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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묵상글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정결과 사랑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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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09 02:41
- 정결과 사랑의
오늘 무염시태 축일에 관해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옛날 신학교 때 들은 원로 신부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너희는 가서 그런 강론하지 말라는 것으로서
당신 본당에 새 사제가 보좌신부로 왔는데
오늘 무염시태 축일 강론을 이렇게 했답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기념하는 거지요.
그리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이기에
마리아의 공로가 아니고 그렇다고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의 공로도 아니지요.
하느님에 의해 그리고 천지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잉태되신 것이며.
그렇기에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은 순전히 은총이지요.
그래서 엘리사벳이 말하듯 은총을 가득히 받은 마리아인 겁니다.
그러니 마리아를 너무 추켜세울 것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이번에 저는 하와와의 비교 관점에서 마리아의 위대함을 보고자 합니다.
매우 조심스럽게 주장하는 바이고 그래서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면,
겸손하게 생각을 바꾸겠습니다만 하와도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 아닐까요?
우리 교리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원죄이고,
그 후손들도 원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하지요.
아무튼 하와도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 맞다면
원죄 없이 잉태되었는데도 하와는 죄를 지는 것이고,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이 말은 은총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은총을 유지한 여인이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는 은총을 받은 여인일 뿐 아니라
받은 은총을 잘 유지한 여인인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선 은총을 잘 받기는 합니까?
은총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아예 못 받는 경우가 있고,
받으려는 자세는 되어 있지만 은총이 은총인 줄 몰라 못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을 받으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교만하기에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다른 이의 도움은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필요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은총을 받으려고는 하지만 받은 은총이 은총인 줄 모르는 경우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 은총만 은총인 줄 알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햇빛은 은총이고 비는 은총이 아니라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음으로 마리아처럼 받은 은총을 잘 유지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세례로 이전의 죄를 씻는 은총을 받았다고 우리는 믿는 사람들인데
받은 다음에는 그 은총을 잘 유지하느냐 그 말입니다.
다시 죄에 떨어지는 일이 많고,
그것이 다 자유의지를 자기 욕구 만족을 위해 쓰기 때문이지요.
사랑을 위해 자유를 쓰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해 쓴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마리아를 정결한 동정녀라고만 하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어머니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그 정결함은 은총이지만
그 정결을 계속 잘 유지하여 주님을 잉태한 것은 그녀의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기념하고 본받아야 할 우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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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영국의 정부 부처 중에서 낯선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영어로 The minister of Loneliness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외로움 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의 장관은 무엇을 할까요? 말 그대로 외로운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장관입니다. 외로움을 국가 문제로 보고 이렇게 정부 부처를 하나 만든 것입니다. 우리 옆 나라 일본 역시 외로운 사람을 위해 ‘고독’ 담당 장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외로움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10명 중에서 5명 이상이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 많은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연을 당해 외로워하는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재미있는 것은 그 사람보다 더 최근에 실연으로 외로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나눌 때 위로를 얻고 치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힘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먼저 맞춰야 합니다. ‘뭐가 힘든데? 겨우 그 정도로 힘들어하는 거야?’라면서 자기 잣대로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경험만 주야장천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보다 상대의 마음에 집중하면서 그 마음과 맞출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이해, 지지, 공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보면, 늘 마음을 맞추신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다는 엄청난 소식을 듣습니다. 무조건 부정하고, 그 소식을 철회해 달라고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과 마음을 맞추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실 때도, 예수님과의 마음을 맞춰서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제 지금 외로움에서 어쩌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우리들과도 마음을 맞추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마음을 맞출 때, 하느님과도 마음을 맞출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마음을 맞추고 있나요? 그리고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과도 마음을 맞추고 있나요? 성모님의 모범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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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발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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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며,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
1854년 12월 8일, 교종 비오 9세께서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 “교의”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으로부터 예외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미리 입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해, 성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이는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여기에,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가득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이렇게 찬양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그렇습니다. 성모님으로 하여, 우리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처럼,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대성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모님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비록 우리가 원죄에 물들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지만, 저희 안에 주님을 모심으로써 저희 죄가 씻기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또한 당신을 건네줄 수 있는 ‘복을 주는 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과 함께 <입당송>에서 부른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정녕, 마리아는 구원받은 인간의 전형이십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는 우리 안에도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이 있음을 보게 합니다. 아니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마음의 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허물이 있다하더라도 가장 깊은 내면의 영역에는 죄로 물들지 않는 거룩하고 흠 없고 순수한 하느님의 모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그곳에는 죄가 발을 들여 놓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이요, 사랑의 보급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우리 안에 거처하는 거룩한 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안에는 “빈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하느님만이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에스트로 에크카르트가 말한 “영혼의 정수”인 “심연”이요, 요한 카시아누스가 말한 “마음의 순수”(puritas cordis)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죄에 물들 수 없는 그분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자리로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세계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에페 1,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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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재물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훌륭한 연장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의 몫이 그만큼 소중합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어머니께로!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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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신비를 기념하며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축일은 하느님께서 구세사의 시작부터 구원의 계획 안에서 성모 마리아를 특별한 방식으로 선택하시고 준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면서 23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제가 있던 본당은 서울 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이었습니다. 23년 전 봄에 저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대림 특강을 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보는 거였고, 가능하시면 특강을 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여름이 지나도 추기경님께서는 답장이 없었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추기경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로마에 회의 갔었고, 며칠 전에야 편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추기경님께서는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에 대림 특강도 하고, 미사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본당 식구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림 특강을 준비했습니다. 마을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고, 문산과 법원리 성당에도 알렸습니다. 군부대에도 협조공문을 보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오시는 날에는 성당이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강의와 미사를 하셨고, 저녁까지 잘 드시고 가셨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이었기에 추기경님께서는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오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고 말한 구절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드러냅니다. 이 표현은 마리아가 단순히 선택받은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온전히 보호되고 인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은 마리아께서 죄의 흔적이 전혀 없는 상태로 태어나셨음을 뜻합니다. 이는 마리아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셨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의 위대함을 증언합니다.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심으로써 구원 계획의 중심에 서게 되셨지만, 그분의 위대함은 단순히 선택받은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순수함은 단지 죄가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사와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자리한 죄와 잘못을 씻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신비는 단순히 그분 한 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가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 받았음을 이 신비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마리아의 모범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 각자도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계획 안에 있음을 깨닫길 바랍니다. 성모님을 본받아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신뢰하며, 우리의 일상에서도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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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끝에 성모 마리아께서 하실 말씀은 이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 성모님의 신앙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엔 자생적 교회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찾고, 스스로 함께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천주교는 ‘천주학’이라는 학문의 범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던 선조들은 이것이 단순 학문이 아닌 믿음과 신앙의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북경까지 찾아가 세례를 청해 받게 된 ‘천주학’을 배운 주교와 사제들을 스스로 뽑아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선조들은 이후 사제의 파견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 땅에 파란 눈의 선교 사제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사제에게 세례를 받은 선조들은 모두 ‘우리는 천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신앙의 고백이 박해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태동이었습니다. 앞서 성모님께서도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하셨습니다. 신앙 고백 이후 성모님은 칼에 찔리는 고통 속에서 사셨습니다. 자기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주님의 죽음까지도 보셔야 했으니까요.
우리 선조들도 신앙 고백 후 박해라는 피의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앙 고백의 완성은 고난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늘 우리를 보호하시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돌보시는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봉헌합시다.
지금까지처럼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늘 은총 속에 성장하기를 기도합시다.
⭐소고기 청경채 볶음
외국 생활하면서 즐겨 먹었던 소고기 청경채 볶음을 소개합니다.
우둔살 250g을 준비해 주세요. 수입산으로 구매하면 만 원도 안 할 거예요. 한입 크기 정도가 좋습니다.
소고기에 밑간을 해야합니다. 아프지 않게 2꼬집 찝어주세요. 후추도 톡톡 뿌려주시고요. 맛술이나 소주 한 스푼을 넣고 버무려주세요.
이후 고기에 전분 가루 한 스푼을 넣고 버무려주세요.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게 잡아주고, 부드럽게 만들어줄 거예요. 전분 가루는 수입산을 한우로 둔갑시키는 마법의 가루입니다.
이제 청경채입니다. 한 봉지 구매하시고 손질해 주세요. 마늘도 적당한 양을 편 썰어주시고 대파도 총총 준비해 주세요. 양념장을 준비해야겠지요?
굴 소스 한 큰술, 양조간장 2큰술, 맛술 2큰술, 설탕 1작은술.
설탕이 녹을 때까지 섞어주세요.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볶아볼게요. 먼저 기름 2스푼 두른 팬에 강불로 마늘과 파를 볶아주세요. 향이 올라오면 고기를 넣어주세요. 고기 겉이 익으면 양념장을 넣고 볶아주세요. 잠시 후 청경채도 넣고 강불로 1분 정도 볶아주세요. 아삭함이 죽지 않게^^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참기름 한스푼 둘러 섞어주세요.
이제 만 원의 행복이 시작됩니다. 오늘의 행복을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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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마리아 성모님
“정주, 찬양, 순종”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시편98,1ㄱㄴ)
세상이 존속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기적들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작금의 위기를 맞이한 대한민국에게 오늘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한국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호자 마리아 성모님이기 때문입니다.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중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는 더욱 각별하고 간절해졌습니다. 한국교회는 물론 미국, 스페인, 포르투칼, 브라질, 필리핀, 니카라과 등의 여러나라 및 성당에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모십니다.
오늘 대축일의 기원은 5세기 동방교회에 속한 시리아에서 시작되어, 7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방교회에서 널리 확산되면서 보편화됩니다. 서방교회에서는 8세기부터 이 축일을 12월8일 기념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남부, 노르망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을 거쳐 최종적으로 로마로 전파됩니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 축일을 로마 전례력에 삽입하였고, 1708년 12월6일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대축일로 격상시킵니다.
마침내 17세기 마리아가 원죄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규정해 달라는 신자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는 교황 무류성에 따라 회칙 <형언할수 없는 하느님>에 의해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를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새삼 가톨릭교회의 뿌리깊은 전통이 자랑스럽고 신뢰가 갑니다. 한국교회는 대희년이었던 2000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다시 한번 성모님께 한국교회를 봉헌했고,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권고에 따라 2015년부터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만 한국교회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오늘 복음과 두개의 독서가 답을 줍니다. 교황님은 어제 대축일 강론중 오늘 복음을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의 하나라고 강조하셨고 공감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약간 시간만 내어 루카 복음을 들여다 보고, 이 장면을 읽는다면, 나는 여러분들 역시, ‘좋다’, ‘참 좋다’할 것이라 확신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역시 사제서품후 35년동안 수없이 이 복음을 접하고 강론했지만 늘 신선한 충격에 새로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1,28)라는 대목은 고백성사시 말씀처방전의 보속으로 참 많이 써드렸고, 어느 수녀로부터는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믿음의 어머니 성모님으로부터 셋을 배웁니다.
첫째, 정주입니다.
정주의 믿음, 정주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언제나 제자리의 정주에 깨어 충실했던 마리아였습니다. 유혹에 빠져 정주의 제자리에서 벗어날 때 줄줄이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하와와 아담 부부가 그 좋은 증거가 됩니다.
“너 어디 있느냐?”
우리 모두가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아담을 찾았을 때 아담은 두려움에 숨어서 나타나지 못합니다. 정주의 제자리에 충실했다면 “예, 여기 있습니다.”대답하고 곧장 주님앞에 나섰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정주의 제자리에서 벗어나자 불순종의 죄를 짓자마자 하느님의 책임 추궁에 서로가 책임전가에 급급합니다. 급기야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저 여자가..”라며 하느님과 아내에게 탓을 돌리는 아담입니다. 서로간 관계의 완전 파탄입니다. 죄의 폐해가 너무 큽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믿음의 마리아, 정주의 마리아입니다. 눈밝은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늘 제자리의 정주에 충실하며 책임을 다하는 마리아를 친히 방문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축복을 확인하신후 속내를 다 밝히시니 주님이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여 눈여겨 보아둔 마리아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찬양입니다.
찬양의 믿음, 찬양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믿음을 날로 깊게 합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모두가 찬양과 감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찬양감사노래는 우리 가톨릭교회가 저녁기도 끝무렵에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성모님과 함께 바칩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1,3-14)의 찬가는 가톨릭교회가 매주 월요일 저녁기도 성무일도때 바치는 찬양감사가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문장으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을 노래합니다.
마리아 성모님 마음에도 쏙들었을 내용에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성모님과 성인들과 함께 끊임없이 하느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주옥같은 은혜 충만한 내용들입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의 믿음, 순종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 성모님의 믿음은 정주에서 침묵의 관상과 경청에서 그리고 겸손한 순종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침묵, 경청, 겸손, 순종 모든 영적덕목을 갖춘 믿음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사랑과 신뢰를 받은 마리아 성모님인지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우리 가톨릭교회의 어머니들의 영원한 롤모델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내에는 예나 이제나 성모님을 닮은 성녀급의 어머님들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차질없이 이뤄지게 한 다음 마리아의 겸손한 믿음의 순종이 얼마나 고맙고 감격하셨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역시 이런 순종의 고백을 하며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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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아, 다만 하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믿을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믿을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느님의 사람아
굳게 믿어라
희망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희망할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느님의 사람아
오롯이 희망하라
사랑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사랑할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느님의 사람아
뜨겁게 사랑하라
함께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함께할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느님의 사람아
끝까지 함께하라
일어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일어날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느님의 사람아
힘차게 일어나라
나아갈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느님의 사람아
박차고 나아가라
이길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이길 수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하느님의 사람아
마침내 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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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6-29)
교회를 예표하는 마리아
그러므로 육화의 신비를 입증하고자 나선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입증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그것을 입증하려 애쓴다면, 신비의 대변자가 아니라 동정녀의 옹호자로 비칠 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복음사가의 말은 요셉이, 주님의 어머니요 신비를 품은 태, 성령의 성전이신 분을 더럽힐 수 없었음을 적절하게 밝힌 말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분의 혈통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 의도에 대해서도 배웠지요. 이제 그 신비에 대해 배워 봅시다. 마리아께서 약혼을 하신 것은 마땅했습니다. 동정녀께서는, 혼인은 했지만 흠 없는(에페 5,27 참조) 교회의 예표이기 때문이지요. 처녀가 성령으로 우리를 잉태했고, 동정녀가 해산의 진통 없이 우리를 낳았습니다. 마리아가 한 남자와 혼인한 몸으로 다른 분에 의하여 충만했듯이, 각지의 교회들 또한 성령과 은총으로 충만하여 시간 속에 나타나신 '사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엑카르트는 이분법적 의식과는 성질이 다른 변증법적 의식을 수시로 들락날락한다. 실로, 그는 스스로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서 변증법적 의식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예컨대, 그는 설교 10에서 하느님이 변하고 고난을 겪고 기뻐한다고 말하지만, 본 설교에서는 어떠한 변화나 변모도 하느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아울러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공정의 길인 첫째 오솔길과 부정의 갈인 둘째 오솔길 사이에는 변증법이 자리 잡고 있다. 단언신학의 하느님과 부정신학의 하느님을 이해하려면 변증법적 의식이 필요하다. 엑카르트는 “높이와 깊이는 같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변증법적 의식을 밑에 깔고서 한 말이다. 또한 엑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하느님은 존재를 지닌 모든 피조물 속에 있지만, 그들 위에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안에 있는 하느님은 저 너머에 있는 하느님과 변증법적인 긴장 관계를 이룬다. 은총과 자연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작용한다. “하느님이 자연과 더불어 일하든, 자연을 초월하여 일하든 간에, 괘념치 마라. 자연과 은총 모두 그분의 것이니.” 엑카르트는 일상의 규범을 변증법에서 도출한다. (292)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묵시 1,9-20
요한의 소명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고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으며,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고 목소리는 큰 물소리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습니다. 또 그분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잔대의 신비는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고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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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성모님의 신앙
강만연 [fisherpeter] 241209. 00:34 ㅣNo.178308
가톨릭 신앙에서 성모님을 공경하는 건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내용만 가지고 묵상을 한번 하고 싶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처녀인 마리아는 분명 훗날은 성모님으로 공경을 받지만 이 시점에선 예비 성모님이 되실 그런 신분이었지 성모님이라는 신분으로 격상될 그런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 요지는 남자를 모르는 순진한 처녀에게 천사가 앞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거라는 사실을 알리는 수태고지를 한 후에 놀라워하자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씀에 그렇다면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며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오늘 이 내용만 놓고 봤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다양한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듯합니다. 믿음이라는 명사는 '믿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긴 하지만 단순히 믿는 마음이라고 하는 뜻이 되긴 하지만 신앙 안에서 믿음은 그런 뜻도 지협적인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범위를 좀 확대해서 보면 어떤 사실, 팩트를 인정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없는 사실일지라도 그 사실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합니다. 또한 그 사실이 불가능할 것처럼 인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정말 그런지 오늘 복음에 그 정답이 있습니다. 이제는 성모님이라는 신분이 아닌 시골뜨기 순진무구한 처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마리아는 한 생명이 탄생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걸 안다고 해서 순수하지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모르는 백치와 같은 처녀였다면 오늘 복음은 이상한 결론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도 남자를 모르기 때문에( 사실 성경에서는 성경이기 때문에 표현을 극도로 완곡하게 표현해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라는 사실은 다 아실 겁니다) 당연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또 가능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랬던 그녀가 그럼 왜 어떻게 해서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 선회를 할 수 있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에 어느 정도 힌트가 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성령의 힘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신앙적으로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복음에 나오는 말씀의 행간 속에 숨은 의미를 보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천사는 사촌 언니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데 그당시 사촌 언니가 임신을 할 수 없다고 할 정도의 불가능은 아니지만 성경상 표현을 보면 "그 늙은 나이에"라는 표현을 언급한 대목을 보면 사실 천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임신이 된 걸 보면 물론 여기서 엘리사벳 언니도 임신이 힘든 몸인데 성령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성령의 힘 여부와 상관없이 단순히 생각해봐도 인간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에서도 그런 게 가능한데 더군다나 성령의 힘이 함께해 주시기만 하면 그런 것도 가능하게 해 주실 수 있다고 하는 능력을 하느님께서는 가지고 계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부분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마리의 믿음이 얼마나 순수한지 또 하나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사실 다른 것 다 떠나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사실로 인해서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일 수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서는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앞으로 예수님을 낳고 난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가브리엘 천사를 향해서 두려운 마음에 거부의 뜻을 전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천사의 말에 순명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 안에서 순명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순명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성모님의 신앙을 통해서 한번 묵샹해봐야 할 것입니다. 신앙에서 진정한 순명은 이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그 말씀 그 자체의 뜻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지 그외 다른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가면 순명이라는 건 있을 수 없고 또 순명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하는 순명은 진정한 순명이 아니고 순도도 조금은 떨어지는 순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정확한 의미에서는 겉모양은 순명이겠지만 진실한 순명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보여주기식 순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런 점을 묵상하게 되면 진정한 순명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듯합니다. 우리 모두 성모님의 이런 신앙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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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지금 말씀이 제게 빨리 /
박윤식 [big-llight] 241208. 20:44 ㅣNo.178306
동정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는 곳곳에 소상히 나타난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라는 천사의 말에 그녀는 당황하며 ‘그 말이 무슨 뜻일까?’하고 곰곰이 되씹었다.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고 그녀를 달랬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그분 믿음에 많은 두려움을 가진다. 믿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건 본능이다. 그 이유는 그것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에.
천사가 알려준 잉태 소식은, 남자를 모르는 그녀에게는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예수님은 그녀가 당장은 바라는 아들이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이 몸은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는 처녀인 자신에게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며, 오직 하느님 능력으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겸손이었다. 자기 능력 밖이라는 솔직한 고백이리라.
그렇지만 하느님이 함께 계시고 그분 총애로 야곱 후손을 다스리는 왕이 될 아들을 주신다면, 기꺼이 따른다는 ‘복종의 뜻’도 분명 지녔다. 사실 마리아는 나이 든 친척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의 놀라움에 몹시 기뻐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몸은 비록 연약한 처녀지만 그분의 뜻이기에 감히 마다할 수 있느냐와 일맥상통한다.
이는 누가 뭐래도 순명하는 긍정의 의미이다. 이에 가브리엘 천사도 마리아의 복종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였으리라. ‘지금 말씀이 제게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재촉으로 충분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느님을 굳게 믿었기에 비록 동정이지만, 다가올 죽음마저 각오한 것이다. 우리도 나의 이해득실에 따라, 주님 뜻을 거부한 적은 없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하겠다.
사실 많은 이들은 확신을 갖기 전에 먼저 두려움을 가진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회의도 든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주님께서 계속 맡기시기에 야속함마저 느낄 때도. 그렇지만 가끔은 충분히 순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일단은 의심으로 부정한다. 이는 자기 높임의 증거요, 자만심의 노출이기도 하다. 믿음은 어떤 절대자에 대한 조건 없는 복종심에서 나온다.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면서 절대자의 지배를 받아야만 우리는 참된 믿는 이가 될 게다.
그러기에 가끔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 단정하더라도, 아니 조금은 두렵더라도 그분에 대한 신뢰로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렇게 주님의 일만을 묵묵히 해 나갈 때,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알게 모르게 곳곳에서 깨닫게 되리라. 그렇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능력보다 하느님 말씀을 더 소중히 여겼다. 하느님 계획을 받아들이는 저 순종의 자세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일 게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나자렛의 저 흠 없는 처녀 마리아의 겸손과 순명은 본받아야 한다.
그녀의 ‘지금 말씀대로 제게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이 애절한 순명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믿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이렇게 순종하심으로써 당신 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는 크나큰 영광을 안으셨다. 우리도 성체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시면서, 얼마나 그분 말씀을 따르며 사는지를 돌이켜 보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평생 동정이신 성모님처럼 순종하는 마음을 꼭 본받자. 나자렛 고을 마리아가 가졌던 ‘이 몸은 당신 종이오니, 지금 제게 하신 그 말씀이 제발 빨리’라는 그 간절한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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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가브리엘 천사는 처음부터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루카 1,28)라고 부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는 표현에는 완료형 시제가 쓰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이미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고 계심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라는 표현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1,30)라는 표현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계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성모님께서 이미 예전부터 하느님의 은총 안에 계셨던 것으로 묘사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1,31-32).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시고자 먼저 성모님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성모님을 원죄에서 보호하시고 당신의 특별한 은총 안에 머무르시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까닭은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질 ‘구원’ 때문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신비의 중심에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를 모두 구원하시기 바라시는 하느님의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기념하는 오늘,
성모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죄와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자녀가 되도록,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특별한 전구를 청합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보호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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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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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전지전능하심은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십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임신할 것을 알리고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라는 단어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겉으로 드러날 것임을 천사는 말합니다.
처녀의 임신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전지전능하심은
세상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너를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이제
너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전지전능하심은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그것에서 우리는 단순한 다름이 아닌
거리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너는 위대한 반면
나는 초라하게 느껴지면
그 위대함은 너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걸림돌을 치우시고자
우리와 같은 모습을 선택하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심은
또 한 번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각자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소중한 존재로서
우리 각자도 자기 삶을 소중히 살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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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루카 1, 28)
아무리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푸른 잎들이
있습니다.
은총을
입고 사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
은총이
있습니다.
고맙고 고마운
일입니다.
하느님이
아니시면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도
복되신
동정의
은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은총의 행진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은총을
지나서만
갈 수 있는
따뜻한
성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있기에
사라지지 않을
예수님의
성탄이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귀한 존재인지를
뜨겁게
깨닫습니다.
은총과
축복의
순간순간들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은총으로
가야 할 길을
깨닫습니다.
모든 사랑의
역사는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은총이
새로운 역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이 땅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전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은총의 시작
구원의 역사를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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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또 다른 나자렛의 마리아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가을, 청소년들 여름 신앙학교를 끝내고, 형제들과 섬으로 휴식 겸 친교를 위한 소풍을 갔을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은 멋진 풍광 속을 걸어 다니고 사진도 찍고, 뷰가 좋은 카페에 앉아 담소도 나누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희 영감팀은 오로지 눈만 뜨면 낚시를 갔습니다.
첫날 처음 보는 물고기가 몇 마리 잡혀서 신기했습니다. 비늘도 없는데다, 자태가 멋졌습니다.
온몸이 짙은 고동색에, 싸이즈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엄청 힘이 세더군요.
회를 떴는데, 살이 얼마나 찰지고 탄탄한지 다들 감탄을 했습니다.
형제들이 너무 맛있다 맛있다 하니 그 다음 날 또 그 자리를 갔습니다.
그 자리가 제대로 된 포인트였던지, 어제 잡힌 정체불명의 물고기들이 또 다시 몇 마리 잡혔습니다.
플라스틱 통에 바닷물을 담아 잡힌 고기들을 던져놓았는데, 지나가던 마을 주민들이 그 고기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이 귀한 고기를 어떻게 잡았데요?”
알고 봤더니 제가 잡은 그 고기들은 횟감으로 가장 비싸다는 다금바리였습니다.
검색해봤더니 킬로당 30만원이랍니다.
우럭은 킬로당 3만원인데, 열 배나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뒤로 즉시 고동색 물고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킬로당 30만원이라는데 하는 생각에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 다루듯이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비싼 고기니만큼 제일 깨끗한 쿨러를 씻고 또 씻어 옮겨 담았습니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숙소로 가져와서 회를 뜨는데, 어제와는 달리 손실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조심조심 회를 떴습니다.
먹을 때도 산삼 먹듯이 음미하면서 그렇게 회를 먹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횟감 중의 횟감으로 귀한 취급을 받는 다금바리를 제가 극진히 모셨습니다.
가지고 있던 고기 보관통 중에서 가장 깨끗한 통에 모셨습니다. 고기가 상하지 않도록 얼음도 담고 그야말로 지극정성을 다해 애지중지한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모님을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성모님은 다금바리와는 비교도 안 될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 만왕의 왕인 예수님을
열 달 동안 자신의 몸에 모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거처로 가장 깨끗하고 무죄하신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의 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환영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가 된 자신의 몸을 매일 깨끗하게 청소하고 단 한점의 흠이나 티도 없이 유지했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내면 안에, 영혼 안에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머무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몸과 마음을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판공성사를 잘 봐야겠습니다.
내면을 잘 정리정돈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또 다른 나자렛의 마리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도 성모님처럼 아기 예수님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이번 성탄,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서 탄생하셨듯이 우리 각자 안에서도 탄생하시기 위해 우리 각자의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 영혼을 말끔히 정화시키고, 매일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도 계속 정화시킨다면,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거룩하고 흠 없는 지성소, 구세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적당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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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해 주셨다.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리아의 고백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우리도 구체적인 삶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고,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성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 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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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원죄 없음: 사흘만 있으면 가죽옷이 준비될 것이란 믿음
길가에 살면서 핫도그를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가게에 라디오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눈도 좋지 않아 신문도 읽지 않았습니다.
다만 좋은 핫도그를 팔면 많은 사람이 사 먹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핫도그에 들어가는 고기와 빵도 남들보다 크게 했습니다.
고속도로변에 광고판도 세웠고 길가에 나와
“핫도그 사세요.”라고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집에 와서 아버지를 돕게 되었습니다.
경제를 공부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라디오 듣지 못하셨어요? 신문도 읽지 못하셨죠? 지금 경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어요.
유럽의 상황은 처참해요.
외국은 유럽보다 훨씬 나쁘고요.”
이 말에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은 대학생이고 신문도 읽고 라디오도 들으니까 아는 게 많은 게 당연하지.’
그리고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고기도 줄이고 핫도그 크기도 줄였습니다.
더 이상 길가에 서서 핫도그를 팔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의 말대로 장사가 점점 안되었습니다.
급기야 고속도로변의 간판도 내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 말이 옳았다.
경기가 곤두박질치는 게 분명하구나.”
사람은 왜 부정적으로 될까요? 긍정을 잃고 부정에 귀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일까요?
믿음이 없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않았기에 죄에 물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죄가 빼앗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고 우리를 사랑하시니 모든 것을 해 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기 위해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하며 정말로 그물을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듯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것이 겸손일까요? 겸손의 탈을 쓴 교만입니다. 베드로의 이 부족한 면은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어주려 하실 때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으려고 하시자, “주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믿지 못하는 게 죄입니다. 믿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능력자이심을 믿을 때 나는 어떤 감정이 듭니까?
바로 ‘긍정’입니다.
다시 사랑하는 부모와 함께 있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성모님은 시골의 한 처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가득하신 분’은 온 세상에 성모님밖에 없으셨습니다.
천사가, “은총이 가득하신 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죄인에게는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그분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라고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느님이 자신들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힘으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자기 능력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원죄이고 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만은 자기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한 꽃집 할머니는 항상 행복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매일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맨날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노부인도 그렇게 대답합니다.
비밀을 이렇게 말해주곤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안 좋은 일도 일어나지.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만이 부활했잖아요?
나도 ‘사흘만 있으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해요.
정말 사흘만 지나면 다 좋아져요.
그래서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이분이라면 거의 원죄를 벗어났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전능하신 분이 당신과 함께 머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원죄에서 벗어난 이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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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모님처럼 우리도>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8-38).”
1)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라고 믿는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성모님을 선택하셨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한처음’은 창조 이전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성모님을 선택하셨다고 믿는 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은 ‘한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 사업은 하느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한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이고, 그 계획대로 실행하신 일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만일에 인간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더 이상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이 ‘메시아 강생’이라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즉 ‘메시아 강생’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 사업’을 미리 준비하신 일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경축하는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우리를 구원하려고 작정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2)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인간 구원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3-5.11).”
바오로 사도는 ‘우리도’ 성모님처럼 ‘한처음부터’
선택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선택을 각 개인이 체험하거나 실감하기는 어렵지만, ‘나’ 라는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던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전부 다 하느님의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에 ‘나’ 라는 존재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나’는 참으로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에서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생명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3)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성모님의 의지나 응답이나 순종과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렇게 태어나신 성모님께서 한평생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응답하는 삶’을 사셨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순종’과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내가’ 정말로 하느님의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다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력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창조 사업의 완성’을 인간의 협력 없이 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면서,
동시에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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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6-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자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즉 성모님은 어머니 배 속에 처음 잉태되는 순간부터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 받으셨음을 기념하는 겁니다. 이 모든 과정은 당신 아들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놀라운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지요. 가톨릭 교회의 ‘믿을 교리’에서는 이 신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또한 오늘 전례의 본기도에서 우리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에 대해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즉 성모님은 죄로 기울어지는 약한 경향성인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 자체를 하지 않으셨기에 죄의 어둠에도 물들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전자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타고 태어난 ‘특전’이라면, 후자는 성모님께서 평생 동안 뼈를 깎는 노력으로 완성하신 ‘공덕’에 해당하지요.
먼저 성모님께서 ‘특전’을 받으셨다는 것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그분께 이렇게 인사하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마음이 죄로 기울어지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크나큰 ‘은총’입니다. 비가 올 때 그릇의 열린 부분이 하늘을 향해야 빗물을 최대한 많이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성모님의 마음이 언제나 하늘을 향해 있기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복을 가득 담아 맘껏 누릴 수 있으니 그보다 더 큰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성모님께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주시어 항상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성모님께 ‘기뻐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겁니다.
다음으로 성모님께서 ‘공덕’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그분의 ‘순명’에서 드러납니다. 율법 중에서도 엄격한 정결법에 따라 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정혼자인 요셉으로부터는 미움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하느님의 뜻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적극적으로 바라신 겁니다. 그런 각오로 사셨기에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당신 아드님과 함께 끝까지 걸으실 수 있었지요. 그렇게 죽는 날까지 하느님 뜻에 충실히 사셨기에 당신이 받은 ‘특전’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구원으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을 은총은 성모님 뿐만 아니라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해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삶 속에서 완성해야 할 소명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니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고, 그분 뜻을 받아들이며 따라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주님께서 머무르실 거처로 내어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은총을 충만히 받으며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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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 사랑, 성모님 믿음 ”
초대 교회부터 성모 마리아께서 잉태되시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성모님 발현이 이를 증거해 주었고 1854년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하신 사실’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박해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의 ‘조선교구’는 1838년 교황청에 성 요셉 성인과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수호자로 모실 수 있는 청원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교황께서 이러한 요청을 수락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요셉과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한국 천주교회의
수호자로 모시며 모진 박해와 어려운 여러 고비들을 이기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인 창세기에서 하와는 하느님께서 금지한 열매를 불 순명으로 따먹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에 원조가 들어 왔던 것입니다.
나자렛의 한 시골의 한 처녀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명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오묘하며 신비로운 우리 자신의 구원계획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4-6)
루카는 우리에게 늘 들어도 또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자렛의 한 처녀 마리아를 방문한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은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과거 아하즈 왕에게 전해 주었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 7,14)
세상이 조용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 한 처녀를 통해 이 엄청난 징표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역사적인 성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성취는 베틀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성탄 이야기와 함께 나자렛에서
이루어 집니다.
성모님은 연약한 한 여인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사실을 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35절)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하느님을 절대 신뢰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라는 순명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은 자유의지이지요.
그로 인해 하와가 하느님께 금지하신 열매를 따 먹는 불순명으로 죄가 에 세상에 왔습니다.
그런데 나자렛의 한 여인의 자유의지의 순명으로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장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한마디의 말씀이 우리 신앙의 삶에 변하지 않는 좌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큰 섭리로 이루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축일’에 오늘 하루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지내며 성모님의 하느님 사랑을 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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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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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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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여호와 그 이름을 찾는 삶
<2024.12.9> 아침을 여는 묵상 (암 5:1~17절)
❝여호와 그 이름을 찾는 삶❞
❚ 멸망의 한가운데서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 어떤 삶을 바라며 살아가야 합니까?
➲ 어떤 일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7절).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너희를 향해 부르는 이 장송곡을 들어라...”(1절,쉬운성경).. 선지자는 임박한 멸망에 처했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을 처녀라고 부릅니다. 이는 젊음과 순결을 상징하는데, 이스라엘이 겉으로 보기에는 젊고 혈기 왕성하다고 느낄 때 멸망이 찾아와 엎드려졌지만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땅...’ 역시 이스라엘이 은혜로 얻은 축복의 땅 가나안을 의미하는데, 그 땅에서 멸망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2절). “...천 명이...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3절)... 군대가 강건하던 이스라엘의 쇠퇴를 역설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백성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4절). 즉,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죄악 된 길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과의 본래의 관계로의 회복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은 곧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멸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인생의 방향키를 돌려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고 구할 때 형통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집스럽게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그것을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필경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전인격적으로 생사화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구하고 어떤 일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 지혜를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8~13절).
하나님은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고...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6절). 벧엘, 브엘세바, 길갈은 북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곳은 여호와를 찾는 대표적인 곳으로 알려 졌던 곳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이며(창 28장), 길갈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수치를 극복한 곳입니다(수 5:9). 브엘세바는 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번성을 약속받은 곳입니다(창 22:19;26:23). 그런데 이곳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살길이 아니라 망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정의를 하찮게 여겼으며 올바른 것을 땅에 버렸기 때문...”(7절,쉬운성경)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8절)이시고, 요새를 무너뜨리시며 강하고 튼튼한 성을 폐허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9절).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자들의 특징과 행위들에 대하여 선지자는 지적합니다(10~12절). 그리고 모두가 진리를 부정하고 외면하기에 지혜자들은 침묵을 지킵니다(13절). ‘지혜자’는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로, 그들은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재판 과정에서 진실을 말해도 소용이 없기에 차라리 침묵을 지켰던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고 해서 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야말로 온전하고도 완전한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멸망의 등불처럼 꺼져 가는 우리를 향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 46:1)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고, 능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멸망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맞추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 지혜를 구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멸망에서 구원을 얻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완전한 힘이 되시며, 지혜이신 하나님만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악한 마음에서 벗어나 선함을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4~17절).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를 통해 끊겨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바른 예배, 생명이 살아나는 예배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14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오직 의인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15절a).. 성문은 재판을 행하는 곳입니다. 자신의 억울한 사정으로 토로하므로 공정한 재판을 시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온전히 토로하여 회개하므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심’(15절b)같이 긍휼을 구하여야 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17절).. 즉,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자로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일상과 삶의 터전, 곧 모든 광장과 모든 거리, 그리고 모든 포도원에서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16절).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백성이 한 마음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성이 상실된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지날 때, 처절한 실패와 큰 슬픔과 통곡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입술로만의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구하는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떤 경우에도 악에게 손을 내밀지 말고, 악을 미워하고 선하신 주님의 뜻을 바라보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의 방향을 바로잡고 생명의 길이 되시며, 생사화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완전한 힘이 되시며, 지혜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악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암 5:1~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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