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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옥나무도서관(The Gwanok Namas Library) 원문보기 글쓴이: 거북두더지
정처 없는 나그네의 가난한 산책
⎈ 기상청은 폭염주의보를 내면서 외출을 삼가라고 하지만 풀이 우거져 보이지 않는 길을 밟으며 천천히 난봉산을 오르다가 약수터에서 발길을 돌린다. 구름이 그늘을 드리우자 또렷하게 빛나던 나무그늘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렇다. 빛은 빛을 삼키고 어둠은 어둠을 삼킨다. 빛이 어둠을 삼키거나 어둠이 빛을 삼키거나, 그런 경우는 없다. (2019. 8. 2)
⎈ 노리치의 줄리안 일독을 마친다. 책으로 나오면 많은 사람이 읽고 위안을 받겠다. 토요명상. 둥글게 앉아있는 모습에서 까닭 모를 고마움이 느껴진다. (2019. 8. 3)
⎈ 서울에서 소록도 다녀가는 길에 누가 들린다고, 11시에 같이 점심 먹기로 했다고, 그래서 조금 서둘러 아홉시에 출발, 난봉산 약수터로 간다. 약수터 걸상에 앉아있는데 저만큼 뱀 한 마리 기어간다. 몸이 먼저 흠칫 놀랐지만 곧 진정시키고 찬찬히 바라보자니 빠르게 움직이던 뱀도 제 박자로 돌아가 느긋이 기어간다. 검정색과 흰색이 번갈아 온몸을 얼룩지운 반 미터 가량의 살모사. 정삼각형 머리를 꼿꼿이 앞세우고 길을 건너 개울로 내려간다. 태도가 우아하고 오만하다. 아름답다는 말이 속에서 한참을 굼틀거린다. (2019. 8. 4)
⎈ 남산 산책길에 등산객 두 사람을 만난다. 이 화창한 날 숲길을 걸으면서 왜 방독면 같은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마스크를 쓰지 말라고 말하는 건 관두고 마스크를 왜 쓰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누구한테는 없는 ‘마스크 쓸 이유’가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그들은 누가 뭐래도 마스크를 쓸 수 있고 써야 하는 거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서 십자가 재목으로 자른 나뭇가지 다듬는데 어느새 햇볕이 어깨를 덮는다. 잠간 사이에 해가 자리를 옮겼나? 해는 붙박이별이라 그럴 리 없다. 그러면 그늘이 자리를 옮긴 건가? 역시 아니다. 실재하지도 않는 그늘이 어디에서 어디로 자리를 옮긴단 말인가? 실은 사람이 자리를 옮긴 거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지구별 때문에 사람이 저도 모르게 벤치와 함께 자리를 옮긴 거다. 옳다. 모든 문제와 모든 답이 결국은 저한테 있는 거다. 제가 문제고 제가 답이다. (2019. 8. 5)
⎈ 새벽꿈에 안병길 목사가 단소와 평조단소를 한 입으로 부는데 소리의 하모니가 절묘하다. 저쪽에서 일부(一夫)가 상아로 만들었다는 단소를 분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황홀한 천상의 음악이다. 안병길 아닌 임의진 목사가 연주를 마치고 단소들을 거두며 “관옥, 자네 공이 크구먼. 한때 단소를 많이 만들어 여기저기 나눠주었잖아?” 하면서 말을 놓는다. 그런데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잠간 멈칫했지만 맞아, 우리 모두 한 터울이지, 한님한테는 손자가 없으니까, 생각에 오히려 속이 편안해진다. 깨어나면서 상상해본다. 소금(素琴) 선생에게 관옥이 말하는 거다, “동식이, 그동안 수고 많았다. 큰형님이 기뻐하실 거야.” 아,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를 ‘누나’라고 부르던 날들이 관옥에게도 있었지. (2019. 8. 6)
⎈ 땡볕이다. 이런 날씨에 산책은 무리겠다 싶어 종일 집안에 머문다. 덕분에 번역 좀 한다. “기도는 구걸이 아니다. 영혼의 갈망이다. 날마다 자신의 나약함을 시인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가슴 없는 말보다 말 없는 가슴으로 하는 것이 더 낫다.” ―간디. (2019. 8. 7)
⎈ 새벽에 잠간 깨었다가 다시 잠들어 누구에겐가 말을 한다. ―잘 보시게. 자네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네는 아닐세. 자네 맹장이나 손발이 곧 자네는 아니잖은가? 자네 아닌 것들의 총합이 곧 자네인 거라. 그리고 자네 밖에도 자네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자, 이래도 자네가 어디 따로 있다고 우길 텐가? 이렇게 말하는데, ‘자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말하는 ‘나’도 보이지 않는다. 깨어나는 순간, 누가 속삭인다, 보았지? 그게 너다! 글쎄다, 누가 무엇을 보았다는 건가? 음, 내가 누군지 더 묻지 말자. ‘나’라는 물건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진실만 속에 간직하고서 남은 날들을 살아보는 거다. 누가?
오랜만에 숨결의 지시를 좇아 난봉산성을 오른다. 빛을 등지고 걸을 때는 또렷이 앞장서던 그림자가 짙은 녹음에 들어서자 간데없이 사라진다. 어두운 제 그늘이 보기 싫으면 두 가지 방법이 있겠다. 제 그늘보다 더 어두운 그늘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가던 길 돌이켜 빛을 안고 가든지. 다람쥐 두 마리가 하도 잽싸게 돌아다녀 사람 솜씨로는 도저히 붙잡지 못하겠다. 생명도 저렇지 않을까?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려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 아닐까? 산길 내려오는 여인 배낭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라진 라디오 소리가 속삭여 말한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잠시 있는 척 시늉하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세상의 소리다. 염려마라. 지구는 갈데없이 고요한 떠돌이별이다. (2019. 8. 8)
⎈ 삼거리에서는 왼쪽 길, 네거리에서는 직진, 오거리 이상에서는 첫 번째 오른쪽 길, 막다른 길에서는 돌아서고, 집으로 오는 길은 가장 빠른 직선 코스. 이런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대문을 나선다. 돌고 돌아 봉화산 아래 조곡동 467번지 앞에서 귀가 길에 오른다. 누가 봐도 분명한 길이 있지만 때로는 길에 대한, 이 길이 삼거리인지 사거리인지,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 해석은 어디까지나 본인 몫이다. 사람이 자기 인생의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오전 인생에서는 해석하고 선택할 권리와 이유가 있지만, 있어야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오후 인생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빠른 외길이다. 해석하고 선택할 여지도 없고 이유도 없다. 지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직진한다. 어디로 흘러가는 길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굽이쳐 흘러도 집으로 가는 길은, 꿀을 딴 벌처럼, 직선 코스다.
의료원 로터리 앞 건물에서 배가 왕산만큼 부른 산모가 오리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다. 무조건 존경스럽다. 모든 여자가, 아이를 생산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간디가 말했다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기를 돌보지 않는 섬김의 정신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남자는 결코 여자에 버금갈 수 없다.” 완전 동감이다. (2019. 8. 9)
⎈ 9학년 아이들 순례 떠나는 아침. 부모와 교사들이 광양 터미널로 배웅하러 나왔다. 흐뭇한 정경이다. 하나씩 포옹하며 한님과 더 가까워져서 돌아오라고, 현빈에게는 자네가 앞에서 이끄는 선행자이기 전에 그분 뒤를 따르는 추종자임을 잊지 말라고, 모든 상황을 한님과 더 가까이 소통할 기회로 삼으라고, 새삼스레 일러준다. 잘들 다녀오시라. 관용 장로 학교에 온 지 백일 되었다며, 정희 장로가 순례 떠나는 아이들에게 떡을 돌린다. (2019. 8. 10)
⎈ 북산(北山) 49재에 후배들이 만들어 세웠다는 묘비명을 사진으로 본다. “영원한 자유인 북산 최완택 목사 운운…” 아무래도 죽기 전에 묘비명 한 줄, 남은 사람들이 괘념하거나 말거나, 장난삼아 스스로 적어두어야겠다. “아무개 그림자 마지막 머문 자리. 의미 없음. 쿨하게 돌아서서 당신 길 가시라.” (2019. 8. 11)
⎈ 효선이 두더지 만날 일이 있어 학교 가는 길에 동승, 오늘 산책코스를 앵무산으로 정한다. 봉두 마을로 입산하여 수없이 많은 거미집들을 무단 철거하며 올라간다. 미안하다. 앵무산 정상에서 양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여수 앞바다와 광양만 풍경이 근사하다. 내려오는 길에 몸이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무엇이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했나, 내려다보니 발길에 차인 마른 밤송이가 저만큼 굴러가는 중이다. 머리보다 빠른 게 몸이다. 몸을 우상화할 건 없지만 잘 대접해야 한다. 몸을 우습게 보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다. 10시에 출발, 오후 3시에 해창 마을로 하산. 제법 먼 길이다. (2019. 8. 13)
⎈ 동천 개울 따라 걷자니 비둘기 두 마리 제 곁으로 사람이 지나가는데 거들떠도 안 보고 꼼짝 없이 앉아 있다. 아무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 같다. 저마다 너무 바빠서 또는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아무의 초라한 슬픔 따위 안중에도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당신’을 만나 눈길을 주고받고 말도 나누고 손까지 잡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인연이란 말인가?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죽도공원이다. 집에서 죽도공원까지가 이토록 가까웠던가? 알겠다. 길의 멀고 가까움이 길이 아니라 길가는 사람한테 있어서, 느긋하면 가깝고 서두르면 먼 것을. 봉화산 정상을 바로 아래로 비껴 망북 약수터까지 걷는다. 길바닥에서 썩고 있는 십자가용 나뭇가지 몇 개 주워온다. 보물을 찾은 기분이다. (2019. 8. 14)
⎈ 어제 효선이 승용차로 서울 가면서 자기와 약속했단다. 두리번거리지 말자, 지나간 일 자꾸 생각하지 말자, 오지 않은 일 앞당겨 생각하지 말자, 다만 지금 여기에 충실하자. 반가운 마음으로 박수쳐준다. 제발 약속이 지켜지기를. 천안 주복교회 서 목사가 오겠다는 연락이 있어 아침 산책 코스를 간단하게 난봉산 약수터로 잡는다. 말 그대로, 두리번거리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면서 천천히 걷자니 벌써 약수터다. 땅거죽으로 나온 나무뿌리들 가운데 목걸이 십자가로 부활시킬만한 것 두 토막 잘라 온다. 잘 생겼다. 오후 3시, 주복교회 서 목사 내외 다녀간다. 노리치의 줄리안을 천안 ‘케노시스 수도원’에서 출판하기로 약속하다.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바꿔도 무방하다고 말해줌. (2019. 8. 16)
⎈ 남산 산책. 갑자기 풀냄새가 진동한다. 누가 방금 예초기를 돌렸나보다. 죽으면서 향기를 뿜는 게 풀이구나. 아무는 죽으면서 무슨 냄새를 풍길까? 고민할 것 없다. 같은 냄새가 누구에게는 향기롭고 누구에게는 역겨운 법. 그러니 좋은 냄새를 풍기려고 따로 애쓸 것 없다. 다만, 이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 이게 예수의 제자로서 할 짓인가? 이 물음을 언제나 앞세우고 살아지는 대로 사는 거다. 늙은 여자와 엇갈려 지나치는데 고개 숙여 인사하니 자기도 뭐라고 한다. 짐작컨대, 잘 다녀가라는 것 같다. 큰소리로 대꾸한다. “예.” 그러는데 누가 묻는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건이든 어떤 상황이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예”라 대꾸하는 하늘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답한다, 시방 그런 사람 되는 길을 잘 가고 있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만큼은 분명하고 확실하오이다.
토요명상. 부모 배움에 온 식구들이 도서관을 그들먹하게 메웠다. 모든 경험을 저마다 자기 성숙의 도구로 삼자고, 간곡한 호소가 절로 나온다. 듬직한 농사꾼 김주광이 햇사과 한 상자 맛보시라며 건네준다. 효선이 밤늦게 서울에서 내려온다. 한 순간도 졸지 않고 잘 왔다고, 왜 길을 도(道)라고 하는지 알겠다고, 알고 보니 길에 도가 있더라고. (2019. 8. 17)
⎈ 오랜만에 국사봉을 향한다. 효선이 할인 가게에서 샀다는 여름철 운동화를 신고 나서니 발이 가볍다. 필시 간밤에 멧돼지가 파헤쳐놓았을 구덩이에서 용케 돼지 밥 안 되고 살아남은 지렁이 한 마리 길바닥 땡볕 위에 널브러져 있다. 건드려본다. 아직 죽지 않았다. 손으로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죽이지 말라고 아우성이다. 무너진 구덩이에 던져주는데, 굼틀거리며 축축한 흙속으로 파고드는 지렁이한테서, 휴, 살았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것 같다. 사람도 죽을 때 저러지 않을까?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눈 감다가 순간, 어? 나 살았네? 휴… 국사봉 밑에서 임도 따라 범골로 내려온다. 순천경찰서까지 시멘트 포장된 길을 3킬로 넘게 걷자니 발이 힘들다고 언구럭이다. 강원도 임계에서는 임도가 시멘트를 뒤집어쓰지 않았는데 순천은 그게 아니다. 비포장에 견주어 포장이 훨씬 길다. (2019. 8. 19)
⎈ 슬기 소리가 아민이네 식구와 함께 휴가로 내려온다. 고맙고 반갑다. (2019. 8. 20)
⎈ 새벽꿈. 초록색 음경(陰莖)들이, 길고 굵고 짧고 가늘고 한 각종 음경들이, 관옥의 아랫도리에 서너 개 달렸는데 그것으로 사람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갖 사람들을 상관하면서 잠에 들고 잠을 깨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다. 어떤 때는 이 순서를 잊기도 하는데, 그러면 잠을 자든 깨어 있든 하루가 공일이다. 잠에서 깨어나며 드는 생각. 그렇다, 사람이 한평생 산다는 게 겨우 몇 사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만날 때, 보이는 거죽으로만 만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속으로도 만나자. 그의 말만 듣지 말고 그 말에 배어있는 외로움, 슬픔, 기쁨, 아픔을 함께 나누자. 그러지 않으면 날마다 공일이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건성은 금물. 대충인생이란, 처음부터 허탕이므로, 사실 없는 것이다.
아이들과 와온 해변에서 전어구이로 점심식사. 집에 돌아와 고단한 몸 낮잠으로 풀자니 어느새 아이들이 돌아간단다. 제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는 아민의 모습이 귀엽고 고맙다. 여기 더 있겠다는 것을 어미가 가야 한다며 데리고 간다. 잘했다. 저는 당장 재미가 있어서 여기 더 있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제 몸을 고단하게 하는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어른들도 평생 그러고 사는 것 아닐까? 무슨 일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오히려 고마워할 이유가 그래서 있는 것이다. (2019. 8. 21)
⎈ 효종이 사주는 냉면으로 점심 먹고, 그린 빌라 뒤편에서 난봉산 정상까지 오후 산책길에, 기도 하나 선물로 받는다. “주인님, 이제부터 저에게 아무런 뜻도 견해도 없었으면 합니다. 솔직히 제 속에 의도나 견해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아직은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가봐야 하지 않나 싶은 곳도 있고, 이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라도, 그런 저의 뜻이나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주인님, 이것이 저의 이유와 목적이 있는 마지막 행위였으면 좋겠습니다, 잘 마른 가랑잎처럼 당신의 가느다란 숨결에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될 때까지. 도와주십시오. 옴.” (2019. 8. 22)
⎈ 비봉산(飛鳳山) 산책. 어제에 이어 다시 한 말씀 선물로 주신다. “너에게도 물론 생각과 견해가 있을 것이다. 그게 없으면 송장이지. 그러나 그것들을, 누가 묻지 않거든, 말하지 말고 네 속 깊은 곳에 묻어두어라.” 아멘이다. 무위당 선생이 처음으로 주신 글씨가 ‘신심명’의 한 구절, 유수식견(唯須息見) 넉 자였다. 모름지기 견해를 쉬라는 뜻이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도, 묻지 않거든 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선생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를 때가 된 것 같다. 백운단처(白雲斷處)에 유청산(有靑山)이라 했지. 맞다, 어차어피 기울고 모자라는 편견일 수밖에 없는 견해, 그것이 하늘을 가린 구름이었다. 구름 걷히면 곧바로 하늘나라다. 한 분 한님 안에서, 하늘나라 아닌 곳이 어디에 어떻게 있을 것인가?
오늘 옮긴 루카도 목사의 한 마디가 시니컬하다. “열흘 동안 제자들은 기도했다. 그 열흘에 보태어진 수십 분의 설교가 하루에 삼만 명을 구원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어쩌면 그 순서를 뒤집고 있는 것 아닐까? 수십 분 기도하고 열흘 설교하는 것 아닐까?” (2019. 8. 23)
⎈ 정읍 사랑방에서 생명평화결사 여름 수련회 모임. 무슨 말을 또 횡설수설. 본디 임락경 목사와 함께 하기로 했는데 수술하는 바람에 임 목사 불참, 괜히 쓸쓸하다. 모임 마치고, 오가는 길에 차를 태워준 효종이 사주는 저녁 먹고, 토요명상. (2019. 8. 24)
⎈ 난봉산성 에돌아 향림재 넘어 국사봉 가다가 참샘 약수터로 내려온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수평으로 걷는 이 길이, 지금 여기인 당신 향해 내려가며 올라가는 계단이기를, 아니, 본디 그런 것인 진실이 몸에 배기를… 과연 산은 가없는 바다와 하늘 향하여 오르막 내리막으로 살아 굼틀거리는 강물이다. 오후, 학교 도서관에서 한님살기교회 예배. 마치고 효선, 유천과 함께 간송이 사주는 메밀국수로 저녁을 먹는데 고맙고 맛도 있다. (2019. 8. 25)
⎈ 새벽꿈. 누가 말하기를, 이승만 씨가 ‘Distribution without War’라는 책을 ‘전쟁 없는 분배’로 번역했다고 한다. 아무가 말한다, 혹시 그런 책이 어디서 출판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승만 씨가 그것을 번역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 사람 그런 주제에 관심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곁에 있던 모 재벌급 출판사 사장 비서쯤 되는 젊은 여자가 벌써 어디론지 전화를 하고 있다. 책이 올봄에 영국에서 출판된 건 사실이고 한국 어느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번역중인 모양인데, 비서의 말이, 우리 쪽에서 인세를 ‘더블’로 올려줄 테니 진행 중인 번역을 중단시키고 이 아무가 번역하는 걸로 재계약하자는 내용이다. 아무가 손으로 사래질하며 말한다. 노 노, 그건 도리가 아니지. 난 그런 일에 끼어들지 않겠소. 갑자기 출판사 사장이, 아는 얼굴이다, 나타나서는 아무렴, 그러시겠지, 없던 일로 합시다, 하며 껄껄 웃는다. 젊은 비서가 얼굴을 붉히고 한쪽에 앵돌아져 있다. 다가가서, 경위야 어찌 되었든 당신이 하려던 일을 가로막은 셈이 되었는데 이 일로 마음 상했으면 사과한다고, 미안하다고, 그러다가 슬며시 꿈에서 나온다. 그나저나, 누가 싸우지 않고 서로 나누며 사는 법을 책으로 썼다 해서, 그리고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해서, 인간들이 과연 그렇게 할까? 피식, 웃음이 난다. 아, 담론이야 뭐 얼마든지 거창하고 글로벌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자기 주머니를 털어 저보다 힘든 친구에게 건네주는 저 작은 아이의 무게가 그 베스트셀러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
시내버스를 97번 아닌 96번으로 탔더니 해룡을 지나쳐 여주 쪽으로 내달린다. 저만큼 앵무산이 보이는 곳에 내려 산을 오르는데 도무지 길이 없다. 이리 올랐다가 길이 막혀 내려오고 저리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두세 번 되풀이한 끝에 용케 고압선 아래로 난 길을 만나 꽤 큰 산을 넘었는데 막판에 또 길이 사라져 허우적허우적 내려와 보니 어? 마음에 둔 목적지의 반대편 종점이다. 어느 집 대문 곁에서 몰래 딴 무화과 한 개로 요기를 하고, 율촌 왕바위재 고인돌 구경하고, 용전마을에서 다시 앵무산을 오른다. 인적 끊긴 지 오랜 샘터, 실처럼 흐르는 물을 받아 마시는데 어떤 물도 이보다 시원할 수 없다. 정상에서 수백 미터 아래 체육공원에서 계당마을로 내려온다. 길고 고된 산행이다. 다리가 좀 풀리는 것 같아 조심 또 조심 걷는다. 길을 모른다는 것은 가지 않아도 되는 길, 가봤자 소용없는 길, 한참 가다가 떠나온 자리를 거꾸로 다시 만나는 길, 뭐 그런 길을 괜히 가고 또 가는 거다. 길을 모른다는 사실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다. (2019. 8. 26)
⎈ 가을비가 종일 내린다. 덕분에 산책은 못하고 목걸이 십자가만 여러 개 다듬는다. 칼로 자르고 껍질 벗겨 사포로 갈고 고리못 박고… 하나 만드는 데 여간 정성이 드는 게 아니다. 그래서 행복하다. 나무에서 떨어져 짐승과 사람 발에 밟히고 비바람에 시달려 썩어가던 가지들이 작은 십자가로 환생(?)하는 모습, 보기 좋다. (2019. 8. 27)
⎈ 꿈에 읽었는지 들었는지 모르겠다. “기도로 일어나 착실함으로 걷고 고마움으로 먹고 정직으로 일하고 진실로 세상 만나고 소망으로 누워 기도로 잠든다.” 아, 젊은 시절에 이것으로 인생 목표를 삼았더라면? 허허, 웃기는 생각! 오늘부터라도 늦지 않다.
가을학기 7, 8학년 첫 수업. 용우라는 학생이 7학년에 전입. 말귀를 제법 알아듣는 것 같다. 생김새도 듬직하다. 장차 물건 되겠다. 하기야 누군 안 그렇겠는가만. (2019. 8. 29)
⎈ 효선이 유천과 함께 두 집안 어머니 모시고 터키로 6박 8일 관광을 떠난다. 보성 불이학당 강의. 노자의 장단상형(長短相形)을 읽는데 목소리가 자꾸 커진다. 부산에서 자허 오고 소현이 남편과 동행. 보성 바닷바람이 선선하고 청량하다. (2019. 8. 30)
⎈ 어제 보성에서 얻어온 된장국에 밥 말아먹고 봉화산으로 향한다. 호흡에 걸음 맞기고 천천히 걷자니 어느새 정상이다. 머슴 엄지손톱만한 왕벌이 금방이라도 침을 꽂겠다는 듯, 코끝에서 윙윙거린다. 손으로 쫓으려다가 진짜로 침 맞을지 몰라 얌전히 서서 그만 가시라고 기다려보지만 막무가내다. 이러다가 콧구멍에라도 들어오면 난리겠다 싶어 손으로 코를 가리고 죽은 송장처럼 가만히 서 있다. 그렇게 한참 탐색하던 벌이 마침내 이 물건에는 볼일이 없겠다 싶었는지 찰나에 사라지고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서 있는 자동차 뒤편으로 돌아 걷는데 더운 열기가 훅, 끼쳐온다. 그래, 안에 타신 양반이 시원하려면 밖에 있는 상놈이 가외로 더워야겠지. 과연, 빈틈없이 공평한 세상이렷다.
간송이 조금 일찍 와서 함께 된장국으로 저녁 먹고 토요명상 참석. (2019.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