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복 《동관감구도(銅官感舊圖)》 증국번 이야기 제발초고
출처:서령경매 소스: EK 이페어케이 플러스
도록번호: 1373
평가 RMB: 30,000-50,000
거래가격RMB: 161,000 (수수료포함)
1373
엄복 동관감구도(銅官感舊圖)》 증국번 이야기 제발초고
지본 렌즈
1911년 작
식문:장군만선개왕서형(章君萬介王王書出)은 그 선덕가인선생《동관감구도(銅官感舊圖)》를 내었는데, 속제식(屬題識)이다복, 복관 전후 여러 공소에서 제영하였다.장공의 이러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부증문정공(夫正文正公)과 이일(異日)한 까닭이다.장공을 만난 자도, 과거에 다시 영탄하여, 각기 다른 점이 있어, 여러모로 군더더기를 취할 수 없었다.지견지명설. 고답.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고금의 사람들이 저론을 쓴 것으로 알고, 분개하여 자살한 사람은 영원히 용서하고, 깊이 사모한다.추앙하여 위엄 있는 일로 여기다.비록 아주 별명이 아니다.지금의 부사는 본래 무용이 있을 수 없고, 용자란 죽음을 택하여 뜻을 이루는데, 구차하게 귀를 피하지 아니하며, 몸을 끊고 절구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 마침내 용과 의가 된다.부문정공유자는 의를 취하고 인을 이루는 일을 반드시 정교하게 말했는데, 어찌하여 군사를 조금 잘못하여 마침내 어지럽게 흥을 망쳤다.
도장:유야당(주)
제발:엄복묵보.양신경제. 도장: 양신(주)
출판: 1. 《엄복가서》P126-127, 비즈니스 인서관.
2. 《엄림심화: 엄복, 임구유묵집》P140-143. 황산서사.
저술: 3. 《엄복집》 제3권 P277-278, 중화서국, 1986년。
4. 《엄복연보》P373,374,손응상저,복건인민출판사,2003년.
5. 《동관감구도제영책교정》P387, 악록서사, 2010년.
설명: 양신이 발문을 쓰다.
이것은 엄복제(官感題) 《동관감구도(銅官感舊圖)》 초고의 2페이지로, 증국번 야스하마를 둘러싸고 투수(水水)하고, 막료장(章幕章)이 되었다.수린(가인)이 구해낸 일로 발단하다., 자살을 반대하고, 사업을 위해 일생을 분투하는 뜻을 밝힌 것은, 관련 증이다.국번, 엄복지업 및 《동관감구도》의 중요 역사 문헌약 1911년에 만들어졌다연 8월. 『엄복집』 『동관감구도제영책교정』 등에 실렸다.
《동관감구도제영책》의 원본은 북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원고는 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엄복이다.《동관감구도(銅官感舊圖)》에 발문을 쓰다.
이 원고는 간행본과 글자의 차이가 비교적 많으며, 초고가 되어 여러 방면의 재량을 거쳐 후방의 정고를 수정하였다.원고 중 서명이 발문을 밝힌 것과 같이 장만선이다구하는 바, 출판할 때 장수린 본인이 구하는 것으로 바꾸었다.몸 투구' 구절의 정본소무 "무엇 때문에 군사적으로 조금이나마 떨어질 수 있었는가""정본"을 "구내"로 고치다.우군사차락(军事軍蹉";) 우정본(定定本) '사마천씨(司馬泰氏) 태산홍모(泰山之毛)의 말은 있으나' 등의 구절은 이 원고에는 없다.
왕서형 즉 왕식통이다.왕은 일찍이 엄복, 임구 등과 함께 《공교회의 탄원서》에 있었다.에 서명하고, 시 작 《위백》이 있다.옥은 그 존인 몇 도 선생의 <강정 전별도>를 제목으로 삼십 년의 옛일을 회상하였다.애처롭게 글을 쓰다.
함풍 4년 봄, 증국번은 친히 상군 수사를 거느리고, 태평군과 악양, 정항, 동관(銅官)에서 싸웠다.저병이 패하여 물속에 투항하니 막료가 장수하였다.린의 구원. 후에 태평천국이 멸망하자, 증씨 봉후배상, 부졸들이 모두 죽었다.'부침목령(浮沈牧令)'.광서 3년, 장수린고로귀상하고, 배를 동관(銅官)에 정박하고, 두서가 없어 《동관감구도(銅官感舊圖)》를 만들고, 많은 옛 제사를 불러 기념하였다.이 그림은 후에 산실되어, 장자가 되었다.장동, 장화(만선)는 임구(林等人) 등에게 보필을 청하고, 이어서 명류제사(名流題辭)를 청하여 8책으로 꾸몄는데, '동관감구도제영책(銅官感舊圖題册》,)'이라는 제목으로 선통 2년에 석인(石印)으로 간행하였다.제자는 좌종당(宗宗等)을 비롯한 200여 가문이 모두 동관(銅官)의 옛일을 빌려 발휘하거나 세상일을 개탄하거나 역사의 공과를 평가하였다.
이 원고를 엄복하고 계장 수린의 차남 장화(만선)가 <동관감구도(銅官感舊圖)> 제사를 청했다.이 글의 논점은 장수린우를 동정하지 않는다.우, 증국번의 배은망덕 여부도 아닌 평성패와 생사의 도리를 말하다.엄복은 고금에 자살자가 많았던 것이 원이라고 생각했다헤아릴 수 없는 말, 심지어"엄청난 절개를 추앙하는 일" "심각한 일" "용자란 치명수를 취한다.지' '자포기생' 비위'용차의야(義"。). 증씨는 '군사에서 조금 벗어나' 강물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덕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그 전문 후언: "방국은 전멸하고, 그 소인은 도생자유를 즐기며, 그 의를 아는 무리들이 서로 상대하여 사국의 일을 가볍게 여기니, 누가 바라겠는가!"
YAN FU AUTOGRAPH MANUSCRIPT OF THE INSCRIPTION FOR TONG GUAN GAN JIU TU
Ink on paper, mounted
Dated 1911
Illustrated: 1. Yan Fu's Family Letters, pp. 126-127, The The Commercial Press
2. Yan and Lin's Paintings: A Collection of Yan Fu's and Lin Shu's Legacy, pp. 140-143, , Huangshan Book Press
Literature: 3. Collection of Yan Fu's Works, vol. 3, pp. 277-278, , Zhonghua Book Company, 1986
4. Chronicle of Yan Fu, pp. 373-374, Fujian People's Publishing House, 2003
5. Revised Inscriptions for Tong Guan Gan Jiu Tu, p. 387, Yuelu Press, 2010
Note: Inscribed by Yang Xin.
30×16.5cm×2
RMB: 30,000-50,000
발자소개: 양신(~重庆, 1922~), 충칭시 출신, 중화미학학회 고문, 해방국립북평예술과에 재학 중이다과학교에서는 서비홍 선생과 동희문 선생을 사사하였다.2013년 베이징대는 '양신하화 품덕상'을 별도로 제정했다.
严 复(1854~1921) 《铜官感旧图》曾国藩故事题跋初稿
图录号: 1373
估价RMB: 30,000-50,000
成交价RMB: 161,000(含佣金)
1373
严 复(1854~1921) 《铜官感旧图》曾国藩故事题跋初稿
纸本 镜片
1911年作
识文:章君曼仙介王书衡出其先德价人先生《铜官感旧图》,属题识于复,复观前后诸公所题咏,于章公此举关系之重,与夫曾文正公异日之所以遇章公者,亦既往复咏叹,各有所明,无取多方骈枝以为之说。顾复所欲言者,窃以为吾国古今人著论,于凡发愤自杀者恒存恕辞,甚者感慕推崇,以为凛然大节之事。虽然,甚非谓也。今夫士固不可以无勇,而所谓勇者,取致命遂志,不为苟免焉耳,非曰断体投臼,自弃其生,遂为勇且义也。夫文正公儒者,其于取义成仁之事讲之必精,独奈何于军事稍稍蹉跌,遂瞀乱偾兴,遽。
钤印:癒野堂(朱)
题跋:严复墨宝。杨辛敬题。钤印:杨辛(朱)
出版:1.《严复家书》P126-127,商务印书馆。
2.《严林心画:严复、林纾遗墨集》P140-143,黄山书社。
著录:3.《严复集》第三册P277-278,中华书局,1986年。
4.《严复年谱》P373、374,孙应祥著,福建人民出版社,2003年。
5.《铜官感旧图题咏册校订》P387,岳麓书社,2010年。
说明:杨辛题跋。
此为严复题《铜官感旧图》初稿二页,围绕曾国藩靖港投水、为幕僚章寿麟(价人)所救事而发,阐发反对自杀、为事业奋斗终生之意,是有关曾国藩、严复志业及《铜官感旧图》的重要历史文献。约作于1911年8月。见载于《严复集》《铜官感旧图题咏册校订》等。
《铜官感旧图题咏册》原件藏于北京图书馆,此稿系市场中仅见的严复《铜官感旧图》题跋。
此稿与刊行本有较多文字差异,系初稿,经多方斟酌、修改后方定稿。如稿中书明跋文为章曼仙所求,出版时改为章寿麟本人所求;稿中“非曰断体投臼”句为定本所无,“独奈何于军事稍稍蹉跌”定本改为“顾乃于军事蹉跌”;又定本“虽有司马迁氏泰山鸿毛之言”等句为此稿所无。
所及王书衡,即王式通。王曾与严复、林纾等共同在《孔教会之请愿书》上署名,有诗作《为伯玉题其尊人几道先生<江亭饯别图>,忆卅年旧事,怆然书此》。
咸丰四年春,曾国藩亲率湘军水师,与太平军战于岳阳、靖港,于铜官渚兵败投水,为幕僚章寿麟所救。后太平天国覆亡,曾氏封侯拜相,部卒皆得置身通显,独章寿麟“浮沉牧令”。光绪三年,章寿麟告老返湘,舟泊铜官,触绪纷来,作《铜官感旧图》,并请众多故旧题辞纪念。此图后来佚失,章子章同、章华(曼仙)请林纾等人补绘,续请名流题辞,装成八册,题为《铜官感旧图题咏册》,于宣统二年石印刊行。题者包括左宗棠等二百余家,皆借铜官旧事发挥,或慨叹世事弄人,或评判历史功过。
严复此稿,系章寿麟次子章华(曼仙)请其为《铜官感旧图》题词。此文论点不为同情章寿麟遭遇,也不在评价曾国藩是否“忘恩负义”,而是评述成败生死之理。严复以为古今对于自杀者多是原谅开脱之辞,甚至“推崇以为凛然大节之事”,“甚非谓也”,认为“所谓勇者,取致命遂志”,“自弃其生”非为“勇且义也”。曾氏“于军事稍稍蹉跌”,便投江自杀为“无德之事”。其全文后言,“邦之殄瘁,其小人既以偷生自娱,其知义之徒相率而轻于死国之事,尚谁望乎!”
YAN FU AUTOGRAPH MANUSCRIPT OF THE INSCRIPTION FOR TONG GUAN GAN JIU TU
Ink on paper, mounted
Dated 1911
Illustrated: 1. Yan Fu's Family Letters, pp. 126-127, The The Commercial Press
2. Yan and Lin's Paintings: A Collection of Yan Fu's and Lin Shu's Legacy, pp. 140-143, Huangshan Book Press
Literature: 3. Collection of Yan Fu's Works, vol. 3, pp. 277-278, Zhonghua Book Company, 1986
4. Chronicle of Yan Fu, pp. 373-374, Fujian People's Publishing House, 2003
5. Revised Inscriptions for Tong Guan Gan Jiu Tu, p. 387, Yuelu Press, 2010
Note: Inscribed by Yang Xin.
30×16.5cm×2
RMB: 30,000-50,000
跋者简介:杨辛(1922~ ),重庆市人,中华美学学会顾问,解放前就读于国立北平艺术专科学校,师从徐悲鸿先生和董希文先生。2013年,北京大学特别设立“杨辛荷花品德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