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얘기가 생각난다.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보톡스를 맞아가며 주름을 펴는 것이 아니라 기억 저편에 구겨 넣었던 청춘의 기억을 다시 꺼내 다림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음의 기억을 환기장치로 꺼내자는 데는 공감하나, 주름을 외과적 시술에 의존하지 않되 묵혀뒀던 젊은 날의 기억을 다림질하는 것이라 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주름을 ‘구겨 넣었던 청춘의 기억’이라 한 비유가 가당치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름은 엄연한 늙음의 가시적 현상이다. 다림질로 펼 수 있는 것이 아닌, 쭈글쭈글해진 노화의 징후인데 주름을 다림질한들 무슨 소용인가. 다 부질없는 일, 임시변통이거나 한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개썰매를 몰아 방향을 찾는 이누이트들은 눈의 주름을 보고 길을 찾는다고 한다. 설원을 할퀴면서 휩쓸고 간 바람의 발자국이 주름을 만든다는 것이다. 주름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 경우를 사막이라 가상해 보면 턱도 없는 일이다. 모래바람이 일시 주름을 접었다 삽시간에 지워버릴 테니까.
언덕에 올라 바다를 굽어보니, 파도의 등을 타고 밀려오는 주름들이 수없는 물비늘로 반짝거린다. 마치 바다에 뜬 낮 별들 같다. 물비늘로 주름이 찬연히 빛나는 것은 절묘한 조화다. 거기에 낙조가 다리를 뻗고 내려앉는다면 그 장엄함에 경탄을 자아내게 될 것이다. 일렁이며 물밀어 오는 물결 속으로 스미는 낙조는 또 얼마나 환상적인가.
내 얼굴의 자잘한 주름들이 잠시 외출이라도 한 것일까. 양쪽 볼따구니에 팬 골짝으로 풍덩 투신해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마의 주름은 또렷한 것 같아도 이랑에는 흩고 지우다 아이 적 치기가 얄브스름히 몇 겹 남아 있다. 거울을 보고 있으려면 실실 웃음이 나온다. 주름 속에 잔잔히 골을 파며 다가오는 앳된 시절의 뽀얀 장난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종심에도 얼굴에 주름 하나 없이 밋밋하다면 인생을 제대로 짐 져 오지 못한 사람 같아 허황할 것 같다. 인생에 곁을 내주며 함께 걸어온 바람길이 없다니, 바람에 부대끼며 밀도 밀려왔으면서 길을 내지 않았다니, 하늘을 우러러 살아왔다면 허공으로 난 길이 있을 것을, 한 오라기 그 길이 나 있지 않다니. 더군다나 겹겹이 혹은 더러 굽이굽이 굽이치거나, 얌전히 뻗어 나간 그 올곧고 비좁은 여로가 길 위에 오솔길로 놓여 있지 않다면 그도 허전한 일이 아니랴.
요즘 사람들은 주름을 지우려 무진 애를 쓴다. 흠결을 넘어 흉물로 여기는 것일 게다. 그래서 될 일인가. 사람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있고, 머물렀던 자리가 있고, 흘러왔던 작은 자취가 있다. 그것들이 쌓이고 덮인 누적으로 그려놓은 그림이 주름이다. 그걸 외면하려는 것은 막무가내 한 일이 아닐까 싶다. 늙음에 길항하려는가. 어차피 인생의 계단에 새겨지고 폐쇄회로에 찍힐 것인데.
더욱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개인사의 흐름을 성형의 손을 빌려 뜯어고치려 눈 벌겋게 덤비는 꼴이라니. 자신의 삶이 파 놓은 알락달락한 회로와 애락의 문양을 지우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청맹과니여서일까. 요즘 탤런트들을 보면 본래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별반 없어 보인다. 내 눈길은 착시가 아닌, 아마 정시일 것이다. 많은 시선을 끌어오던 고혹적인 미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변모의 이유는 간단하다. 더 예뻐 보이려는 것, 그것도 칼을 들이대 깎고 다듬는 것이다. 하물며 주름 제거 시술은 기본, 얼굴도, 목덜미도 다림질을 한다. 유심히 보면 볼수록 생판 딴 사람이 돼 있다. 얼굴이 아주 바뀐 수준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구석이 진실 한 조각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인지 헷갈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리 미에 집착한다 해도 이건 아니다 싶다. 성형한 여인에게 느끼는 건 미의 창출이 아니라 가면을 보는 비애다. 그렇게 얻어낸 미모를 얼마나 오랫동안 지닐 수 있는 것인지 답은 보나 마나 한 일이다.
문제가 있다. 나중에 염라대왕 앞에 가면 원본을 대조할 것이란 얘기가 실감 난다. 거기가 어떤 데인가. 그곳일수록 진짜를 확인하려 들 터라 반드시 원본대조 필 서류를 요구할 게 아닌가. 그 먼 길을 갔다 천근같이 팍팍한 다리품 파느라 터벅거리며 허둥대지 않으려면 길을 뜰 때 미리 준비하고 가야 할 판이다. 하긴 이도 뜯어고친 사람이 해결할 일이지 내 소관이 아니다.
주름에도 결이 있다. 어떤 장수 노인은 각질로 씌워진 얼굴에 온통 주름이 날과 씨로 엮여 그물처럼 덮이기도 한다. 팔순에 채 못 미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는 얼굴에 명주의 결 같은 고운 주름을 앉혔던 어른이다. 시골에서 농사에 묻혀 살아도 주름의 결이 고왔다. 선이 선명했던 이마의 주름엔 당신의 풍상이 고스란히 고여 있었고, 입가의 잔주름엔 말수가 적었던 당신의 곧은 성품이 울바자처럼 촘촘히 둘려 있었다.
거울에 나를 비춰 본다. 늙음의 무게와 그늘이 무겁고 깊게 드리워 있다. 좋게 조려 해도 주름으로 분분한 얼굴이다. 앞이 보인다. 내 얼굴의 주름은 불규칙해 몇 년 더 나이를 먹으면 지푸라기 어질러진 시골집 마당처럼 난장을 이룰 것 같다.
언제 들어섰을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귀띔한다. 주름은 삶의 굴곡이 종횡으로 깊고 얕게 파놓은 무늬라 한다. 농사에다 집안 범절이며 크고 작은 상일에 쉬는 날이 없었으면서도 늘 정숙한 면모를 지녔던 어머니. 나도 당신처럼 주름이 고운 얼굴로 늙고 싶다.
얼굴이 나이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지만, 한창 늙음으로 가는 여정인데 주름이 고우면 어떻고 궂으면 어떨 것인가. 허허실실 마음 편케 사는 것이지.
(김길웅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