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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양심 추적 (3) (창44:16-34절)
고난은 인간을 강퍅하게 만들기도 하나 반대로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한 때 야심만만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야곱이 자포자기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 후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절대적 신뢰감을 토로하는 신앙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 말은 어떤 경우에든지 그 결과를 자신의 신앙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시절에 아람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사마리아를 에워쌀 때 예루살렘 성 안이 크게 주려서 여인들은 자기의 아이를 삶아 먹었습니다. 그때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는데 성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는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왕하7:3-4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저들은 비록 나병 환자들이지만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겠다는 신앙의 자세로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아람 사람의 진영에서 엄청난 축복을 누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는 야곱의 심정은 죽기보다도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잠히 하나님을 의뢰하였습니다.
*시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불안하고 심약한 야곱이 믿고 의지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 솨다이’ 인데 “전능한” 에 해당하는 ‘솨다이’ 는 ‘굵고 튼튼하게 하다.’ 라는 기본 뜻을 가지며 이는 사랑하는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동시에 엘 솨다이 라는 하나님의 명칭은 언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창17:1-2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28:3-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35:11-12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야곱은 인생의 위기에 상황에 봉착하자 언약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자신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을 약속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식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자식들을 지켜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기서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하밈” 은 ‘태’ ‘자궁’ 의 복수형으로 긍휼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는 어머니가 태 속의 아기를 감싸듯이, 또는 아기에게 긍휼을 베풀되 불붙는 듯한 마음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현장에서 살아있는 아들을 둘로 나누어 반은 이 계집에게 주고, 반은 저 계집에게 주라는 왕의 명령 앞에 아이의 어미는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왕상3:26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바로 이 아이의 어머니의 불붙는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식들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했으나 또한 잃게 되면 잃을 수도 있음을 시인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시도록 한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대로 구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는 신앙의 회복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섯 가지 양심 추적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이렇게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추적의 손길은 여전히 저들을 향해 펴지며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여섯 번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양심 추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6. 하나님의 극진하신 환대였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에 대한 유다의 진지한 설득과 이스라엘의 필사적인 믿음의 탄원 후에 그들은 예물을 취하고 갑절의 돈을 가지고 베냐민과 동행하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혹시 착오가 있었을까 두려워하여 지난번에 자루에 넣어 가져온 식량 값을 다시 넣고 예물도 단단히 챙겼습니다.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예물로서 형, 에서의 복수심을 진정시킨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예물이 애굽 총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은혜를 입을 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들들에게 예물을 준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 당도하여 요셉의 앞에 나아갈 때에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슴을 조아리며 숨을 죽이고 있을 때에 전혀 뜻밖의 사건이 전개되었습니다. 그것은 상상하지 못할 하나님의 지극한 환대였습니다.
*창43: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마치 집 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종을 불러 잔치를 준비하는 장면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도적의 누명을 씌우고 감옥으로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으로 초조해 하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환대는 오히려 사람을 당황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에게 나아가 서둘러 변명을 합니다. 그때 청지기는 너무나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창43: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요셉의 청지기도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청지기의 말은 이 사건의 핵심을 지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요셉의 명령에 의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지만 청지기는 이 일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돈을 받으셨고 또 되돌려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불러내어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양심 추적의 하나님의 환대는 세 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로 아주 특별한 초대를 하십니다.
이방 사람들이 애굽 총리의 개인 집으로 초대를 받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을 넘어 예물을 준비하면서까지 양식을 사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특혜가 아닌 것입니다. 청지기가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할 때에 저들의 당황하는 모습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창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요셉의 형제들은 총리대신 집으로 인도될 때 형벌을 받게 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하였습니다. 욥이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실의 참담한 상황 속에서 육체적인 질병보다 더한 정신적인 고통과 소외감으로 탄식할 때에 그는 그 두려움을 이렇게 독백합니다.
*욥30:14-15 그들은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같이 내게로 달려드니 순식간의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요셉의 형들의 심사가 이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변과 소유물에 큰 위험이 닥쳐온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여도 있었으나 그보다 더 큰 내용은 그들의 뿌리 깊은 죄의식이 그들을 짓누른 까닭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총리의 초청으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총리와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로 풍족한 대접입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기아선상에 허덕이던 그들에게 물은 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에게 아주 풍족한 대접을 합니다. 즉 그들에게 물을 주어 자신들의 발을 씻게 합니다. 물론 이것은 긴 여행에서 때 묻은 그들의 발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요셉에게 지은 반인륜적 죄악에 대한 요셉의 깨끗한 용서가 베풀어질 것을 예시해 줍니다.
*창43: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그뿐 아니라 총리의 식탁에는 애굽의 모든 산해진미가 준비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다 애굽 사람의 수종까지 받으며 만찬에 참석하는 풍족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창43: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나 주었다는 것은 특별한 손님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고대 근동 지방의 상징적인 풍습이지 실제로 정량보다 더 많은 음식을 주어 먹게 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애굽인들의 숫자 개념에서 ‘5’는 완전함, 충만함을 뜻합니다.
*사19:18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애굽에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성읍 다섯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애굽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총리의 식물로 형제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풍족하게, 넘치게 기름진 것으로 대접하였습니다.
셋째로 세심한 배려입니다.
음식물이 귀한 때이고 먹는 것이 모두 화폐가치와 직결되던 흉년기 임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들이 타고 온 나귀에게도 먹이를 주어 먹게 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들과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또 그 형제들을 장유의 순서대로 앉게 함으로 식탁 하나하나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창43:31-33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히브리 사람들은 한쪽 팔을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하는 것과는 달리 애굽인들은 의자 없이 낮은 테이블 주변에 앉아서 먹는 것이 일반의 식사법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차서의 순서대로 둘러 앉아 아주 자연스럽게 즐거워하였으며 좋은 시간을 요셉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환대도 역시 하나님의 양심 추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이러한 환대를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도 자기들이 애굽에서 귀빈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나 조건은 없습니다. 우리는 뜻밖의 환대나 좋은 일이 있을 때 이 역시 하나님의 양심 추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겸허하게 살펴보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7. 화해와 용서를 전제로 한 은잔의 시험입니다.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요셉과 형들 간의 숨 막히는 만남과 시험, 갈등은 이제 그 절정을 치닫고 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내려올 때는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자신의 요구를 만족시킨 형들에 대하여 이제는 형제간의 우애를 알아보기 위해 최종적으로 은잔 시험을 시도합니다. 형들의 자루에 양식을 가득 채우고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마지막으로 요셉의 은잔을 베냐민의 잔에 넣었습니다. 가나안으로 향하는 형제들의 귀향은 즐거움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억류되었던 시므온도 풀려났으며 애굽 총리로부터 지극한 환대를 받았고, 양식도 충분히 구입하고 동생 베냐민을 무사히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제들은 자신들을 기다리실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이제는 걱정 근심이 다 사라지고 고향에 돌아가 편안히 지낼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등 뒤에서 호통 소리와 함께 성난 청지기의 고함소리가 하늘을 울립니다.
*창44:4-5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지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청지기의 말은 자기들이 애굽 총리의 점치는 은잔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꼼짝없이 도적의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인 안녕과 행복을 보장해 놓은 후 성도의 신앙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인 것입니다.
*신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요셉의 각본을 알지 못했던 형제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변명을 다 늘어놓습니다.
*창44:7-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적질하리이까.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형제들이 자신들의 결백과 의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적질을 하다니요.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도적이라니요. 지난번에 우리 자루 속에 넣었던 돈도 우리가 도로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우리가 은, 금을 훔치다니요. 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무서운 말을 사정없이 내뱉습니다.
*창44:9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얼마나 자신만만합니까. 죄가 발견된 자는 죽을 것이요, 자기들은 다 종이 되겠다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결백을 확신하면서 주장했던 이 말은 요셉이 행한 시험의 중요한 초점이었습니다. 즉 형들이 과거에 자기를 버린 것처럼 이 상황에서 베냐민을 버리든지, 아니면 베냐민이 죽도록 내버려 두고 돌아갈 것인지, 반대로 베냐민과 생사를 같이 할 정도로 과거를 뉘우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은잔이 발견된 자에게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고 연대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청지기가 나이 많은 자로부터 자루를 풀고 조사를 시작하자 르우벤이 지나가고, 유다도 지나갈 때에 자신들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순간은 누구에게서 잔이 발견되든지 간에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아니면 각자 행동으로 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시련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마지막 자루를 열어보니 불행하게도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변명도 필요가 없습니다. 유구무언이 된 것입니다. “은잔의 시험” 이것은 요셉의 형제들의 자존심, 의로움, 교만, 당당함, 자기변명,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하는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은잔의 시험” 이것은 요셉의 형제들이 서로를 위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하나로 뭉치느냐, 아니면 각자의 유익에 따라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헤어지느냐 하는 중요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저들은 자기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처절한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처럼 결백을 장담했는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자 요셉의 형제들은 절망과 슬픔이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이제 선택은 자유입니다. 형제들이 하나가 되든지, 아니면 갈라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공동책임을 지겠다는 자신들의 약속대로 베냐민과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애굽의 성으로 되돌아옵니다. 즉 그들은 베냐민을 위하여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옛날과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20년 전에는 동생이 미워 죽이려 했던 자들입니다. 어린 동생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고도 양심에 가책 하나 없었던 자들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슬퍼하며 고통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었을 때에도 단 한 번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던 냉혈한들이었습니다. 인정도, 피도, 눈물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양심 추적을 받으면서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양심 추적이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양식을 도로 싣고 성으로 돌아와 요셉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쓴 상태였으나 어쨌든 그들은 요셉과 첫 상면과 둘째 상면에 이어 세 번째로 요셉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애굽의 노예로 팔리게 된 원인이었던 요셉의 꿈은 완전한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요셉의 꿈의 철저한 실현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의 신실성이 입증되었으며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와 용서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회개와 자성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철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의 제자 플라톤의 명연설을 사람들은 극찬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훌륭한 연설문이요, 더 굉장한 탄원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 애굽 총리 앞에서 행한 유다의 탄원입니다. 유다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앞에 두고 이를 해명하거나 규명하기보다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며 과거의 죄악을 회개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창44: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유다의 이 말은 그들이 오래전에 요셉에게 행하였던 악한 행동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즉 그들이 지금 당하는 고난은 전날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간주하여 허물을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 이라는 히브리어는 “아온” 인데 원래 ‘구부리다’ 의 뜻을 지니며 ‘뒤집다’ ‘행악하다’ 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 말을 연결해 보면 인간의 속에 있는 구부러짐과 하나님의 뜻을 뒤집으려는 것이 결국 행위로 나타나 행악하게 됨을 말합니다. 이러한 죄악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적발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죄를 범했습니다. 아간은 자기의 범죄를 잘 은폐하는 기지를 보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죄를 위장하고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은폐를 도모하는 자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사29:15-16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과거에 요셉이 꾼 꿈의 내용을 듣고 그 형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그러나 이제 유다는 자신의 입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형들은 요셉을 힐난하고 그 꿈을 비웃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의 비웃음 그대로 그 꿈이 완전히 실현되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자청하여 총리의 종이 되겠다고 했지마는 자기의 앞에 있는 사람이 요셉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제의에 대하여 요셉은 베냐민을 제외하고 모두 풀어주겠다고 말함으로 마지막으로 형제들을 시험하였습니다. 요셉의 이 제의는 형제들에게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에 처자식이 있는 몸으로 평생을 이국땅에서 노예로 억류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다가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서서 탄원을 시작합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애굽 총리에게 간청하는 이 내용은 가히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유다의 이 변론이야말로 구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수사학이라고 극찬합니다. 한때 가나안 여인과 부도덕한 관계에 빠졌던 유다가 이처럼 힘찬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진실함에 있었습니다.
그는 오! 내 주여! 라는 인사에 이어 1차 상면을 상기하고 1차 귀향 시의 일을 소상히 전했으며 마지막으로 진지한 탄원을 합니다. 유다가 만일 거짓을 말하여 세상의 지혜대로 행동했다면 요셉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구구절절 효심과 우애심으로 가득 찬 유다의 고백적 탄원은 그렇지 않아도 주체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요셉의 벅찬 심정을 봇물 터지듯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유다의 자기희생적 이 변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버리는 것이 곧 승리의 길이라는 기독교의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둘째는 사랑과 진실에 근거할 때 진정 힘 있는 변론을 할 수 있으며 상대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타적 사랑과 진실에 근거한 뜨거운 가슴이야말로 세상의 빛과 소금을 감당해야 할 성도들의 마음 자세인 것입니다.
*창44: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유다의 이 제안은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서라도 아버지 야곱의 뜻을 이루고 베냐민을 구해 내겠다는 자기희생적이며 결사적인 제안입니다. 생명은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마지막 영역이요, 양보할 수 없는 존재의 바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자기 생명에 집착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마음으로 탄원에 임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이 모습은 이전에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을 때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베냐민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을 두고 갈 것인가, 아니면 함께 죽을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저들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끼리 한 마음, 한 뜻이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어머니들끼리 서로 다투고 반목하며 시기하여 사이가 좋지 못했던 상황에서 아들들끼리 화목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탄원은 이러한 조건을 넘어서 아버지와 베냐민을 구조하기 위한 진솔하고도 자기희생적인 애틋한 탄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다 멸하고자 할 때 모세는 대신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희생을 각오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저주를 받아 하나님께 끊어질지라도 원하고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진정 중보자가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진정한 중보의 사역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다의 자기희생적인 변론은 극히 불미스러운 근친상간의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어떻게 야곱의 임종 시에 놀라운 메시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곱 번에 걸친 양심 추적은 마침내 저들의 입을 통하여 지난날의 모든 죄악을 시인하고 고백하게 만들었으며 잃어버린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형제 우애를 되찾게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죽이기까지 하려 했던 사람들이 형제를 사랑하며 잘못을 저지른 아우를 대신하여 벌을 달게 받고 그 아우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불효를 저질렀던 사람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생명을 불사하는 효심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한 백성의 자질을 갖춘 신령한 모습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다의 진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고백과 탄원을 다 들은 요셉은 이토록 아름답게 변한 형들의 모습을 볼 때에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길이 없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물러가라”시종들이 다 물러갔을 때에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를 알리며 방성대곡합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든지 요셉의 울음소리가 애굽 사람들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도 들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양심 추적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기 사랑의 표현이요, 긍휼입니다. 이 하나님의 양심 추적과 사랑이 우리에게 영원히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살아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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