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VC관 62년 역사의 뒤안길-신우산업 김홍기 대표의 회고①
초가, 양철판 주택개량사업에 PVC재질 최초도입
PVC 63년 일본수입 압출기로 빗물받이 생산시작
KS 제정 이후 럭키, 진양, 내쇼날등 PVC 제조
해방과 전쟁의 참화로 암울한 시대의 초상화
1945년 광복의 감격은 잠시뿐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는 1950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주거시설로는 초가집, 기와집, 양철(함석)집, 판자집이 대부분으로 건축자재라고는 목재나 함석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일본에서 막 도입한 집단 양계시설도 별 다른 자재가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위생적인 케이지식이 아니라 비위생적인 나무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땔감도 산에 있는 나무들을 무차별하게 벌목하여 숯과 장작으로 온돌 난방(구들)과 취사용으로 사용하여 우리나라의 강산은 민둥산으로 변해야 했다.(최근 북한의 인근 산들은 대부분 민둥산이다.)
1950년 중반 남한 땅에서 생산되고 있던 저열량 무연탄으로 조개탄을 만들어 학교 등 공공기관 난방용으로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로켓탄이란 별명의 최신 발명품인 19공탄이 우리나라의 모든 가정뿐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연료, 취사, 난방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사진:한국전쟁이후의 서울)
1961년 516혁명 후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아래 사회전반에 벌어진 새마을운동사업 중에는 주택개량사업과 국민건강위생을 위한 상하수도관 개량사업도 포함되었다.
판자집, 초가집, 함석집 지붕을 스레이트지붕으로 개량하면서 이에 필요한 물받이, 홈통과 연탄난로 연통의 주요 재료는 오로지 함석뿐이었다. 하수도는 토관(황토관)에서 시멘트관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으며 수도관은 아연관과 주철관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시멘트산업은 1919년 평남 승호리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강원도 삼척에 위치한 삼척공장이 전쟁이후 생산되었다. 삼척공장은 1956년 동양시멘트가 운영했으며 문경에는 대한양회공업주식회사가 시멘트를 생산했다.)
농업사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1963년 경 상공부차관을 지낸 배응도(1954년7월 - 1955년 9월 재임)씨가 일본의 세키스이(積水化學,1947년 창업)에서 압출기와 기술을 도입하여 서울시 수유리 쌍문동에 비달산업(주)을 설립한다, 대한민국 최초로 PVC관 및 물받이, 닭모이통등을 S-LON이라는 상표로 생산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녹슬지 않고 썩지 않으며 연탄가스에도 삯지 않고 위생적이며 수명이 반영구적인 혁신적인 자재가 대한민국에 등장한 것이다.(강관은 PVC관 보다 10년 후인 1973년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포항종합제철의 행정실장을 역임했던 박재홍씨가 32세에 동양강관을 설립하여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이후 강관은 우리나라 상수도관등 기간산업으로 40년간 급속한 성장을 했으나 지난 2013년 중소기업경쟁제품으로 묶여 상수도사업에서 철수했다. 동양철관은 군사정권의 정치적 경영을 해 왔으나 민주화시절로 접어들면서 결국 섬유회사인 갑을이 인수하여 현재 운영하고 있다.)
물받이, 오수통, 닭 모이통으로 시작된 PVC 산업
1965년 PVC 상하수도관, 물받이가 한국산업표준규격(KS)으로 제정되자 서울시도 급수관으로 PVC수도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대기업인 한국화성, 진양, 내쇼날, 럭키등이 PVC파이프 생산대열에 참여하면서 PVC상수도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신우화학(대표 김홍기)이 제조공정에 사용되는 실린다(cylinder)는 박격포의 포신으로, 스크류(screw)는 자동차의 차축으로 가공하고 변속장비인 중장비 미션(mischen)을 개조한 압출기로 중소기업 최초로 PVC물받이 홈통, 닭모이통을 생산보급하기 시작하였으며 뒤를 이어 부산에 있는 세흥화학이 PVC건축자재를 생산하였다
1970년부터 본격 시작된 새마을운동사업의 일환인 농어촌 위생개선사업으로 농어촌 간이상수도 개량사업에 PVC수도관이 사용되었다. 주택개량사업에는 연탄가스에 삯지 않고 녹슬지 않는 PVC 물받이 홈통이 혁신자재로 큰 몫을 담당하며 인기를 모았다. 인기가 치솟자 서울지역에는 은성화학, 대영화학, 현대프라스틱, 신한영화학, 창성화학과 부산지역의 삼부화학 등 중소기업들이 속속 설립되었다
하지만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일면서 치열한 경쟁으로 부실위기에 몰린 5개 PVC Resin(고분자 중합체) 생산업체인 전북 군산의 우풍화학, 울산시의 공영화학, 경남 진해의 한국화성, 인천시의 동양화학, 충북 청주의 대한화성을 정부 주도하에 합병시키게 된다.
한국산업은행 관리하에 한양화학주식회사를 설립하여 PVC RESIN(합성수지)을 독점 판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약 1년 6개월간 PVC원료를 배급받기 위하여 삼영화학 등 전국의 대기업을 비롯한 중소 PVC제조업자들이 아침마다 줄을 서서 배급받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1972년에는 한양, 진양, 내쇼날, 럭키등 4개 대기업들이 한국PVC관협회(전무이사 하수덕:육사 8기/협회는 1980년까지 유지)를 결성한다. 현재의 한국 PVC관 공업협동조합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4개의 기업들은 영업사원 1명씩을 파견하여 PVC 파이프 수요개발에 주력하면서 PVC 상수도관 사용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한국전기통신공사(현재의 KT)의 통신전선보호관 자재로 사용되던 시멘트 유공관을 PVC관으로 대체시키는 등 PVC관의 수요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1976년 약 9개월간 지속된 2차 석유파동을 겪으며 부산, 대구, 광주지역에 중소기업들이 대거 등장한다. 건축자재만 생산하던 신한영(대표 양춘근)이 PVC수도관과 전선관의 KS규격을 획득한다. 뒤이어 현대프라스틱(대표 진인천), 신우산업(대표 김홍기), 대영화학(대표 오제동), 세흥화학(대표 한상남), 삼부화학(대표 정석근) 등이 PVC수도관 시장에 참여한다. 1979년 경에는 약 12개 중소기업들이 수도관, 전선관의 KS표시를 획득하여 한국PVC관협회에 가입하면서 대기업 제품과 중소기업 제품과의 유통가격 조정등의 협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소기업 대부분 1대의 압출기(extruder)로만 생산하였기에 KS기준 규격을 맞추기에도 버거웠다. 품질규격에 가까스로 도달하였으나 대기업 생산제품과는 품질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사용현장에서는 수도관을 연결할 때 사용하였던 이음관 접착제를 시공업자들이 저가의 저질 접착제를 사용하므로서 이음부에서 누수가 자주 발생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PVC파이프가 깨어진다는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신우산업은 수도산업분야에서는 한국주철관공업(1953년)에 이어 도산하거나 창업주가 전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1968년 설립하여 57년의 업역을 지닌 장수기업이다. 창업주인(김홍기, 김주환(69년생, 장남) 김홍기 대표(사진)는 1943년생으로 현업에서 역동적으로 운영을 하는 몇 몇 안되는 최고령 인물이다. 서울대농대를 졸업하고 농촌활동을 접고 졸업후 26세에 PVC산업(초창기 기업명은 신우화학)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적인 이윤보다는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심을 잡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철칙이 강하다. 그래서 PVC 역사속에 위기와 변화를 추구해야하는 시련기마다 한극프라스틱조합 초대 PVC분과위원장, 현재의 한국 PVC공업협동조합 초대 이사장등을 역임했다. 상생적 발전을 위해 회원사 공동의 발전을 위해 품질의 안정화와 고급화에 목적을 두었으며 조합의 투명한 운영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부정적 결탁이나 비리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정도를 걸어가는 투명한 경영으로 한국의 생태적 환경에서는 대외적으로 별반 인기가 없으며 대외홍보에도 적극적이지 않지만 내부 직원들에게는 신뢰를 얻고 있다. 물산업 분야에서 1세대 중소기업 경영인 중에는 몇 안되는 서울대 출신이다.
(환경경영신문 http://ionestop.kr 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 환경경영학박사, 시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