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44
8월9일[연중 제1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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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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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dkvRTNqK6E
[인천교구 한산동 마르코(만수2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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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나뿐인 우리의 목숨, 대체 무엇을 위해 바칠 것입니까?>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왜 그리 사소한 것에 목숨을 겁니까?” 저도 돌아보니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리도 혈안이 되고 목숨을 걸 듯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 하나뿐인 목숨, 시시한 대상, 스쳐 지나가는 대상,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대상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보다 고결하고, 보다 가치있고, 보다 의미 있는 대상에 목숨을 걸고 올인을 해야 하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 최상의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 안에는 목숨이란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목숨,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칩니다. 다들 목숨은 연명하기 위해 갖은 수모와 고초를 겪으면서도 용하게 견디어 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목숨이라는 것이 또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시편 작가의 표현처럼 우리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순식간에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지만, 3분, 5분 숨 못 쉬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목숨과 관련해서 주어지는 과분한 특전이요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숨은 세상 사람들의 목숨과는 철저하게도 차별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물학적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또 다른 목숨이 시작됩니다. 영원히 지속될 영생을 시작하는 영혼의 목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인지요.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뿐인 우리의 목숨, 대체 무엇을 위해 바칠 것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역설적인 초대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묵상해봐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목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주님 사랑 안에 길이 생명의 호흡을 누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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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태안 내리 살레시오 피정센터 중고등부 겨울신앙학교
일상을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신앙체험!!!
수십 년의 전통과 경험을 자랑하는 살레시오 신앙학교!!
2025년도 겨울신앙학교(피정)를 아래와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1차: 2025년 1월 17일(금)-19일(일)
2차: 2025년 1월 21일(화)-23일(목)
3차: 2025년 2월3일(월)-5일(수)
4차: 2025년 2월7일(금)-9일(일)
5차: 2025년 2월 11일(화)-13일(목)
6차: 2025년 2월15일(토)-17일(월)
-각 차 2박 3일 일정, 각 차별 인원은 60명 선착순
-개인이 아닌 본당별로 접수 받습니다.
-인원에 따라 두 본당, 세 본당이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접수: 2024년 8월 16일부터
-주제와 세부 시간표: 추후 안내
-신청: 010-7368-0624, chleosdb@gmail.com
-부재 시 문자를 남겨 주시면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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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kx3I64Q5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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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많이 낳음이 가장 행복한 투자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인생이 ‘투자’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투자는 이익을 바라고 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그것을 갚아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투자라는 개념이 맞기는 한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달란트의 비유’(마태복음 25:14-30)에서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투자하는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투자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이나 명예, 쾌락 등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남는 게 없습니다. 투자한 것이 회수되는 때는 죽음 이후일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돈을 덜 번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박지형 대표가 위암 복막 전이 4기로 6개월~1년 선고받고 주위에 죽어가는 암환자들을 보며 느낀 것, 곧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도 ‘잊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잊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투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교회를 낳으시고 교회 안에서 당신이 기억되게 하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교회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매 미사 때 기억합니다.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죽음의 고통을 이깁니다. 또한 그렇게 교회를 낳았을 때 영원한 신랑과 같으신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어떤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아들을 살리고 좋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서 아버지는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인생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특별히 최저출산국이고 자녀를 키움이 행복보다는 고통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더 큰 고통은 나를 기억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임을 깨닫게 하도록 우리는 노력할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성녀 지아나 베레타 몰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이탈리아의 소아과 의사입니다. 임신 중에 합병증이 발생하자 그녀는 위험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자녀의 생명을 우선시하기로 했습니다. 지안나의 사심 없는 결정으로 인해 출산 직후 사망하게 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과 희생의 유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2004년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엄마가 생명을 바쳤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투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성인, 성녀입니다.
이레나 센들러(Irena Sendler)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약 2,5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밀수입하여 구한 폴란드의 사회복지사였습니다. 그녀는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중 많은 아이가 비유대인 가정에 맡겨졌습니다. 그녀는 심한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노벨상은 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98세까지 사셨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제가 구한 아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손자와 손녀들까지 저를 찾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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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보 중에 어김없이 보는 것이 있습니다. 동쪽 하늘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볼 수 없지만, 태양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저녁에는 서쪽 하늘로 사라집니다. 제가 있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데, 태양은 이렇게 매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느낍니다. 이렇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이론이 ‘천동설’입니다. 비단 태양뿐만 아니라, 하늘의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입니다. 천문학이 발달하고, 망원경이 생기면서 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동설’의 등장입니다. 학자들은 지구가 시속 1760킬로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하루에 거의 300만 킬로를 움직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느끼지 못하지만 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니 ‘지동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동설은 우리의 감성과 느낌의 영역이고, 지동설은 과학과 학문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지구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신기 할 뿐입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우주 만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빅뱅’으로 어느 순간에 우주가 생겼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옹기장이가 옹기를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하느님을 모른다면, 인간의 존재의미를 모른다면 천동설도, 지동설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예동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태양이 중심도 아니고, 지구가 중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중심으로 우리는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는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예동설을 믿는 우리는 역사를 예수 탄생 이전(Before Christ)과 예수 탄생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합니다. 위령 미사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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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24-28: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강요가 아니고,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선택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목숨을 얻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은 구원과 멸망과 같다.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절)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 파멸을 맞게 되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며 멸망이다.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오리게네스, 마태오 복음 주해 12,26).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줄, 생명 대신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따르는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신다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아드님의 영광이 같다는 것이다. 이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하나의 영광이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듯이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심판과 엄격한 판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8절) 우리는 이제 선택만이 남아있다. 십자가의 선택이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다. 계속되는 자신과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을 끊고, 버리고, 죽이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음을 맛보셨고, 신앙인들에게도 이미 죽음의 맛을 보여주셨다. 말씀에 행동이 따른 것이다.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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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나훔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고들 합니다.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멸망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니네베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기원하고 그 함락을 지나치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첫 부분에서는 니네베의 함락을 “기쁜 소식”이라고, 그 소식을 알려 주는 이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나훔 2,1)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훔서의 첫머리에서는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1,2)이라고 선포합니다. 매우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 52장 7절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평화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은 훨씬 듣기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이 선포되려면 바빌론이 멸망하여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또한 압제자가 몰락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훔서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억압에서 풀려나려면 아시리아가 무너져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의 성읍”(3,1)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기쁜 소식”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훔서의 “기쁜 소식”은 거북하다고 느낀다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아니, 비논리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훔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라 하더라도 그 힘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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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허무한 것들로는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4ㄴ-28)
1) 28절의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은 ‘신자들과 사도들’입니다.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살아 있는 동안에 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이다.”인데, 예수님께서 정말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재림과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든지 때가 되면 재림과 종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 28절의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앞의 10장에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3ㄴㄷ)
이 말씀에서 ‘너희’는 ‘사도들’이고,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는 “이스라엘 민족 모두에게 다 복음을 선포하기도 전에”이고,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는 “나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도 겉으로 보이는 표현 그대로 생각해도 되는 말씀은 아니고,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바탕으로 해서 해석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교회’로,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재림과 종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기도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곧 재림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승리가 이루어지니까 참고 견디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3)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을 고비를 겪은 사람들이 많고, 죽음의 고통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어서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죽음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또 그게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경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고통과 무서움을 생각한다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살아 있는 채로 재림과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해서 맞이하는 사람들보다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재림과 종말의 날은 곧 ‘최후의 심판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4) 예수님께서는 ‘심판’에 대해서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믿기만 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만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마태 7,21), 심판은 ‘행실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행실’은 ‘지금의’ 행실입니다. “전에는 나도 신앙생활을 잘했었다.”라는 말이나, “나중에 잘하겠다.”라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결과’는 사실상 각자 자기 자신이 ‘지금’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기 때문에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항의할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5) 26절의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은,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그것들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세속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것’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실천 등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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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내 뒤를 따르려면>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새로운 제안을 하신다. 이것은 하나의 제안이지 강요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제안이 아니라 강요이고 반드시 실천해야할 의무이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이고 길이다.
즉 "나를 따라야 한다."는 의무이지 "나를 따라도 좋다. 또는 나를 따르면 좋겠다."는 권고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무요,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내 뒤를 따르려는 사람"이란 새로운 출애급을 하려는 사람이다. 즉 자기를 따르는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길을 걸으려는 사람이다. 나 중심으로 하는 삶에서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하고 나는 다만 그분을 따라가는 삶으로 바꾸겠다는 사람이다.
나를 추종하는 삶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삶으로, 나를 섬기는 삶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삶으로 살으려는 사람이다.
내 욕망을 채우는 삶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내 인생에서 예수님을 마치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시는 분"(느헤 9, 19)으로 섬기며 살겠다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 뒤를 따르는 사람"의 삶이란 새로운 출애급이다. 무슨 출애급인가? "나"에서 "예수님"이라는 낮선 곳으로의 출애급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사용했던 모든 생활 필수품들, 집, 일터를 버리고, 모세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따라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갔듯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신앙인들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출애급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출애급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이다.
그럼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급급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찾아다녔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의 것을 앗아왔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신을 내세워야 했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모든 행동들은 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본래의 나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나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 자아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 동안 참 자아로 살지 않고 거짓 자아로 살아왔다. 그래서 점점 더 하느님으로부터 또 참된 자기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렇게 하느님과 참된 자아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는 욕망 즉 거짓 자아를 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거짓 자아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동안 거짓자아인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거짓 자아를 만들어 가는 나의 욕망은 이미 자기 자신과 동일시 되어버렸다. 즉 자기 신체의 일부분 또는 자기 신체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즉 자기 욕망을 실현시켜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매순간 자기의 거짓 욕망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취하라는 말이다.
이미 자기 자신이 노예가 되어 있는 거짓 욕망을 버린다는 것 자체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십자가이다.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는 반드시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나의 십자가를 대신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를 자기 혼자 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까지 홀로 가야 했다면 아마 그들은 거의 대부분 에집트로 돌아갔던지 아니면 광야에서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죽고 외롭고 고통스러워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그들의 십자가를 그들에게 모두 지우지 않으시고 그들의 인도자 모세를 앞 장 서서 그들을 인도하게 하시고 "낮에는 어김없이 구름기둥으로 앞 길을 인도하여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비추어 주셨다."(느헤 9,19)
이처럼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그들에게만 지게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동반해주셨고 거들어 주셨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나의 십자가이지만 나 혼자 그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동반해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주님이 앞장서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항상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점 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 점점 더 이기주의가 된다는 것은 점점 더 욕망이 커지고 따라서 거짓자아가 더 크게 자리잡아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리고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다.
반면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거짓 자아를 버리고 반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의 행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요, 영원히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3, 35. 15, 17)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의 삶을 사는 이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선물을 선물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만이 또한 더 많은 선물을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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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나훔’ 예언자의 이름의 의미는 ‘위로받은 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역할은 이름의 뜻과 달리 ‘위로를 주는 이’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어두운 시대에, 강자의 희생자가 되어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주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 아시리아의 패망, 유다를 향한 위로, 그리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멸망에 대한 묘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지만,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보복하시는 분”(나훔 1,2)이심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미래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안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화답송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는 희생당하는 당신 백성을 대신하여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서 볼 수 있듯 ‘의로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주시는’(마태 5,10 참조) 위로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신에 대한 배척, 수난 그리고 죽음을 앞두시고 적대자들에 대한 보복은 하느님께 맡기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께서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이의 본보기가 되십니다.
따라서 불경한 자들에게는 보복을, 의로운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드러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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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곤경의 날에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근심과 곤경 가운데 더욱더 주님께 다가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그리고 그분께 매달리고 그분께 손을 대었습니다.(루카 6,19 참조)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은 생명을 얻으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아시고 반기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그런데 그분의 말씀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그것을 잃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또 당신의 이런 선택을 씨앗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생명이 죽음에 이르도록 철저히 경멸해야 한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 우리에게는 정말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환난을 이겨 내고 생명을 얻은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12,1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대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이 여전히 많은 신앙인에게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곧바로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걸으셨고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그러고는 부활하실 것이라는 당신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복음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뒤따라 사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부활해야 한다는, 신앙의 여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는데 죽어야 하는가?’ ‘행복을 원하는데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자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며, 희생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이고 선물의 표지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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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의미 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아내와 가족을 잃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지요. 굶주림, 혹독한 추위, 그리고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핍박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 극복의 비결을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합니다.
“어떤 처참한 상황에서도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견딜 수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우리가 겪는 고통이 훨씬 더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불평불만의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에 그냥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이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의 죽음까지도 맞이하셨지요. 이 죽음이 과연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기쁨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만 해서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십자가로 상징되는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을 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피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그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을 떠올려보면 어떻습니까?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가족도 있고, 직장 안에서의 삶도 있고,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는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찾아오는 십자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떠올리며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너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순교자들도 모두 하느님을 위하여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기억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의 목숨만을 유지하려고 비굴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을 지키겠지만, 우리 마음에서 잊히거나 죽은 이들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십자가의 무게를 바라보지 말고,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감사하면서 더 큰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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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허물에 대한 보속을 위해,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등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나의 생각이나 바람을 관철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며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면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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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으로 살겠지만
사람으로 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이를
품음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주린 이를
채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약한 이를
돌봄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버려진 이를
보살핌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없는 이에게
나눔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를
섬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낮은 이를
돋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쓰러진 이를
일으킴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낯선 이를
반김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를
살림으로써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으로 살겠지만
사람으로 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야
참으로 사람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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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자신을 버림, 제 십자가를 짐, 주님을 따름-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스스로 변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지금, 단호해져야 한다.”<다산>
단호히 다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이후 선종하기까지의 삶은 전적으로 깨어 회개와 보속의 마음으로 정진했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마라.”<논어>
공자의 처신도 참으로 단호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예禮’ 대신 ‘길道’이나 ‘진리眞理’를 넣어도 그대로 통한다 싶습니다. 지명만 봐도 유교가 국교였고 산이 많은 나라였던지라, 예禮와 덕德과 산山이 들어가는 지명도 참 많습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 1면에 소개된 교황님이 콜룸부스 기사들에게 주신 절박한 말씀이 모든 세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되는 전쟁이요 참으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성 에디트 슈타인 수녀 만세!”
오늘은 ‘만세7창’에다 한분 추가했습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에는 기념하지 않지만 오늘 8월9일은 성녀 에디트 슈타인 동정 순교자(1891-1942) 축일입니다. 성 베네딕도, 성녀 가타리나, 성녀 비르짓다, 성 치릴로, 성 메토디오와 함께 유럽의 수호성인입니다.
성녀는 교회 역사상 유대인으로서는 처음 성인품에 오른 분으로 가르멜 수도회의 수녀로 1942년 8월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수도명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입니다. 한나 아렌트, 시몬느 베유, 로자의 룩셈부르크와 함께 세계 4대 유대인 여성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1998년 시성 당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순교는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화해의 가교다.”말씀하셨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로 미국과 똑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새삼 우리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마지막 절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 나훔서의 나훔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 역시 역사의 하느님이라는 진리입니다. ‘위로자’ 나훔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구약 성경에는 없습니다. ‘위로자’ 나훔은 참으로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힘으로 지탱해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위안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준 예언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나훔 예언자는 유다에 기쁜 소식과 더불어 악의 제국 아실리아 니네베에는 격렬하게 파멸을 선포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유다 대신 대한민국을 넣어 읽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지금도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어 니네베에 선포되는 불행입니다.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오물 풍선이 떨어지고 날로 추락하는 국격의 작금의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싶어 섬찟한 느낌도 듭니다만, 이도 곧 지나갈 것이니 저력의 대한민국이요, 역사의 하느님은 순교자들의 대한민국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강론 쓰는 도중 고요히 외쳐보는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그 구체적 삶의 방법을 오늘 복음이 보여줍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그대로 바꿔 읽으면 아주 분명해집니다. 목표와 방향이 뚜렷하니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요, 목표이자 방향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저는 감히 비단 그리스도교 신자들뿐 아니라 온인류에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 말씀이라 믿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음으로 제 목숨의 얻는 영생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참삶의 길, 성인의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항구히 열렬히 사랑할 때 자발적 기쁨으로 자신을 버리고, 제 운명의 십자가를, 제 책임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 제 본분을 다하는 구원의 삶입니다. 이렇게 시종여일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할 때 오시는 주님을 두려움없이 기쁨으로 환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앞당겨 맞이하는 오늘 ‘지금’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언제나 깨어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끝으로 늘 새로운 각성覺醒을 주는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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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숨>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목숨’의 의미를 오늘은 새겨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목숨’과 ‘목숨’을 구분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구분이 없을 겁니다.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사실 건강을 잃으면 돈도 소용없고 명예도 소용없는데 목숨을 잃으면 내게는 세상도 하느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치 순위는 목숨이 그리고 건강이 돈보다도 온 세상보다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목숨을 또 나누십니다. 자기 목숨을 따로 떼어 말씀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사실 나만 목숨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 목숨 말고도 수많은 목숨이 있지요.
내 목숨은 수많은 목숨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고, 내 목숨을 포함하여 수많은 목숨은 하느님의 숨에서 나와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창세기 2장은 목숨의 시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the LORD God formed man out of the clay of the ground and
blew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so man became a living being.”
라틴말의 ‘Vita’, 영어의 ‘Life’가 한자어로는 생명(生命)이고 우리말은 목숨이지요. 그런데 우리말 목숨이 아주 영성적입니다.
목과 숨이 붙은 것이 목숨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목에 들락날락하는 숨이 바로 목숨이라는 말이고, 우리의 목에서 숨이 붙어 있지 않고 끊어지면 그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을 숨이 끊어졌다거나 목숨이 끝났다고 하지요.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숨이 자기 숨이거나 공기 흡입일 뿐이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 숨이 실은 하느님의 숨의 흡입이고, 그리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자기 숨이나 공기를 들이키는 숨만 쉬다가 죽으면 아무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해도 그 목숨은 결국 이 세상에서 끝나게 되어 잃게 되지만 하느님의 숨 곧 사랑과 성령의 숨을 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은 잃게 되어도 그 숨만은 영원히 계속 쉬게 되어 죽지 않겠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사랑의 숨’을 처음으로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숨이고 성령의 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상적으로는 사랑을 들이키고 사랑을 내뿜는 것입니다. 하느님/성령을 들이키고 하느님/성령을 내뿜는 것이며, 이렇게 살면 숨 쉬는 것이 그대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숨을 쉼으로써 이 세상에서 생명력과 생기를 지니고 살다가 하느님 사랑 때문이든 이웃 사랑 때문이든 아무튼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할 때가 와 자기 목숨을 바치면 자기 목숨은 잃어도 영원한 생명을 저세상에서 누릴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목숨이 온 세상보다 가치 있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목숨이 자기 목숨보다 가치 있습니다.
이것이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뜻이라고 묵상하고 여러분과 나누는 오늘 저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사랑의 숨을 쉬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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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마태16,24-28)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감'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그 자체가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하면, 예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罪)요, 가장 큰 죄'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느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 '그 심판의 결정적 기준'은 '사랑,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사랑은 죄에서 자유로워진 상태'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님, 치기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는 주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박종현(요한마리아비안네)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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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목숨으로
시작되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목숨 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한
십자가이며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입니다.
소유할 수 없는
목숨이며
대신 지고
갈 수 없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목숨과
십자가를
아우를 수
있는 그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순
없습니다.
사람이 되어
가게 하는
십자가이며
목숨입니다.
목숨에 던져진
대답은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깨닫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목숨임을 알기에
하느님을 향합니다.
목숨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복종하게 되며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목숨이며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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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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