각 다르다. 더욱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 또한 매번 다른 것은 알 수 있다. 모든 나뭇잎이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 나무라 해도 그 나무에 있는 모든 나뭇잎이 한꺼번에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다. 바람이 불면 동시에 떨어지는 것 같아도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모두가 다르다.
겨울이 되면 새들이 떠난다. 여름새들이 떠나고 겨울새들이 온다. 그 겨울새들은 주로 강과 들에 앉아 있으므로 나무들은 친구를 잃는다. 다람쥐도 청솔모도 멧돼지도 겨울잠에 든다.
자신을 감싸던 나뭇잎들을 잃고 가지 사이를 파고들던 새 울음마저 잃으면 나무들은 문득 외로워진다. 헐벗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헐벗는다는 표현처럼 어울리는 표현이 있을까.
근본을 따져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헐벗은 존재들이다.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혼자인 존재에게는 갈망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고 집착이 있다. 헐벗었음을 깨닫고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혼자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통을 원하고 공감을 원한다. 소통을 원한다면 상대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온전히 다가서야 한다.
온전한 소통은 서로를 바라보고 주의를 기울여주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었을 때 비로소 상대를 볼 수 있다. 인간의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마주 보아야 상대를 지켜볼 수 있다.
상대가 간혹 시선을 돌려 다른 것을 향하더라도 아픔에 겨워 자신을 들여다보더라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거리가 없다면 상대가 나와 함께 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인간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 입장이 다르고 조건이 다르다. 출발점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눈보라를 맞는 일뿐이다.
눈보라는 너에게 오지만 나에게도 온다. 아주 조금의 눈보라가 옆자리에 있는 너로 인하여 줄어들고 아주 조금의 눈보라가 나로 인하여 줄어든다. 각자의 자리에 서서 눈보라를 맞지만 옆에 있는 덕분에 가질 수 있는 이익이다.
눈보라를 맞는 일뿐이다. 눈보라는 너에게 오지만 나에게도 온다. 아주 조금의 눈보라가 옆 자리에 있는 너로 인하여 줄어들고 아주 조금의 눈보라가 나로 인하여 줄어든다. 각자의 자리에 서서 눈보라를 맞지만 옆에 있는 덕분에 가질 수 있는 이익이다.
업이라는 것은 행위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지금의 내가 어쩔 수 없는 전생이 아닌, 나의 행위에서 업이 비롯 한다면 그것만 해도 한결 자유로워진다.
떨어져 있되 땅을 딛고 선 존재로서 지금 여기에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함께 맞고 있다면, 모두의 입장이 다르고 위치가 달라 하는 일이 달라 각자가 맞는 눈보라의 방향이 다르다면 그로 인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면 내 행위로 짓는 업은 조금 덜하지 않을까.
수많은 나무들이 서 있듯 인간인 우리도 땅을 딛고 선 존재로서 조금씩 눈보라를 맞고 있다면 인간 또한 숲이 아닌가.
글 | 이강선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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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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