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멜 산상의 대결 (왕상18:16-20절)
요즈음은 전 세계가 환경의 재앙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1월 한 달 동안에 허리케인 같은 폭풍, 사상 최대의 폭설, 영하 50도의 추위, 거기에다 겨울 홍수가 연거푸 강타함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극한 재앙이었습니다. 왜 이런 재앙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인재입니까 아니면 천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환경오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과도한 탄소 배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물론 틀림없는 과학적 판단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판단으로는 인생이 하나님을 떠난 신앙의 결핍에서 오는 결과로 보기도 합니다. 일종의 종말의 징조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온전한 신앙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내린 삼 년 기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일어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아합 왕의 두 번째 상면은 엘리야의 전갈을 궁내 대신 오바댜가 아합 왕에게 전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아합의 상면은 갈멜 산상의 일대 결전을 앞두고 가뭄의 원인에 대한 설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이 말은 가뭄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엘리야를 3년 만에 만난 아합 왕의 첫 마디 말이었습니다. 이 첫 마디 말 속에 아합 왕의 악한 감정과 그의 비뚤어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가뭄은 국가적 재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참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에게 재난을 내린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가뭄은 아합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데 대한 질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진노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과 그의 추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가뭄은 자연과 농경의 신인 바알이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신앙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데 대한 불쾌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은 바알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3년의 가뭄 기간 동안 여호와의 선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서로에 대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로 비난하는 두 반대 입장의 대립은 최후의 결판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갈멜산 대결을 요청합니다. “갈멜 산상의 대결” 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엘리야를 보자마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하고 내뱉은 이 말은 아합 왕의 마음에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쏟아져 나온 그의 심중의 고백이었습니다. 며칠 전 엘리야를 만난 오바댜의 고백과는 정반대의 말입니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기를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요, 엘리야는 일개 야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을 소유한 오바댜가 하나님의 전사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바댜가 엘리야를 “내 주” 라 불렀는데 “주” (히) 아도나이 는 주인, 소유자의 강조형으로 오직 인간이 만물의 소유자, 지배자인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엘리야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자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바댜로부터 보고를 받은 아합 왕은 급기야 엘리야를 만나러 갑니다. 짐승을 위한 꼴을 구하는 일도 젖혀두고 엘리야부터 만나려는 것은 가뭄의 원인이 엘리야에게 있음을 알고 가뭄을 해소해 보려는 그의 기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만났을 때 그의 첫 마디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였습니다. 여기서 “괴롭게 하다” (히) 아카르 는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말하는데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국적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아합 왕의 국가 경영 지침이 무엇입니까.
*왕상16:29-33 유다의 아사 왕 제 삼십팔 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당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아합 왕조의 국가 정책은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엘리야의 행동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이었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저주로 나라에 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불길하고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재난의 장본인으로 엘리야를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 는 말은 그 유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의 일입니다.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이 패배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낸 여호수아는 아간을 끌어냅니다.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처형할 때에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수7:25-26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골 골짜기는 괴로움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므로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라고 한 것은 엘리야가 아간처럼 죽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신정 왕국에 있어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으뜸 되는 직무는 목자적 직무입니다. 목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양을 먹일 꼴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합은 과연 엘리야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엘리야의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으로서 해야 할 첫 번째의 임무인 것입니다. 이 중대한 임무를 아합은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서 엘리야를 판단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산헤드린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에 대하여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예수의 능력이 하늘로부터인지, 아니면 땅의 것인지, 예수의 가르침이 천국의 계시인지, 아니면 사단의 궤계인지 물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축복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저주인지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아합 왕과 마찬가지로 목자의 양심을 버렸습니다. 산헤드린의 행위는 아합 행위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에게서 아무 허물도 찾을 수 없다는 무죄 선언을 했을 때 말씀의 조명에서 확실한 답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은 간곳이 없고 예수는 백성을 소요하게 하는 자라고 결론을 내린 후 재판을 한 것입니다. 즉 “예수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라는 것입니다.
*요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2.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엘리야는 가뭄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아합의 비난에 대하여 아합의 말과 똑같이 상대를 책망합니다.
*왕상18: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아합이 엘리야에게 사용했던 말 “괴롭게 하다” (히) 아카르 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난의 책임이 아합과 그의 왕조에게 있다는 통렬한 반박을 합니다. 아합의 가문은 그의 부친 오므리가 왕조를 연 이래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정책을 시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켰습니다.
*왕상16:25-26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오므리 왕조 이전에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는데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가뭄의 원인을 추궁하는데 단지 아합 왕 개인을 비난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버지의 집” 까지 함께 공박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삼 년 반 동안의 가뭄의 원인이 단순히 아합 시대의 죄악이라기보다는 그 아버지 집의 누적된 죄가 이제 절정에 이르러 나타난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은 비록 바알은 섬겼으나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관념적인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잡아 죽일 동안 그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이세벨이 여호와 경배를 금하고 있는데도 아합은 자기 아들 이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를 이어서 왕위를 계승했던 아들은 이세벨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하시아” 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 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구속사를 통하여 계시된 속죄의 하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만사가 자기의 무역, 재능, 군사에 있을 뿐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수아 때 하나님이 무너뜨린 여리고 성을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는 거부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모양을 갖추면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아온 아합 왕이었습니다.
3. 갈멜산의 대결
이제 이스라엘의 속죄 사역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솜씨를 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뭄의 고통을 안겨 준 저 재난의 장본인. 목자적 왕의 직의 직무를 망각하고도 오히려 엘리야를 공격하는 아합을 하나님은 왜 일격에 파멸시키지 않습니까. 이유는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구속 사역에 저 완고한 왕을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왕상18:19-20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백성과 바알 선지자들을 모을 수 있는 권세는 왕에게 있습니다. 엘리야는 그 왕직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유히 흐르는 구속사의 강물을 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거친 반역도 에덴의 동산에서부터 노아--아브라함--다윗 그리고 베들레햄에서 골고다로 흘러가는 구속사의 도도한 강물은 막지를 못합니다. 그 어떤 것도 이 강물의 장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갈멜산으로 모으소서.” 날카롭게 엘리야를 공격한 아합 왕도 별수 없이 엘리야의 말대로 바알 선지자들, 아세라 선지자들, 백성의 대표들을 모아 갈멜산으로 나옵니다. 왜 나옵니까. 이유는 대회전을 위함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회전입니다. 저 대회전은 결단코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리고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승리의 환희를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갈멜 산 대회전의 초점은 언약의 진노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길, 하나님과 화해의 길을 열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대회전은 세 가지의 놀라운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1) 첫째--희생제물입니다.
엘리야는 열두 돌을 취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 가로 도랑을 파고 물을 길어 세 번이나 붓습니다.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의 기도에 맞추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 심지어 도랑의 물까지도 다 태웠습니다.
2) 둘째--심판입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로 그 마음을 돌이키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바알의 선지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손 시내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3) 셋째--은혜입니다.
엘리야의 일곱 번 기도가 시작됩니다.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합니다. 일곱 번의 끈질긴 기도 후에 큰비가 내렸습니다. 은혜의 단비요, 축복의 비가 쏟아진 것입니다. 실로 삼 년 반 만에 내리는 반가운 비였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사건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이스라엘에 내린 삼 년 반의 가뭄은 주님의 공생애를 예표합니다. 에수님의 공생애 동안 선포된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갈증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기갈이 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멜산 대결에서 골고다의 십자가를 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대로 무너진 제단을 쌓은 것은 십자가의 형틀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운 것은 자신을 단번에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갈멜 산 위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에게 단비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일곱 번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치시고 사망의 권세를 영원히 깨트리며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일곱 번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 때처럼 이 땅의 모든 죄인에게 속죄의 은총이 부어졌습니다. 큰비가 내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멜산은 골고다의 그림자입니다. 준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야는 성경의 다른 선지자들처럼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당시의 상황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를 통해서 주신 교훈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과, 백성들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불의 응답을 받은 것은 그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응답을 받은 비결은 하나님과 은밀한 교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5:17-18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은밀한 교통을 항상 갖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기도로써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되 단순히 믿었습니다. 그가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며 능하지 못한 일이 없으신 전능자이십니다. 그는 이 사실을 단순하게 믿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어느 한 쪽에도 서지 않으려는 중립성, 타협성의 경향이 농후합니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신앙과 현실, 어느 한 편에 서야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자 중 택일을 강하게 요구하십니다. 차든지 덥든지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미지근하면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택하라.’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네가 진리를 안다면 진리를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만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것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그 결단은 명확하고 확고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은 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며 확고한 성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 세상과 결별된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도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절대적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지에 축복해 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전된 사회이기 때문에 신앙만 따르자니 살아갈 일이 막연해지고, 과학이나 현실을 따르자니 신앙이 퇴색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도 갈멜산 대결이 필요합니다. 하늘로부터 불의 응답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불을 충만하게 받아서 마음속에 있는 우상을 완전히 불태우고 여호와 절대 신앙을 회복하는 축복과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