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45
8월10일[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연중 제18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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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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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Jt4UfFh-MU
[의정부교구 백병훈 요셉(덕정성당 협력사목)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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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 희생없는 성공을 경계합시다!>
저희 피정 센터는 바야흐로 대목입니다. 이박삼일 일정으로 아이들이 나가고 들어오고, 적막하던 어촌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목청껏 소리 지르면서 신나게 뛰놀고, 야무지게도 잘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다들 흐뭇해합니다.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동료 사제와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면서,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냐?” “젊을 때 공부 열심히 안한 결과!”라는 둥 농담을 주고받으며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뭐든 거저 되는 것은 없다는 것,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행사가 성공리에 치러졌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묵묵한 희생과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조용히 땅에 떨어져 썩고 죽는 밀알 영성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퍼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 역시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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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NKTfDeVI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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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과 자기 학대의 차이점>
신자 중에서 가끔은 용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성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가, 기도도 청하고 예언도 듣고 치유와 가르침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들은 대부분 외모가 비슷합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기보다는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일단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까지 주님께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 섞여 있습니다. 전혀 꾸미지 않고 그냥 고무줄 하나로 묶고 다닙니다. 옷도 생활 한복과 같은 멋을 낼 필요 없는 수수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성당에 앉아 있거나 엄청난 시간을 기도와 성경 필사 등에 투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가치 있는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학대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행은 좋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기 위해 단식하시며 고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행은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행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인도에 70년 이상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라흘라드 자니’입니다. 그는 하늘의 기운을 마시며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된 이후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여신 때문인지 그는 여성의 모습처럼 분장하고 다닙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자 인도 국방연구개발기구(ORDO)는 2010년 15일 동안 병원에서 그를 관찰하였습니다. 사람이 1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30명의 의료진이 카메라와 CCTV를 통해 그를 살펴본 결과 정말 그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장실에도 간 적이 없습니다.
놀란 의료진은 15일 뒤, 자니의 장기와 뇌, 혈관 등을 검사했으나 그 수치가 모두 정상인의 안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뇌의 상태는 25세 젊은이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DRDO는 그를 더 연구하면 군인들이 전장에서 음식물 없이 견디거나 재난 상황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는 의학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수행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왜 스승들은 이런 시도를 하는 제자들을 칭찬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유학 가서 신학생 때 고행을 한답시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잤습니다. 그러나 결국 음식을 먹을 때는 폭식을 할 때도 있었고, 잠은 수업시간에 잤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저 고행 자체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려고 하는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자기 학대는 자기만족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고행은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생을 말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으면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목적지가 사랑이라면 그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 고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를 죽이는 일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 고행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면 자기 학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오히려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하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배가 불러도 필요하면 더 먹어주기 위해 당하는 고통이 바로 고행입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것이 고행입니다.
한국의 방송국이 ‘프라흘라드 자니’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5일 단식 당시의 기록을 상세하게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 있다가 샤워한 후에는 그 소변이 싹 빠져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샤워 물을 마시고 그때 소변을 보았던 것입니다. 훈련되면 음식 없이 40일 이상 사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자니 씨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생한 자기 학대의 삶을 산 것뿐입니다.
반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황제가 원하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덕분으로 자신은 불로 달궈진 석쇠에 구워지는 고생을 하였으니 그것은 정말 고행입니다. 그것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몸을 조금 괴롭히는 것도 그것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한 열매의 목적이 아니면 상은커녕 평생을 자기에게 자기가 속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밀알은 썩어야 하지만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야 합니다. 그 열매란 나의 고생으로 이웃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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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3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끌려가 조롱과 멸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죽겠지만 다시 살아날 것이다.” 처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옷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는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였지,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확신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박해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제자들이 원한 것은 수난과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원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중풍병자를 걷게 하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으로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난과 죽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제 아들들을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둥지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밀알은 어쩌면 우리가 머물고 싶어 하는 둥지일 수 있습니다. 그 둥지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먹이가 있습니다. 그 먹이에 취해서 우리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둥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자들을 다그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재물이라는 둥지를 벗어났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보화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된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둥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둥지를 벗어나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시련의 바람이 불고, 고통의 암초가 다가올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며 힘차게 날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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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은 자신이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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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밀알은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으면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밀알이 없어져야 싹이 트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려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 있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기가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참 어리석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은 죽을지 말지 생각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씨앗은 죽고 다음 세대의 열매가 자랍니다. 또 그렇게 자라난 열매들은 누군가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다시 씨앗이 되어 그다음 세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은 본성에 따라 자연 질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뜻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어서, 때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길을 스스로 갑니다. “자기 목숨”(요한 12,25) 때문입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언덕이 멀리 있는 큰 산보다 크게 보이는 법이지요. 그래서 잠시 누릴 수 있는 눈앞의 이익, 편안함,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하고 밀알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합니다. 더 큰 것을 위하여 작은 것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택하는 것은 사실은 어리석음입니다. 밀알에게 배우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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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1) 지혜서 저자는 의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지혜 3,2-7)
이 말을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의 순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순교자들의 순교가 바보 같은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순교자들의 순교는 결코 ‘인생이 끝나버리는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생명을 누리게 되는 ‘영원한 인생의 시작’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가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5-60)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것입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스테파노의 목숨을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스테파노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환영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는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순교뿐만 아니라, 모든 충실한 신앙인들의 죽음은, 죽음이(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만이 죽음이라고(끝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지상에서의 인생을 ‘천막집’으로, 즉 임시 거처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새 인생을 ‘영원한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집’을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 ‘영원’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인생은 짧아도 아주 짧은 잠깐 동안의 일,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일 뿐입니다.
3)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밀알 하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으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땅에 심어진 밀알이 죽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잠깐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씨를 땅에 심는 일은, 그 씨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심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씨가 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씨, 즉 생명력이 없는 씨는 땅에 잘 심고 가꾸고 돌본다고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심기도 전에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하나의 씨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의 씨가 됩니다. 순교자들의 경우에도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씨로 자신을 바치고, 그 다음에는 순교를 통한 신앙의 증언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씨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자신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실격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했습니다.(1코린 9,27)>
신앙생활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생활입니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어떤 일에 대해서 스스로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희생한다고 해도, 그 희생도 사실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희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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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전승이 있습니다.
식스토 2세 교황이 미사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하여졌는데, 라우렌시오에게 “사흘 뒤 너도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던 성인에게 로마 총독이 교회의 보물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협박하자, 사흘간 말미를 달라고 한 뒤 모든 보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사흘 뒤에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나타나 바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였고, 이에 격분한 총독은 석쇠 위에 눕혀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인은 오히려 형리들에게 “자! 한쪽은 다 익었으니 나 좀 뒤집어 주시오.” 하였고, 마지막에는 법관을 향하여 “이제 다 익었으니 잡수시오.”라고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모두 재물과 생명에 대한 너그러운 자세를 통하여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을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즐겨 사용하시던 씨앗의 비유로 뜻밖의 수확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강조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오로 사도도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의 요점을 말하며 씨앗과 수확의 비유를 듭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것은 거저 받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쥐고만 있던 손을 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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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초세기부터 교회는 라우렌시오 성인을 공경하여 왔습니다. 성인을 그린 대표적인 성화를 보면, 부제복(달마티카)을 입고 한 손에는 불타는 석쇠가, 다른 한 손에는 교회의 ‘보물’을 담은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이것은 석쇠 위에서 오랜 고통을 겪으며 화형을 당한 그의 순교와,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보물로 여기며 돌보았던 애덕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또 다른 성화에는 한 손에는 석쇠가, 다른 손에는 월계관이 들려 있습니다. 이것은 라우렌시오라는 이름이 가진 뜻처럼 사랑의 삶과 거룩한 순교로 하느님께 월계관을 받은 성인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3세기 중반 교회의 재산을 탐내던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칙령에 저항하여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들이 교회의 보물들입니다.” 이때 성인이 가리킨 이들은 가난한 이들, 병자들, 소외된 이들, 이방인들로 성인이 날마다 교회의 재물로 돌보던 이들이었습니다. 황제는 그를 석쇠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펴 서서히 죽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애덕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행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제1독서 참조)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사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이웃에게 선물로 내주는 인생에 대하여 성찰하게 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삶,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아낌없이 내주고 기쁘게 주는 삶에 대하여 생각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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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3~24)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의미는 시간이 한 참 흐른 다음에 비로소 이해됩니다. 예전 누이 무덤에서 울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를 물었다면, 지금은 누이의 죽음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의 방향이 변했습니다. 그 까닭은, 누이가 죽을 당시에 저는 주님을 알지 못했기에 누이의 죽음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지금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라는 주님 말씀의 핵심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서, 누이의 죽임이 새로운 의미로 제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고, 부활을 향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17,1) 주님의 기도에 의하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부의 영광이 드러나는 동시에 성부께서는 성자의 영광도 드러내고자 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똑같은 뜻이 표명되어 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3~24)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십자가상의 죽음이 영광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大死一番(대사일번)이면 絶後蘇生(절후소생)이란 표현처럼 큰 죽음大死과 큰 삶大活의 경우와 똑같이, 죽음과 부활은 즉卽, 바로 그것으로 직결되어 있기에, 십자가 즉 부활, 부활 즉 십자가, 십자가는 바로 부활이요, 부활은 바로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싹터 나오는 모든 생명을 한번 눈여겨보면,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우리 마음을 노상 에워싸는 근심 걱정도 잊게 될 것이다. (....) 참으로 생명은 죽음에서 나오며, 부활은 하나의 전면적 파괴인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찬란한 빛을 발산한다.』(카를로 카레토의 ‘도시의 광야’에서)
부활(=부활체험)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평신도, 수도자 그리고 사제로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비움의 삶, 낮아짐의 삶, 자기 죽음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도자의 삶을 저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자주 표현하는데, 그 까닭이란 부활을 살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죽이는 삶(=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살기 위해)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5)라고 말씀하신 의도가 바로 자기 집착에서 이탈의 비움의 삶을 살았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처럼 아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타자를 위해 죽지 못하는 우리의 삶과 신앙이, 삶 안에서 부활을 위한 죽음을 살지 못하는 이유라고 느낍니다. 썩어 없어진 밀알은 결코 그 모습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지만, 그 밀알은 새 생명을 알리는 표징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또한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시며,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2코9,7.8참조)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기 비움과 죽음을 살 때 새 생명의 기쁨 또한 더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12,26)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당신처럼 또 하나의 죽은 밀알의 삶을 산 사람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신 것처럼 그를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줄 것이며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의 실현을 우리는 오늘 기억하고 기념하는 라우레시오 부제를 통해서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순교자는 새 세상, 새 역사를 열어주는 표징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밀알의 죽음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 밀알이 지금은 누구일까요?
이처럼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자기 몸에, 자기 인생에 부활 사건이 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삶을 자기 삶 안에서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단지 생의 끝에 오는 사건만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이며, 매번 죽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매번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는 욕심, 거짓된 삶을 위해 죽음을 거부하는 욕심은 매 순간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매번 죽지 못한 사람은 참사람의 참삶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능동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의 행위가 곧 진리를 깨달은 존재의 자유의 행위이며 부활을 향한 투신이라고 오늘 성 라우렌시오 순교자를 통해서 생각해 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와 함께 기도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순교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라우렌시오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면서도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박해자들 앞에서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라고 고백하자, 그를 불살라 처형하였는데, 그 고통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라고 말하면서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임을 성 라우렌시오는 본을 보여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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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 시대를 평가한다면, ‘러닝머신 같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움직이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서 그냥 서버리면 뒤처지면서 러닝머신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뛰면 어떨까요? 그냥 그 제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이처럼 쉬면 뒤처질까 봐 멈추지 못하고, 열심히 살아봤자 겨우 제자리 정도인 시대가 요즘이 아닐까요?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공의 법칙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건국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이 번아웃을 겪고 있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사제조차 뒤처짐을 느끼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시대입니다.
다들 바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나 바쁜지 초등학생도 “너무 바빠요.”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이제 습관적으로 바쁘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제 생각은 자기만의 속도로 느리더라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기란 너무나 힘듭니다. 바쁘게,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서 단단하지 못한 채 앞으로만 힘들게 가고 있습니다.
책을 남들보다 조금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글자 많은 책을 보면 “와! 글씨가 너무 많아.”라면서 책 읽는 것을 포기했던 저였습니다. 이런 제가 신학교에 들어간 뒤, 책을 통해 저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지식이 팍팍 들어오면서 단단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30년 넘게 꾸준히 책을 읽다 보니, 이제야 조금씩 단단해지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단한 믿음이 묵주기도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미사 한 번, 피정 한 번 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주님을 따르는 길을 향할 때,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성 라우린세오 축일을 지내는 오늘입니다. 성인께서는 부제로 세상에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면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런데 단번에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아닙니다. 꾸준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단단해질 수 있었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교회가 찬란히 발전할 수 있었던 역할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단번에 믿음이 생기길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계속해서 주님을 따를 때만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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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마태12,24). 이는‘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입니다.’ 물론,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 능력, 재능, 물질,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냥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한 알의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으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입니다.(홍승모)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몰래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가 ”이들이 교회의 재산이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 하고 믿음을 증언하며 죽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 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않고 끝까지 항구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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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목숨>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나의 목숨>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너를 믿는
나의 목숨
잃을수록 간직하다
너를 바라는
나의 목숨
잃을수록 간직하다
너를 사랑하는
나의 목숨
잃을수록 간직하다
너를 품는
나의 목숨
잃을수록 간직하다
너를 돌보는
나의 목숨
잃을수록 간직하다
너를 섬기는
나의 목숨
잃을수록 간직하다
너를 살리는
나의 목숨
잃을수록 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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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 꿈의 실현>
-예수님을 닮자-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시편112,1)
지난 수요일(8.7) 입추부터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 싶습니다. 풀벌레들 청아한 찬미와 더불어 배봉지 속 배들도 무럭무럭 커가며 익어갑니다. 오늘도 옛 어른의 말씀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고백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황량한 귀양지에서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위기는 나의 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이십 년 세속의 길에 빠져 선왕의 훌륭한 정치가 있는 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가를 얻게 되었다.”
혹독한 고문후 생명을 부지한채 장기간의 유배생활은 말그대로 죽어 사는 삶이요 자기와의 참 외로운 고투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다산의 위대함은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불가사의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다산은 스승 예수님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 살았던 분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분투의 노력의 삶에 원동력이 됐음을 봅니다. 늘 읽어도 새롭게 와닿은 다음 제 자작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아마 진리이신 주님 향한 이런 사랑의 열정이 이뤄낸 다산의 업적일 것입니다. 새삼 진리이신 주님 향한 사랑의 열정이 마르지 않는 삶의 원천源泉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진면목을 잘 보여줍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은 이들은 이렇게 살아 가며 하늘 나라 꿈을 실현시켜 갑니다. 저는 예수님의 삶을 네 측면에 걸쳐 살펴봤습니다.
1.“죽어라!”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대로 예수님의 전삶을 요약합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이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죽어야 비로소 무수한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평생 한 알 그대로의 이기주의적 삶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죽어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성사로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열매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열매들입니다. 순교자들은 물론 순교적 삶을 살았던 예수님의 후예들인 성인들도 바로 그 모범입니다. 죽어 살았던 다산의 헤아릴 수 없었던 업적도 그 하나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도 그 모범입니다. 죽어 살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성인들입니다. 258년경 30대 초반에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 라우렌시오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던 성인입니다.
순교를 예감한 성인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후 집정관 앞에 병자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타나,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외쳤습니다. 성인은 뜨거운 석쇠 위에 눞여 살이 타들어가는 순간에도 웃으면서, “이쪽은 다 익었으니 뒤집어라” 말했다 합니다.
순교때나 순교 후에도 그의 몸에서는 향기가 났다 합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쳐드렸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다.”며 그의 순교를 칭송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는 로마의 수호성인이자 가난한 이들과 요리사, 소방관, 코미디언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2.“비워라!”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예수님을 닮아 참으로 무지의 탐욕을 비워낸, 집착에서 벗어난 이탈의 초연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란 불가의 사성제(四聖諦)에서 보다시피 모든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습니다.
애오라지 일편단심 주님 사랑의 자연스런 귀결이 자기 죽음에 이어 자기비움의 초탈의 삶, 영원한 삶입니다. 새삼 삶은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가는 겸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3.“섬겨라!”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의 삶은 우리 믿는 이들 삶의 모두입니다. 섬김의 영성, 섬김의 사랑, 섬김의 기쁨, 섬김의 행복, 섬김의 환대,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최고의 처방도 섬김의 생활화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은 영성의 잣대요, 섬김과 추종은 함께 갑니다. 섬김의 삶이야말로 영적건강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의 자리 바로 거기에 우리가 평생 섬기고 추종하는 주님이 계시고 아버지께서도 이런 섬김의 사람을 인정하시고 존중하십니다. 일상의 모든 섬김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삶이요, 섬김(service)의 종(servant)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4.“나눠라!”입니다
오늘 제1독서 2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둘째 서간이 참 아름답습니다. 나눔의 사랑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나누라 있는 소유물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내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정말 그대로 주님 사랑을 닮은 이들이 나눔의 사람들입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없어서 못나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어 나누면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미소, 따뜻하고 진실하고 친절한 언행등 신망애(信望愛)의 삶, 진선미(眞善美)의 삶 존재 자체도 참 좋은 나눔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평생 섬기고 따를 파스카의 예수님이 늘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주시며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시편 1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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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죽는 밀알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12,24-26)은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 죽음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너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가 죽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리고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는 '절대적 사건'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의 옮아감'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해 주는 다리:이며,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어제는 네 차례, 오늘은 내 차례!'
알 수 없습니다. 박종현(요한마리아비안네) 형제님은 73세에 떠나갔지만,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갈 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늘 깨어 있는 일'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도, 수많은 순교자들도 그렇게 너를 위해 죽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죽는 밀알이 됩시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여, 박종현(요한마리아비안네) 형제를 도와주소서."
"성 도미니코여, 박종현(요한마리아비안네) 형제를 도와주소서."
"성 라우렌시오여, 박종현(요한 마리아 비안네) 형제를 도와주소서."
"주님, 세상을 떠난 박종현(요한마리아비안네) 형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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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하느님 안에 있는
죽음과 생명입니다.
집착과 미련으로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놓아주어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모든 것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죽어야 다시
깨어날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더 풍요로일 수 있는
우리 생명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은
부여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생명입니다.
죽는 밀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삶과 죽음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죽는 밀알의 모습에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진짜
생명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죽음이 생명이고
생명이 죽음이듯
죽음없이는 결코
열매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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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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