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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린도 전도
행 18:1-11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 18:1-11 / [바울의 고린도 전도] 그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다. 2-3) 거기서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에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얼마전에 이달리야에서 쫓겨나 그곳에 와 있던 참이었다. 아굴라도 바울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의 집에 묵으면서 같이 일을 하였다. 4)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온 후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일에만 모든 시간을 바치며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다. 6)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러한 바울에게 대들고 욕을 퍼부었고 예수를 모독하기까지 하였다. 바울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옷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말하였다. `당신들이 잘못한 책임은 당신들이 지시오.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겠소.' 7) 그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지냈다. 유스도는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 책임자 그리스보가 그의 온 식구들과 함께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았다. 9)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으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겁내지 말라. 계속하여라. 중단해서는 안 된다.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 될 사람이 많이 있다.' 11) 그래서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거기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7장에서 베뢰아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던 바울은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 힘들게 복음을 전하고 고린도로 이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동역자(1-4) 바울의 아덴 전도는 힘들었습니다. 복음은 철학적인 논쟁으로가 아닌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큰 은혜를 예비하셨습니다. 좋은 동역자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믿음과 헌신을 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직업이 같아 함께 살며 함께 일을 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에 큰 힘이 되어준 동역자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바울은 매 주 안식일에 회당에서 강론을 할 수 있었고 집중하여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로 가리라(5-11)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은 준비된 지원군을 보내 주셨습니다. 실라와 디모데입니다. 바울과 함께 했던 선교팀이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모인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황을 보고했고 실라는 빌립보 등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를 가져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을 했습니다. 한편 유대인 대적들의 비방 또한 거세졌습니다.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했습니다. 대적들은 바울의 이 말을 심각하게 들어야 했습니다. 에스겔서의 예언이기 때문입니다(겔 3:16-21; 33:4). 바울은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유스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 집은 회당 옆에 있었고, 회당장 그리스보에게 복음을 전하여 온 집안이 주를 믿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두려워말고 침묵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년 6개월 고린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연출이셨습니다.
적용: 복음 외에 우리 인류를 구원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대적하고 비방을 받습니까? 그래도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에 주님은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합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의 삶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목적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후회하지 않고 목적이 있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멈추지 않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적이 있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주님을 만나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목적을 향하여 흔들리지 않는 전도의 삶을 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목적있는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 설 교 >
바울의 재기
이필재 목사
우리들 각자 자신이 추진하는 일들이 계속 되어지는 것은 삶의 기쁨이요, 행복인데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이였던 아덴에서 그것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심히 낙심되었고 몸도 극도로 지쳐있었습니다. 사실 이때의 바울은 상당히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에 괴로움을 겪으면서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가서 아주 달라지는 내용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 그 내용을 성경에서 함께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5절을 보면 아덴에서 겪었던 바울이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아덴에서는 이것과 반대였습니다. 아덴에서 겪은 이야기는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서 헬라 철학의 전공자인 이들 앞에서는 철학적 대결을 해야 그래도 내가 유식하게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 아닌가?’라고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철학적으로 대결한 것이 지난번 사도행전 본문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을 자인하는 말이 오늘 여기 고린도전서에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고린도에 와서는 말과 지혜에 아름다운 수식어를 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말하려면 수식어를 수없이 써야 합니다. 아주 깊이 있고 논리적인 수식어를 연역적, 귀납적으로 꿰뚫어나가야 그게 철학적인 말이 됩니다. 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수식어를 쓰면서 설교했지만 이제는 아름답게만 꾸미는 말로는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덴에서 겪은 마음고생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그냥 전하겠다. 이것만 내가 알리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지할 때, 그의 마음은 심히 약하여져서 담대해야 될 사람이 “심히 떨었노라”, 그러니까 벌써 성령의 능력은 내 영적인 속에서 약해졌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말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있다.”라는 결론을 가지고 이제 이렇게 완전히 복음적 사도의 변신을 한 겁니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모습과 고린도에서의 모습은 아주 달라집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내용을 보면 아덴에서 경험했던 것에 거의 반영하는 말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낙심한 상태에서 찾아온 고린도는 매우 활발한 도시입니다. 그 당시에 75만의 인구가 살고 있던 항구도시입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입니다. 이런 도시에는 두 가지가 많게 됩니다. 하나는 돈입니다. 거래가 많으니까 경제가 활성화되지만 돈으로 인해 또한 죄가 많아집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도시일수록 신전이 많은 것이 헬라 대도시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 앗시지 신전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신전이 있는 지역을 찾아간 것입니다. 고린도에 온 바울은 마음이나 몸의 상태를 보아서는 ‘내가 또 실패하면 어쩌나’하고 도저히 전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열심히 하다가 한번 딱 꺾여서 침체가 되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치료하는 전문 상담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번아웃(Burnout)이라고 말합니다. 탈진이 되어서 목회하기가 아주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목회의 길을 가다가 좌절, 절망 같은 뭔가에 꺾여질 때가 있습니다. ‘어휴, 나는 이거 못하겠다!’ 그래서 그때는 사람이 망가져버리는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는 거기에 대한 교육을 받고 전문가들이 상담치료를 하면 또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는 겁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그런 경우를 만났습니다. 그랬는데 이 치료를 누가 하느냐? ‘안되겠다! 아덴에서의 경험 때문에 큰 사역자 하나가 좌절할지도 모른다!’ 해서 하나님이 바울 챙기기에 나섭니다. 바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몇 가지 위로의 사건을 고린도에 와서 만나게 됩니다. 낙심한 바울을 치료해서 다시 재기시키는 역사가 고린도 역사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째가, 동역자를 만났습니다. 낙심이 될 때 내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동역자의 만남은 정말 구세주와 같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창조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 똑같습니다. 어느 교회가 영적 능력이 사라져서 망가지는 그런 교회가 될 수가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 하나를 잘 만남으로 교회가 치료가 되어 놀라운 영적 능력의 사역이 되기도 하고, 침체된 나라가 지도자 한 사람을 잘 만남으로 정말 진주와 같이 빛이 나는 나라로 발전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도 하고 또, 내 자신이 그렇게 침체되었다가 어느 동역자를 만남으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남은 중요한데, 아덴에서 실망한 바울을 하나님이 고린도에서 다시 챙겨서 일으키는 작업으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역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가 어느 날 “이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다 내쫓아라!”라고 해서 고린도로 쫓겨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 선생도 유대인 아닙니까? 추방명령에 의해 쫓겨나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직업이 장막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고린도에 간 바울이 잘 생각한 것인지 잘못 생각한 것인지 ‘내가 어디 취직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생활할게 없으니 마음이 낙심이 되어 ‘어휴, 이거 잘못하면 굶어 죽지 않을까?’라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취직을 하려고 일을 찾다 보니까 텐트 만드는 천막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아! 나는 이것의 기술자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을 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네, 그러십시오. 같이 일합시다.” 그래서 바울과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학교를 다닌 전문가이며 헬라철학을 전공한 헬라어, 유대어 언어학자입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의 72명 중에 한 사람으로 그 사회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최고로 출세한 사람인데도 천막 만드는 손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생활 철학입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공부를 했던지 제사장들도 자녀들에게 손기술 하나를 가르칩니다. 안 가르치는 자는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 임무로 하는 것 외에 뭐든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 하나씩 습득하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어디를 가든지 손만 움직이면 충분히 먹고 사는 것이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무슨 기술이 있으셨습니까? 목수 기술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겁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데 기술자입니다. 그래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니까 굉장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당신 뭐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 그러면 됐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후원을 할 테니까 바울 선생님은 그 일만 열심히 하십시오.” 그래서 이 만남이 바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바울 선생은 이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이 부부가 얼마나 바울에게 고마운 사람이었으며 바울에게 얼마나 큰 충성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3~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을 위해서 무엇을 내놓았습니까?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이 바울을 위해서는 우리가 생명을 내놓고 일하자!”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좀 문안하라. 그들은 나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느냐 하면 내가 그들 때문에 고린도에 가서 용기를 얻었고 다시 사역자로 재기를 했고 지금까지 그들이 텐트 공장을 해서 벌은 돈을 나의 선교비로 다 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복음의 사역자를 하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은 목숨을 바칠 것만큼 나에게 충성을 했다.” 이 만남이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아덴에서 겪었던 절망적 분위기가 이들을 만남으로 용기가 나고, 경제적, 심적 도움까지도 받았습니다. 사실 바울과 아굴라의 관계는 피차 행복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후원받아서 선교를 많이 할 수 있었으니까 행복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났다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행복인 것입니다. 만남 속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잘 만나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악연이라는 말과 인연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악연으로 만나서 ‘어휴, 안 만났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나는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렇게 또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에 두 번 실패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부인이 도망을 가서 실패를 했고, 또 결혼을 했는데 이번은 부인이 도망을 안가서 실패했답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자체가 행복이요, 힘이요, 용기입니다. 사람이 제일 행복을 느끼는 때가 언제입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는 피차 인정했습니다. “당신들은 나의 선교의 제1의 공로자입니다. 목숨이라도 내놓고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이 사람들은 너무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자기 생명을 바칠 곳을 찾는 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섬겨도 괜찮은 어떤 주인을 만나기를 바라고 만났을 때는 생명을 바쳐가면서 싸워주고 일합니다. 이런 문화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내가 리더의 역할에 서는 것보다도 훌륭하지만 리더를 도와주는 것을 더 행복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회장 누가 되느냐, 우두머리 누가 되느냐 싸움은 우리보다 십분의 일도 안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섰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것에 더 행복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몸 바쳐 충성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있으면 가장 열심히 합니다. 오늘 여기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하는 일을 보고 목이라도 내놓은 정도로 뭐든지 희생해서 도와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서 에베소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곳에도 따라가서 또 도와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마지막에 로마로 갈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 하는 것을 듣고 먼저 로마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돕다가 바울을 돕는다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주의 종을 만나 그가 하는 일을 위해 내가 몸을 바치는 것이 내 인생의 보람이라고 판단하고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다시 용기 있는 사역자로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고, 아덴에서 겪었던 실망을 고린도에서 위로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오늘 말씀에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는 예수님 전도와 마찬가지로 회당을 중심해서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당에서는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회당에서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고린도에는 그 당시에 약 9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회당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이라고 열심히 가서 전했더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하느냐?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하시고, 이방인 유스도의 집을 예비해 두셔서 그 집에서 오늘 말씀대로 1년 6개월 동안 살았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게 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핍박 가운데 유대인의 핍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을 제일 많이 도와준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장 핍박했고, 가장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부나 어떤 기관에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도와주면 도와주었지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는 대한민국에서는 안 통합니다. 기독교가 가장 앞서가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선진국은 정부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이것 좀 도와주세요.” 합의해서 사회사업을 정부와 함께 추진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양로원을 하나 세우겠습니다. 정부가 반 내고 우리 교회가 반 내서 합시다.” “노인 아파트를 하나 건축하는데 우리 교회가 100만 달러 내겠습니다. 정부가 100만 달러 내십시오.” 정부가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아, 그럽시다. 반씩 내서 우리 합시다.” 안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사회사업은 같이 하자고 해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교회 핍박의 문제가 뭡니까? 믿는 자끼리 복음 전파의 방해자 노릇을 서로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가 됩니다. 믿는 자끼리 방해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됨으로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고, 유스도를 만나 이방인이지만 그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고, 그 다음으로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된 겁니다. 지금 회당 출입을 금지 당한 바울이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라고 저주적인 발언을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유대인이 아닌 회당 전도를 그만하겠다. 이방 전도에 문을 열겠노라.”라고 선언했는데 뜻밖에 회당장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 집안 식구들이 다 함께 세례를 받는 큰 열매를 얻게 되니 바울이 이 만남을 통해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덴에서 겪었던 마음의 상처와 어려움이 고린도에 와서 몇 사람을 만남으로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에 빠질 때 그냥 두십니다. 왜 그냥 두시느냐 하면 그것을 겪고 난 다음에라야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내 영 가운데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넘친 곳에 위로가 넘치는 겁니다. 항상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이 회당장은 상당히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러 가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회당에서 쫓겨나서 실망하고 있는 바울한테 회당장이 와서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며 온 집안 식구들이 세례를 받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개척교회를 해본 목회자는 누구나 똑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 인도하러 나가보면 개척교회니까 몇 사람 나와 있지 않잖아요? 그런데 어떤 뜻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 문을 쓱 열고 들어올 때는 그 사람이 누구였던지 간에 목사의 마음에는 너무너무 예쁘고 너무너무 반가워서 가서 그냥 꽉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란 말입니다. ‘어머나! 저 사람이 어떻게 교회로?’ 흥분해가지고 나갈 때는 ‘내가 뭐 줄 것 좀 없나?’ 이건 개척교회를 해본 목사만이 느끼는 심정입니다. 제가 부목사님들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교사의 경험과 개척교회의 경험을 하는 것이 목회자로서 훌륭하게 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그냥 큰 교회에서 왔다 갔다 하면 이런 것을 모릅니다. 교인들이 수천 명씩 모이는 교회에서만 목회를 하다보면 영혼 하나가 귀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개척 교회하라고 하면 자신 있습니다. 거기에 은사도 받았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다섯 교회를 개척했는데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이 너무너무 잘되었습니다. 지금도 교인 한명씩 한명씩 전도하는 것은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나 그것이나 내 마음속 기쁨은 같습니다. 교회가 없는 지역에 나 때문에 교회 하나가 생기고 한사람 두 사람씩 전도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또, 개척교회가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사실 저도 갈보리 교회 올 때 얼마나 염려했는지 교인이 줄면 난 어떡하나? 그때는 볼 것도 없습니다. “어휴, 저 이 목사는 실력도 없어!” 이렇게 되면 목사는 의기소침해서 목회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는 교인 줄 염려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시작했으니까 일 년에 수백 퍼센트 교인이 증가됩니다. 열 사람만 나와도 1,000퍼센트, 두 사람만 나와도 100퍼센트 이렇게 되니까 거기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한명 왔으면 그게 증가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인이 100명 모이면 이것은 황무지에서 얻은 흑진주 같은 교인들입니다. 너무 예쁘고 너무 감사하고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온 기쁨이 말도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개척교회로 지금 세우는 거 아닙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만났고, 유스도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바울이 더 신이 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에 가서 환상을 선물로 받습니다. 9~10절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환상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겁니다. 고린도에 와서는 하나님이 바울을 챙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에 빠져있는 바울을 다시 용기 있는 사역자로 만드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걸 믿고 하면 됩니다. 환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가짜 환상을 볼 때가 많습니다. 또, 그냥 꿈 한번 꾼 것을 자기 맘대로 연결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말 추리소설을 쓰는데 유명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체험한 신비적 사건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메섹에서 빛이 비추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음성 들었고, 빛 봤습니다. 유럽 넘어갈 때도 마게도냐에서 환상 가운데 유럽 사람들이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환상을 보고 건너갔습니다. 그 다음에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부르니까 옥토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려버리는 환상을 봤습니다. 오늘 네번째로 고린도에서의 환상! 나중에는 입신을 경험해서 삼층천에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마지막에는 밀레노 섬에서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는 독사뱀에 물렸으나 아무 해도 받지 아니해서 토인들이 바울을 보고 “이는 신이라!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다 언제냐? 꼭 필요한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기를 주시고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내 백성으로 택함을 입었느냐? 너희를 책임질 것이다.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내가 너와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거기에 대한 믿음이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내가 왜 이 모양이야?’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성령을 근심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인도를 주시는데도 그것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 없으면, 성령도 그런 사람과는 일을 하기 싫어집니다.
이제 고린도의 바울은 이와 같은 몇 가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에서 “십자가 외는 말할 것도 없고 알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제일 교인이 많은 교회를 바울이 세우게 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환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는 상대가 누구이던지 상관없이 두려워말고 말하세요. 열매는 하나님이 거두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고 “내가 말해봤자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을 사람이다.” 내가 그냥 결정을 해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도 안 나타납니다. 내 믿음이 거기 밖에 안 가는데 ‘내가 아무리 기도해봤자 저 사람이 예수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다.’ 먼저 내 마음에 결론을 하고 말을 하니 그게 뭐가 되겠습니까? “말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심히 떨리는 약함을 가지고 의기소침해서 실망하고 낙담한 상태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에게 하나님은 준비하셨다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유스도의 집을 주셨습니다. 회당장을 보내시고, 나중에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개인적 생활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가 시험을 받습니다. 시험 받을 때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내 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에 온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로의 사건이 오늘 예배 나오신 온 교우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바울의 선교 이정표와 그의 순례 과정을 저희들이 보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바울의 선교에 나타났는가? 거기에 담긴 영적인 뜻을 저희들이 잘 해석함으로 그것이 내 개인적인 삶이나 교회 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기쁨과 행복이 있어지게 하시옵소서. 지금 현재 이 설교를 듣는 형제들 가운데 바울의 아덴과 같은 역사가 있다면 고린도와 같은 역사를 곧 준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김삼환 목사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대답을 잘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이겠습니까? 교회는 언제 시작이 되었으며, 교회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교회의 발자취는 누구에 의해서 걸어 온 것입니까? 이 세상의 권력과 부유함과 잘된 조직과 사상도 1세기를 넘기가 어려운데, 교회는 어떻게 2000년 동안이나 걸어왔습니까? 교회를 이끌어온 사령관은 누구이며 누구에 의해서 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교회를 이끌고 가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원시인의 교회이든, 정글 인디언의 교회이든 교회의 주인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교회 안에 계셔서 성도와 교회 안팎의 일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며 인도하시며 길러주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며 응답하시며 부흥시키시며 교회의 사명을 다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의 교회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어떤 핍박 중에도 성령은 교회를 지키시며, 어떤 환란과 전쟁으로 나라는 무너지고 권력은 바뀌어도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끊임없이 운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신비하고 신령한 사람인가? 구름 타고 다니는 사람인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인가? 기사와 이적이 엘리야처럼 나타나고 모세처럼 홍해를 갈라지게 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성령의 사람인가? 우리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좋은 인격을 가지고 내 가정과 내 삶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 자신의 할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복음을 증거하며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하여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고, 예쁜 처녀가 옆에 와도 조금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쁜 여자가 오면 마음이 움직여야 좋은 사람입니다. 예쁜 분이 옆에 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런 특이한 체질을 가진 특이한 유전자가 흐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온 세계에 복음을 증거한 최고의 영적 지도자이지만 평생동안 고린도 교회에서 천막을 기우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이 부부와 함께 평생동안 천막을 만들면서 열심히 일하고 복음을 증거한 것이 바울의 삶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신비하고 신령하게 산신령같이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이 자면서, 똑같이 생활하면서 복음을 증거한 삶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삶은 목수의 삶입니다. 부모 형제와 함께 고향에서 열심히 일하고 살았던 삶이 예수님의 삶이에요. 그래서 어떤 분은 '예수님은 손에 못을 박으셨지만 못 박히기 전에 이미 망치로 주님은 끊임없이 못 박히는 삶을 살아가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삶은 이런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이런 삶입니다. 남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가르쳐 주는 스승이며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며,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영영 죽은 죄인입니다. 오늘 임집사님께서 불러주신 대로 '나 같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이 아닙니다. 가장 쓸모 없는, 가치 없는, 볼 것 없는 흉악한 죄인, 영영 죽어 마땅한 죄인, 이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이 세상에 나보다 큰 죄인은 하나도 없는, 내 죄가 제일 크고, 내 죄가 제일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 죄를 대신하여 주님이 죽으시고 내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미국 남 북 전쟁 때에 '스카피야'라고 하는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졸다가 붙들렸습니다. 여러분, 전시(戰時)에 보초의 역할은 참 중요합니다. 백 명이 자고, 천 명이 자도, 누굴 믿고 자는가하면 보초를 믿고 잡니다. 적군이 들어와 수류탄이라도 던지면 한 중대는 한 순간에 죽습니다. 그것을 누가 막아내느냐? 다 재워놓고 보초가 서서 지키는 거예요. 밤새도록 철저하게 지키는 거예요. 철조망이 있지만 적군은 철조망을 끊을 수도, 뛰어 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키는 거예요. 보초 한 사람이 잠이 들면 적군은 한 순간에 다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보초가 자리를 이탈했다든지, 보초 서는 사람이 존다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천명을 희생시키는 무서운 큰 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스카피야는 전날에도 보초를 섰는데 그 날 친구가 몸이 아파서 친구 대신 보초를 서다가 그만 졸려서 잠을 자다가 사령관에게 들켰어요. 그리고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어요. 어느 나라든지, 사형을 받으면 좋다는 분도 있지만 구명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어져 있습니다. 사형 폐지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나 친지들이나 친구들이나 학계에서 끊임없는 구명운동을 일으키지요.
이번에 미국에 흉악한 살인범에게도 구명운동을 일으키듯이 스카피야도 구명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이 청년은 자기의 죄도 아니고 친구 때문에 또 보초를 서다가 졸게 되었다고 대통령께서 사면을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링컨이 그 소식을 듣고 스카피야를 사면 시켰어요. 스카피야 개인적인 운명은 대통령에 의해서 사인(sign)으로 사면이 된 거예요.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된 거예요. 어두움에서 광명을 찾은 거예요. 영영 죽을 사람이 자유를 얻은 거예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래서 주선을 하여 대통령 앞에 인사하러 가게 되었어요. 그냥 악수를 못하고 무릎을 꿇고 "각하,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습니까?" 그럴 때 링컨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이 은혜는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 은혜를 갚으려면 훌륭한 군인이 되어 주십시오. 돌아가서 훌륭한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주시고,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내 일터로, 내 고향으로, 내 위치로 돌아가서 훌륭한 학생이 되고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치인은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 농부는 훌륭한 농부가 되고 어부는 훌륭한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운전기사는 운전기사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하며 훌륭한 기사가 되기 위해 오는 손님에게 친절하게 하고 복음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요, 성령 충만한 삶인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이런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천사들이 땅에 많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천사들이, 농사 짓는 천사들이, 땅을 파는 광부의 천사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발소에서, 수영장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천사를 만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 '의사들하고 약사들하고 붙는다. 일년동안 길게길게 싸움을 했는데, 또 대판으로 한번 붙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의사, 약사는 사촌간입니다. 형제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더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누구보다 더 이성적이어야 됩니다. 사람은 너무 감정적으로 기울어지면 안됩니다. 왜 공부시키는 줄 아세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살라고 공부시키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왜 좋은지 아세요? 감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신앙적이고, 인격적이고, 합리적인 좋은 생각을 갖고 살려고 예수 믿는 거예요. 오늘 우리 나라는 너무 감정적이에요. 노조와 경영자가 너무 감정적이고, 학생과 선생이 너무 감정적이에요. 요사이는 부부간에도 너무 감정적이고 부모 자식간에도 감정적이에요. 모두가 다 너무 감정적이에요. 불길같이 한순간에 죽이고 살리는 거예요. 말 한마디를 서로 못하는 거예요. 오늘 이 사회가 참 평화롭기 위해서는 너무 감정적으로 가지 않아야 돼요. 모두 내 삶에 감사하며 살아야 해요.
성령 받은 자의 삶은 이해하는 삶이에요. 관용하는 삶이에요. 감사하는 삶이에요. 이 은혜 때문에 범사가 다 편안해지고 원수가 없고, 이제는 그렇게 시기 질투할 사람도 없고, 이제는 그렇게 말 한마디에 흥분할 일도 없고 그래서 좋은 거예요. 그 전에는 조그만 것도 못 참고 이해를 못하다가 주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 은혜에 감사해서 내 성격이 온유해지고 어린아이 같아지고 순수해지고 이해하게 되고 아름답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의 삶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내 안에 오심으로 죽어야 할 나를 살리신 은혜를 생각하면 이제는 모든 일에 흥분하지 아니하고 감사한 거예요. 남편이 늦게 돌아온다? '그럴 수 있지. 남편이 집에 일찍 와서 뭐해?' 이런 마음으로 마음이 변하는 거예요. 부인이 바가지를 긁는다? '부엌에 바가지 소리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모두가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내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여자분들은 부엌에서 반찬을 합니다. 김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담그고 된장은 무형문화제급으로 만들고 고추장은 세계 챔피언 맛을 내는 거예요. 찌개 하나를 끓여도 맛이 꿀맛 같아요. 우리집 장은 누가 훔쳐갈까봐 겁이나요. 사람이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대요. '집에서 반찬 잘 만들어 먹는다' 이 세상에 이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요? '저처럼 부족한 종이 설교해서 이 설교에 모두 은혜를 받는다' 세상에 이런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요? 내가 하는 농사, 꽃 한 송이라도 예쁘다 칭찬해 주고 모두 아름답게 보면 이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요? 우리 모두 내 위치로 돌아가서 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선사하는 이런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이에요. 이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나는 어려서 제일 궁금한 것이 가마 타고 가는 아가씨는 어떻게 타고 가나? 가마가 마을 앞에 오면 아주머니들이 나가요. 그러면 가마의 행렬이 멈추면서 가마문을 아주머니들이 열어 주어요. 남자들은 못 봐요. 그런데 저는 꼭 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어머니 사이로 들어가 가마 안에 있는 색시를 봤어요. 색시는 손에 하얀 명주수건을 갖고, 아래위로 예쁜 한복을 입고, 머리에 예쁜 것을 쓰고, 양쪽 볼과 이마에 빨간 연지 곤지를 도장 찍듯이 찍어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보니 울어요. '저렇게 잘 입고, 남자들이 메고 가는데 왜 울까?' 이해를 못했어요. 요사이 생각하니까 고생문이 훤해서 운 거예요. 그때는 조혼을 했고 부모 떠나서 멀리 산골로 결혼해 가니 안 울 수가 없지요. 성령의 충만한 삶은 어떤 삶일까? 성령 충만한 삶을 들여다보면 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하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의 현장이 어디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으로 천국 같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정진경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하셨어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가려낼 수 있는 것은 그 은혜스러운 표정이라고 하셨어요. 성도는 얼굴이 은혜로워야 돼요. 만 명이 있어도 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그 얼굴이 은혜로운 거예요. 죽어야 할 나를 살려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은혜스럽고 즐거운 모습은 가장 훌륭한 추천장이라고 프렌시스 베이커는 말했어요. 어디에 어느 직장에 소개해도 내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사람은 은혜로운 표정의 사람이에요. 아무리 많이 배운들 얼굴에 은혜가 없어 보세요? 은혜로운 사람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사랑 받고 하나님 영광 드러낼 줄 믿습니다.
삶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마음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생활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말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은혜 받았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아니면 나는 죽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이런 마음으로 늘 울어도 눈물로써 갚을 수 없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명일동 옆에 상일동이라고 있는데 그 곳에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계셨어요. 지금부터 한 15년 전에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청주 쪽으로 다녀오는데 상일동에 계시는 목사님이 옆에 앉은 목사님께 나는 창 쪽으로 가겠다고 자리를 바꿔달라고 하셨어요. 창가에 계신 목사님도 창 밖을 보는 것이 좋은데 기어이 자리를 바꾸어서 당신이 창가에 앉겠다고 하시더니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트럭에 받혀서 그만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먼저 그 자리에 앉았었던 목사님은 돌아가셨을 텐데 순식간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살게된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깜짝 놀란 것이지요. 딱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상일동에 김목사님이 돌아가셨어요. 그 다음에 그 목사님은 김목사님으로 인해 살게 되었으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그 가족들을 지금까지 돌보고 가족들을 볼 때마다 그 분이 생각나지요. 그 분이 아니면 내가 죽었을텐데….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이 어떤 삶이에요?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고 고아를 돕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벌써 죽었을 텐데…' 이 마음으로 살아가면 언제나 감사한 것입니다.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은혜 생각하니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순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살려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이런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우리 성도의 삶은 복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아주 어렵고 강퍅하고 너무 과격하고 사람이 무서워졌습니다. 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강퍅하게 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의 문화가 발전하면 사람은 아주 강퍅해집니다. 거칠어집니다. 우상 문화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의 문화는 사람들을 얼마나 거칠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빈들의 마른 풀처럼 작은 불만 붙으면 그대로 활활 타게 됩니다. 요사이는 아이들에게도 말 한마디 못합니다. 그냥 자살해 버려요. 죽어 버려요. 노인도 자살해요. 강퍅해졌어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셨어요? 네팔에서 어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 줄 아세요? 30살 된 왕자가, 이 아들이 아버지 어머니하고 12형제를 다 죽였어요. 왜인지 아세요? 네팔은 어떤 나라인지 아세요? 세계 우상 숭배를 1등으로 하는 나라예요. 네팔의 왕은 법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매일 점쟁이 말을 듣고 다스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날도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아들이 서른 살인데요 장가를 가려고 아버지에게 신부를 소개하고 결혼을 시켜달라고 하니까 아버지가 점쟁이 말을 듣고 반대를 한 거예요. 점쟁이가 왕에게 35살 되기 전에 아들을 장가 보내고 결혼 시켜 아이를 낳으면 왕실에 큰 화가 있다고 한 거예요. 왕에게 화가 미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점쟁이 말을 듣고 장가를 못 가게 한 거예요. 여러분, 남자 성도 여러분, 30살 되어봐요. 얼마나 장가가 가고 싶은지…. 그런데 5년을 기다리라고 하니 총을 쏘지 않고 견디어 내겠어요? 점쟁이 말 듣고 자신과 집안을 살리려 하다가 왕실이 다 망한 거예요. 우상 문화는 강퍅합니다. 아시아에서 우상을 제일 많이 섬기는 나라가 또 일본입니다. 일본 사람이 얼마나 강퍅합니까? 일본 사람은 자살을 제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습니까? 할복을 해요. 칼로 그어서 죽어요. 우리는 죽어도 칼로는 못 죽습니다. 어떻게 무서워서 칼로 죽어요 목매어 죽지…. 일본 사람은 아주 잔인합니다. 강퍅합니다. 세계에 자살 제일 많이 해요. 자살을 해도 언제나 잔인하게 죽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강퍅하게 합니다.
오늘 성령의 단비가 부어져서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길 바랍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 충만해야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가정, 부모 자식이라고 믿을 수 있는 줄 아세요? 요즈음 오늘 우리 나라도 얼마나 우상과 미신이 많아지고 점쟁이들이 얼마나 번성하는지 아세요? 교회는 부흥하지 않고 점쟁이는 얼마나 부흥하는지…. 이럴수록 강퍅해집니다. 우상 문화는 술 취하고 방탕한 문화예요. 우상 문화의 배경은 두 개예요. 하나는 강퍅하고 하나는 더러워져요. 마음이 더러워져요. 윤리 도덕이 다 땅에 떨어지고 음란하고 더러워져요. 오늘 이 더러움에서 돌아서는 길도 성령 충만이에요. 강팍한 마음에서 돌아서는 길도 성령 충만이에요. 성령 충만하면 누가 무슨 말해도 참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겸손하게 됩니다. 기쁨이 찾아옵니다. 삶의 즐거움과 환희가 찾아옵니다. 유명한 천지창조를 작곡한 하이든은 오스트리아 태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영혼 깊은데서 환희가 솟아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 마음에 거하시고 성령의 충만한 심령이 되어 늘 기쁨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환희가 충만하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합니다. 위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왜?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오셨으니까. 인간에게 우상의 영, 사탄의 영이 오면 땅의 것을 찾아가지만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생활은 복음을 증거합니다. 주님을 높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사도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있으면서 고린도 교회를 일으키고 또 에베소에 가서 에베소 교회를 일으키듯이 우리 성도들은 어디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업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의사를 하든지 교수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 증거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예수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민족이 삽니다. 남북이 다 잘 사는 길은 예수 믿는 길이에요. 가정 모두가 복음화 되어서 예수 믿는 계절이 이 나라 전체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습니다. 어떤 죄에서도 용서함 받고 어떤 문제도 주 예수는 해결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됩니다. 남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부지런하며 근면해야 합니다. 바울 같이 열심히 일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한 삶입니다. 부지런한 삶입니다. 세상사람 나를 부러워하지 않지만 나도 역시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면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면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모두가 다 나보다 잘 되는 것 같고 항상 차별에 대해 신경을 씁니다. 정치도 누가 차별하지 않나 그런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왕이 나와 함께 하는데 그런데 신경이 쓰여지질 않아요. 차별하면 하는 겁니다. 학교에 가도 '누구를 선생님이 더 좋아하지 않나?' 신경 쓰고 학교에 대해 불평하고 선생님에 대해 불평해요. 교회에 나와도 목사님이 누구만 좋아하지 않나 이런 마음이 생겨요. 성령이 내게 충만하지 않으면 항상 불만이예요. 목사님이 누구 집에는 가고 누구 집에는 전화하고 우리 집에는 전화 안 한다고 불평을 해요.
교인 한 분이 늘 자랑을 했어요, 목사님은 퇴근하면 우리 집에 꼭 들려 간다고. 이 분이 또 과부예요. "우리 아이를 사랑하셔서 목사님이 집회하는 곳마다 데리고 가서 안수 기도 해준다. 해외 갈 때면 늘 우리 집을 거쳐간다." 교인들이 그대로 믿었어요. '왜 목사님은 그 집 아들만 사랑하고 그 집에만 가시나?'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요. 성령의 충만한 삶은 석류가 꽉 차 있듯이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는 것입니다. 도무지 누구에 대해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없어져요. 할렐루야!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해서도 누구 집에 더 가고 누구를 더 사랑하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런 마음은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아주 좋지 못한 마음이에요.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다 그래요. '이 우주에 나 보다 더 은혜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이런 마음 가지고 살아야 행복한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바로 자기의 삶에 대한 만족합니다. 자기의 삶에 만족해야 되요. 내 영혼에 만족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상추와 배추를 보면 깨닫는 게 많아요. 상추는 제 잘났다고 하며 잎이 꼭 하나씩 뻗어나가요. 절대로 상추는 뭉치는 법이 없어요.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그래서 색깔도 검어요. 시커멓든지 시퍼렇든지. 그런데 배추는 그렇지 않아요. 배추는 전부 서로가 모여서 잎이 전부 안으로 들어가요. '나는 부족하다'하며 서로 감싸주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전부 안으로 들어가서 똘똘 뭉쳐요. 어느 배추든지 그래요. 참 신비해요. 배추는 전부 하나가 잘 되요. 배추는 서로를 생각해요. 배추는 드러내지 않아요. 전부 다 감추어요. 겸손해요. 서로가 하나가 되어요. 나중에 보면 속이 노랗고 맛이 좋고 배추 속을 보면 신비한 궁궐 같아요. 배추는 김치를 담구어 일년 내내 먹는데 상치로 김치 담는 분 봤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배추 같이 살아야 되요. 서로 감사하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겸손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생각해야 돼요.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안아주고 서로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이제는 나 혼자 잘났다하며 상추처럼 빠지지 말고 전부 안으로 들어와서 감싸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
행 18:1-4 / 김명혁 목사
행18:1-4, 롬16:3-5
지난 한 달 동안 여러분들과 함께 신학자들의 귀한 설교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큰 축복이고 말씀을 듣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별들 중에는 큰 별도 있고 작은 별도 있습니다.
1 한경직 목사님과 작은 별들
한경직 목사님은 큰 별이었습니다. 한 평생 설교와 삶과 봉사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큰 별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서 한국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평생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큰 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강을 이미 건너간 피안의 삶을 사셨습니다. 통장과 집과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삼 무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만을 증거하시며 예수님처럼 사신 큰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 있었습니다. 소년 한경직이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 마을에서 자라며 그 동네에 있던 진광소학교에 다녔는데 홍기두란 선생님이 소년 한경직에게 다른 과목들과 함께 성경을 가르쳤고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 있던 반작교회에 다녔는데 반작교회의 우용진이라는 전도사님이 소년 한경직에게 성경과 기도와 찬송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이 소년 한경직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소년 한경직을 오산학교에 보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볼 때 마다 언제나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은 소년 한경직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언제나 빠트리지 않고 말하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신의주 제2교회의 김기범 장로님입니다. 김기범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을 신의주 제2교회에 청빙한 장로님입니다. 김기범 장로님은 12년 동안 언제나 한경직 목사님을 후원하고 격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경직 목사님의 의견에 따르지 않으려고 했을 때에도 김기범 장로님은 언제나 한경직 목사님 편에 서곤 했습니다. 사실 한경직 목사님이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를 신의주 제2교회의 부교역자로 청빙하려고 했을 때에도 김기범 장로님이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후에 어떤 사람이 한경직 목사님에게 어떻게 영락교회를 그렇게 훌륭하게 목회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한경직 목사님이 이렇게 소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저 전에 김기범 장로님이 하시던 말씀대로 목회를 했디요." 김기범 장로님은 큰 별을 만든 작은 별이었습니다.
2 사도 바울과 작은 별들
사도 바울은 큰 별들 중의 큰 별이었습니다. 한 평생 설교와 삶과 봉사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큰 별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예수님을 밝히 증거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소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큰 별들 중의 큰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큰 별 바울을 만든 작은 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살던 이름 없는 하나의 신자였습니다. 물론 기도를 쉬지 않던 신자였습니다. 어느날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만나 그에게 안수 기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이곳에 왔는데 어떻게 내가 그에게 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명령은 단호했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아니니아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고 사울은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주님께로 인도한 작은 별이었습니다.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이 소년 한경직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작은 별들이었던 것처럼 아나이나는 사울을 처음 주님에게로 인도한 작은 별이었습니다. 큰 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루디아도 디모데도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언제나 말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후원하고 격려했던 한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말을 했습니다. 마치 한경직 목사님이 김기범 장로님에 대해서 항상 말했듯이 사도 바울이 항상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의 동역자가 한 사람 있었다. 언제나 나를 후원하고 격려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부부였다. 내가 고린도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때,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이 너무 인색해서 아무도 나를 돕지 않고 있을 때, 그들은 나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도왔다. 아니 그들은 나를 위해서는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 놓으려고 했었다. 내가 고린도에서 그리고 에베소에서 전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에베소와 로마에서 자기들의 집까지 내 놓아 교회를 만들었지. 아 나는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이제 그들에 관한 성경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 만드는 것이더라"(행18:1-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라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희 교회에게 문안하라"(롬16:3-5).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부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딤후4:19). 디모데후서 4:19의 문안은 의미심장한 문안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편지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한 문안입니다. 바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바울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던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였습니다.
3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16:3). 동역자란 후원자요 위로자요 협력자란 말입니다. 방해자도 있고 방관자도 있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후원자요 위로자요 협력자요 동역자였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명칭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였고(고전3:9)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바울을 동역했는지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도왔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인색했기 때문에 아무도 바울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손으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와 선교비를 보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본래 장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과 함께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바울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책임지고 도왔습니다. 바울은 이제 생활비와 선교비를 걱정하지 않고 복음만 열심히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직업을 선택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직업의 목적을 어디 두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종류의 직업을 선택했고 그 직업의 목적을 전도자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돕는데 두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있어서 직업은 둘째였고 첫째는 바울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그들도 함께 떠났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행16:18). 마치 김치선 집사가 1945년 10월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38선을 넘었고 다시 1950년 6월 28일 김치선 집사와 이창로 장로가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마포 한강을 넘었듯이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을 모시고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둘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전도를 도왔습니다.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동역자가 되려면 담임 목사와 항상 함께 있으면서 교제를 나누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과 항상 함께 있으면서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다니면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고 다음에는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나중에는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로 갈 때는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 두며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저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학자 아볼로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을 들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셋째 아굴라 부부는 재물과 집을 내 놓고 목을 내 놓으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목을 내 놓았다는 것은 몸을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집과 몸을 내 놓으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마지 부산 부전교회의 백남조 장로와 대구 서현교회의 정규만 장로가 재물을 바치고 집을 팔아서 바치면서 주님과 교회를 섬겼던 것처럼, 아굴라 부부도 재물과 집과 목을 내 놓으면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굴라 부부는 자기 집을 교회처소를 제공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고전16:19).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자기 집을 교회처소로 제공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또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16:3,5).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을 돌이켜볼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직업적으로 도왔고 전도적으로 도왔고 재물적으로 육체적으로 도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김기범 장로님을 항상 기억했듯이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항상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작은 별들의 역할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아름답게, 누구누구의 동역자라고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롬16:3-5을 읽고 말씀을 마칩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
사도행전18:1-4 / 조재진 목사
요즘 한국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많고 교인들도 많은데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훨씬 적었던 구한말에는 한국교회가 사실상 한국 민족을 이끌어 갔고 사회 변혁을 주도하였습니다. 3.1 만세운동에 대한 여러 평가들이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요,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고 성도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40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반정도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났지만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저는 오늘 그 원인 중에 하나로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부족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헌신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초대교회가 한 시대를 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은 모이는 숫자나 교회의 크기, 혹은 성도들의 지식 수준이나 부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인 헌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요즘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어 가는 발자취를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 때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 지역, 또는 한 도시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에 우리 가운데 초대교회와 같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복음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헌신된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위기는 바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마음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사도행전 17장을 통해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도시에 가득한 우상보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또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당시 철학자들과 논쟁도 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저 유명한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덴에서는 제자도 세워지지 않았고 교회도 세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가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로 와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는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제자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의 전도와 고린도에서의 전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왜 아덴에서는 많은 전도의 열매들이 일어나지 못했고 왜 고린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제자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혹시 아덴보다 고린도 지역이 복음 전하기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덴에서는 핍박이 없었지만 고린도 지역에서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또 아덴이 철학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입니다. 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들의 생활은 매우 부유했지만 도덕적으로는 심히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비너스)라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는 1천명의 매음을 하는 성창(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탕한 사람을 가리켜 "고린도인 같은 사람"이라 할만큼 고린도는 성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바로 복음을 위해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복음에 헌신한 사람들이 소개되어 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과 같은 직업을 가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에 내놓은 디도 유스도, 또 회당장 그리스도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서 합류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과 함께 헌신된 사람들이 일어날 때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중요하지만 복음에 헌신하여 바울을 도운 일군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 이 민족가운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 헌신된 일군들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자기 이름만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민족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그런 말을 했지요. "지금 우리 나라엔 가마를 탄 사람이 필요하지 않고 가마꾼들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고린도에서 일어났던 복음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이런 헌신된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헌신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특별히 부부가 함께 헌신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의 헌신은 바울이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놀라운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 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굴라는 본도라는 지역출신입니다. 본도란 흑해 부근의 지역입니다. 그에 비해 브리스길라는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로마귀족의 이름입니다. 또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는 유대인 말살정책을 폈던 로마의 황제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황제가 되고 난 이후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 시기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이름이 여섯 번이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은 항상 함께 등장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따로 불리워지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한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우리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부부의 이상형이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부부에 대한 언급이 여섯 번 기록에서 네 번은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데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아마 브리스길라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활동적이었고 헌신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굴라는 아내 브리스길라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헌신했습니다. 사실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은 유대인 남자에게 내려졌지만 로마의 귀족 출신인 브리스길라는 남편에게 헌신하고 남편을 따라 낯선 도시 고린도로 옵니다. 반면 남편 아굴라는 넒은 마음을 가지고 아내 브리스길라가 마음껏 활동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축복은 바로 고린도에 와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의 직업에 텐트 만드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사도 바울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지 고민하다가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 부부를 만나게 되었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지만 아마 이 때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났던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낯선 도시 고린도에 왔을 때 아마 그들의 심정을 그렇게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그들에겐 고린도에서의 삶이 위기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의 만남은 이들의 삶을 가장 가치있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린도로 오기를 잘한 것이지요. 쫓겨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부부의 생애에 최고의 만남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는 너무 놀랍습니다.
말씀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과 만남은 이들 부부의 삶의 방향, 목적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을 때, 그 때 가장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갈수록 복음에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보십시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고전2:1-5에 보면 당시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갈 때에 어떤 심정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아마 바울은 아덴에서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고린도로 오면서 오직 예수만을 말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면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보십시오 이 성경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 첫 번째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바울에게서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그들의 가슴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찼습니다. 모든 것을 복음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복음에 불타 올랐던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이들 부부에게 옮겨가고,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헌신된 마음이 이들 부부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도하게 되고, 헌신된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함께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복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사도행전18:24이하에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볼로라는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당시 학문과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언변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기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었고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히 예수에 대해 설교는 했지만 여전히 요한의 세례, 즉 윤리적인 설교에 그치고 맙니다. 이들 부부는 아볼로의 설교에 가장 중요한 복음이 빠졌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냥 듣기 좋은 소리에 "아멘"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지 못하는 부분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아볼로의 설교에서 복음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들 부부가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볼로를 초대하고 함께 교제를 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도", 즉 정확한 복음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줍니다. 결국 이들 부분의 영향으로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의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평신도로서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헌신해야 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훈련 받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양육받는 일, 예배에의 헌신, 기도에의 헌신, 제자훈련 등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헌신을 통해 좋은 믿음의 일군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말씀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수여한 일이 없었습니다. 말씀으로 훈련받고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잃어 가는 것은 말씀에 헌신한 사람들이 줄어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 와서 드리는 예배 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알기 위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해 1년이고 2년이고 시간을 바쳐 말씀을 배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적이 있습니까?
교회와 영적 지도자에 대해 헌신하십시오
브리스길라 부부의 또 다른 헌신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특히 바울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세워졌고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헌신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말씀에 헌신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그리고 주님의 사역자들을 철저히 섬겨야 한다는 의식이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울을 도와 로마가 복음화 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이 어느 정도 헌신했는지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18:18 이하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게 되는데, 이 때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동행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닙니다. 아예 이사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했을 때 이들 부부는 자청하고 나선 것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에서의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의 사업도 정리할 수 있는 이런 용기와 결단을 가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이사하는 교우들 중에 "제가 이사하는 것은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섭니다" 아니면 "제가 이사하는 것은 교회에 좀 더 헌신하기 위해섭니다." 라고 신앙생활을 위해 이사한다는 분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또 직장을 선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면서 직장을 선택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직장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직장이 주님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자기들의 삶의 현장까지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전16:19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라고 기록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브리스길라 부부도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 때도 그들의 집에 교회가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나자 다시 바울과 함께 로마로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롬16:3에 보면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4절에 계속 말하기를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아마 이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이여 당신을 위해 우리가 목슴까지도 내어놓겠습니다. 이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교회 안에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이 주의 종들에 대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감사한 일지요. 제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포기한 청년도 있었고, 오직 교회에 헌신하기 위해 직장을 옮긴 청년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한 어떤 젊은 부부는 목사님과 함께 평생 선교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돈버는 이유가 바로 선교하는 것이라고, "돈 벌어 선교비는 왕창 왕창 댈 테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당당하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삶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뒤에 있었던 이런 평신도들의 절대적인 헌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신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에 헌신하려할 때 많은 장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장애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헌신의 장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중심적인 자세입니다. 어떤 한 곳에 헌신하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주님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은 자기계획, 자기 방법, 자기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버릴 정도로 그리스도가 귀하고 자기 계획을 버릴 정도로 교회와 주의 종이 귀하게 보일 때 헌신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에 어떤 농부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흔치 않는 일이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중의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묻습니다."두 마리 중 어느 것을 드리지요?" 잠시 생각하던 남편은 "나중에 크면 결정하십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사색이 되어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여보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남편은 "방금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가 "아니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지 정해놓지 않았잖아요!" 라고 반문하자 남편은 "아니요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흰 놈이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바로 그 놈이 죽었단 말이요!"
이게 사람들의 마음이지요.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속에는 욕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할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에 빠릅니다. 손익에 대한 계산 때문에 헌신하기를 주저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헌신에 장애 되는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한 염려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헌신에 주저하는 이유는 염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동안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언젠가 "신앙과 돈"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설교가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때 나온 단어가 "청부" 즉 깨끗한 부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분은 설교에서 아주 강한 감동을 받은 것이 바로 십일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100만원 십일조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보다 정확하게 십일조 하는 사람 100명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많은 십일조 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정확하게 믿음으로 십일조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대강 십일조 합니다. 월정헌금처럼 십일조 합니다. 작년에도 십일조가 10만원이었고 올해도 10만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5년 전에도 이분의 십일조는 10만원이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물질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것이지요. 정확하게 십일조 드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헌신에 장애 되는 세 번째 부분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습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부부사이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식어가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이 불타오를 때는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헌신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랑의 회복이 사명의 회복이며 헌신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시험에 빠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헌신된 사람은 사단이 흔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좋은 목사도 필요하고 직분자도 필요하고 은사 있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사람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예배에 헌신한 사람, 기도에 헌신한 사람, 그리고 교회와 교회 지도자에게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교회의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 헌신된 자로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