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주님,
저로 하여금 엄마 품에서 젖 뗀 아이의 만족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매일 풍성한 말씀 속에 거하게 하시고
말씀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하실 일이 너무도 기대가 되는 나날들입니다.
저의 모든 소망이 말씀 안에 있음을 점점 더 알아갑니다.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내는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악한 것 앞에서 무방비로 시달리지 않도록
십자가의 길을 밝히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보혈을 의지하게 그 길로 달려가니 아무 걱정 없습니다.
이 시간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
빛을 비추어 주셔서 오늘 말씀 가운데 나의 주님을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22.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23.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4.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25.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26.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27.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
28. 내가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29. 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
30.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나의 묵상)
아내가 죽은 이후 말문이 닫힌 에스겔의 입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다.
그것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악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동안 말씀을 주시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
이제 예루살렘 함락의 소식이 들려오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입을 열어 말씀을 주신다.
함락된 예루살렘에서 기거하는 자들과 포로로 끌려와 지금 에스겔과 함께 있는 자들에 대하여 각각 말씀하신다.
먼저 함락된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스라엘 땅에 관한 말씀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운운하고, 아브라함을 운운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영적 교만에 빠져 있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교회 생활은 하지만 말씀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이 과연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말씀으로 통치를 받지 않으므로 자기 생각이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고 만다. 자기 생각에 충실한 것은 영적 교만이다.
영적 교만에 빠져 말씀에 관심도 없고, 말씀을 모르니 순종인지, 불순종인지 구분도 못하는 상태로 자신은 계속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나는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잘 다니기 때문에” 라고 한다.
지금 망한 예루살렘에 숨어 있으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거야’ 라고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저들과 꼭 같은 반응이다.
내가 그랬다.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헌금도 기꺼이 드리고.....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나의 시간을 주님께 먼저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놓고.....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으니 어떤 하나님인지, 나의 주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내 식의 주님을 만들어 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나 자신은 물론 지체들까지 상처를 주는 실수를 곧잘 범하곤 했다.
그때는 그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다.
내 탓이 아니라 그들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씀 없는 심령은 완악하기 이를 데 없다.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니 나의 상태를 볼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이다.
예루살렘의 남은 백성들이 믿음의 본질을 놓치고 땅의 유업을 바라는 것이나 지금 우리들이 말씀을 놓치고 그저 얄팍한 입술의 신앙고백으로 이 땅에서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다음, 포로로 끌려와 에스겔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말씀이 임한다.
그들은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되 실행하지는 않는다.
책망하는 말씀조차 달콤한 음악처럼 즐길 뿐,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다.
주일 예배 때 선포되는 말씀 앞에 ‘아멘’ 하면 그만이다.
‘아멘’하는 그 순간은 물론 진심일 수 있다.
자신의 그 아멘으로 믿음이 더 굳건해지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말씀 듣기는 하나 그때뿐이다.
심지어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을 때도 그렇다.
그저 자신에 대해 잠시 한숨을 쉬고는 그뿐이다.
내가 그랬다.
지속적인 말씀의 다스림 안에 있지 않으니 그야말로 돌짝밭에 뿌려져 곧 말라버리는 씨처럼 죽은 믿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여도 모르는 것투성이다.
창세 전의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를 모르고,
아버지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시고 그때 이미 우리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시기로 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아버지께로 난 유일한 아들을 주셔서 죽을 인생을 구하신 것을 모르고,
십자가 복음, 장사 복음을 모르고,
영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누리는 것인지를 모르고.....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그러나 이제 안다.
이 모든 것의 더 깊은 은혜를 알기 위해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안다.
말씀 앞에 나아가면 그곳에서 처참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십자가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 그분의 품속에 거한다.
말씀을 통해 천국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구경거리로 생각했던 포로들,
무슨 음악처럼 한없이 가볍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
그들에게 내려질 심판은 오직 한 가지.
두렵다.
(묵상기도)
주님,
날마다 말씀으로 돌이키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로 살게 하소서.
하늘에 속한 말씀의 기쁨을 누리므로
세상을 거뜬히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