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날짜: 2026年9月19日(土)
1본문:歴代誌 第一 11:20〜47
20 요압의 아우 아비새는 그 세 명 중 우두머리라 그가 창을 휘둘러 삼백 명을 죽이고 그 세 명 가운데에 이름을 얻었으니
21 그는 둘째 세 명 가운데에 가장 뛰어나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첫째 세 명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
22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용감한 사람이라 그가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죽였으며
23 또 키가 큰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으나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2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5 삼십 명 중에서는 뛰어나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장을 삼았더라
26 또 군사 중의 큰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7 하롤 사람 삼훗과 블론 사람 헬레스와
28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29 후사 사람 십브개와 아호아 사람 일래와
30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렛과
31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이대와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32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후래와 아르바 사람 아비엘과
33 바하룸 사람 아스마웻과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34 기손 사람 하셈의 아들들과 하랄 사람 사게의 아들 요나단과
35 하랄 사람 사갈의 아들 아히암과 울의 아들 엘리발과
36 므게랏 사람 헤벨과 블론 사람 아히야와
37 갈멜 사람 헤스로와 에스배의 아들 나아래와
38 나단의 아우 요엘과 하그리의 아들 밉할과
39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 잡은 자 베롯 사람 나하래와
40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41 헷 사람 우리아와 알래의 아들 사밧과
42 르우벤 자손 시사의 아들 곧 르우벤 자손의 우두머리 아디나와 그 추종자 삼십 명과
43 마아가의 아들 하난과 미덴 사람 요사밧과
44 아스드랏 사람 웃시야와 아로엘 사람 호담의 아들 사마와 여이엘과
45 시므리의 아들 여디아엘과 그의 아우 디스 사람 요하와
46 마하위 사람 엘리엘과 엘라암의 아들 여리배와 요사위야와 모압 사람 이드마와
47 엘리엘과 오벳과 므소바 사람 야아시엘이더라
2. 시작기도
아버지…
오늘도 감사함으로 이 아침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어제 금요 예배는 나라상과 함께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지금 다케이상이 입원 중에 있습니다. 다케이상 본인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아서, 저희는 병문안을 가지 못하고 기도로 마음을 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일본에는 '메이와쿠'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나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 사회의 중요한 규범입니다. 타인을 배려하려는 마음인 동시에, 혹여 눈 밖에 나거나 규범을 어기면 공동체에서 배제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 담겨 있는 문화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도 중 한 명이 병문안을 가겠다고 합니다, 나라상은 그 성도를 다소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성도는 일본계 브라질인으로, 브라질 특유의 정서와 표현 방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이 갈등의 이유가 아니라 서로를 배우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 성도의 사랑의 마음이 지혜롭게 표현되어, 다케이상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상처가 아닌 위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저희가 이 땅의 문화를 판단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그 문화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서로 다른 성향과 배경을 지닌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어 가게 하소서.
아버지….
오늘도 모든 근심을 주님께 맡기며 말씀 앞으로 가오니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정케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다윗의 용사들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먼저 20-25절은 삼십 용사의 우두머리 격인 아비새와 브나야의 전과를 기록한 부분이었다. 요압의 아우 아비새는 삼십 명 중 우두머리로, 창 하나로 삼백 명을 죽인 용사였다. 브나야 역시 만만치 않은 용사였다. 모압의 장군 둘을 죽였고, 눈 오는 날 구덩이에 빠진 사자를 잡았으며, 막대기 하나로 거구의 애굽인을 쳐 죽인 인물이었다. 다만 처음 세 용사(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에는 들지 못했다. 다윗은 그를 자신의 경호대장으로 삼았다.
26절부터 41절 상반절까지는 서른한 명의 용사 명단이었다. 사무엘하 23장의 병행 본문과는 이름과 숫자에 약간 차이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다와 시므온, 단 지역 출신이었다. 이는 다윗 자신의 고향에서 힘센 용사들이 모여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42절 하반절부터 47절까지는 사무엘하에는 없는 열여섯 명의 명단이 추가된 부분이었다. 대개 요단강 동편 출신들로, 역대기 저자가 다윗의 세력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덧붙인 것으로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능력과 전과만 놓고 보면 처음 세 용사보다 브나야나 아비새가 결코 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진짜 차이는 다른 데 있었다. 처음 세 용사는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이 목숨을 걸고 떠온 물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어드리며 "내가 결단코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충성, 곧 목숨을 건 헌신이었다.
이 이야기는 신약으로 이어졌다. 다윗의 나라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영원히 세워질 나라였고, 그 메시아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롬 1:3-4).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만물의 통치권을 받으셨고(엡 1:21, 빌 2:9-11), 그 통치권은 흑암 아래 있던 자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데 사용되었다(골 1:13-14). 그렇게 생명을 얻은 자들이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갔다(엡 1:21-22).
그리스도인 역시 용사로 부름 받은 존재였다. 사망의 권세와의 싸움은 여전히 치열했고(고전 15:26),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과 그 생명으로 실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싸움이었다. 생명을 얻고도 그 생명대로 살지 못하면, 마치 고장 난 옛 기계를 억지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탄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어 이미 생명을 얻은 자들마저 옛사람으로 되돌리려 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영적 전쟁에 임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법대로 하며, 수고를 다하라는 것이었다(딤후 2:3-8). 그리고 그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 은혜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고(행 20:24),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다. 세상에서도 목숨을 건 사람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이치가 영적 싸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바울이 복음에 미쳤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했기 때문이었다(고후 5:13-14).
그렇게 선한 싸움을 다 싸운 바울은 마지막 순간, 의의 면류관을 사모하며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4. 나의 묵상
또 키가 큰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으나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애굽 사람의 창은 베틀채와 같았다. 누가 보아도 압도적인 크기였고, 맞서기에 무모해 보이는 무기였다. 그러나 브나야는 그 앞에서 더 큰 무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막대기 하나를 들고 내려갔다. 상대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크기 앞에서 내려갈 것인가, 물러설 것 인가였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어제 나눈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메이와쿠'라는 문화는 오랜 시간 다져진 견고한 규범이었다. 그것은 애굽 사람의 창처럼 크고 위압적이어서, 그 앞에서는 사랑조차 조심스러워지고 위축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반면 병문안을 가겠다는 그 성도의 마음은 막대기 하나에 지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정제되지 않았고, 이 땅의 정서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브나야의 승리가 무기의 크기가 아니라 내려가는 결단에서 비롯되었듯, 사랑의 진정성도 얼마나 실제로 다가갔느냐 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자주 상대의 반응이나 상황의 무게를 먼저 계산했던가 돌아보게 되었다. 관계 속에서, 사역 속에서 '괜히 폐가 되지 않을까', '이 방식이 맞을까' 재느라 정작 내려가야 할 그 순간을 놓친 적이 많았다.
브나야에게 중요했던 것은 창의 크기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막대기 하나를 들고서라도 내려가는 순종이었다. 처음 세 용사가 인정받은 것도 능력이 아니라 목숨을 건 충성 때문이었던 것처럼, 나의 믿음의 자리도 결국 얼마나 잘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순전히 내려갔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었다.
5. 묵상기도
아버지….
오늘 브나야의 막대기 앞에 저를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동안 너무 자주 상대의 크기와 상황의 무게를 먼저 재느라, 정작 내려가야 할 순간에 머뭇거렸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
다케이상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서 친히 만져 주소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마음까지도 주님이 아시고 감싸 주소서. 그리고 병문안을 가겠다고 나선 그 성도의 사랑이, 문화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지혜롭게 흘러가게 하소서. 나라상과 그 성도 사이에, 서로 다른 문화가 정죄의 이유가 아니라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
그리고 저 역시, 능력이나 세련됨이 아니라 순전한 헌신으로 주님 앞에 서는 자 되게 하소서. 창의 크기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막대기 하나를 들고서라도 내려가는 용기를 주소서. 바울이 그러하였듯, 제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은혜의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자로 삼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