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원제 : On Dangerou Ground
1951년 미국영화
감독 : 니콜라스 레이
음악 : 버나드 허만
출연 : 로버트 라이언, 아이다 루피노, 워드 본드
찰스 켐퍼, 안소니 로스, 에드 베글리
서머 윌리암스, 클레어 무어
'어둠 속에서'는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1951년 작품이며 필름 느와르 장르입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장르죠. 감독 이야기를 먼저 좀 하면, 개인적으로 니콜라스 레이는 안소니 만과 함께 21세기 들어 국내 시네필들에게 과대평가된 감독이라고 봅니다. 고전영화를 꾸준히 섭렵하지 않거나 책 위주로 공부한 시네필들은 어쩌다 시네마데끄에서 회고전을 하면 그 감독에 대해서 과잉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소니 만과 니콜라스 레이가 그렇죠.
니콜라스 레이는 나름 실력파 감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유없는 반항'이 가장 많이 알려졌고, 그 외에 '북경의 55일'과 '왕중왕'이 유명한 작품입니다. 물론 그 두 작품의 흥행이 안되어 결국 감독의 경력이 끊어졌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작품이지요. 그 전 작품으로 '그들은 밤에 산다' '서부의 유랑자' '자니 기타' '파티 걸' '바렌' 등 제법 괜찮은 영화들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존 포드나 히치콕, 윌리암 와일러, 빌리 와일더 급수까진 아니라도 50년대 할리우드 실력파 감독임은 맞지요. 그렇다고 불멸의 거장까진 아니고. 그 정도 레벨의 감독은 40-50년대에 즐비했습니다.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물입니다. 1시간 20분 정도 되는 짧은 영화에요. 주인공인 짐(로버트 라이언)은 경찰입니다. 좀 거친 경찰이지요. 범인을 검거할 때 폭력을 쓰지요. 범죄자를 상대하면서 거칠어졌고, 심신이 좀 피곤한 상태입니다. 사명감이나 냉철함 보다는 분노와 폭력을 갖고 있지요. 영화가 좀 전개방식이 독특한데 사건위주가 아니라 인물위주입니다. 처음에 동료 경찰이 살해되었고, 그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범인의 끄나풀과 연관된 여인과 끄나풀을 추적하여 잡는 과정이 나와서 동료 경찰 죽인 범인 잡는 이야기 같지만 어느 순간 슬그머니 그 내용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짐이 시골 마을로 잠시 내려가서 그곳에서 벌어진 소녀 살해사건 수사를 돕게 되지요. 뭐 수사랄 것도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범인의 꼬리를 대충 잡은 것 같고 분노에 찬 소녀의 아버지(워드 본드)는 마을 사람들을 규합해서 총을 들고 범인을 쫓죠. 짐은 슬쩍 거기에 합류한거지 뭔 수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페이크 장면으로 짐이 범인을 목격한 둘째 딸에게 질문을 던지며 묻는 장면이 나올 뿐입니다.
자, 그럼 대체 타이틀 맨 앞에 등장한 아이다 루피노는 언제 나올까요? 영화가 절반 딱 지난 다음에야 등장하더군요. 영화 전개방식이 독특하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것 때문인데 사실 도시에서 벌어진 동료경찰 살해사건은 별 중요한 내용이 아닙니다. 짐이 시골로 와서 눈 먼 여인 메리(아이다 루피노)를 만나서 겪는 내용이 주요 내용인데 그럼 7 : 3 정도로 비중을 할애해야 하는데 별 중요하지 않은 내용으로 절반을 끌고 나간 것이니까요. 이런 면에서 감독의 연출묘미가 아쉽다는 겁니다. 일급 감독이면 적절히 시나리오를 활용하여 조정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에 헛점이 많습니다. 우선 범인은 왜 빨리 피신처로 오지 않앗을까요? 피해자 소녀의 아버지가 범인의 얼굴도 모르는데 빨리 피신처에 와서 옷도 갈아입고 해야지 왜 숨어 있을까요? 그리고 시각 장애인 여인이 마을에 있다면 소문이 나고 알아야 하는데 피해자의 아버지는 전혀 모르고 있고, 걸어가기에는 좀 먼 거리였긴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도 좀 구성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동료 경찰관 살해사건에 대한 이야기처럼 흘러가다가 시골 마을 소녀 살해사건으로 바뀌다가 다시 짐과 메리 두 사람간의 로맨스 처럼 흘러가니까요. 이런 저런 것 별려 놓고 억지로 로맨스 영화로 마무리한 느낌입니다. 처음에 전개되는 동료 경찰 살해 사건 이야기는 애초에 떡밥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무성의하게 전개하는 느낌이고요. 대체 어떤 단서로 어떻게 찾아가서 이렇게 쉽게 끄나풀을 잡아 족치는지.
치밀한 추리물이나 경찰 드라마로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다만 표정 자체가 만사 피곤해 보이는 전형인 로버트 라이언이 연기하는 경찰이 많이 어울립니다. 로버트 라이언은 주연, 조연 가리지 않고 많이 등장하는 배우인데 주연이 좀 더 많지요. 이 영화에서는 사명감 보다는 분노와 피로감이 쌓인 경찰이었지만 메리를 만나고 비로소 인간다운 점이 드러나는 뭐 그런 역할이랄까요.
아이다 루피노 이야기를 한다면 시각장애인 연기를 이렇게 잘한 배우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대충 감 떨어지는 관객이라도 그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판단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저만해도 짐이나 소녀 아버지보다 훨씬 빨리 알았으니까요. 오히려 그 두 사람이 너무 늦게 알게되는 것이 답답할 지경이지요. 아이다 루피노의 표정, 움직임 등은 매우 좋은 연기였습니다. 캐스팅도 잘 한 것 같습니다. 강한 듯 하면서도 연약한, 냉정한 듯 하면서도 여린, 이런 캐릭터로 아이다 루피노 같은 마스크가 딱 어울리니까요. 20대 시절 지나치게 고운 인형같은 외모가 오히려 차가움을 내포했는데 그런 무표정한 차가움과 도도함속에 감추어진 가녀림, 연약함은 이런 역할에 잘 어울렸지요. 사실상 조연인데 이름이 로버트 라이언보다 왼쪽에 나올 정도면 그 당시 이 배우의 위상을 알 수 있지요. 로버트 라이언도 제법 유명 배우지만 아이다 루피노의 위상이 더 높았던 것이지요. 우리나라에 덜 알려졌을 뿐.
존 웨인 이나 헨리 폰다 출연작에 주로 조연으로 많이 나온 배우 워드 본드가 딸을 잃고 분노에 차서 범인을 직접 처단하려는 아버지로 등장합니다. 등장 빈도는 아이다 루피노 만큼 높지요.
필름 느와르 영화들이 워낙 우수한 수작들이 즐비해서 이 영화는 수작 범주에 들어갈만 하지는 않습니다. 각본이나 스토리 전개는 좀 허술한 듯 했는데 배우의 캐릭터나 촬영은 꽤 잘한 영화입니다. 아, 그리고 버나드 허만의 음악도 유효적절히 좋은 효과를 냅니다 특히 초반 타이틀에 나올때 분위기가 잘 잡히고. 그렇다고 '말타의 매' '이중배상'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빅 슬립' '악의 손길' '상하이에서 온 여인' '길다' '사냥꾼의 밤' '애수의 호수' '건 크레이지' '창속의 여인' '살인자' 이런 수작들이 즐비한 필름 느와르 장르에서 상위에 꼽히긴 어려운 작품이지요. 그래도 꽤 볼만한 작품입니다. 니콜라스 레이는 제작비 쳐들은 후기작보다는 이런 초기작이 좀 더 나으니까요.
물론 이게 온전히 니콜라스 레이 연출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몸이 안 좋아서 아이다 루피노가 연출을 일부 하기도 했다니까요. 정확히 어느 부분인지는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아이다 루피노가 등장하는 후반부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이 영화는 짐의 캐릭터를 갖고 만든 두 편의 독립적 영화를 합친것에 가깝거든요. 도시사건과 시골사건은 별개의 건이니까요. 전반부의 도시사건은 다소 진부하고 무성의한 듯 느껴지고 후반부 시골마을 사건은 꽤 긴박감있게 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후반부쪽이 아이다 루피노 연출로 '의심' 됩니다. 그녀는 상당한 연출감각이 있는 감독이기도 하니까요.
짐 캐릭터를 가진 두 편의 영화를 합쳤다고는 했지만 사실 짐 캐릭터도 완전히 다릅니다. 전반부에는 더티 해리고 후반부에는 제법 감정을 가진 인간이니까요. 그런 전환의 고리는 아이다 루피노가 연기한 메리라는 여인이었고요. 그리고 엔딩은 너무 상투적이 되버렸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의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RKO 사장 하워드 휴즈의 입김과 간섭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영화의 분량 배분이나 스토리 전개, 엔딩 등에 대해서 니콜라스 레이에게 뭐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독특하게도 도시를 무대로 한 고루하고 무성의한 형사드라마와 시골을 무대로 한 인간적이고 긴박감있고 깊이와 서스펜스도 있는 휴먼 범죄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영화지요. 아이다 루피노와 워드 본드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는 것이죠.
ps1 : 저는 시각장애인의 집에는 손 발에 걸리거나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깨끗히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소품, 도구들이 많아야 하겠더군요. 만질 물건이 많아야 위치나 방향 등을 알 수 있으니까요. 즉 아이다 루피노의 연기가 그만큼 남달랐다는 겁니다. 시각장애인 나오는 영화가 여럿 있었음에도.
ps2 : 도시의 경찰이 어쩌다 시골에 내려가서 그곳의 한 여인과 어떤 인연을 맺는다....'위트니스'가 이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요?
ps3 : 보통 50년대 당시 자동차 실내 장면에서 창 밖의 배경은 합성을 하고 가짜 운전을 했지만 이 영화에서 시골에서의 운전은 직접 실제상황을 연출한 것 같습니다. 시골의 비포장 도로에서의 심한 흔들림이 굉장히 생생하게 촬영되었으니. 여러가지 인상적 촬영과 화면구도 등이 좋았던 영화입니다.
[출처] 어둠 속에서(On Dangerous Ground, 51년)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고전 범죄물|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