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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48.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치더니 말씀하셨다
[스님께서 언젠가는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치더니 말씀하셨다.]
한 때 운문선사께서 법을 보이셨다.
운문선사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은 있는 그대로 법인것입니다.
왜 그럴까? 석존께서도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든 무위법(無爲法)이 개시불법(皆是佛法)이다라고 하였듯이 말과 글이 되려면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인 양변을 함께 들지 않으면 말도 글도 하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법(因緣法)이고 연기법(緣起法)이며 색(色)과 공(空)을 함께 드러내어야만 양변(兩邊)이 다 들어나야만이 양변을 벗어난 절대평등(絶對平等)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푸른하늘에 흰구름이 떠있다고 한다면, 흰구름은 푸른 하늘이 바탕이 되어 주니 구름이 드러나는것이요. 허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흰구름의 형상이 있음으로 푸른 창공이 허공으로 드러나는 이치이니 이것이 양변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진실여상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다 알아차리는 것이 그대로 깨달음이고 인식론(認識論)이듯이 알아차림이라는 말도 양변이 함께드러남으로 깨달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마음에 대비하여 본다면 체인 무심(無心)이 무심지도(無心至道)인 본래마음이 번뇌망상(煩惱妄想)인 유심(有心)이 일으남으로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일으나면 이것이 번뇌망상(煩惱妄想)임을 자각(自覺)한다면 바로 그게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화엄경(華嚴經)이 일진법계(一眞法界)라는 말씀은 양변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요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인 것이요. 모든 법이 개시불법이란 법화경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란 뜻이니 이것을 알아차리면 완전한 붓다요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부처님의 경전은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 인 진리(眞理)의 당체(當體)요 법의 당체(當體)요. 마음의 당체(當體)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진리가 그대로 법이고, 법이 그대로 마음이니 이것이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인 체상용(體相用)인 것임을 안다면 일심삼체(一心三體)인 부처의 본래모습인 것입니다. 돌~~~!!!!!!!!!
이렇게 깨달으면 그대 자체가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대의 일거수 일투족과 행주좌와 어묵동정 있는 그대로가 불성해(佛性海)라 지금 여기가 피안(彼岸)이요 극락(極樂)이며, 화엄법계(華嚴法界)이며 화장찰해(華藏刹海)이며 화엄동산(華嚴洞山)인 것입니다. 나무영산회상 불보살_()_
자 본론에서 “운문선사가 법을 보이셨다 언젠가는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치더니 말씀하셨다.”라는 것은 운문선사의 마음이 체요, 주장자는 마음의 작용인 것입니다.
주장자로 앞에 놓인 선상을 쳤다는 것은 마음의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인 도리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시고는 향상일구를 거하시니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온갖 소리는 부처님의 소리이며 모든 색은 부처님의 색이다.]
라고 하시는 뜻은 온갖 소리는 공기의 파장이요 매아리라고 했지만 소리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소리는 부처님의 소리라고 하신 것은 소리라는 매아리가 있는 그대로 일 뿐이니 있는 그대로는 진실여상(眞實如常)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니 바로 부처님의 소리라고 하신 것이고, “모든 색은 부처님의 색이다”라고 하신 것도 직설적으로 바로 모든 색이든 공이든 형상으로 드러나면 이 형상은 빛의 화현이지만 운문선사는 지금 여기 형상 그대로가 진실여상한 중도 실상이르는 뜻으로 부처님의 색이라고 직설적으로 바로 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그대들은 발우를 들고 밥을 먹을 땐 이것이 발우라는 생각을 하고, 걸어갈 땐 간다는 생각을 하며, 앉을 땐 앉는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하십니다.
앞단 실중어요 24에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萬法)에 허물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한 생각이란 념(念)이니 “발우를 들고 밥을 먹을 땐 이것이 발우라는 생각을 하고” 밥을 먹을때는 밥을 먹어면 되는 것이지 왜 밥을 담은 발우라는 생각을 합니까? 밥이란 말도 명색(名色)이요 발우도 명색(名色)입니다. 그것은 명색이 밥도 아니요 발우도 발우가 아닌 것입니다. 밥이란 한 형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대로인 것이지 이것을 밥이다 발우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것이 번뇌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걸어갈 땐 간다는 생각을 하며,”라는 말도 같은 것입니다. 가면가고 서면 서는 것이지 간다라는 생각없이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 그대로이지 여기에 왜 간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다 번뇌망상을 일으키느냐, 그리고 다시 “앉을 땐 앉는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하시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하면 하는 그대로인 것이지 이것을 걸어간다 앉는다. 누웠다라는 한 생각없이 무념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한 생각이 일어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념처(無念處) 심법계에서 본다면 십지보살의 제팔지 부동지(不動地)인 것입니다.
법화경을 한 마디로 말할 때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며, 셋으로 종과 체용으로 나누어 본다면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입니다. 이 말을 학술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란?
법화경을 세가지 근본을 말한다면
무념(無念)을 종(宗, 으뜸)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 바탕)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 뿌리)으로 삼습니다.라고 합니다.
무상은 모습에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며, 무념은 생각을 하지만 생각이 없는 것이고, 무주는 사람의 본성을 말합니다.
즉 무주(無住)는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 공부의 근본은 머무는 바 없이 행하는 데 있다.
금강경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하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다.
머문다는 것은 곧 집착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 한 가지 대상에 머물게 되면, 그 대상에 사로잡히고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세간의 온갖 분별들이 전부 공(空)한 줄 알면 그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무아(無我)인 줄 알아 어떤 것도 집착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연기(緣起)를 알아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임을 깨닫는다면,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과 싸우고 부딪히고 속이고 다툴 때에도 그것이 공한 줄을 깨닫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으로써 미운 마음을 담아두지 않는다. 당연히 복수하거나 해칠 생각을 내지 않는다.
머물지 않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함에도, 이미 지나간 생각과 현재의 생각, 미래의 생각이 계속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번뇌 망상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얽매임이지 무주(無住)가 아니다.
모든 법 위에서 매 순간 머물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얽매일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무주를 이 법의 근본으로 삼는다.
심지어 그것이 불법이거나, 열반이거나, 해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무상(無相)은 밖으로 일체의 상(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이란 일체 삼라만상의 제각기 특색 있는 모습, 모양을 뜻한다.
정신적인 것 또한 이미지로 마음에서 그려낼 수 있기 때문에
그 또한 상이다. 모습, 즉 상(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모습에 얽매이고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사람들이 괴로운 이유는 상(相)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좋은 차를 소유하거나, 여성들은 좋은 명품 가방 같은 것을 소유하면 스스로 높아진다는 상에 사로잡힌다.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소유물의 모양에서 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착각을 일으킨다.
외모를 가꾸려고 하거나, ‘척’하는 모든 행동들이 전부 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높다거나 낮다는 상,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상, 부자라거나 가난하다는 상, 좋다거나 싫다는 상 등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상이다.
사실 상(相)은 마음속의 하나의 이미지일 뿐,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다른 것들과 이것을 비교해서 분별하기 때문에 상이 생겨난다. 그래서 상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삶의 경험이 다르면 상(相)도 다르게 마련이다.
저마다의 분별이 다 다르기에 상도 다 다른 것이다.
그러니 그 상이 고정된 것일 수도 없고, 다 같을 수 없다.
그러니 상이란 다 허망한 것일 뿐, 진실한 것이 아니다.
무상(無相)이야말로 만법의 참된 실상이지만,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무상을 상으로 착각하고, 그 착각된 허망한 모양이 진짜라고 여겨 거기에 집착한다. 상에 집착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생겨난다.
무념(無念)을 으뜸으로 삼는다.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 무념이다.
무념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다 일으키면서도 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생각의 본성이 공함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본성이 공하다는 자각, 그것이 바로 무념이다.
그러니 모든 경계 위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마음이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공한 줄을 아는 까닭이다.
대상경계를 생각하면서도 그 대상경계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경계를 따라 마음이 이리 저리로 휘둘리지 않는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무념법을 듣게 되면, 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 생각을 없애려고 애를 쓴다.
무념은 생각을 끊어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한 가지 생각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그 생각만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타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자신도 괴롭고 남들도 괴롭힌다.
그런 까닭에 이 불법에서는 무념을 으뜸으로 삼는다.
무념을 실천하는 이는, 생각을 하되 그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니,
삶에서 과도한 고집이 없다. 유연하다.
이렇게 되어도 좋고, 저렇게 되어도 좋다.
인연 따라 삶을 온전히 내맡기며 자연스럽게 흐른다.
자기의 생각을 타인에게 고집하지 않으니, 대인관계도 원만할 수밖에 없다.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다.
자성에는 본래 얻을 수 있는 한 법도 없다. 만약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삿된 견해다.
무념, 무주, 무상을 말하지만, 이것은 모두 ‘이것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전부 다 아니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한 가지에도 과도하게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다.
무념도 생각하지 말고, 무주에도 머물지 말며, 무상을 모양 지어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참된 무념, 무주, 무상이다.라고 학생이란 분이 논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무념(無念)인데 그 명색(名色)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나서 아무른 대답이 없자 운문선사는 이렇게 말후구를 날린다.
[이러한 부류들은 그런 식으로 계속해 간다면 방망이를 집어 들고 몽땅 쫓아 흩어버려야겠다."]라고 하시어 명색에 물든 마음으로 수행을 한다면 아무리 해도 깨달음에는 닿을 수 없음을 밝히며 납승들을 다 방망이로 쫓아버리겠다고 꾸짖고 계신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라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운문록을 통하여 인연성불 요인성불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