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151119전라도닷컴[한송주의 길따라 인연따라] 목판화가 강행복
내 안의 부처 찾아 활인검 벼리다
강행복 화가와의 인연은 절집에서 움텄다.
2006년 5월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강행복 목판화전 ‘나를 찾아 안으로 걷네’가 열렸다. 수좌들로부터 그의 도기(道機, 刀氣)가 인가받은 것이다. 마침 기자가 몸을 의탁, 수행하고 있던 터라 미좌(迷佐)를 자임했다. 미좌는 그때 이렇게 도반들을 안내했다.
‘판각행자 강행복의 칼끝엔 단기가 있습니다. 그는 활인검으로 존재의 이랑을 갈고 팝니다. 마음밭을 새판잽이로 뒤엎어서 눈뜰 겨를 한 찰나 장만합니다. 그 영겁에 참여하여 일순 참나를 만나고 가십시오. 강행자의 행각은 바깥으로 떠돌지 않고 귀가수분(歸家守分), 안으로 누벼갑니다.’
이듬해 서울에서 ‘명상의 나무’라는 제목으로 큰 난전이 벌어졌다. 그때도 미좌가 같은 곡조로 호객했다.
‘장주莊子의 푸주한 포정은 칼을 들기 전에 벌써 피 한 방울 비치지 않고 소의 골육을 발라낸다. 신의(神醫) 화타는 진맥 전에 한 번 눈빛으로 이미 처방을 마친다. 텐진가초가 가부좌를 하자마자 삼라만상이 스스로 옷을 벗고 알몸을 보여준다. 오늘 명상의 나무 아래 활인검객 한 놈이 행복하게 눈감고 앉아있다.’
이 자르르한 호객행위에 힘입어 세간 출세간 난전이 함께 대성황을 이뤘고 목판 강행복은 각도계의 일가로 우뚝 서게 됐더라.
밤샘 기도 후 집도..산사축제에 인경체험 도입도
일개 강처사가 텃세 드센 소림강호에서 절수로 인가받게 되는 데에는 나름의 피나는 정진공덕이 있었다. 인연법에 추호의 차타가 있을 수 없음이다.
월간 송광사 2005년 11월호 ‘편집장의 말’에 그 사연이 주절주절 씨부렁거려져 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송광사 불교문화축제가 많은 지역민과 불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올해의 산사축제는 특히 승과 속, 놀이꾼과 구경꾼이 따로 없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즐기는 신명의 대동마당이 되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그런 평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인경캠프, 단청캠프, 비사리구시 주먹밥캠프 등 관람객들이 직접 현장에서 우리의 전통불교문화의 편린을 체험하고 송광사의 풍물을 맛보면서 축제의 판을 이끌어가도록 유도한 '참여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경체험캠프는 단연 인기캡이었다. 일주문 앞에 판을 벌인 송광사 인경체험 천막은 장이 서기도 전에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모본이 되는 다양한 작품들이 천막 앞 횃줄에 매달려 펄럭거리는 가운데 판상 위에는 거멓게 먹물이 밴 고색창연한 경판들이 떠억 놓였는데, 판각쟁이들은 목판에 먹물을 발라 한지를 댄 뒤 마력으로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이 희한한 풍경에 끌려 천막 안으로 빨려든 어린애 몇이 힘들게 마력질을 하는 일꾼아저씨들과 함께 한참을 괜히 끙끙대다가 이윽고 경판에서 한지가 쩌억 소리를 내며 벗겨나오자 와!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쳐댔다.
뜨끈뜨끈한 김을 내뿜으며 이제 막 현대의 가마에서 구워져 나온 보조국사 말씀이며 오도자 관음도며 하는 고전 명품들!
효봉선사 오도송이며 보성 방장스님의 휘호 그리고 송광사 전도 등 경판들도 인경일꾼들의 손놀림 따라 금방 예술미 그윽한 작품이 되어 횃줄에 내걸렸다.
"너희들도 한번 해 보렴." 하고 얼굴에고 손에고 먹물범벅이 된 일꾼 아저씨가 먹솔을 내밀자, 반갑게 받아들고 부랴부랴 먹물을 찍어발라 마력으로 정신없이 문질러댄다. 아저씨의 지도를 받으며 안간힘을 쓰던 초짜 인경쟁이들이 잠시 후 자신들의 첫 작품을 빼어들고 짓던 그 환희의 미소라니!
이런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난장을 어느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너도 나도 달려들어 한번 밀어봅시다, 하는 통에 순식간에 잉크가 바닥나고 롤러가 부서지고 한지가 동나고 일손까지 부족해 스님들까지 동원하는 행복한 사태가 벌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경은 우리 출판문화의 진수이다. 비록 현대화 된 도구와 기술로 잠깐 체험한 인경캠프였지만 한국불교문화의 단면을 직접 호흡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번 '인경도감'의 도감은 판화가 강행복 처사였다. 판각에서 인경, 감수까지를 혼자 다 해냈다. 판각쟁이 강처사는 올 송광사 축제의 일등공신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강처사는 절집에서 판각작업을 많이 했다. 월간 송광사 편집위원으로 동참하면서 편집장인 미좌 방에서 자주 동거했는데 밤에 베개를 같이 한 적은 별로 없다. 미좌는 미훈(微醺) 후 초저녁부터 곯아 떨어져 자고 있는데 이 작자는 연장바랑만 윗목에 던져두고 밤새 종적이 모연했다.
알고 보니 대웅보전 관음전 영산각 약사전 각 전각을 두루 돌며 백 팔배 기도를 했던 거였다. 그러고서는 도량석 할 때쯤 슬그머니 들어와 잠시 둥붙였다가 대중들 모두 조죽을 들러 선열당으로 서둘러 갈 때 공양을 사양한 채 경상 위에 판때기를 꺼내 깔고 연장통을 끌어당겨 집도(執刀)에 들어가던 거였다.
먼 포행을 마치고 새참 찻자리를 갖추러 거처에 돌아올 때까지 강작가는 땀을 송글송글 맺으며 사각사각 나무판 위에 조각칼을 열심히 내달아 가고 있던 거였다. 경상 아래 방바닥에는 한 나절 내내 간절히 파낸 나무밥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이렇듯 그는 불심을 뚝심으로 순일하고 검질기게 행각(行刻)해 나갔더라.
낙백 후 남녘 타관서 힘찬 재기
도산검수(刀山劍水)의 역경계가 있었다. 시연(時緣)이 그를 건졌다. 그는 오는 12월 12일 광주시립미술관 상록갤러리에서 열릴 ‘길 위의 길’ 제목의 특별초대전 인사말을 이렇게 미리 써두었다.
‘원래 제 고향은 경기도 김포입니다.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1987년 무작정 낯설고 물설은 광주에 왔습니다. 올해로 28년째 살고 있으니 이제 여기가 제2의 고향입니다. 당초에는 몇 달 정도 쉬었다 갈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광주에 머무는 동안 아는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고 해서 무등산에나 올라가 시간을 때웠더랬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무등산 너덜강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시내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였어요. 내가 낯선 이곳에 왜 와 있나, 나는 뭐하는 놈인가, 이제 무얼 하며 살고 그 다음엔 어디로 가려나. 내 안의 나와 맞닥뜨려 성찰을 하는 시간이었던 셈이지요.
그리고 사무치는 참회와 간절한 기도 끝에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불교목판화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부처님을 찾아 칼을 벼리어 각고해 나가자고 원을 세웠습니다. 마침 90년대초 광주 봉선동에 판화공방이 있었는데 방을 하나 얻어 동참하게 되었지요. 그때 최병구님, 강봉길님, 박선주님, 김익모교수님들의 따뜻한 배려로 목판화를 하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실크스크린과 석판화는 서울을 오가며 했고 목판화는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광주에서 작업했어요.
명상, 명상의 나무, 길, 나를 찾아 걷네 등 그동안의 전시가 모두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풍경들입니다. 지금도 저는 나를 찾아 여행 중입니다.’
신심불자답게 상(相)을 안 내서인지, 풍찬노숙 객살이에 숫기가 쫄아서인지 강작가는 자신의 행각에 대해 발설하기를 꺼리는 편이다. 광주에서 마음을 추스린 뒤 그는 고토로 올라가 나름 착실하게 살림을 꾸려나갔다.
서울 인사동에 나이테판화공방을 차리고 십수년 그 방장을 살았다. 또 전국판화두레에서 소귀(牛耳)를 잡고 이끌었다. 국제난장인 서울판화미술제의 간판스타였다. 그동안 서울 일본 캐나다 해내 해외를 두루 하며 6번의 개인전을 차렸다. 굵직한 국제 단체전에 35번 출품했다.
광주 예술의 거리 뒷골목에서 어수룩하니 눈칫술 먹으며 그 경기도촌놈이 알고 보니 세간 출세간 해내 해외를 부처님 손바닥으로 주물러댄 거한이었던 것이더라.
선판에 새긴 우주자연의 파동
명안(明眼)으로 이름난 박영택 평론가는 강작가의 작업을 이렇게 보아냈다.
‘..수많은 선의 교직이 두터운 울림을 주는 한편, 그로 인해 화면은 겹성의 진폭을 두르고 있다. 화면은 자연을 청각적으로 접촉하게 하는데 이는 단순한 자연경관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생명의 이치로 다가서게 한다.. 그는 여러 개의 색면을 깔아놓고 그 위에 많은 판들을 축적시킨다. 그 때문에 색채들이 매 순간 인연과 만남에 따라 다르게 올려진다.. 바람이나 물 같은 자연의 숨결과 기운이 그 판 위에서 파동친다.. 작가는 자주 산사에 가서 기도하고 법문 들으며 세속의 때를 벗고 온다고 한다. 그리고 산사의 적요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칼과 나무로 이미지화하는 그의 작업실은 기실 수행의 공간이다.’
<강행복의 목판화론>을 쓴 김종길 평론가는 또 이렇게 읽어냈다.
‘작가가 최근까지 탐색하고 있는 판화미학은 명상의 나무다. 이 나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세계 어디에도 없는 나무다. 이 나무들은 신묘하여 자연의 바람결을 따르기도 하고 형형색색의 별빛을 뿜기도 하며 빛의 오로라 속에서만 그 형체를 드러내는가 하면 거대한 대지와 우주를 잇는 신목이 되기도 한다. 그 나무는 보리수이거나 사라수일 수 있고 모든 나무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 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씨알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간다면 거대한 신단수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그 나무에 명상을 접목해 초월적 상징의 세계로 확장시킨다.’
요즘 기자의 낮참 포행 이정이 새로 잡혔더라. 옛 사직공원을 한 바퀴 하고 시립사직도서관에서 좀 놀다가 틈나면 그 아래 양림동네 한희원미술관에서 케냐산 원두커피를 고봉으로 마신 다음 솔방솔방 거닐어서 방림우체국 골목에 새로 성주한 강행복 판화공방에 들러 치즈와 올리브장아찌를 안주로 시원한 맥주 두어 캔을 빠는...환장의 드림코스!
그날도 코스를 밟아 예술의 거리 한 전시장에 구경갔다가 어느 선배 화백을 조우했더라. 마침 강인연을 수사 중이었던 터라 한 마디 언급을 구했더라.
“저 칼잽이 강 솜씨가 어떻던가요?”
“응, 좋대.”
“어떤 점이 좋던가요?”
“응, 그냥 좋대.”
“아따 긍게 뭔 특색이 있겄지라우.”
“아따 기자들은 꼭 그렇게 꼬치꼬치 캐 묻대이. 그냥 좋다면 좋겄이재. 글고 잘 알아서 뭐라고 뭐라고 쓰드만 그래.”
“뭣을 알아서 쓰긴 써요. 대기자는 지어서는 안 써라우. 그냥 말씀 하신 대로 쓸라요.”
“그래 좋아. 그렇게 써.”
그래서 이렇게 그냥 썼더라.
글 한송주 대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프시다고, 서울 전화를 받은 지 몇 달이나 되었을까...
그 목소리 아직 내 귓가에 서늘한데
문득 섧고 끝내 아쉽고 넘 쓸쓸합니다.
한송주 벗님과 단 셋이서 남광주 시장통 대낮 주막을 앉아
멀었던 인연 데우고 흐린 소리도 한 가락 흘리던
한 폭의 아리따운 그림이 천둥 같습니다.
강행복 형!
영면하시오... 부디 잘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