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
처음 며칠을 고요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계속 기다리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불결한 무언가가 소리 없이 집 주위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기라도한 것처럼, 하지만 처음 하루이틀은 엄마의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흘째가 되어서는, 어쩌면 앞으로 그렇게까지 나빠지진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침마다 유기농 토마토 세개를 씻고 잘라서, 엄마가 알려준 대로 꿀, 얼음과 같이 믹서에 넣고 갈았다.
다른 음식은 더 어려웠다. 한국 음식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고 그나마 내가 할 줄 아는 요리 몇가지는 엄마가 소화해 내기에 버거웠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엄마에게 뭐라도 먹고 싶은 게 있는지 계속해서 물어봤지만, 엄마는 입맛을 완전히 잃어 나의 물음에 무심히 고개만 저었따. 그러다가 엄마가 유일하게 생각해낸 음식이 오뚜기라는 브랜드의 크림스프였다. 아시아 식품점에서 파는 이 인스턴드 가루는 맛이 순하고 소화도 잘될 것같았다.
유진에는 H마트가 없었다 대신 일주일에 두 차례씩 엄마와 나는 선라이즈 마켓이라는 어느 한국 가족이 운영하는 구멍가게로 한국 식료품 장을 보러 갔다. 아저씨는 작달막하고 피부가 가무잡잡했다. 아저씨는 큼직한 레이밴 스타일 안경을 쓰고 노란 작업용 장갑을 낀 채 새로 도착한 물건을 가게 안으로 들여놓느라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아주머니는 예쁘장한 얼굴에 아담하고 짧은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붙임성 있고 상냥한 아주머니는 보통 계산대에서 일했다.이따금씩 세 딸 중 하나가 식료품을 봉지에 담고 진열대 채우는 일을 도왔다.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 대학에 간 언니의 자리를 메꾸었다. 나는 딸들이 금전등록기로 콩나물과 두부를 계산하면서 엄마와 한국말로 대화 나누는 것을, 그러다가 딸들의 입장에서 명문 대학 이름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을 듣곤 했다.
가게 앞쪽에는 상업용 선반 위에 큼직한 쌀자루가 높다랗게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엔 열 종류가 넘는 김치와 반찬이 들어 있는 유리문 냉장고가 있었다. 가게 가운데에는 인스턴트 면류와 카레 등이 놓인 진열대가 있었고 반대쪽 끝에는 모둠 해물과 냉동 만두로 가득찬 냉동고가 줄지어 서 있었다. 뒤쪽 한구석에는 한국 비디오테이프 코너가 있었는데, 흰색 커버를 씌운 테이프 등에 손글씨로 제목을 세로로 적어놓은 불범 복제 테이프들이 선반에 빽빽하게 꽃혀 있었다.
엄마는 거기서 서울 친구와 가족들은 이미 오래전에 다 보고 이야기해준 철지난 한국 드라마 시리즈를 빌려 보곤 했다. 내가 얌전히 굴면 엄마는 계산대에 진열해놓은 주전부리를 사주었다. 보통은 야쿠르트나 작은 컵에 담긴 과일 젤리를 사주었지만,간혹 찹쌀떡 한봉자를 사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내가 아홉 살 때 선라이즈 마켓은 더 큰 가게로 이전했다. 엄마는 가게 확장과 함께 새로 들여놓은 수입 물건들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작은 나무상자에 담긴 냉동 명란이며 인스턴트 짜장면인 짜파게티며 물고기 모양의 페이스트리에 아이스 크림과 단팥 앙꼬를 넣은 붕어빵 같은 것들이었다. 엄마의 지나간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음식들은,옛날 입맛을 사로잡으려 새롭게 개발된 것들이었다.
우리가 늘 함께 다니던 곳에 혼자 있으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전에는 으레,파전에 쓸 냉동 모둠 해물과 부침가루를 요리저리 살피면서 어느 게 할머니가 쓰던 것과 가장 비슷한지 열심히 확인하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가만 했으니까. 이제 엄마의 카트에서 벗어나 엄마가 먹고 싶다 한 인스턴트 수프를 찾아 선반을 훑었다. 브랜드를 확인하느라 포장지에 적힌 한글을 떠듬떠듬 읽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