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마산시 산호동 있는 산호공원 또는 용마공원이라고도 하며 마산의 역사가 숨어 잇는 곳이다..
삼국시대 초기에 마산지역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 중 골포국(骨浦國)이 위치했다. 〈삼국사기〉에는 포상팔국이 209년에 아라가야를 공격했다고 했으나 곧 가야연맹에 병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골포국은 합포현(合浦縣)으로 개칭되어 의안군(義安郡:창원)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에 들어 1018년(현종 9)에 금주(金州:김해)의 속현이 되었다. 1280년(충렬왕 6)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합포에 설치하고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은 일본 정벌을 시도했다. 정벌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와 지원에 애쓴 공로로 1282년(충렬왕 8)에 합포를 회원현(會原縣)으로 승격하고 현령을 파견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08년(태종 8)에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을 합하여 창원부로 승격시키고, 정동행성을 설치했던 곳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兵營]을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창원도호부로 개칭하고, 1601년(선조 34)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창원부에 있는 하나의 포구(浦口)에 불과했던 마산이 지금과 같은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899년 개항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미 마산포는 경상도의 해안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1760년(영조 36) 마산포에 조창(漕倉)을 설치해 낙동강 서남부 일대 9개읍(뒤에 8개읍)의 조세를 수납했던 것은 마산포의 상업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만기요람〉에는 마산장을 경상도의 최대 장시(場市)로 기록했다. 1899년에 마산포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자 기존 시가지[舊馬山] 남쪽 신마산(新馬山) 지역에 각국의 영사관 부지와 공동 조계(租界) 등이 들어서 도시가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창원 감리서가 폐지되고 마산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었으며, 마산과 삼랑진을 연결하는 군용 철도인 마산선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내륙과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1914년 군면폐합 때 종래의 마산부지역 중에서 각국 거류지와 외서면지역을 마산부로 정하고, 나머지 지역은 창원군·진해군에 소속시켰다. 1949년의 시제 실시에 따라 마산시로 바뀌었다. 마산은 1960년 부정 선거에 대한 격렬한 시위, 1970년 한국 최초의 수출자유지역 설치, 1973년과 1977년의 고속도로 개통, 1980년 부마사태 등 개항등의 나라의 역사를 역사를 바꾸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문화행사로는 마산향토문화진흥회가 주관하는 만날제가 매년 9월에 열리고, 진동면에서 향토민속경연대회로 삼진민속문화제가 열린다. 주요 민속놀이로는 삼진큰줄다리기와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마산농청(馬山農廳)놀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6호)가 있으며, 이 놀이에는 닭머리대기·몸통줄다리기 등이 함께 행해진다. 특히 삼진큰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은 몸통지름 1.5m, 길이 200m나 되는 초대형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진동면 인곡리, 내서읍 삼계리·호계리 등의 마을에서는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다. 특히 내서읍 호계리의 동제는 구비전승과 혼합된 형태로, 호랑이가 마을을 건넜다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열린다. 설화로는 〈만날고개이야기〉·〈말이나해보지고개이야기〉·〈돝섬과 가락왕 총비에 얽힌 이야기〉 등 지명과 기암에 관한 것이 전한다. 이 지역이 공업화되기 전에는 주로 농업과 어업을 생계로 삼았기 때문에 민요는 농·어업에 관한 노동요가 많다. 〈모찌기노래〉·〈논매기노래〉·〈노젓는노래〉·〈얼기돌리기노래〉·〈그물당기기노래〉 등이 있으며, 의식요로는 〈상여노래〉·〈시집살이노래〉 등이 구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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