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1 도마복음 말씀/ 천지(天地)와 지천(地天)
말씀 11 (1, 18-3, 19-3, 42, 60-2, 61-1, 85, 111-1 참조)
11-1 예수가 말했다. “이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
11-2 그리고 죽은 자들은 살아있지 못하고 살아있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11-3 오늘 너희는 죽은 것들을 먹고, 그것들을 살게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빛 안에 있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겠는가? 너희가 하나였든 날에, 너희는 둘이 되었다. 그러나 너희가 둘이 되었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겠는가?”
천지(天地)와 지천(地天)
성서는 천지의 창조 이야기다. 천지(天地)의 이야기는 지천(地天)의 이야기로 주석(註釋)된다. 물리적 하늘과 땅은 천지와 지천을 말하기 위해 동원되는 상징 체계다. 천지(天地)는 천지(天地)를 말하기 위한 비유며 은유다. 물리적 천지는 심천(心天)과 심지(心地)를 은유하는 상징 언어라는 말이다. 물리적 하늘과 땅은 육체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장엄한 우주다. 우리 정신이 비로소 각각 자기 존재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언어를 빌어 말하면 여전히 하늘과 땅의 창조를 통해서 그 존재의 세계가 존재로 드러난다.
모든 문학과 철학과 예술은 인간의 자기 세계를 드러낸다. 신학도 예외가 아니다. 시인의 언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종류의 꽃이나 식물들은 그를 바라보는 시인의 세계를 드러낸다. 꽃의 이름을 빌려 마음을 이야기 한다. 상상속 동물을 빌려 마음의 혼탁과 갈등을 그려낸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며 인간의 이야기다. 신의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리스 신화가 그러하며 성서인들 다를까.
이 같은 단순 명쾌하고 자명한 사실이 꼬일 대로 꼬여 창세기 1장이 우상의 이야기로 읽히고 수많은 도그마를 양산, 독단의 책이 되어 버렸다.
창조 서사 문학이 물리적 창조의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팩트 여부를 따져 묻는 시대가 되었다. 한 송이 국화꽃은 소쩍새가 울지 않으면 피울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누군가는 이를 입증이라도 할 요량으로 정말 소쩍새가 우는지 봄부터 가을까지 국화 옆에서 소쩍새를 찾으며 국화와 소쩍새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려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 국화와 소쩍새의 인과관계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수많은 논증을 시도하는 논문들이 쏟아지고 그를 바탕으로 소위 신학 박사들이 양산된다. 창조론과 유신진화론의 갑론을박은 그 한 단면일 뿐이다. 기실 그 이면은 권력다툼이 본질 아닌가.
시를 시로 읽지 않고 문학을 문학으로 보지 않고 창조 서사시를 서사시로 읽지 않는 데서 벌어지는 웃픈 현실이다.
11-1 예수가 말했다. “이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
도마복음 말씀 10에서는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기껏 창조한 천지를 불태우기 위해 창조했다는 말인가. 수많은 소위 정통(?) 해석가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신은 도대체 불태우고 사라질 하늘과 땅은 왜 창조하고 또 소멸한다는 말인가? 오늘도 도처에서 들려오는 자연 재난, 지진과 홍수와 태풍 등은 그 전조 현상이라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주로 종교인들 해석이다. 거기서는 도마복음 말씀 10번 혹은 11번은 그 해석을 발견할 수 없다.
창세기 1장 1절은 어순이 천지다.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2절부터는 하늘 이야기가 아니라 땅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땅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에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천지의 창조 된 계보(낳고 낳고)가 이러하다. 야웨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יְהוָ֥ה אֱלֹהִ֖ים אֶ֥רֶץ וְשָׁמָֽיִם) 때였다.”(창 2:4)
하늘과 땅의 이야기로 소개하면서 정작 땅의 이야기를 먼저 드러낸다. 에덴의 이야기는 천지의 이야기며 땅과 하늘(地天) 이야기다. 아담과 하와, 뱀 그리고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것은 땅과 하늘 이야기라는 말이다. 사실은 에덴의 이야기는 따지고 보면 땅의 이야기인데, 그것이 하늘의 이야기라는 말인가. 어떤 점에서 그러할까.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2장 3절에서 이야기가 끝나고 에덴 이야기는 2장 4절에서 시작된다. 어떤이들은 개역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를 창세기 1:1~2:3절을 마무리하는 결어(結語)로 생각하려 한다. 아니다. 2장 4절은 에덴 이야기를 여는 첫 문장이다.
도마복음 말씀10과 11의 순차도 이와 마찬가지다. 말씀 10에서 땅에 불을 던지러 온 이야기가 먼저 전개되고 있고, 말씀 11에서 하늘이 사라지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곧 불태워지고 사라져야 하는 땅과 하늘이 있다는 얘기며,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도래할 것, 야웨 하나님의 땅과 하늘의 창조 이야기는 거기서 엿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소위 창조과학회가 말하는 창조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상징계이며 둘째 하늘과 둘째 땅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사라와 이삭이 상징하는 세계다. 성서의 이야기는 존재의 세계를 창조해가는 상징언어를 동원한 히브리인들의 이야기 방식이다.
이 같은 전제 위에서 11-1 예수가 말했다. “이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의 해석을 발견해야 가야 한다.
야웨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먼저 옛 땅을 불태우고 처음 하늘을 사라지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고 하실 분들이 많을 터이나,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바를 살펴보라. 야웨 하나님의 창조가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온통 저 아주 오래 오래 전 물리적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불랙홀에 빠져 오늘 여기 그 의식의 하늘에서 이뤄지는 생생한 창조 이야기를 주목하지 못할 뿐더러, 주목하려 하지 않는다.
온통 우상의 이야기로만 성서를 읽으려 한다.
첫댓글 하나님이 저를 성명할 방법으로 물리적 천지와 생명을 만들었다.
사람이라는 관찰자가 없다면 저도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