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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묵상글 (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 사랑하며 기도하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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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0 03:17
- 사랑하며 기도하며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오늘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시는데
누구보고 위로하라는 말씀일까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죽는소리하는데
누가 누구를 위로한다는 말입니까?
정해진 사람이 있습니까?
정해진 사람은 없지만 뽑힌 사람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위로자로 뽑으실 때 응답한 사람이고,
자기는 위로자가 되기 싫고 위로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고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적게 뽑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응답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당이 비좁아서 천국 문이 좁은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위로자로 주님께서 부르실 때 뽑히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생각해볼 것입니다.
나는 위로받는 사람인 것이 좋은지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은지.
힘들다고 죽는소리를 와서 하는 사람이 많은 내가 좋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죽겠다고 하소연이나 하는 내가 좋은지.
위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 좋다면
이제 위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도록 해야겠지요.
어떻게?
어떻게 사랑을 키웁니까?
‘사랑하며 기도하며’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면서 배우고 성장케 합니다.
그러면서 꼭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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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는 매주 산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등산하면서 다음에 등반할 산을 생각했고, 등산 갈 생각에 설렘을 갖고 또 한 주간을 보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을 소홀히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편안하게 등산에 임하려면 열심히 한 주를 보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고 물으면, 저기에 산이 있으니 오르고 그곳에 계속 살 수 없으니 내려온다고 답했습니다. 남들과 다르지만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늘어나면서 산에 가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가고 오는 교통 시간과 등산의 시간을 모두 포함하면 온종일 시간 투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를 ‘남들도 모두 그렇게 사니까….’라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등산을 멀리했습니다. 결국 지금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좋은 취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남들이 간 길을 그냥 따라가는 삶은 편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든 말든 진정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잘해 나가는 삶,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이 되어 기쁨 안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사는 삶이 목표가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삶이 과연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나처럼 사는 삶, 나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삶이야 말로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작음도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논리는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이런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 뜻을 따를 때만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통해 나의 고유함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내침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볼품없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의 뜻을 따른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더 크게 쓰시고 받아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않는 큰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 작은 사람이 되는데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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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G.E.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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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 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뜻”(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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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크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보면,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적혀 있습니다. 사실 지금 완벽한 사람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얼마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못된 사람도 결코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고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문제 있는 이는 언제나 있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을 지녔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인 예수님께 온전히 의존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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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당에서 ‘죽음 교육’이 있었습니다. 죽음 교육의 첫 시간에 김소엽 시인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 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후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죽음 교육의 목적은 잘 사는 방법을 찾는 거였습니다. 죽음 교육의 목적은 잘 익어가는 거였습니다. 죽음 교육에서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았습니다. 좋았던 일, 보람 있었던 일, 행복했던 시간을 찾아보았습니다. 괴로웠던 일, 슬펐던 일, 아쉬웠던 일, 불행했던 시간을 찾아보았습니다.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어우러지는 쌍곡선이라는 말처럼 많은 분이 행복했던 기억, 불행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교적 평탄했던 저의 인생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희망과 절망도 있었습니다. 인생의 그래프에서 안 좋았던 시간은 극복하고, 좋았던 시간은 반복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죽음 교육에서 ‘솔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솔개는 장수하는 새에 속한다고 합니다. 40살 무렵이 되면 솔개는 부리는 커지고, 날개는 무거워지고, 발톱이 무디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솔개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서 6개월간 인고의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먼저 커진 부리를 바위에다 부딪친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리가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부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 나온 부리로 무디어진 발톱을 뽑아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발톱이 나온다고 합니다. 무거워진 날개 깃털을 뽑아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깃털이 날개를 덮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면 솔개는 새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다음 30년을 힘차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솔개’처럼 살아야 합니다. 솔개가 부리를 바위에 부딪쳐서 없애 버리듯이 낡은, 우리의 습성을 없애야 합니다. 솔개가 약해진 발톱을 뽑아 버리듯이 나약한 우리의 습성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솔개가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 버리듯이 못된 우리의 습성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그날이 오면 유배가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평등의 세상, 자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제가 살았던 서울도, 지금 살고 있는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깊다면 서울도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언덕이 높다면 지금 살고 있는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메워진다면, 언덕이 평평해진다면 어디에 있어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날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길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운과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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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소금 장수가 소금을 배 위에 실었습니다. 배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돌풍이 불었습니다. 배 에 가득 실은 소금 중 한 포대가 강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소금 포대는 강 위에 잠시 떠 있더니 이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소금 장수는 그 모습을 아까운 마음으로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은 소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소금 장수가 강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한 모습입니다. 혹여 뛰어든다 해서 소금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정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이치와 하느님의 이치는 다른 듯 합니다. 세상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다른 듯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잃지 않으려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하느님이 불공평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꼭 하느님께서 우리 집보다 이웃집을,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차이를 보인다 느껴진다면 우리 마음의 방향에 따른 것일 겁니다. 즉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바보 같은 모습으로 말 한마디, 손짓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늘은 바보 같은 사랑 한 번 해 보심이 어떨까요? 세상 이치를 떠나 바보처럼 웃어주고, 바보처럼 용서해 주고, 바보처럼 이해해 주심이 어떠십니까?
그러면 우리들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가 서서히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안에서 탄생하실 것이며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실 것입니다.
⭐오래되면 썩는다는 말
우리 말에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격언이 늘 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맞는 것 같습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무언가에 의해 변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유혹이 늘 우리를 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되면 소유하려 합니다.
오래되면 놓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오래되면 첫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썩어갑니다.
사람도, 봉사도, 희생도….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는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깨어 기도함은 늘 자신을 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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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주님
“희망과 기쁨, 위로와 연민, 온유와 겸손”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교회가 시복시성을 위해 노력중인 ‘하느님의 종’, 착한 목자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묘비명입니다. 믿는 이들 역시 늘 착한 목자 주님을 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전 수도원 분원장 직을 맡았을 때 “공동체의 장상이기 보다는 형제들을 섬기는 목자로 생각하라.”는 장상의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착한목자 주님의 진면목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초점은 “길 잃은 양 한 마리”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마리가 있는 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복음에서 하나이지만 실제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곳곳에 길을, 희망을, 꿈을, 비전을 잃고 유혹에 빠져 방황하고 죄를 짓고 병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주님을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 각자 잃은 양이 되지 않기 위해 늘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찾는 노력도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더 나아가 참으로 바람직한 삶은 잃은 양을 찾는 착한목자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이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착한목자 주님이십니다. 앞서의 복음 내용도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곳곳에 길을 잃은 작은 이들이요 우리 또한 여기에 속할 수도 있겠고 모두가 하느님의 연민의 구원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목자 주님 중심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있는 아흡아홉에, 하나 만이 공동체로부터 떠나 방황하는 길잃은 양이 된 것입니다. 새삼 어디에 있던 주님의 공동체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자각이 얼마나 큰 위로와 안도감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형제들과의 관계가 깊고 좋으면 어디나 지상천국의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교황님도 늘 강조하는 것이 “더불어(together)”의 여정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가 길잃은 양이요 지옥입니다. 공동체 안에 함께 살아도 순전히 고립단절의 삶이라면 길잃은 양이요 지옥같은 삶입니다.
그러니 관계의 욕구는, 공동체 소속의 욕구는, 길이자 희망이신 착한목자 주님을 찾는 욕구는 누구나의 근본적, 생래적 욕구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늘 이런 길잃는 작은 이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찾아 나섭니다. 어찌보면 우리들은 모두 길잃은 작은 이들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이런 길잃은 작은 이들을 불철주야 찾아 나선 착한목자의 사랑에 응답하여 착한목자 주님을 찾는 적극적이고 항구한 응답이 절대적입니다.
대림시기는 바로 우리 모두가 우리를 찾아 오시는 착한목자 주님을 기다릴 뿐 아니라 마중 나가는 시기입니다. 대림시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마디는 “오시는 주님”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이 공동체 안팎의 모든 형제들이 온통 찬미의 기쁨으로 깨어 가슴 활짝 열고 오시는 착한목자 주님을 맞이할 것을 촉구합니다.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그분은 오시어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공동체 안팎의, 길잃은 모든 이들이 분발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대림의 공동체에 합류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화답송에 앞서 이사야서도 우리의 참여를 촉구합니다.
“기쁜 소식은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귀환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온처럼, 예루살렘처럼 대림의 주님을 맞이하라 하십니다.
“보라,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모두를 품에 안으시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 대림의 착한목자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을 받은 이사야는 또 우리에게 세가지 요청을 하십니다. 1.위로와 2.주님을 길을 닦는 것, 3.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착한목자 주님은 위로의 주님입니다. 길잃은 작은 이들을 물론이고 위로의 구원을 갈망합니다. 정작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아라.”
대림시기, 참으로 내적으로 회개하여 치유되고 정화되고 성화되어 온유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이며 바로 대림시기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입니다. 이어 본연의 인간모습을 되찾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하느님 중심을 확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무지와 무의미, 허무의 심연에 함몰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새삼 은총의 대림시기 하느님 말씀과 하나되는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 필수공부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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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를 찾아서>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오 18,14)
잃어버린 하나를
기꺼이 찾아나서는
애틋한 마음 안에
하나는 이미 있기에
누군가 못된 마음으로
굳이 없앤다 해도
그리하여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다 해도
잃어버린 하나를
애써 품는 마음 안에
하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늘 그렇게
마음에 품고 있는
잃어버린 하나를
찾아나서는 이에게서
어느 누구도 하나를
결코 빼앗을 수 없나니
잃어버린 하나를 향한
첫걸음만으로도 넉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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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우리가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보살피도록 얼마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러니 ‘저자는 대장장이야. 신기료장수야. 농사꾼이야. 저 작자는 멍청이야’ 같은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은 그를 업신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마음이 들 경우, 주님께서 얼마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온화한 사람이 될 것을 촉구하시고 이 작은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명령하시는지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그들 기운데 세우시고 ‘어린이처럼 되라’(마태 18,3 참조)고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10절) “죄짓게 하는"(마태 18,6) 자는 최악의 운명을 맞을 것입니다.
그분은 연자매를 예로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불행 선언과 함께 그런 사람을 우리의 손이나 눈인 것처럼 잘라버리라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뜻과 수난을 통해 이 작은 형제들을 소중히 여기심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그들을 소중히 여길 것을 촉구하시며, 그들에게는 돌보아 주는 천사들이 있음을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는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께서 이런 형제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로마 14,15 참조), 아버지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길을 잃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목자는 구원받은 이들은 놔둔 채 길 잃은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길 잃은 양을 찾으면, 그것을 찾아서 또 그것이 안전해 크게 기뻐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단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적당하게 먹어라." 1단식과 취식은 이분법적으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엑카르트는 미움과 사랑도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선을 사랑하거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성질 같은 행위다다.이때 모든 악도 하느님을 찬미한다. “어둠, 궁핍, 결점, 악조차도 하느님을 찬양한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아는 일에 부정의 길이 유악한 까닭은 앎이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모든 지각 대상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오감이 모든 지각 대상을 여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성 역시 만물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여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만물을 보듬고 계신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만물을 여의어야 합니다.(293)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히늘과 땅의 주인이신 당신을 흠숭하며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 당신을 경배하나이다. 당신의 선하심을 노래하는 모든 이와 함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기리는 모든 이와 함께 찬미하오니, 그들과 마음으로 하나 되어 당신께 찬미가를 부르게 하소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흠숭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름으로 당신을 경배하나이다. 당신을 사링하지 않거나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 당신을 미워하고 비난하는 이들의 이름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믿지 않거나 진리를 거부하면서 공허한 믿음만 안겨주는 거짓 신을 믿는 이들을 대신하여 당신을 믿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이나 당신의 평회를 바라지 않는 이들 폭력과 투쟁을 선호하고 악령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긴 이들의 이름으로 당신을 받이들입니다.
시간의 주님이신 예수님, 이 해가 저를 비롯한 모든 민족과 나라가 새로 시직하는 한해가 되께 하소서!(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281)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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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fisherpeter] 241210. 02:05 ㅣNo.178337
오늘 복음 또한 잘 아시는 복음입니다. 오히려 간결한 내용의 복음이라 다른 각도에서 한번 접근해봤습니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잘 이해를 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오늘 복음을 들여다봤으면 합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뜻하는 바는 비율로 보면 1프로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마리의 양도 보호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서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만약 여러분이 목자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사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풍습을 이해를 해야만이 더 잘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비유입니다. 저는 오늘 이것도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것까지 언급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그렇습니다. 한 마리의 양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 되겠습니까?
만약 그 한 마리쯤 잃으면 잃지 하는 식이라면 이건 인간 세상의 형법의 논리라면 그냥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입니다. 미필적 고의라는 표현은 뉴스에서 잘은 모르실 수도 있지만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적극적으로는 살인을 하려고 하는 고의는 없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그러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해도 내가 의욕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어나면 할 수 없지 하며 그 상태를 내심 받아들여 인용하는 상태의 고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논리로 본다면 살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찾지 않으면 그 양은 굶어죽을 수 있고 다른 요인 때문에도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에도 애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주지 않아서 애가 죽어도 부작위에 의한 유기치사죄가 성립합니다. 형법상 이런 형태를 부진정부작위범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가 행위를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때 사용하는 형법상 용어입니다.
만약 엄마가 기소돼 방어권으로써 난 단지 젖만 주지 않았다고 변론한다면 이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만약 다른 여인이 애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저는 세상 형법의 논리이지만 이 논리를 한번 생각해보면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목자는 이래야 합니다. 어떤 목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목자도 있는 걸 저는 봤습니다. 정말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입니다.
분명 복음에도 이 내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아흔아홉마리 양이 나한테는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 마리 양은 포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포기를 하는 이유가 아주 무서운 이유입니다. 바로 상대적인 비율입니다. 양입니다. 그와 같은 목자는 겉으로 보기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습니다. 만약 이런 경우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마리를 구하게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잃게 된다는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 한 마리를 잃지 않는 게 하느님 뜻이라고 해서 무모하게 한 마리를 선택하려고 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목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극단적인 비유를 들었지만 이런 상황을 이해를 해야 우리가 함부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왜곡해 해석할 여지를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한 번 더 하느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다시 한 번 더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이 표현은 사실 중의적인 함의가 포함된 면도 있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 드리기 위해 이런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한 명까지도 구원하는 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다른 말씀을 한번 살펴보면 마음은 그 한 명까지도 구원을 하고 싶은 게 하느님 마음이라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인간세상에도 자기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말이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복음을 이런 관점에서 묵상하는 건 만약 우리 교회에 이처럼 다수의 교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어떤 한 개인을 보호하는 것을 방임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 목자가 이런 부분을 평소 생각해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모를 수 있는 목자에게 한번 상기해 드리고 싶어서 이런 묵상을 해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 언급한 목자는 개신교 목자였습니다. 설마 천주교에서는 이런 목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여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런 목자는 분명 나중에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런 목자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사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리가 평소 표현하는 이 표현을 얼마나 잘못 사용하는지 그것까지 묵상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것까지 설명하면 너무 묵상이 길어져서 언제 또 기회가 되면 이 표현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지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표현입니다. 잘못 사용하면 마치 살인적인 무기와 같은 게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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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잃은 그 한 마리 양 찾는 목자 곁에서 /
박윤식 [big-llight] 241209. 18:19 ㅣNo.178333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이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은 그곳에 남겨둔 채 길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리하여 그가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찾은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처럼 이 작은 이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고자 그 어떤 수고도 감수하시고 찾으신 뒤에는 그 양을 메고 참으로 기뻐하신단다. 이게 바로 가난한 이, 죄인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어루만지시고 덜어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이리라. 그분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비의 마음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라틴 말로 ‘자비(misericordia)’라는 말은 두 의미가 합쳐진 것이란다. 하나는 슬픔 또는 괴로움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함께하는 마음이란다. 따라서 자비란 마음이 슬픈 이에게서 오는 것이리라. 그래서 자비로운 이는 다른 이의 고통을, 마치 자기 일로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그 고통을 없애려 할 게다. 이처럼 함께하는 그 양들은 주님 품안에서 위안으로 즐거움을 찾는단다. 그렇지만 잘못된 길로 빠져 엉뚱한 길로 빠져 나간 주인 잃은 그 양들, 그것들은 양 찾아 나서시는 주님에게서 사랑과 자비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나.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이들까지도, 모두 품기를 바라신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널리 퍼진 현상 중에서 아주 염려스러운 게 이른바 왕따이란다. 비단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알게 모르게 따돌림 당하는 이들이 참 많다. 우리 역시 은연중 그런 행위에 동참하지나 않은지를 생각해 보자. 누군가로부터 어떤 특정인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것을 자세히 알아보거나 진위를 확인하지도 않고, 본의 아니게 막 퍼뜨리는 경우마저 있다.
어쩌면 이렇게 뜻하지 않게, 어느 특정인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키는 일에 동참할 때가 있을 게다. 나의 편리함이나 집단의 암묵적인 강요로 그를 소외시키는 일에 무심중 동참할 때도 있었으리라. 이는 역사적으로도 쾌나 비일비재했다. 유다 지도자들의 농간으로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흥분하여 소리 지를 때, 일부는 그분께서 죄 없음 알고도 침묵을 지켰었다. 그 책임은 누가 질까? 잘못을 저지른 자만이 회개하는 건 아니다. 회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회개는 주님 사랑하는 거다.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온몸 되돌리는 것’이리라.
우리는 공동선을 찾아야만 한다. 부부는 신혼의 느낌을 되살리는 거고, 직장인은 처음 근무 때의 그 열정 되찾는 거다. 오래된 믿는 이라면 세례 때의 그 순수함을 되찾는 것도. 이건 결코 쉽지만은 아닐 게다. 그러기에 그 어떤 계기가 주어져야만. 가을에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린 나무는 봄이 되면 다시금 시작한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그 모습으로 주님을 보면서 살아가자.
주님께서는 내적 친밀감의 표현인 당신 마음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드러내신다. 목자의 표상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신다. 잃어버린 양들에게 부드럽게 행동하실 뿐만 아니라,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시다. 사랑은 함께하면 그 기쁨 배 되리라. 더구나 주님 곁에 늘 머무름은 그 크신 자비 더 느낄 게다. 이러니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 보자. 그분께서 그 한 마리 양을 찾으시고자, 그 수고까지 감수하신 걸 늘 기억하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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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이사 49,14-16).
이사야 예언서의 이 말씀이 마치 오늘 복음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잊으시거나 포기하셔 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당신을 떠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이며, 당신 사랑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주인공이 됩니다.
기도가 사라져 버린 삶에 다시 기도가 시작된다면, 그 또한 하느님께 더없는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와 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없는 기쁨을 드리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바빌론에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에게 하신 이 위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니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품고 우리의 목자이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양이 되어 오늘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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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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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초점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백 마리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돈이 99만원인데
조금 더 노력해서 100만원을 만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은
백 마리 가운데 하나이기보다
한 마리로서 소중하기에
그 양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도
각각이 소중합니다.
때로는 비유에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둔 채
길을 나서는 것이
나머지 양들을 방치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한 마리를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해되는데
그렇다고 아무런 보호 없이
나머지 양들이 방치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에 빠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 두는데
그 장소는 산입니다.
루카복음도 똑같은 비유를 전하는데
거기에는 광야라고 언급됩니다.
즉 산이라는 표현은
마태오복음의 의도를 담고 있는 표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산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목자는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하느님의 보호에 맡기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도 소중하기에
아무런 보호 없이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렇듯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으며
설사 그 보호에서 벗어나게 되어도
하느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찾아
그 보호를 받게 해 주십니다.
그만큼 또한 우리는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될까 걱정할 필요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유를 살아가는 오늘이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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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 13)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대림시기에
깨닫게 됩니다.
우리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방법도
길을 찾는
방향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친히 길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길을
잃음이
불러오는
간절한 회개의
마음입니다.
길을 잃었던
시간
모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를
회개로
안내합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회개로
이루어지는
성탄입니다.
회개로
다시 출발하는
예수님과
우리의
기쁨입니다.
회개를
기다려주시고
회개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기쁨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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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번 판공 성사는 이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대림절만 되면 각 본당 마다 성탄 판공 성사가 운영됩니다.
판공 성사 표까지 배부가 되고, 봤는지 안 봤는지 체크가 되니, 거의 반강제적인 제도라고 불평하실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발걸음을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려놓고자 하는 은혜로운 제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특강 다니는 곳 마다 목청껏 외치고 있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안에 자비하신 주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길 잃은 어린 양 한마리 되찾는 것을 당신 삶의 가장 큰 보람이요 기쁨으로
여기시는 주님께서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 12-13)
지난 세월 고백소 안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보니 참으로 맞는 말씀 같습니다.
낚시꾼들이 잔챙이를 잡을 때는 기분이 별로지만, 대어를 낚으면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
고백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들이 큰 죄를 털어놓을수록 기쁩니다.
30년 냉담자의 고백을 듣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교우들이 걱정들 하시는데, 고백소 안에 계신 신부님께서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누군지를 알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이 엄청난 죄를 들으시고 충격받지 않으실까?
그래서 어떤 분들은 목소리를 평소와 다르게 변조까지 하십니다.
부탁드리건데 절대 그런 걱정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백 사제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대신해서 죄를 사해드리고,
교우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새 삶을 시작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님께서는 우리로부터 값지고 좋은 선물도 기쁘게 받으시지만, 우리의 죄, 수치스러움, 꿈에도 생각나면 부끄러운 흑역사, 혹독한 실패, 이런 모든 부정적인 것들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는 그 작업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고백소 안에 앉아 우리 교우들이 이렇게 고백성사를 보셨으면 하는 것을 몇가지 적어봤습니다.
1. 내 죄만 고백한다.
2. 그분의 죄는 그분이 고백하도록 놔둔다.
3. 그분의 부족함은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긴다.
4. 고백 사제 뒤에는 자비하신 하느님도 함께 앉아 계심을 굳게 믿는다.
5. 주님께서 내 죄를 적당히가 아니라 온전히 사해주심을 확신한다.
6. 고백 사제들은 들은 바를 신속히 망각한다는 것을 믿고 안심한다.
7. 제일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죄부터 고백한다.
이번 성탄,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서 탄생하셨듯이 우리 각자 안에서도 탄생하시기 위해 우리 각자 영혼의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 영혼을 말끔히 정화시키고, 매일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도
계속 정화시킨다면,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거룩하고 흠없는 지성소, 구세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적당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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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목자와 길 잃은 양
예수께서는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백 마리의 양 떼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것은 목자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양이 무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양은 태초에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다. 아담은 죄를 지어 천사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 때문에 인류 전체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부르신다. 그분의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착한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나머지 양 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것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길잃은 백 번째 양을 찾으면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사회로부터 냉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면 그들과 함께 기뻐하셨다. 예수님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차별 없이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는, 그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되도록 모든 교우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처지를 생각 못 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고 하면서 조건이나 기억을 가지고 대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회개한 다음에는 기쁨만이 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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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 도움은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의 몫
만약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환자를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해 볼까요? 만약 이 간호사가 자신이 구해 준 남성의 가족에게 계속 금전을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자기 아버지를 구해 준 이 사람에게 계속 돈을 빌려주거나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고마움만으로는 마음의 문이 지속해서 열리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어느 용병대장이 적으로부터 한 도시를 구해주었습니다.
이에 성내의 선량은 시민은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갖가지 방안을 짜냈습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까? 금전으로 보답하는 것은 너무 경박해 보일 듯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금, 은을 주더라도 어찌 성내 시민을 지켜 준 공적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이 용병 대장을 성의 영주로 임명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곧 또 다른 이들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반박했습니다.
사람들은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를 목매달아 죽인 후에 우리의 수호성인으로 모시자.”
결국 용병 대장이 받은 보답은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그 사람이 자신에게 고맙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지혜로운 사람은 고마운 존재가 되기보다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상대가 당신에게 고마워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의지하게 만들어라.
의지하는 것은 오래 기억되지만, 감사의 마음은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에서 목을 축이면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아무리 맛있는 과일을 먹어도 먹고 난 뒤 껍질을 쓰레기통에 던진다.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더 이상 예의도 존경도 사라진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할 때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 또한 교만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에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고마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짐’과 같습니다. 보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짐을 지워주면 지어줄수록 부담만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줄기차게 얻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열어 모든 것을 얻어내려면 그분께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그분께 어떻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한 마리 양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양들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도움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영화 ‘인턴’은 70세의 은퇴한 벤 휘태커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온라인 패션 회사의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시작됩니다.
벤은 회사의 젊고 재능 있는 CEO 줄스 오스틴과 함께 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줄스가 그를 부서 이동시키려 하며 벤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벤은 경험과 지혜, 따뜻한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으며 점차 줄스의 신뢰도 얻게 됩니다.
줄스에게 필요한 인생의 조언을 해 주며 회사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기 때문입니다.
줄스는 사업과 가정을 동시에 관리하며 겪는 스트레스와 고립 속에서 벤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벤은 그녀의 삶에 조언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며 줄스가 자신의 약점과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벤은 줄스에게 단순한 인턴이 아닌,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멘토로 자리잡습니다.
결국 줄스는 벤이 자기 삶과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닫고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줄스는 회사에서는 벤이 인턴이지만, 인생에서는
자신이 인턴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에 인생을 오래 산 벤의 품격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당신 십자가를 양보하였습니다.
시몬은 그렇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는 죽어서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계속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청하기 이전에 내가 그분의 필요에 관심 두는 사람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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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착한 목자를 잘 따라가려면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1) ‘되찾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은 어떤 메시아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하나를 애타게 찾는 ‘착한 목자’이신 메시아(구세주)입니다.
‘잃은 양’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입니다.
‘작은 이들’도 ‘모든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은 ‘잃은 양’의 처지에 있습니다.
14절의 ‘하나라도’ 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잃은 양’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되찾은 양’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되찾은 양’이 될 수 있는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때가 곧 ‘되찾은 양’으로 완성되는 때입니다.
2) 그런데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그것을 얻기를 희망하지도 않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또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기는 잃은 양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의인인지 죄인인지
판단하는 일은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권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 문제를 함부로 판단하는 것도
죄가 되지만, 자기 자신의 구원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되찾은 양’이 되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3)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는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이 강조되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되찾은 양’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의 첫 번째 목적은 ‘목자의 기쁨’보다 먼저, 바로 ‘나 자신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기를 원하니까, 내가 살기를 원하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나를 애타게 찾으시는 것도, 나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것도, 당신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나의 신앙생활이 인정받아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되면, 그때 바로 나 자신이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물론, 기뻐하는 나를 보면서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착하게 살아라. 공부해라.’
같은 말을 할 때,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라고 말할 때가 많은데, 아직 철이 안 든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잔소리라고만 생각하거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철이 들면, 부모의 그 말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가르침대로 착하게 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크게 기뻐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심정은 바로 그런 부모의 심정입니다.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은 그 심정을 나타냅니다.>
4) 주님께서는 ‘가짜 목자’를 따라가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양들을 속이려고 하는 가짜 목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적이 없는 세속의 물질적인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 목자들입니다.
<양들 쪽에서 먼저 그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바라는 경우가 있고, 그것은 스스로 진짜 목자를 버리고 가짜 목자를 따라가는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지금 얻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착한 양인가?”를 성찰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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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8,12-14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다니는 선한 목자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는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반면,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양들을 ‘산’에 놓아두고 길을 나섭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광야’와 ‘산’은 천양지차입니다. 광야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환경인데다 양들의 목숨을 노리는 맹수들이 우글거리지만, 산은 배고프면 뜯을 풀이 있고 자기 몸을 지키기에 용이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한 장소라는 점이지요. 그것이 목자가 아흔아홉마리 양을 놓아두고 길을 떠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 양들은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굳이 걱정할 필요 없이,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산에 덩그러니 남겨진 양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지켜줄 목자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불안하고 걱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을 이끄는 목자가 단 한 마리 양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끝까지 챙기며 결국엔 되찾아 오는 모습을 자기들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그들이 느꼈던 불안함과 걱정은 오히려 든든함과 높은 자존감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도 그 양처럼 똑같이 길 잃은 처지가 되었을 때 목자가 찾으러 와 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하나 하나가 목자로부터 그토록 큰 사랑을 받는 특별하고 귀한 존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께 소중하다는 점을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중간에 놓쳐버린 것이 길을 제대로 보지 않은 나의 부주의 탓이든, 다른 것에 한 눈을 팔아도 금방 다시 쫓아갈 수 있다고 여긴 나의 경솔함과 교만 탓이든 상관없이, 주님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당신 양을 끝까지 찾아나서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손에 맡기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비유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다는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크신 자비를 알려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당신 목숨을 바쳐 그 사랑을 직접 행하셨으며, 그 사랑의 실천을 당신의 기쁨이자 사명으로 삼으셨지요. 그러니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도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마땅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먼저 찾아나서시는 주님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느님 품에 돌아오는 것을 그분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산에 놓아두고 떠나셨던 주님의 믿음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돌아온 탕자의 형처럼 되지 않고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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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양 한마리가 길을 잃으면 ”
이곳에 와서 사목활동 중에 하나가 면담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교우들 때문에 고해성사에서 시간 때문에 다 못 듣는 이야기는 따로 시간을 내어 듣습니다.
얼핏 보면 이민생활이 단순한 것 같아도 이제까지 살아오다보면
남들에게 다 비추어 주지 못하는 아픔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도 소외된 사람들이고 때로 이야기를 듣고 나면 주님께 달려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셔야 한다고 매달릴 때도 있습니다. 너무나 딱한 삶의 모습들이 있지요.
‘잃어버린 양’이라고만 하는 복음의 주님 비유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침묵을 지킵니다.
양은 무리를 져서 풀을 따라 이동합니다.
양들을 보면 그냥 있을 때보다는 열심히 풀을 뜯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간혹 가다가 양들이 풀들을 따라 가다가 보면 양떼에서 멀어 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웅덩에 떨어지거나 낭떠러지에서 굴러 밑으로 내려 갈 수도 있습니다.
양은 순한 이면에 무척 약하지요. 맹수들이 목자의 품에서 떠나 양을 그냥 둘리가 없지요.
그래서 길 잃은 양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두 명의 목동들은 숫자를 세다가 모자라면 그 양을 찾으러 나섭니다.
양은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기 때문에 목동은 양을 찾으면서 특유의 소리를 냅니다.
풀 섶이나 나무사이라든지, 낭떠러지에서 길 잃은 양을 찾을 찾으며 다행인데,
때로 온 밤을 헤매며 그 양을 찾아야 하지요. 밤에는 더욱 맹수에게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사랑하는 목동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길을 잃고 헤맬 양을 생각한다면
그 목동은 한시도 멈추지를 않고 양을 부르며 여기저기를 다닙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숫자에 의해 여러 정책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인간에게는 숫자가 주는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다보면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의견을 어쩔 수 없이 무시되거나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숫자를 갖고 사람을 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한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소외된 사람의 소리도 듣습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4,18)
종말론적인 희망을 전하는 예언자는 사람의 헛됨에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6-8)
유배에서 지쳐 있는 그들은 삶의 덧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 희망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시온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또한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외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9절)
주님을 사랑이십니다. 구약에서 약속을 지키신 하느님이십니다.
한 사람도 버림받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이곳의 삶에 지쳐 있는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길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시듯 나를 걱정하시며 애타게 나를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그분에게 구원의 목소리를 힘차게 냅시다.
나를 찾아 나서신 그분이 알아들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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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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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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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삶으로 드리는 예배자의 삶
<2024.12.10> 아침을 여는 묵상 (암 5:18~27절)
❝삶으로 드리는 예배자의 삶❞
❚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 어떤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까?
➲ 거짓되고 헛된 희망을 버리고 순종과 긍휼을 구하는 예배자여야 합니다(18~20절).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을 사모’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에는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여호와의 날이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18절)고 말씀하십니다. 즉, 심판의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기쁨이나 희망의 날이 아니라 파멸과 어두움의 날이 된다는 것(20절)입니다. 사자를 피해 달아다나가 곰을 만나는 것과 같고, 집에 들어가 벽을 손을 대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19절, 쉬운성경)..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도, 신실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소망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은 그 누구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는 거짓되고 헛된 희망을 품은 예배는 결국 내 스스로에게 큰 수치만을 안겨다 주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슬픔과 절망과 불행의 날이 아니라 기쁨과 소망과 행복의 날이 될 수 있도록 거짓되고 헛된 희망을 버리고 순종과 긍휼을 구하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화려함과 많은 제물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로 드리는 예배자여야 합니다(21~24절).
거짓되고 헛된 희망을 품고 예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백성들이 드리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도 받지 않으시고, 돌보지 않으실 것(21~22절)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음악으로도 드리는 예배 또한 듣지 않으시겠다(23절)하십니다. 그 이유가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24절) 흐르지 않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배 행위들, 즉 장엄한 성회(21절), 제사(22절), 찬양(23절) 등은 그것에 합당한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예배는 삶으로서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보다 순종을 더욱 원하십니다. 순종이 빠진 거짓된 마음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를 아니 종교 행위를 하나님은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감사의 노래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예배’(시60:30~31절)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는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악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예배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예배당과 의식은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진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려함과 많은 제물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로 드리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형식적인 종교 행위를 버리고 믿음과 신뢰로 드리는 예배자여야 합니다(25~2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출애굽 이후 40년의 광야 기간 동안 부지런히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25절). 이는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식적인 종교적 행사로서의 제사 의식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숭배하던 실체가 ‘식굿과 기윤’(26절) 즉, 하늘의 별과 같은 우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27절).
우리는 우상 숭배를 하지 말아야 하며, 형식적,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진심으로 섬기며 순종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 참석, 헌금 등의 종교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섬기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죄를 멀리하고 우리의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버리지 못한 ‘식굿과 기윤’(26절)과 같은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의 종교 의식에 사로잡힌 우리의 예배가 아닌지 돌아봅니다. 아무 감격도 없이 마음이 없는 거짓된 예배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중심, 내 뜻에 맞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뜻과 중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잘못된 예배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종교 행위를 버리고 믿음과 온전한 신뢰로 드리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이루지 않는 거짓된 예배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삶이 예배가 됨을 언제나 인식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복을 주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삶이기를(암 5:18~2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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