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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42. 주장자를 보면 주장자라 할 뿐이다.
[스님께서 하루는 주장자를 세우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하시면서 법을 보이셨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장자에 대하여 주장자는 어떤 의미로 선승들이 사용하였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지혜의 지팡이 석장(錫杖), 주장자(拄杖子), 금강저(金剛杵) 등이 있는데 이는 스님이 길을 나설 때 사용하는 지팡이로, 스님이 들고 다닐 수 있게 허용된 18가지 물건 중 하나이다. 요즘처럼 교통과 문물이 발달한 때에 석장을 포함한 비구 18물을 들고 다니는 스님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실 석장을 지니고 다니는 스님들이 아직도 계신다면 석장이 낯선 존재가 아닌 굉장히 친근한 존재였을 텐데, 이제는 무협게임의 아이템이나 중국 영화 혹은 지장보살의 지물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석장은 한국·중국·일본 삼국에서 모두 사용되었으나 중국도 요즘은 거의 사라졌고 일본만 예불이나 의식 때 사용되고 있다.
석장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칵카라 (khakkhara)라고 하며 유성장(有聲杖), 명장(鳴杖), 지장(智杖), 덕장(德杖), 금주석이라고도 한다. 보통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6개의 고리가 달려있어 육환장(六環杖)이라고 하며, 고리의 개수에 따라 4환장, 9환장, 12환장으로 부른다. 서유기의 삼장법사가 들고 다니던 것은 9환장과 비슷하며, 덕이 높은 고승들이 사용하였던 것이다.
석장은 장두부(杖頭部:머리 부분)와 병부(柄部:자루 부분)로 나누어진다. 장두부는 하트모양의 큰 고리로 구리 혹은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병부는 나무를 주로 쓰는데 철제도 있으며 머리부분에 긴 나무를 끼어 사용하였다. 장두부 정상 또는 고리의 안에 보주(寶珠:보배로운 구슬)나 보탑(寶塔:보배로 장식한 탑)·불상 등을 조각하고, 장두부 좌우에 앞서 말한 4개, 6개, 9개 혹은 12개의 작은 고리를 매달아 짚을 때마다 소리가 울리게 되어있다.
참고로 비구 18물은 다음과 같다.
*비구 18물 ①양지: 이빨을 청결히 하기 위한 버드나무 ②조두: 대두, 소두의 분말로 손을 씻는 비누로 쓴다 ③삼의(三衣): 법복 ④병 ⑤발우 ⑥좌구: 앉고 누울 때 까는 천 ⑦석장 ⑧향로 ⑨녹수낭: 물을 마실 때 수중벌레들의 목숨을 보호하고, 자신의 위생을 지키기 위하여 물을 거르는 천으로 된 주머니 ⑩수건 ⑪도자: 손칼 ⑫화수(火燧): 불을 피우는 도구 ⑬섭자(子): 콧수염을 빼는 족집게 ⑭승상(繩床): 노끈 등으로 만든 상 ⑮경 ⑯율 ⑰ ⑱
석장을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스님이 산속을 거닐 때에는 석장을 짚으며 있을지 모르는 독사와 해충과 같은 생명들에게 ‘내가 지나가니 놀라지 말아라’라며 살생을 피하기 위함이고, 민가에서는 염불을 하며 탁발을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은 주장자(拄杖子)를 법의 상징으로써 드는 경우 법을 설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는 많은 이들이 분별심을 내지 않도록 법을 전하는 용도로 쓰입니다.
○ 금강저(金剛杵, Vajra)
원래 도리천의 주인인 제석천(인드라)의 무기이다. 금강저의 원어는 바즈라(Vajra)로 번개나 벼락을 의미한다. 제석천은 불법에 귀의한 후에 부처님을 수호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어 부처님의 뒤에서 금강저를 들고 호위한다. 또한 제석천뿐만 아니라 금강역사도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한다. <열반경>에는 금강역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금강저로 모든 악마를 티끌같이 쳐부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 나라의 신중(神衆)탱화에서는 동진(童眞)보살이 반드시 금강저를 들고 있다.
금강저는 또한 여래의 금강과 같은 지혜로써 능히 마음속에 깃든 어리석은 망상들을 파멸시키는 보리심을 상징한다. 주로 밀교에서 금강저를 특히 중요시하여 의식과 수행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때 금강저는 금강령과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천태종의 종기에도 이 금강저가 나타나 있습니다.
금강저는 금. 은. 동. 철 등으로 만들어지며 불교의 금속공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형태는 손잡이 양쪽이 뾰족한 끗을 가졌다. 모양에 따라 뾰족한 끗이 하나인 것은 독고(獨孤), 2.3.4.5.9 갈래로 갈라진 것은 3고저. 4고저. 5고저. 9고저라 한다. 최초에는 그 형태가 무기형으로 뾰족하고 예리했으나 불구로 사용되면서 끝의 가락이 모아지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들중 독고가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운문스님께서 하루는 주장자를 세우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어록(禪語綠)은 무엇입니까? 선사(禪師)들이 선기방편(禪機方便)으로 말씀한 것을 기록한 것입이다.
여기서 운문선사는 체가되고 주장자는 용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체용(體用)의 도리(道理)인 것입니다.
체용의 도리는 인연법(因緣法)이 되고 이는 또한 인과법(因果法)이며 연기법(緣起法)이며 주객(主客), 주빈(主賓), 자타(自他), 이것과 저것, 나와 너, 너와 나 등 어떻한 말도 상대가 없으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말이나 표현방법은 다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인 것입니다.
상대성은 이분법(二分法) 또는 차별법(差別法)이며 말을 하고 글로쓰고 행동하는 것도 이것을 나타내려면 차별법이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차별상을 드러냄이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입니다.
불경에도 드러냄의 현교와 드리내지 않음의 밀교가 있듯이 이것이 현교는 부처님의 경전을 중심으로 이것을 마치 법이다하고 하는 것은 행위와 의식과 형상적으로 행하는 불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전만이 불교라면 경전되로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경전되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경전은 형이상학적으로 진리적 측면에서 쓰여져 있습니다.
그럼 경전자체가 진리인가라는 물음에는 그렇다 할 수 없습니다.
세상사 모든 종교는 다 진리(眞理)를 표방합니다.
그러나 진리(眞理)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드러난 것은 하나의 현상(現相)일 뿐입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왜 진리라 하는가? 인간사에서 이것이 법이다라고 하는 것은 다 지나간 기억이고 지나간 행위와 말과 명색(名色)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그 드러남의 실체(實體)가 영원히 있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성주개공(成住皆空)으로 변화여 갑니다. 그럼 영원한 것은 무엇이냐 이것을 진여(眞如)라는 것입니다.
진여는 진실여상(眞實如常)한 것이라는 이름이지만 이것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드란 말입니다. 그럼 변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형상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럼 형상이 바뀌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진여(眞如)가 있느냐? 있다는 것입니다.
형상이 없지만 살아 움직이는 한 물건이 있었으니 이것이 무엇일까? 시십마(是什摩) 즉 이 뭣 꼬~~~?인 것입니다. 이것을 방편을 보여줬어 납승들이 돈오돈수(頓悟頓修)할 수 있도록 선기방편을 베푸는 것이 선어록이요 선기방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주장자를 세우면서 이렇게 말로써 방편을 베풀고 있습니다.
["교학(敎學)에서라면 범부(凡夫)는 이 주장자를 실제로 있다고 보고 2승(二乘)은 없다고 부정한다. 또 연각(緣覺)은 헛것일 따름이라 하고 보살은 그 자체란 원래 공(空)한 것이라 할 것이다.]
라고 향상일구(向上一句)를 던지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까?
나누어 “교학(敎學)에서라면 범(凡夫)는 이 주장자를 실제로 있다고 보고”라고 하시는 것은 주장자라는 것은 이름인 것입니다.
그럼 주장자라는 것이 실체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장자도 선사라면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주장자 중에 어느 것이 주장자 일까요? 형상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자질도 다르고 깍아서 만들다 보니 다 다름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어라 할까? 선사들이 집고 다니는 지팡이를 주장자(拄杖子)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붙여진 이름을 명색(名色)이라 합니다. 그 별의별로 다른 지팡이를 그냥 주장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 실체라고 할 수 없는데도 그렇게 훈습된 이름을 주장자로 알아차려 주장자로 본다는 것이니 보이는 데로 생각을 일으키지만 범부라고 한 것은 일반 불교를 모르는 그리고 수행을 해 보지 않는 사람은 대중들이 말하고 보고 듣는 견문각지(見聞覺知) 드대로를 받아 들여 주장자가 있다라고 한다는 것은 “있다”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장자가 아닙니다 굳이 말을 하려면 지금 여기서 내가 보기로는 나무로 깍아 만든 구부정한 지팡이 같습니다라고 한다면 근사치에는 가지만 이것에 붙여진 명색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고 “2승(二乘)은 없다고 부정한다.”라고 하신 것은 2승(二乘)이란 학문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배운 내용을 가지고 들어서 훈습도니 조작된 마음으로 이것을 사구백비(四句百非)로 받아 들여 무조건 백가지로 부정하는 습성이 생긴 수행자를 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어라 하든 일단 부정해 버립니다.
즉 일체개공(一切皆空)이란 편견에 빠져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작금의 선사들도 다 이 편견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공(空)을 투득했다. 무(無)자 화두를 투득했다. 하면서 다 없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모든 것은 그 주도 없고 용도 없다. 자성도 없고 주관도 없고 세상 모든 것은 텅빈 공이다라고 하면서 이것을 실증한다고 양자이론까지 들먹이면서 다 색즉시공이교 공적시색이라고 설법하고 방편이라면 다 부정해 버리는 편견(偏見)이요 조작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마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2승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은 양변을 벗어난 해탈이 아니라 한 쪽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사구를 마치 진리인줄 알고 이중에서 없다와 본래부터 무일물이다 하여 양변 중에서 한 쪽으로 치우친 편견으로 깨달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독선이고 왜곡된 전형적인 이슬람교같은 극단으로 치우친 독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이슬람교의 극단주위로 자기들의 중장이 마치 진리이며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다 죽여 없에야 한다고 하여 전세계를 향햐여
태러와 암살과 폭동과 폭압으로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종교 제일주위에 취하여 이렇게 전쟁도 불사하면서 내세우는 잘못된 종교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이비라는 종교 집단들고 다 편견에 집착하여 독재적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집단들이 수도없이 생겨 나는 것은 이른 편견에 집착하는 인간들의 근본 욕망을 채워 준다는 그릇된 사고와 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연각(緣覺)은 헛것일 따름이라 하고”라고 하신 것은 삼승이라고 할 때 성문 연각 보살의 행리처를 말하는되 여기서 연각이란 선지식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 그렇구나 하고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바로 받아 들이면 전혀 마구니가 되어 버린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화타에 떨어집니다.
왜 그런가 선사들이 처음으로 화두같은 말을 하는 것은 전부 뒤집힌 전도몽상(轉倒夢想)인 뒤집히고 꿈을 꾸듯한 마음을 그것이 아니다 하고 하여 상대성원리에서 역순이며 뒤집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받아 들이면 전부 마구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럼 선사들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안목(眼目)입니다. 왜 저른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가 이것은 역순경계로 나에게 의심이 가게 만드는 말이다라고 알아차리고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전도 몽상을 바로 뒤집어 반대편의 사상과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이 양변을 벗어나는 향상일구를 찾아 내어야만 바른 중도정견의 안목있는 납자인 것입니다.
사구에서 본다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는 안목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양변이 회통하여 차별심자체가 잘 못되어 있음으로 이것과 저것이 하나인 것이라는 불이법(不異法)을 깨달아야 만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은 그 자체란 원래 공(空)한 것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보살은 부동지(不動地)인 보살을 말하는 것이니 보살은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집착하거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부동지임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달았음으로 말이나 행동이나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안심입명의 단계이며 모든 것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그 자체가 변화하는 한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 하여 본래부터 색도 공이요 공도 공이니 모든 것은 다 그 실체가 없음을 알아 현혹되거나 변하지 않는 마음자리에 임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삼승사과(三乘四果)로 대비하여 들여 주시고는 말후구를 날립니다.
[납승은 주장자를 보면 주장자라 할 뿐이다.
가면 갈 뿐이고 앉으면 앉을 뿐이라 도대체 옴짝달싹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위에서 향상일구는 삼승인 들의 법을 받아 들이는 형태를 말씀해 놓으시고는 이제 “납승은 주장자를 보면 주장자라 할 뿐이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들은 어떻게 받아 들입니까?
이 말씀은 양변을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직심(直心)으로 바로 가리켜 주신 것입니다.
납승이 항상 결론은 “모든 법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이라고 하고 있듯이 이 말씀은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란 불교의 초고 최상의 말후구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형상을 드러낸 주장자는 있는 그대로가 진실여상한 주장자가 맞습니다. 여기에 자기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주장자 일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것입니다.
그러니 “가면 갈 뿐이고 앉으면 앉을 뿐이라 도대체 옴짝달싹 못한다”라고 하시어 “가면 갈 뿐이고”라고 하신 것은 가면은 가는 그대로가 지실여상한 진상이라는 것이고 “앉으면 앉을 뿐”이라는 말도 앉으면 앉는 그대로가 진실여상한 진상일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찰나간에 보이면 보이는 그대로 일 뿐이라는 말로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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