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수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 가운데 한 명이 가수 나 훈아입니다. 그
렇지만 대중들은 그의 노래를 이미 수년 째 듣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지난 2007년 잠정 활동 중단을 선언한 나 훈아 는 이후 신체절단 설 등
온갖 괴소문에 휘말렸고
결국 2008년 1월 기자회견을 자청해 모든 루머를 불식시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활동을 중단한 채 종적을 감춘 나 훈아 주변에선 끊임없이 루머가 생산됐고
또 다른 소문들만 나 훈아의 노래를 대신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가장 최근 나 훈아의 근황을 보면 나 훈아가 뇌 질환 치료 후
양평에서 요양 중이라는 얘기가 가장 신뢰할만한 이야기인 듯 합니다.
가수 나 훈아(본명 최홍기)는 1947년 2월 11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자 무역상이었던 아버지와
전업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나 훈아는 평범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즐겨 쳤다고 합니다.
사실 나 훈아의 지인들은 나 훈아가 악기를 다루는데 능숙하고
그 중에서도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이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었던 자신의 형을 따라
1965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 훈아는 최초로 ‘약속했던 길’이라는 노래를 취입하고
오아시스 레코드 사를 통해 1966년에 당시 19세의 나이로
1집 천리 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간드러진 꺾기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나 훈아는
1968년부터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면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시작으로
‘강촌에 살고 싶네’, ‘님 그리워’가 대중들로부터 히트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가지 마오’가 크게 히트하면서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였고
1972년에는 ‘고향 역’, ‘머나먼 고향’을 차례로 히트시키면서
본격적으로 대중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당시 팝 스타일의 트로트로 사랑 받던 가수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뤄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게 됩니다.
나 훈아는 남진과 달리 대부분 차분하고 조용한 노래를 선곡하였으며
당시 무대에서 다양한 포즈와 꺾기 창법으로 트로트를 맛깔 나게 불러
중년층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나 훈아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연회에 참석해 줄 것을 초청받았으나
그는 자기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사는 사람들에게만 노래를 한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전성기를 한창 누리고 있었던 나 훈아는
1972년에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나 훈아가 공연 중에 피습당해 몇 개월 동안 입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나 훈아의 팬들은
남진의 팬들이 나 훈아를 다치게 했다는 루머를 듣고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후일 가요계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나 훈아는 이 시기에 백마부대 명예 정훈대위가 돼
한달 간 파월 위문공연을 갔다가
1973년, 공군에 자원 입대해 큰 화제를 불러 모으면서
파월 장병들과 군의 사기 진작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영화배우 최무룡과 이혼한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와 1976년에 결혼을 발표하며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인기도 결혼과 함께 방송 출연이 점차 줄어들고,
라이벌이었던 남진도 신 군부의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2인 체제가 사라지게 됩니다.
1977년에는 심수봉이 무명시절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노래실력에 감탄한 나머지
즉석에서 레코드 사 사장을 불러 그 자리에서 심수봉을 가수로 데뷔시키는데
힘을 실어주기도 한 일화는 뒷 날 심수봉의 증언을 통해
알려진 미담 중의 하나로 회자되기도 하였답니다.
결혼과 동시에 방송에 좀처럼 출연하지 않고 잠잠했던 나 훈아는
1981년에 8집 대동강 편지를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복귀하여
MBC 10대 가수 특별가수상을 수상하였고
1984년에 대형가수 중에서는 조용필 다음으로 일본에 진출하여
데이지쿠 레코드 사와 성공적으로 계약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나 훈아는 일반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나 훈아의 공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됩니다.
방송에서 그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설과 추석 등 명절의 나 훈아 특집 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홍보와 마케팅에 집중하는 젊은 가수들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는
뜸한 방송활동이 오히려 그에게는 관객들을 몰려들게 했고
한층 그의 존재감은 전설처럼 상승했던 것입니다.
또한 주로 서정적이면서 슬픈 Romantic한 곡들을 불렀는데
‘갈무리’, ‘영영’,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홍시’라는 곡이 대표적인 곡들이었습니다.
나 훈아가 데뷔할 때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대중가요를 왜색가요라고 시비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으며,
방송가요심의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창조적이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가요와 왜색가요는
방송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면서 통제하기에 이르는
이른바 대중가요계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1970년대 트로트 말고도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등장하면서
음반 판매량 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은 한 층 발전하게 됩니다.
그 중 나 훈아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과 더불어
작곡과 작사 능력으로 대한민국의 Singer Song Writer로 자리매김했으며
199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약 2,500곡을 취입하고
정규 19개를 포함한 200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나 훈아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약 100곡 이상 정도 추정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공(空) / 나훈아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 주진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 년도 힘든 것을 천 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 없다는 것을
띠리 띠리 띠리리리 띠 띠리 띠 띠리
띠리 띠리 띠리리리 띠리 띠리 띠리리
살다 보면 알게 돼~ 알고 싶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미련하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희미해져도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잠시 스쳐가는 청춘 훌쩍 가버린 세월
백 년도 힘든 것을 천 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띠리 띠리 띠리리 띠 띠리리리
띠리 띠리 띠리 띠리 띠리리 리리리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