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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동도 한때는 진보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광동도 한때는 ‘진보’였다. 월간조선 2018년 7월호에 게재된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인터뷰 기사’를 보자.
“젊은 시절에는 그도 ‘진보’ 언저리에 있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좌파 지식인들과 북한 문제를 연구했다. 뭔가 그럴듯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1960년대 북한 경제를 공부했지만, 결과는 환멸이었다. 북한이 왜 실패했는지, 대한민국이 어떻게 성공했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한의 실체를 알고 나서 전향했다’는 흔한 레퍼토리다. 흥미로운 대목은 뒷부분이다. “그때 우연히 안무혁(전 국가안전기획부장) 당시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게 됐다. 그는 안무혁 의원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안 의원을 통해 그는 종전에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과거 대한민국을 만들고 이끌어 온 이들 가운데 실력이나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 많다는 것,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이 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님을 느끼게 됐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진보’에서 ‘보수’로 넘어왔다.”
그가 감화를 받았다는 안무혁은 육사 출신으로 전두환 시절 승승장구했던 ‘5공 인사’ 가운데 하나였다. 전두환 군사반란 직후 사회정화위원장을 역임한 안무혁은 국세청장에 이어 당시 부총리급인 국가안전기획부장에 발탁될 정도로 정권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안무혁은 1992년 제14대 국회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으로 배지를 달았다.
안무혁은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1995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 상정되자 ‘전두환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의원직을 사퇴할 정도였다. 전두환-노태우 뇌물수수 방조 사건에 연루돼 복역했다. 김광동이 이런 안무혁의 이력을 몰랐을 리 없다. 김광동은 ‘변신의 알리바이’로 안무혁을 내세운 것은 아닐까.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광동은 안무혁 의원 보좌관 이후 자유민주연구학회 회장,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을 역임하며 뉴라이트 활동에 전념했다. ‘직장인’으로서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국가보훈위원회 위원, 독립기념관 비상임 이사 등을 지냈다.
[윤 정부의 뉴라이트] 과거사 정리 위원회 위원장
"과거사위는 초헌법적 소비에트 정부" 비난 장본인
현 정부선 "이론-실무 겸비 국민통합 적임자" 둔갑
평생 굴절된 렌즈로 현대사 왜곡해온 뉴라이트 전형
박정희와 10월 유신, 독재자 이승만 미화에 적극
'광주항쟁' '4·3사건' 두고 "공산세력 무장투쟁" 강변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12일 취임식을 하고 있다. 2022.12.12. 연합뉴스
“과거사정리위 없애라”던 김광동
“혁명정부가 아닌 이상 과거사정리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같은 ‘초법적’ 기구는 존재 이유가 없었다. (…) 특히 제주 남로당의 4·3 반란사건에서 보듯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시키고 한반도에 소비에트정부를 만들고자 했던 반란행위도 잘못된 정부행위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자 희생자로 미화시켜왔다.
결국 과거사위의 활동이란 특별법을 근거로 3권분립을 짓밟고 정상적 법제도와 기존 판결 등을 무력화시키며 ‘현재’의 정치논리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고 있다. (…) 예산지출과 지원인력 확대를 통해 좌파 내지 친북세력의 육성과 재생산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 과거사위는 존립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진실 규명과 화해의 길이 아니라 역사 왜곡과 국민 분열만을 확대한다. 역사파괴이자 대한민국 파괴행위일 뿐이다.”
김광동이 2009년 9월 3일 ‘미래한국’에 기고한 칼럼 <대한민국 파괴하는 과거사위 정리하라>의 일부다. 김광동은 이 글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 과거사 관련 정부위원회들을 정리하라는 주장을 격한 어조로 펼쳤다.
김광동의 과거사정리위 비난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그는 초지일관 과거사정리위 비판의 최전선에 있었다.
“무슨 과거사위원회나 각종 시민단체위원회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위원회 정치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이 바로 소비에트 정부다.” (2009년 6월 2일, 기독교 우파 성향의 유튜브 채널 ‘참깨방송’)
“과거를 잘못이라고 규정하고 역사 청산을 자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그것은 실패하는 나라에서는 늘 반복되는 일이다.” (2016년 12월, ‘미래한국’ 기고문)
“역사적 성취와 업적을 만드는 데 전력을 투여해도 모자랄 것이 뻔한데 역사를 청산하고 다시 세울 자원과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현실성도, 사례도 없다.” (2017년 6월, ‘미래한국’ 기고문)
비난 퍼붓던 과거사정리위 수장 자리에 앉아
소가 웃을 만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런 김광동을 지난해 12월 9일 장관급인 과거사정리위 위원장에 임명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보도자료를 통해 “과거사 진실 규명에 대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여 과거사정리위 현안 업무 추진의 연속성은 물론 대한민국이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임명 이유를 밝혔다.
과거사위에 대해 “진실 규명과 화해의 길이 아니라 역사 왜곡과 국민 분열만을 확대”하고 “역사 파괴이자 대한민국 파괴 행위일 뿐”이라며 폐지를 주장하던 사람을 임명하면서 “적임자라고 판단”했다니 돌부처도 웃을 일이었다.
김광동은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 중에서도 활동성이 강한 편이다.
자유민주연구학회 회장,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자유민주연구원 정책연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자유민주연구학회는 2005년 10월 22일 출범한 뉴라이트 성향의 학술 단체다. ‘북한 및 국내 헌정질서 부정 및 파괴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를 수호하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한 제반전략을 연구, 전파하기 위한 단체’(자유민주연구학회 홈페이지 ‘창설 취지’)를 표방하고 있다.
1992년 출범한 나라정책연구원은 ‘변신 인사들’도 대거 참여한 뉴라이트 단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고성국 정치평론가 등이 참여했다.
김광동의 역사 인식은 대단히 극우적이다. 그는 뉴라이트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을 바라본다. 그의 말과 글을 살펴보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경도돼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이 지난 3월 13일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2023.3.13. 연합뉴스
지만원 비슷한 ‘광주항쟁’에 대한 인식
김광동은 2020년 10월 23일 ‘미래한국’에 기고한 <위기에 처한 개인의 자유…역사 인식에 대한 국가의 파시즘적 통제>라는 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주장을 펼쳤다.
“북한의 침략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문제가 되지 않고 북한에 의한 도발이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5·18사건이 북한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하면 범죄가 되는 현실이다.”
지만원이 주장했던 ‘5·18 북한군 개입설’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지만원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을 ‘북한 특수군’이라고 지칭하는 등의 주장으로 지난 1월 22일 대법원의 징역 2년 형을 받아 수감 중이다.
‘제주 4·3사건’은 공산세력의 무장투쟁?
“제주4·3사건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시기를 전후해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벌인 무장투쟁이자 반란이다.”
2009년 2월 18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재향군인회가 주최한 ‘호국·안보 세미나’에서 나온 김광동의 주장이다. 그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4·3사건을 두고 “경찰에 대한 정당한 항거행위로 규정짓는 것이나 대한민국의 건국저지 투쟁에 나서고, 군·경을 공격한 사람들까지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4·3사건이 ‘정부의 과잉 학살’이었다고 사과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정부 공권력에 의한 과도한 행위를 근거로 4·3 사건의 실체를 부정, 곡해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추진했던 행위를 부정한다면 대한민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훼손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세력에게 직간접적으로 휘둘리는 것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한국논단’ 2014년 4월호에 기고한 글에서는 “제주 4·3 폭동은 반한·반미·반유엔·친공 투쟁”이며 “4·3 희생자는 제주도민 유격대에 의해 발생했다”라고 왜곡했다.
4·3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한국전쟁 다음으로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규정돼 있다. 희생된 제주도민은 3만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절대 다수인 78.1%에 이른다. 무장대에 의한 희생 역시 있었지만 12.6%였다. 이는 2003년 4·3특별법에 따른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작업으로 파악된 ‘객관적 수치’다.
김광동의 주장 태반은 우익 단체들이 이미 해왔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익 단체들은 2009년 헌법소원, 국가소송, 행정소송 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시도했었다. 법원은 모두 각하 또는 기각 처리했다.
김광동은 2011년 6월 29일 제주에서 열린 ‘제주 4·3 교과서 수록 방안 공청회’에서 4·3을 “단독정부 수립 반대 및 거부투쟁이 아니라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반대와 친북·친소 체제를 자행했던 공산주의자들의 무장 투쟁”으로 규정,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숨기려는 독재정권과 목숨 걸고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1987'의 한 장면.
박정희와 이승만 찬양
“10월 유신은 당시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이 맞이한 국가 생존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자 도전이고, 그 대응과 도전에 위대한 승리의 시작이었다. 10월 유신은 우리 근현대사의 위대한 전환이자 성공의 기반이었다.”
김광동은 2019년 10월 17일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열린 ‘10월 유신 47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박정희와 10월 유신을 이렇게 미화했다. 그의 박정희 찬양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다.
“4·19 혁명과 5·16은 연속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고, 민주주의 기반한 민족주의 혁명이었다는 건 지난 30, 40년간 한국 발전 국가 보면서 누구나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은 4·19와 5·16 연속 혁명으로 새로운 번영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2015년 9월 유튜브, 정규재TV 강연)
“5·16 한국 군사혁명은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이 됐고, 실제 박정희 시대 이후 20년의 역사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
“대한민국의 늦어진 근대화, 공산주의와의 싸움 속에서 자유민주혁명과 근대산업혁명을 이뤄서 그 연장선상에서 계승적으로 발전되어 나간 것인데, 오히려 1987년을 만든 세력들이 민주화 세력이라고 주장하면서 1948년(이승만)과 1961년(박정희)을 독재라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 주장을 음으로 양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대한민국 역사가 계승되지 않고 단절된 이유다.”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
단독 혹은 공동 저자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화하는 여러 권의 책을 냈다. 박정희를 미화한 책으로는 <박정희 새로 보기> <4·19와 5·16> 등이 있다. 이승만 관련 책으로는 <이승만 깨기>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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