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요릿집 전통 가락과 음식을 준비한 요릿집, 혜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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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3. 18:50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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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요릿집
전통 가락과 음식을 준비한 요릿집, 혜천관
요약 1906년, 지금의 서린동에 개업한 최초의 요릿집 혜천관. 윤병규가 개업.
당시 광교 남쪽에 수월루라는 목욕탕과 이발소·다방을 겸업하는 곳이 생겼음.
혜천관은 수월루와 달리 기생들의 소리와 음식을 준비해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유흥장.
1909년 조선 요릿집 명월관이 생기면서 혜천관이 문을 닫음.
요릿집이 연회장이기도 하고, 유흥장이나 사교장이기도 하며, 집회소·예식장이기도 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원조로 알려져 있는 곳은 혜천관이라는 요릿집으로, 윤병규라는 사람이 1906년 지금의 서린동에 개업했다고 한다.
이 무렵 광교 남쪽 개천변에는 수월루라는 색다른 영업 장소가 생겨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기생을 두고 술과 음식을 파는 요릿집 이름 같으나 실은 목욕탕이었다.
그 안에 커피를 파는 다방이 있었고, 이발소도 있었다. 즉, 주인이 겸업을 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한다 어쩐다 하는 시절인데도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서린동 근방엔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요릿집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곳에 목욕탕·이발소가 들어서더니 수월루 같은 겸업 장소가 들어선 것이다.
수월루에 있는 다방이라는 곳은 이를테면 이발하는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기 장소였다.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는 장소였다. 아니 기다릴 필요가 없을 때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난 후 이발을 했다. 목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욕하고 나서 꼭 커피를 마셔야만했다. 그래야 수월루에서의 목욕 순서가 모두 끝나는 것이다. 머리 깎고 목욕할 때에도 커피는 반드시 곁들여졌다. 신종 상술이 먹혀 들어간 것이다. 멋을 아는 현대인은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게 수월루의 선전이었다. 수월루에 갔다와서 으스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곳은 일류 사교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사교장이라는 말은 물론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람들은 혜천관도 역시 사교장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혜천관도 수월루처럼 다방이 있고, 목욕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혜천관은 분명히 수월루와 격이 달랐다. 혜천관은 전문 요릿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가면 각종 요리와 춤과 소리가 있었다. 말하자면 혜천관은 전통의 가락과 음식을 준비해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유흥장이었다. 사교장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범주에서 나옷 것으로 보인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그런 이름을 붙인다 해서 안될 것은 없을 것이다.
혜천관은 개업하자마자 성업일로에 있는 인근의 일본인 요릿집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대거 몰려온 일본인들이 저녁이면 찾아오던 요릿집이었다. 그래서 국운이 다한 나라에 일본의 전통가락인 나니와부시(인정이나 의리를 주로 노래한 일본의 대중적인 창)가 매일 밤 골목에 흘러넘쳤고, 일본의 유행가가 때도 없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서린동에 오던 일본인들의 발길이 혜천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두 번 와본 사람들이 소문을 내면서부터였다. 다름아닌 그곳 기생들의 소리와 춤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이때 기생들의 소리란 때묻지 않은 조선의 가락 바로 그것이었고, 시중에서 그런 것들을 들을 수 있게 되자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한번쯤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었다. 그 시중이란 바로 요릿집을 말하는 것이다.
주로 관가 주변에 있어야 할 기생들이 이렇듯 시중으로 흘러나온 것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데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관기제도를 없앤 것은 그것을 공무원 사회의 폐단이라 여겼기 때문인데, 그러자 자연스럽게 민간이 그 폐단을 이어받은 꼴이 된 것이다.
시중에 나온 기생들은 처음엔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예의범절에서도 철저했다고 한다. 그래서 연회석에 들어가기 전에 꼭 미리 든든하게 음식을 먹어두었다. 기생도 체통을 차려야 하는데 속이 비어가지고서야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느냐는 뜻에서였다. 그들이 말하는 체통이란 예의범절과 제대로 된 춤 그리고 소리였다.
그런 혜천관이 개업 수년 후에 강력한 라이벌을 만나게 되었는데, 일본 요릿집이 아니라 조선 요릿집이었다. 궁중에서 요리와 연회를 담당했던 안순환이라는 사람이 사직을 한 후 차린 명월관이 바로 그곳이다. 1909년의 일이었다.
명월관의 음식은 궁중식 그대로였다. 그리고 팔도의 소리꾼이 그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해 혜천관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윤병규는 광산으로 눈을 돌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요릿집 - 전통 가락과 음식을 준비한 요릿집, 혜천관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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