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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미국인이 일본에 대해 쓴 책이 많지는 않겠지만, 이 책은 나름대로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도널드 리치는 1924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1947년 연합군사령부 군무원으로 일본에서 살았다. 2013년 8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평생을 일본에서 살았고, 일본 사회와 문화, 영화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으며 또 여러 편의 일본 관련 영화도 제작했다. 그로 인해 하와이 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2002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는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딸아이가 일본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웃 나라라서 그런지 그도 아니면 미운? 일본놈들이라서 그런지 일본에 관해 관심이 가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다. 그중 한 가지가 우리와 비교되는 무엇, 그것들이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지난날 역사를 생각하면 미운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일본을 여행하면서(내년 1월에도 일본여행 예정)느낀 것은 그들은 현명하고, 친절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절대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들을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그들에 대해(칭찬해)쓴 이 책을 읽으면서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느낀 이야기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고향을 아늑하게 느끼는 사람은 연약하고 초보자다. 이미 강하게 단련된 사람은 모든 객지를 고향처럼 여길 줄 안다. 하지만 온 세상을 객지로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하다.”- 「친절함 그리고 거리두기,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중에서
일본인들은 글자를 표현하는 수단이 묵이냐, 네온사인이냐에 관계없이 서예의 미학은 일본인에게만큼 외국인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아름다운 글자의 형태는 그 뜻만큼이나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일본인들 사이에도 여전히 글씨로 사람을 평가하는 뭐가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편지를 읽을 때면 그 내용만이 아니라 어떤 글씨로 쓰여졌는지도 본다. 악필인 사람은 아직까지 나쁘거나 혹은 최소한 나약하게 여기고, 보기 좋고 깔끔하고, 심지어 우아한 손글씨는 여전히 필수조건이다. 미적인 기준이 도덕적인 기준이 되고 미가 곧 정직의 척도도 된다.
그러나 디지털 소통 시대에 더 이상 손글씨는 쓰지 않는다. 키보드로 글을 쓴다. 일본은 표지판과 문자로 이루어진 우아한 글씨가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의 어린 세대는 스펠링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모두 계산기를 갖고 있으므로 간단한 산수 능력조차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런 세상에 일본의 신비한 소통 방법이고 우아한 문자, 그것도 붓글씨라는 것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표지판과 문자」중에서
일본에는 ‘파친코’가 아주 많다. 사람들이 파친코라는 도박을 즐기는 동기가 얼핏 물질적인 보상인 것처럼 보인다. 구슬 25개의 값은 100엔에 불과하다. 껌 한 통 값이고, 전철 한 번 타는 요금에도 못 미친다. 담배 한 갑보다 훨씬 싸다. 25개의 구슬을 잘 사용하면 대박을 바랄 수 있다. 문화평론가 릭 케네디는 연간 파친코 산업 매출이 7조 엔에 달한다고 했다. 1986년 한 해 동안 일본에서 생산된 비디오카메라의 총 가치가 3조 엔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크다. 일본에서 생산된 담배 값의 20%가 파친코 경품으로 사용되었다. 통계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돈을 따려고 파친코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왜?
서양의 오락실은 오락을 즐기거나,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타인과의 매력적인 만남이 있는 편안하고 친근하고 사교를 위한 분위기지만 파친코는 결코 그렇지 않다. 끝도 없이 널어선 기계가 있을 뿐이다. 기계를 빼면 세면대, 화장실, 공중전화, 현금 계산대가 전부다. 오락 시설은 없고 필수 시설만 있다. 무얼 마시는 사람도 없고,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대화도 불가능하다. 느긋한 배경음악 대신에 소음 사이로 간간이 가장 절도 있는 전쟁행진곡들이 반복해서 들린다. 그곳에서 수백 명, 일본 전체로 보면 수백만 명이 앉아 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기계 앞에 앉아 은색 구슬을 집어넣고 있다.
흔히들 지적하듯 파친코는 중독성이 있다고 한다. 일단 시작하면 아주 많이 하거나, 하더라도 거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열차 시간을 기다리거나, 친구를 기다리면서 파친코를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중독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알콜 중독자가 술을 찾듯이 파친코를 찾는다. 그렇게 중독된 사람들을 국가 차원에서 우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파친코의 영향을 전혀 해악이라고 여기지 않거나, 파친코의 영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본에 파친코가 존재하지 않았다. 폐허 뒤에 튀어나온 것이다. 파괴된 도시들이 제대로 복구되기도 전에 파친코 업소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낙이라고 찾을 수 없고, 가난에 찌든 일본에서 파친코는 단순하지만 즐거움을 가져다준 것이다. 필수 시설만 갖춘 업소 내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우울한 줄, 내부에 울려 퍼지는 전쟁행진곡, 파친코는 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방문하고 찾아온 곳이다. 국가나 마을과 도시, 종국에는 가족들과도 어떤 정서적 유대를 맺지 못한 그들은 불과 30년 동안에 전통적으로 300년, 혹은 그 이상 걸렸을 일을 찾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도시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파친코는 대도시에서 시작한 오락인데, 지금은 일본 전역의 교차로마다 늘어서 있다. 파친코가 처음 등장한 곳은 산업도시 중에서도 가장 낡은 나고야다. 원래 파친코를 드나들던 사람들은 일자리도,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자리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기를 출입한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중독성을 구하는 장소, 예를 들어 술집으로 몰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술집에 있는 사람들처럼 파친코에 있는 사람들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이 아니라 일종의 희열을 경험한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하는 짓이 무슨 의미인지 걱정하지 않은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쾌락의 상태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명상할 때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명상의 목표가 고삐 풀린 마음이 제멋대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을 제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생각이나 자아를 통제하는 유일한 기관이고, 명상은 마음의 행위를 제한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수단이란 모호하다. 스승과 단련된 명상가에게 무의미해 보이는 수수께끼나 화두를 던져, 마음속에서 계속 되새기게 한다. 이렇게 하면 머리 활동이 바빠지지만, 생각 이전에 만들어진 패턴에 따라 방황하는 것을 막아준다. 머리는 그런 패턴을 자아라고 생각한다.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상관없음에 대한 깨달음은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마음이 가는 길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파친코라는 기계도 자아와는 아무 상관 없는 대상일 수 있다. - 1980∼1986 「파친코」
일본 ‘기모노’는 사이즈가 두 개밖에 없다. 남성용과 여성용이 그것이다. 기모노가 옷을 입는 사람의 사이즈에 맞추어 디자인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사람을 기모노에 맞추려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인은 성별과 같은 중요한 차이를 빼면 모두가 같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독창성이 묵살되어 버린 일본에서 개인의 특성을 살려 옷을 맞춘다는 것은 중시되지 않는다. 그보다 화합이 만사의 목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복장에도 기꺼이 동일성을 드러낸다.(처음 듣는 이야기 같다)
그러나 다른 복장과 마찬가지로 기모노는 보이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 옷차림과 관련된 언어는 뉘앙스로 가득 차 있다. 기모노는 여러 의미로 옷의 주인을 정의한다. 몸에 맞춰 만들어지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어떤 옷과도 다른 방식으로 몸을 휘감고, 제한하고 받쳐준다. 몸과는 접촉하지 않는 아랍의 가프탄, 페르시아의 차도르와는 대조적으로 기모노는 입은 이의 몸을 자세히 묘사한다. 특히 여성의 기모노는 몸에 끼는 데다 겹겹으로 덧입은 속옷 위에 입기 때문에 마치 몸의 형태를 기록해 놓은 껍데기와도 같다.
기모노로 기록하는 몸은 서양에서는 강조되는 가슴이나 엉덩이 부위가 아니라 몸통 자체다. 몸통을 꼭 죄는 기모노는 움직임을 옥죄기 때문에 걷고 서고 앉고 무릎 꿇는 동작 외에는 다른 행동을 하기가 힘들다. 이는 매우 제한적인 동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제약이 많은 옷은 무언가를 감싸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고, 개인적 자각만큼이나 강한 일본인들은 순응을 강조하는 엄격한 사회를 이룬다. 강한 사회적 자아와 그만큼 강한 사회적 규율이 필수적이고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서양 패션을 다르게 해석하거나(청바지), 창의적으로 해석하거나(대형 사이즈 룩), 잘못 해석할 뿐만 아니라(미국이 원조 히피룩을 귀여운 패선으로),한 번도 서양의 패선을 일본인이 완전히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입은 적이 없다. 서양에서 유일하게 받아들인 것은 제복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간호사나 승무원 등 특정 직군에서만 제복을 입는다. 제복을 입는 것은 보통 여성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제복이 도처에 늘려 있다. 요리사는 물론이고, 중고등학생은 검은색 모직에 칼라가 달린 프로이센 교복을 입는다. 심지어 일용직 노동자, 스키나 하이킹을 즐기러 가는 일반인도 위아래 풀세트로 갖춰 입는다. 일본인들은 제복의 일종일 때에만 진정으로 마음을 편하게 여긴다. 제복을 입는다는 것은 규정된다는 뜻이기도 한데, 바로 이 규정의 필요성이 현대 일본인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 것이다. 일본 패션에서 군림하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동질성이다. 그렇지만 이제 엄격한 의미에서 일본적 기모노가 점점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 「패션의 용어」중에서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벚꽃에 열광한다. 그래서 그런지 채 피지도 않은 벚꽃을 구경하러 다니는가 하며, 한겨울에도 벚꽃을 피우는 광광명소가 있다. 벚꽃에 열광하는 순간은 꽃이 활짝 피었을 때가 아닌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할 때다. 흩날림으로 상징화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그 소멸성을 대놓고 찬양한다. 비어 있음을 기렸듯이 찰나를 축복하는 것이다. 비어 있음에서 채움을 찾는 것은 참으로 창조적인 일이다. 채움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비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비어 있어야 할 곳이 꽉 차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청빈의 이상은 부유로 바뀌었고, 비어 있었던 공간은 텔레비전·DVD·냉장고·컴퓨터·전자렌지·자동응답기 같은 물건들로 채워졌다. 시간도 넘쳐난다. 민주적으로 배분된 시간은 더 이상 사색으로 채우는 창조적 공간이 아니다. 이런 소비지상주의는 일종의 도덕적 타락의 결과다.
비어 있음에서 풍부함을 찾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아마도)일본 문화가, 오랜기간 경쟁적인 성향 탓에 극히 실용적인 특징을 갖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은 쓰임새가 있다. 고유한 존재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자연은 정원이 되고, 꽃은 아케바나(生花)가 된다. 이렇게 무언가 쓰임새를 창조하는 충동이 아주 강한 곳이 일본이다. 탐구적이며 실용적인 영혼이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재료가 흔치 않을 때 마(間)가 생기고, 다도가 태어난다. 요즘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점점 많아지면서 더 초라한 목적지인 소비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된 것이다. - 「비움으로 채우는 공간」중에서
나는 소속감보다도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것이 오랜 객지 생활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아직 그 가르침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친근하게 대하지만 늘 엄격하게 거리를 두는 일본은 나에게 학위를 약속했다. 그 학위를 받기 위해 나는 생빅토르에 위그가 쓴 『연학론(Didascalicon)』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인용한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 “고향을 아늑하게 느끼는 사람은 연약한 초보자다. 이미 강하게 단련된 사람은 모든 객지를 고향처럼 여길 줄 안다. 하지만 온 세상을 객지로 여기는 이야말로 완벽하다.”처음에 인용했던 그 구절이다. - 「친밀함 그리고 거리두기 :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중에서
세계 최초 영화는 ‘루이 뒤미에르’가 1895년에 만든 「열차의 도착」이라는 영화다. 열차가 라시오타 역에 들어오던 당시에 그곳에만 열차가 도착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각지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1897년에는 도쿄에 오사카에서 출발한 열차가 도착했고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세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목도한 것은 열차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도착이었다. 열차의 증기와 속도와 힘은 인류 발전의 희망 자체를 상징했다. 특히 영화에서 질주하는 열차 엔진은 모더니즘(창조예술 경향 태도)을 의미했고, 달리는 열차의 다양한 모습은 수많은 상상의 영화에 등장했다.
일본의 영화팬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감명받기는 했지만, 이들이 열차라는 현상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일본이 열차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길들인 이후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열차가 일본 현실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질주하는 엔진의 모습 이상의 통제가 필요했고, 그것을 인격화하고 의인화하고 난 뒤였다. 전후 일본 감독들은 열차의 역할을 한 가지에만 국한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했다. 여기에는 기계이자, 상징이자, 은유로서 열차의 힘을 명확히 느끼게 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의인화해 사용했다. 열차는 누구에게나 한 사람 미묘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역할까지도 했다. -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열차」중에서
일본은 계절의 변화에 유난스럽다. 4계절의 변화는 한국이나, 저자의 고향 오하이오도 똑같지만 유별나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계절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계절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때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지나가고 마는 계절의 덧없음을 일본처럼 찬양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수경재배로 한겨울에도 유통망을 자랑하는 현대의 일본 사람들이 여전히 제철 꽃과 제철 음식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덧없음을 찬양할 구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벚꽃놀이 열풍인데, 땅에 떨어져 흩날리며 눈에 보이는 변화가 가장 뚜렷한 순간, 꽃이 쓰러져가는 그 순간의 덧없음을 찬양하게 되는데 심지어 자연의 변화를 느낄 때 내 뺃는 감탄사까지도 존재한다. ‘아와레(哀れ憐れ)’가 그것이다. 700년 전 인물이었던 승려 요시다 겐코(吉田兼好, 1283∼1340)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세상에 머무른다면 …, 사물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힘을 잃고 말 것이다.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삶의 불확실성이다.”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 「일본 반세기의 변화」중에서
만화 형태의 소통 방식이 일본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망가(漫畫-에도 시대 판화가 호쿠사이가 1814년 붙인 이름)는 단순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세계 공통의 문화다. 그러나 이미지에 대한 지각이 강한 일본에서만은 ‘만화문화’가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될 정도로 번성했다. 통계에 따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 70%가 망가를 읽고 있으며, 출판물의 40%가 망가라고 한다. 망가 붐이 절정이던 1995년 한해 거의 20억 권에 달하는 망가가 팔렸다고 하는데, 이는 일본 사람 전체가 15권씩 구매했다는 것이다.
망가책 1권이 320쪽이라면 대략 20분 만에 다 읽을 수 있고 1분에 16쪽을 읽고, 쪽당 4초가 채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망가는 마치 화면이 느리게 바뀌는 휴대용 TV처럼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정독이 가능하고, 그리고는 버려진다. 권당 2달러 정도로 싼 가격이지만, 그 량을 합치면 출판사에게는 상당한 수익을 안겨준다. 망가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체로 쓰레기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 무해한 오락이다.”고 한다. 어느 정도 현실을 생각하면 대중문화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텔레비전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텔레비전이 퍼지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 망가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일본 만화의 붐에는 “정보량은 한입 크기로 나누는 것이 좋고, 너무 복잡한 내용은 피해야 한다. 미묘한 뉘앙스는 굳이 없어도 되고 이런저런 조건을 다는 행위는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시각적인 자극으로 대체하면 되고, 정확한 언어 구사는 시대착오적인 산물이다.”라고 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로버트 맥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 피카츄, 다마구찌 등 일본의 이미지 산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얼마 전 최광진 교수의 「한국의 미학」을 읽었던 적도 있지만, 일본에도 어느 미학자가 이미지에 대해 발견했던 통찰이 있다.“실제와 비슷한 그림이 있고 그 비슷함 때문에 좋은 그림으로 인정받는다면, 그 그림은 자연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실제와 비슷하지 않은 그림이 있고 그 비슷하지 않음 때문에 좋은 그림으로 인정받는다면 그 그림은 그림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17세기 화가 도사 마쓰오카(土佐光起)가 한 말로, 여기서 그는 사물과 그 이미지 사이의 정체성을 확실히 구분할 뿐 아니라, 그 이미지를 만든 수단으로부터도 구분하고 있다. 상징한다는 것은 개념이나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뜻이므로 이미지를 창작하는 작업은 그 과정에서 확대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창작 수단이 펜이건 붓이건 판화이건 컴퓨터 그래픽이건 가상현실의 법칙이건, 상관없이 오래전부터 그렇게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일본의 이미지 산업은 이러한 역사적 바탕 위에서 성장해 왔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상상하고 특정 개인이 아닌 모두를 위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장을 넓혀 나간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하나의 표준화된 이미지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일본의 이미지 업계는 자신들의 주관을 강요한다. 또 그렇게 표준화된 모델을 팔고 있다. -「일본과 이미지 산업」중에서
일본이 자동차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아닐지 몰르지만 세계 곳곳에 일본 자동차가 넘쳐난다. 「니혼소카(日本書紀)」와 「만요슈(萬葉集)」에 따르면, 운송수단으로서 탈 것은 처음 우마차였지만, 여기에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인 이중 요크 사프트를 고안해 사용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19세기 말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된 인력거(人力車-진리카샤)를 개발한 것도 일본이다. 그전에는 가마가 고작이었다. 인력거가 등장하자 금새 인기를 끌어 상하이와 홍콩 및 동남아에 수출되었다. 그곳에서 뿌리를 내린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인력거는 중국의 발명품으로 여기지만. -「일본의 자동차 문화」중에서
일본은 아시아 다른 나라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뒤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이용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스스로도 제국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자신들이 동경해 마지 않았던 서구 열강을 모방해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중국과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는 한국을 병합해 이른바 국경을 확장시켰다. 20세기 초 이런 작업에 성공했던 일본은 식민 지배의 야망을 결국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에까지 확대했다. 타국의 국경을 파괴하는 행위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슬로건 아래서 행해졌다. 이것은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비로운 일본의 리더십 아래 아시아를 경제적·정치적으로 통합한다는 생각을 내세운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뒤따랐던 문제 중의 하나가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보여주었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버금가는 과대망상적 행위였다. 일본이 타이완과 한국과 만주국을 차지했던 행위와 그 뒤에 북중국을 자치국가로 내세우려 애썼던 일은 해방이라는 말을 내세워 예속시키려 했던 나라들과 각종 경제적 유대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과정은 서양 국가들에 비해 덜 야만적일 수도 있다. 아편으로 다른 나라를 예속시키려 했던 나라도 있었으니까. 일본은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그 목표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도 있다. 가령 버마의 국가 지도자였던 바모(1893∼1977)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일본 군인들이 자행한 잔인하고 오만한 행위에 대해서는 개탄하지만, “수많은 식민지 민중을 해방시키는 데 일본이 수행한 역할은 결코 지위질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일본은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싱가포르나 상하이, 쿠알라룸푸르 같은 일부 아시아 지역은 어떤 의미에서 도쿄를 모델로 삼고 있다. 한편, 일본은 미국을 모델로 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일본은 벌써 50년 넘게 미국의 속국으로 지내오고 있으니, 아시아 나라들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 타이 등지에서의 이슬람 내란 문제 등을 차치하면 여전히 충돌을 보이는 곳은, 고대의 지도까지 뒤지고 있는 일본과 한반도 사이다. 같은 바다를 두고 일본은 일본해라 부르고, 한국은 한국해 혹은 동해라고 부른다. 국경을 둘러싼 이런 분쟁이, 과연 국경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데, 사전의 정의는 일부 그림만 제시할 뿐이다. 국경이란 국적이나 자아라는 것이 다른 국적이나 타아와 비교를 통해서만 규정할 수 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통해서 자신이 가난하다고 규정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특정한 사상이나 특정한 정치전략이 옳은 것이라고 여기려면 어둠의 힘이나, 악의 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딱히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과의 대비를 통해 우리를 규정한다. 이웃과의 대비를 통해서만 우리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전히 가까운 이웃이 아닌 태평양 너머 대륙과 스스로를 비교한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고 점점 일본도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현재로서는 대항과 경쟁이 한 데 흥미롭게 뒤섞여 돌아가는 모양새다. 거기에는 물리적이고 정치적이며 은유적인 경계가 있고, 국경을 넘나드는 상호작용이 있어서 경계가 세워졌다가 허물어지기도 한다. “오직 이웃 국가 사이의 상호 존중과 명예로운 의무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가로지르는 저 기나긴 경계”라고 윈스턴 처칠이 미국과 캐나다 사이 국경을 규정한 적이 있는 것처럼, 이는 경계로 이루어진 세상에 어떤 종류의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 「경계 넘나들기, 일본의 사례」중에서
전통적으로 일본 여성들은 어머니와 아내와 딸 이외에는 하는 역할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그 역할들을 대물림하지 않아도 되고, 의사도 될 수 있고, 변호사도, 정치인도 될 수가 있다. 아직은 완벽한 환경은 아니지만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여성의 독립성을 비난하는 영화가 너무 많다. 그런 영화들은 시부야 길거리에서 옷을 요란하게 차려입고 있는 소녀들이나 안전한 집을 떠나 불량한 남자들의 손에 떨어지고 마는 소녀들이 잘 보여준다.
여성이 결혼을 거부하거나, 결혼하더라도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것도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대단히 다르다. 그때는 여성은 결혼하기 전까지 완성된 인간이 아니었다. 아이를 낳아야만 완전한 시민권이 주어졌다. 우리와 같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더 대접도 받았다. 전적으로 가부장 사회라지만, 이제는 많은 가정이 실질적으로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 결정권을 갖는 모계사회 구조를 띠고 여성의 권위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일본 영화가 오늘날 일본 여성을 솔직히 그려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영화들도 존재하고 거기 비친 모습들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저자의 말이다. 일본 여성도 변화와 성장을 이뤄가고 있으며 그것이 영화에 반영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든 일반 여성이든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뻔한 사회적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해방시키고 자아를 실현해가는 만큼, 아직은 어둡지만 충실하게 그들을 묘사하는 영화도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에서 본 일본 여성」중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의 영속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제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되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가 했다는 이 말을 들으면, 죽음은 현실이지 환상이나 과거의 일은 아닌 모양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 지점으로만 인식될 수 있고, 죽음에 정체성을 부여하려면 삶이 필요하기 때문에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곧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죽음을 맞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고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도 다르다.
일본에서도 절이나 화장터에서 장례식을 하기도 하나 여전히 가정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가정적인 장례식은 일본이 죽음을 특별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신의 빠른 처리뿐 아니라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그것이 드러나는데, 조문이 오늘 밤이고 장례식이 내일이라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장례식은 유족들이 준비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고인이 미리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런 효율성이 망자를 존경하지 않는다거나 애틋 해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관 속에 고인이 좋아하던 물건이나 꽃을 뿌리는 것은 서양과 다르지 않다. 능률적이고 능동적인 이런 장례식은 일본에서는 죽음이 서양보다 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사실과 큰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 영화에서는 삶과 죽음을 마주해 드러내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죽음이라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를 가장 깊게 파고 들어간 일본 영화의 제목이 ‘이키루(生きゐ)’다. 이키루는 ‘살다’란 뜻의 동사다.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중에서
세상에 덧없는 아름다움이란 없다. 물론 아름다움이란 깨닫는 것이지 실제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혹은 인생과 예술에서 깨닫는 사람의 반응은 체념에서 오는 우수일 수도 있고, 감탄일 수도, 또는 숙고 끝에 나온 수용적인 쾌락일 수도 있다. 그것을 일본말로 아와레(あわれ[哀れ])라고 하는데, 동정심, 정 또는 비애라고 해석되는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려는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가 있었으나, 제대로 표현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말에서 근대에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物の哀れ]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것은 일본 문학의 기조(基調)를 이루는 것으로 마음에 젖어 드는 정감·정취(情趣)라는 뜻으로, 일본 문화의 정수를 규정하기 위해 그 뜻이 확장된 것이다.
“일본은 오랜 세월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서 스스로의 내부로 침잠한 나머지, 다른 나라에서 종교가 했던 역할들의 상당 부분을 예술적 충동과 미학이 대신하게 되었다. 일본 문화는 그 중심에서 미학적 가치와 구조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미학적 관심사가 심지어 종교적 믿음이나 의무보다 흔히 우선시되곤 했다. 헤이안(794∼1185)시대 후기의 불교 조각에 이르면 예술이 종교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예술이 되었다.”근대 일본인 소설가 가토 슈이치(加藤周, 1919∼2008)가 한 말이다.
일본은 예술을 실용적으로 접근한 유일한 나라다. 통일 국가 시기 일본에도 예술을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었다. 에도 시대에 미학적 행위에 대한 추구가 비범한 경지에 올랐는데, 사무라이들의 法, 부시도(武士道)가 이론화되고 규범화 된 것이다. ‘언제라도 아름답고 고귀한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의 무시도가 나타난 시기는 공교롭게도 사무라이가 칼에 죽어야 할 더 이상의 군사적 이유가 사라졌던 때다. 완전하고도 엄정한 미학의 완성을 위해서는 에도 시대처럼 강제적인 쇄국과 의무화된 평화와 정체(政體)된 사회조직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말처럼 쓰는 ‘야시시이[優しい]’는 원래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쑥스러움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부드러운(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오카시이(可笑しい)’는 매력적이고 멋짐을 뜻하는 헤이안 시대의 단어였으나, 요즘은 웃기거나 어처구니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지금까지 읽어본 「일본미학」이라는 책은 급변하는 현시대에서 보면 옛날의 미학적 개념들은 대부분 화석화되었고, 화석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은 통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 미학은 어떤 관점에서는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전제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