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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터 스크랩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 의궤儀軌)
신영주 추천 0 조회 26 08.11.16 17: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의궤(儀軌)’란,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로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전통시대에 주요한 국가적 행사가 있으면 전왕 때의 사례를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국가 행사의 관련 기록을 의궤로 정리해 둠으로써

후대에 일어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왕실 행사의 전범(典範), 의궤


조선시대에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해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련 기록을 모아두었다가, 행사가 끝난 후 의궤 편찬을 담당할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국가적 행사를 추진할 전담 기구 설치, 행사 보고서 작성,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행사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의궤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철저한 기록 정신이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철저하게 기록하는 한편, 행사 참여자의 명단, 소요된 물자와 남은 물자까지 일체의 내역을 기록하여 정치의 투명성과 공개성을 꾀하였다.


의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림이다.

사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나 각종 건물과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을 수록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통상 천연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행사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문자 기록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다.



의궤에 기록된 다양한 왕실 행사들


조선시대에는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에 대해 행사의 전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의궤를 만들어 후대에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의궤는 조선시대에 거행한 왕실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의궤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의궤 중에는 국왕의 일생과 관련된 의궤가 많이 있다.

왕실에서 새 왕자가 탄생하면 그 태胎를 모아서 땅에 묻는 과정을 기록한 『원자아기씨장태의궤(元子阿只氏藏胎儀軌)』,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후 만들어졌던 『세자책례도감의궤』, 왕세손으로 책봉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왕세손책례도감의궤』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대부분 전왕이 사망하고 장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즉위식은 기쁜 행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국왕의 즉위식을 기록한 의궤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경우 왕위에 있다가 황제로 즉위했고, 즉위식 자체가 군주국에서 황제국으로 격상되는 중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에 이 또한 의궤가 작성되었다. 1897년에 작성된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가 바로 그 책이다.

왕실의 혼인이 있을 때에는 『가례도감의궤』가 작성되었다.

왕비 또는 왕세자빈 선발 시, 전국적으로 금혼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삼차에 걸친 선발 과정이 일차적으로 진행되었고, 다시 여섯 가지 절차를 거쳐 혼례를 치렀다. 의궤에는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 혼수 물품, 국왕이 왕비를 맞으러 가는 과정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고, 국왕이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화려한 행렬이 ‘반차도班次圖’라는 그림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왕이나 왕비가 사망했을 때에는 『국장도감의궤』가, 왕세자나 세자빈이 사망했을 때에는 『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장례 절차는 물론이고 장례에 쓰이는 상여, 기물, 부장품 등의 일체 물품이 그림으로 그려져 함께 수록되었다.

 

또한 『국장도감의궤』가 만들어질 때에는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가 동시에 작성되었는데, 산릉도감은 무덤을 조성하는 공사를 담당한 기관으로서 『산릉도감의궤』에는 조선시대 왕릉 조성에 얽힌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밖에도 국왕과 신하들의 활쏘기 모습을 담은 『대사례의궤』, 국왕이 친히 농사의 시범을 보인 『친경의궤』, 궁궐의 악기 조성 과정을 담은 『악기조성청의궤』, 명나라 사신을 맞이한 외교 의전 관계 기록을 정리한 『영접도감의궤』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의궤에 기록된 혼례식, 즉위식, 궁중 잔치, 사신 영접 등 다양한 왕실 행사들을 문화 콘텐츠로 적극 활용한다면, 품격 있는 조선 왕실 문화의 모습들을 국내외적으로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어람용 의궤가 프랑스에 간 까닭은?


의궤는 국가 행사가 끝나면 보통 5~8부를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정성을 들인 1부는 국왕에게 올렸다. 이를 어람용(御覽用) 의궤라 하는데, 왕이 열람한 후 국방상 안전지대로 파악되었던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내졌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친히 보는 만큼 사고(史庫) 등지에 보내는 일반 의궤보다 재료가뛰어났다. 저주지가 사용된 대부분의 의궤와는 달리 어람용 의궤에는 초주지가 사용되었으며, 비단으로 된 표지, 놋쇠 변철, 국화 모양의 장식 등 품위 있는 의궤의 장정(裝幀)들은 누구라도 한눈에 어람용 의궤를 구별할 수 있도록 최상급으로 만들었다. 1866년 강화도를 침공하였던 프랑스 군대는 의궤에 유독 눈독을 들이고 이를 약탈해갔다. 의궤가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벽안의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리라 !


이로 인해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 때 가지고 온 한 책의 의궤(『휘경원원소도감의궤』)만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296책의 의궤는 아직까지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2002년 1월부터 2007년 6월에 이르기까지 4번에 걸쳐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의 실물 상태를 조사, 연구하는 기회를 가졌다. 12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의궤가 원래의 비단 표지가 아닌 상태로 개장된 것이 아쉬웠지만, 정성들여 쓴 글씨와 품격 있는 재질의 종이, 인물의 수염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나타내려고 한 그림 등 의궤의 문화재적 가치를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람용 의궤들이 하루 빨리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조선시대 왕실 문화의 진수를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의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다


왕실의 주요 행사를 의궤의 형태로 남긴 것은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전통으로서,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형식의 의궤가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의 의궤는 사용된 물품의 재료·수량·빛깔까지 기록하였으며, 특히 왕실의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하급 행사 참여자의 실명을 기록한 점도 주목된다. 의궤에는 김노미(金老味), 김돌쇠(金乭金) 등 글자 자체로만 보아도 당시 천민 계층이었을 사람들의 이름이 그대로 적혀 있다. 이는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부여한 조처로 이해된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행사가 시리즈 형태로 정리되어 있어 왕실 행사의 변천 모습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며, 이러한 점은 세계적인 기록물 의궤의 위치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또한 현장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 주고 있는 의궤 속의 반차도와 도설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통시대의 살아 있는 모습들이다.


그리하여 2006년 우리 정부는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2007년 6월 14일 마침내 의궤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시 말해 의궤의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오늘에 이르러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기록문화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의궤! 이들의 세계적인 가치는 영원히 우리 후손들에게 최고의 긍지로 자리할 것이다.




▷ 글 : 신병주 박사(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사진 제공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2007-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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