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등대 아래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 것이 최고의 낙이었다. 수평선을 향해 무한한 상상을 펼치며 지냈다. 비록 퇴학당하긴 했지만, 내가 해군사관학교로 진학했던 것도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였다. 내게 있어 수평선은 하늘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배를 타고 수평선을 향해 노를 저어가면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다다라 날카로운 칼로 하늘을 쪼개 스스로 문을 만든 후 그 안으로 쏙 들어가면, 바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후일 그것이 어리석은 깨달음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그러나 내 어린 시절은 명백히 하늘과 바다, 혹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서 보냈음에 틀림없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였으며, 내가 바라본 곳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였던 것이다. 해방후 북한의 끝, 전쟁후 남한의 끝 청년시절은 미시령 정상을 바라보며 보냈다. 대체 저 산 저 너머 저 언덕에는 무슨 꽃잎이 피어있는 지 대단히 궁금했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미시령 바람의 근원지도 살펴보고 싶었고, 겨울이면 하염없이 날리는 눈발의 근원지도 찾아보고 싶었다. 사실 울타리처럼 둘러 쌓인 설악산 아래 살면서 그 너머의 세계를 동경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산 능선 저 너머에 펼쳐질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그 꿈 많던 시절을 채웠다. 대처에 나갔다 때때로 세상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미시령 언덕에서 상처를 달래곤 했다. 내게 있어 미시령은 꿈과 현실, 승리와 패배의 경계선이었다. 내가 한 평생을 보낸 이 마을을 지난 시대엔 수복지구라 불렀다.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압축판이라 할 만 했다. 해방 무렵엔 양양 현남면을 지나는 38선이 경계였고, 전쟁이 끝난 후엔 고성 현내면을 지나는 휴전선이 경계였다. 이 마을 사람들로서는 해방 후엔 북한의 맨 끝 경계에, 전쟁 후엔 남한의 맨 끝 경계에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그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살아온 셈이다. 그렇다. 우리 마을은 늘 이렇듯 경계의 한 끝을 지켜왔다. 경계란 말은, ‘다른 영역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또한 ‘이질적 영역이 접점을 찾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맨 동쪽 끝에서 태평양의 맨 서쪽 끝과 만나고 있고, 백두대간을 경계로 동쪽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채 한반도의 전통문화와 접하고 있으며, 찬바람 부는 북쪽나라와 휴전선으로 접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찍이 장정룡 교수는 우리 지역을 일컬어, 산악문화와 해양문화가 한데 어우러지고, 북쪽의 실향민 문화와 남쪽의 고유문화가 서로 혼합되어, 지정학적으로나 문화적, 혹은 언어학적으로 완충 역할을 해 왔다고 분석한 바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설악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은 ‘경계의 미’에서 발원한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는 관동팔경은, 하나같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육지에 서서 바다를 조망한다는 것은,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를 바라본다는 의미고, 그것은 신선한 시각으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나 뱃전에서 들여다보는 육지 풍경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없다’는 속담이 있으나, 우리 지역만은 예외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석호들도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만들어낸 미의 결정체들이다. 영동지역에 위치한 10여 개의 호수들은 모두 한때 바다였으나, 그 길목이 모래로 막힘으로써 조성된 석호들이다. 이성선 시인은 이 호수들을 일컬어, ‘설악의 맑은 눈망울’이라고까지 묘사한 바 있거니와, ‘어린왕자’식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만약 저 먼 별에서 바라본 지구가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 마을 곳곳에 숨어 있는 호수들 때문일 것이다. 영동 해안 경계엔 열 아홉 개의 섬이 있다. 모두 오백 평 내지 천 평 내외의 작은 섬들이고, 다 무인도인데다, 육지와 바짝 붙어있지만, 그 섬들 또한 영동 해안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미적 자산들이다. 화진포의 금구도는 금강산 여행의 종착지로 불릴 만큼 지난 시대 때 높은 명성을 자랑했었다.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경계는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 깊은 땅 속 아래에도 있다. 서로 다른 지각이 만나는 틈 사이로 온천수도 솟아오르고 탄산약수도 솟아오른다. 우리 지역에 밀집한 약수터와 온천장이 바로 그 지각의 경계 사이에 치솟고 있는 것이다. 지질학적 경계가 우리 지역의 자산인 셈이다. 백두대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백두대간이라 함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 기간 산줄기를 말하는 데, 이는 한반도를 동서로 나누는 경계 역할을 한다. 백두대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시발점인 백두산과 그 종착점인 지리산이다. 그 한가운데 위치한 설악산이 그 다음으로 높다. 물론 설악산이 아름다운 것은 그 높이 때문이 아니라, 암벽으로 구성된 특이한 미적 구성 요소 때문이지만, 설악산은 백두대간이라는 경계가 만들어낸 또다른 미적 결정체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백두대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조성하고 보호하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두대간은 기후를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바람 많고 눈 많은 우리 마을의 기후적 특색은 바로 백두대간 때문이다. 그러니 봄의 신록, 여름의 맑은 하늘,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이 모두 백두대간이 조성해 준 셈이다. 우리 지역의 수려한 풍광과 온화한 기후는 순전히 우리가 그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낙산사도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있고, 달마대사를 닮았다는 달마봉도 백두대간의 동서 경계에 있다. 동해를 지키는 용왕신과 설악산을 지키는 산신이 함께 만나고, 동해로 흐르는 하천과 서해로 흐르는 강물의 발원지가 저 산 정상에서 갈라지고 있으며, 북한 지역의 방언과 강원도 특유의 억양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곳이 바로 우리 마을이다. 신(神)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며, 역사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고, 땅과 바다도 만나는 그 절묘한 경계가 우리 마을의 미적 근원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 마을은, 경계가 창출해 낸 산, 바다, 호수, 온천, 섬, 기후 등을 총망라한 진정한 ‘화합의 미’, ‘통합의 미’를 지닌 곳인 것이다. 태평양을 막 건너온 저 싱싱한 태양이 떠나기를 주저하며 따사로운 햇살을 흠뻑 내리꽂아 주는 마을, 이 땅에서 가장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만약 나처럼 이곳에서 소년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장년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인 노년시절을 맞기 전에, 지금쯤 그 기운을 총망라해 ‘통합적 결실’을 맺기 위해 노력해 볼 일이다. 최 재 도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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