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선터미널 예술적인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공간으로
-타관생활 오랜만에 찾은 그리운 고향을 찾아오는 길목-
시내 일정을 소화하다 잠시 들러보는 곳이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이다.(사진) 관광객 및 도서지역 주민, 목회자, 행정, 교육, 농협직원들이 이용하는 여수 연안 여객선터미널도 역시 바이러스 감염증 여파가 크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여수 연안 여객선터미널이다. 목회자들이 섬 교회 교인들을 만나는 만남도 있는 곳이고 교인들과 헤어짐이 있는 곳으로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곳이다. 많은 사연을 안고 오고 간다. 슬픈 사연도 아픈 사연도 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라고 하지만 이별은 슬프다는 것이다. 이별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만남보다 헤어짐이 더 많다.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을 흘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보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곳이다. 뭍의 소식을 실어다주는 곳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배가 갈 수 없다. 바람이 불면 뭍으로 나올 수 없다. 새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언제든지 가고 싶을 때 갈수 있으련만 발만 동동 구른다. 섬에 나서 섬에 자란 섬사람이 맨 주먹 쥐고 상경해 피땀 흘려서 오늘을 일궈낸 입지전적인 삶을 산 섬 출신 인사가 타향살이가 몇 해룰 살았는지 손꼽아 헤아려보면서 몇 십 년 만에 찾은 그리운 고향을 찾아오는 길목이다.
경향각지 요소요소에 섬을 자랑하는 목사,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소꿉놀이하던 코 흘리게 꼬맹이들이 어린 시절 추억을 떠 올리며 숱한 연륜을 산 사람들이 만나 그 동안 못다 나눈 안부회포를 푸는 곳이다. 어떤 경우 유골함을 품에 안은 상주일행이 오르내리기도 하는 곳이다. 시내를 몇 번 가본 게 자랑거리가 되었던 시절이야기다. 이제 터미널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여객선으로 쓰르마루 운항이 1945년까지 진행되다가 1946년부터 여객선 동도호가 1952년까지 운항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부터는 웅천호 운항이 1959년까지 이뤄졌다.
1959년 사라(Sarah)호 내습으로 여객선 운항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재개 되었을 때 기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이 기뻤다. 1960년 여객선 조양호 운항이 1963년까지 이뤄졌으며, 1962년 여객선 창운호 운항이 1963년까지 되었다. 1964년 여객선 장구호 운항에 이어 1969년까지 여객선 창영호의 동편운항이 1973년까지 운항된다. 그 무렵 1968년 연도초등학교 역포분교장이 설립되었다. 여객선 여1호가 운항을 시작해 1975년까지 운항하다가 1974년 여객선 신양호 운항과 함께 여객선 창녕호의 서편운항을 하게 되었다. 1976년 여객선 신흥호 운항에 이어 1981년 여객선 경주호 운항이 되었다.
두둥실호 순풍호에 이어 지금의 금오고속 페리까지 많은 여객선들이 고향의 해상교통편 역할을 했다. 그 외 남해, 화정면, 나로도 방면 여객선 등 여수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한다. 중앙동 현재 이순신광장 해안가에 있었던 여객선터미널 모습 등 몇 차례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터미널 변천사와 6, 70년대 섬마을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 전시회 및 기항지별 섬마을 영상물 실을 갖추면 좋을 것이다 축소판 뮤지 엄 공간을 마련해 보여주는 등 관광객 및 승객들에게 예술적인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스토리가 있는 공간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여수 연안 여객선터미널 주차장 경비초소 모습이다. 경비를 서는 분이 여성분으로 바뀐 걸 본다. 금오고속페리로 1항차 여수 오전 6시 20분 출발-연도 오전 8시 도착 여수 오전 9시 50분 도착, 2항차 여수 오후 2시 30분 출발-연도 오후 4시 20분 도착, 여수 오후 6시 15분에 도착한다. 매일 오전 5시에 문을 열어 오후 6시에 문을 닫는 터미널은 오후 4시에 방역을 위해 잠시 문을 닫게 되며 시민들의 휴게소 역할을 하는 중요공간이다. 한 번씩 관련단체들이 커피나 차를 준비해 나가 섬김을 주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여수=정우평 목사, 010-2279-8728【교계소식】문서선교후원계좌 우체국 500314-02-264196 정우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